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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대왕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팔레스타인을 물려주었다.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은 아켈라우스가 대공의 칭호를 받아 다스렸고, 갈릴리, 동부 요르단 베뢰아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소영주)으로 다스렸다. 동부 요르단의 북부 지역은 필립푸스가 분봉왕으로 다스렸다. 예수 시대에는 아켈라우스가 기원 6년에 갈릴리로 추방됨에 따라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이 로마 총독에게 예속되었다. 헤롯의 손자 아그립파 1세는 기원 37년에 필립푸스의 후임자가 되었고, 39년에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넘겨받고, 41년에는 유대 전 지역을 넘겨받았다. 에드워드 로제 지음, 박창건 옮김의 『신약성서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를 타자 쳐서 올린다.
헤로데스는 나라를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지만 유대인들로부터는 소외되었다. 백성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하였지만 백성들의 사유(思惟)와 행동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변화에 대한 희망을 북돋 아주기는 하였으나 그 어떤 폭력적인 혁명도 권하지는 않았다. 헤로데스의 말년에 세례 요한과 나자렛 예수가 태어났다(마 2:1, 눅 1:5). 교묘하고 교활한 정책으로 오랜 통치 기간 동안에 그의 지배권을 지켜온 그는 죽기 전에 후계자를 정하려고 하였다. 후계자로 생각되었던 세 아들들은 이미 그가 죽여 버렸었다. 왕이 죽기 직전에 한 유언에서 나라를 세 명의 아들, 즉 아르케라우스(Archelaus), 헤로데스 안티파스(Herodes Antipas), 필립푸스(Philippus)에게 분할하여 주었다. 아르케라우스는 왕이 되어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를 다스렸으며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동부 요르단에 있는 베뢰아를, 그리고 필립푸스는 나라의 북부에 있는 동부요르단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로마의 필요한 확인을 받아야만 법적으로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헤로데스가 죽은 후(기원전 4년) 세 명의 아들들은 각기 더 많은 지역을 얻어 내려는 생각으로 세계의 수도 로마로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헤로데스의 아들들의 지배권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의 독립성을 회복시켜 줄 것을 간청하는 사절단을 로마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눅 19:12, 14의 비유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귀족 한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났다…그러나 같은 도시의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대표들을 뒤따라 보내어 우리는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소망을 들어주지 않고 헤로데스의 유언에 따라서 원칙적으로 처리하였다. 안티파스와 필립푸스는 분봉왕으로, 즉 소영주라고 불렸다. 아르케라우스는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한 미미한 대공(公)이라고만 불렸다. 물론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칭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배자들은 백성들에게는 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신약성서에는 아르케라우스(마 2:22)도 헤로데스 안티파스(막6:14, 26, 마 14:9)도 왕으로 언급되었다. 헤로데스의 세 아들이 로마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이 나라에는 소요가 일어났다. 그래서 시리아의 총독인 크빈티리우스의 지휘하에 있던 로마 군대가 개입하여 안정과 질서를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로마 군대의 가혹하고 엄격한 처리로 인하여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로마적인 풍조가 일어났다. 이때 세 영주들이 로마에서 돌아와 그들에게 약속된 지역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매우 전제적이고 포악하게 통치하던 아르케라우스는 백성들에게서 가장 미움을 받았다(참조, 마 2:22). 그래서 억압 받던 신하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한 번 더 사절단을 보내 그들의 고통을 간절하게 호소하였고 그는 이 호소를 받아들였다. 아르케라우스는 기원 6년에 그의 지위에서 밀려나 갈릴리로 추방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백성들로부터 일반적인 존경을 받고 있던 로마 총독에게 예속되었다(참조, 70, 183면). 그러므로 예수 시대에는 갈릴리와 동요르단 북부 지역의 땅은 유대인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고 반면에 사마리아와 유대, 그리고 이두매는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눅 3:1).
총독은 카이사레아에 거주하였으며 때때로 예루살렘에 올라왔는데 대체로 유대인들의 대축제일에 예루살렘으로 왔다. 축제일 때는 수많은 유대인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어 많은 군중들이 선동적인 행동으로 급격히 번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때에는 예루살렘에 총독이 머무는 것이 좋았다. 제의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이나 사제단과 산헤드린의 활동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성전 안에는 어떠한 황제의 초상화도 걸려 있지 않았으며 로마 군대는 그들의 군기(軍旗) 없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최고의 법적 권력은 총독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의 용무만을 처리할 수 있었고 사형 선고나 집행을 할 수는 없었다(요 18:31). 안토니아 성에는 로마군 소대만이 주둔하고 있었고 대축제 때나 소란의 위험이 있을 때에는 증강되었다. 군인들은 그 땅의 비유대인 주민들 가운데서만 징집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 1절에는 카이사레아, 즉 총독의 소재지에서 근무하던 이방인 장교 고넬료가 언급되고 있다.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거기에서 그의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행 23:23, 33).
예수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있었다(기원 26-36).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그의 직무 수행은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재판 없는 사형 집행, 계속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잔학”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도하고 있다(legatio ad Gaium 302).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느날 밤 황제의 초상을 단 로마의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훼손시키느니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감수한다고 선언하자 비로소 군기를 다시 도시에서 가져가도록 명령하였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수도 설비를 하여주려고 성전 금고에서 돈을 사용하였을 때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빌라도는 확산되려는 항거를 폭력으로 막았다. 한 사마리아 예언자가 모세의 시대에 가리짐에 거룩한 기구들을 매장하여 놓았을 것이라고 선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산 위에 모여 들었을 때 빌라도는 군인들을 진격시켜서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체포되었으며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분노는 매우 컸다. 그들은 로마의 특사로서 시리아에 머물고 있던 비텔리우스에게 가서 빌라도에 대한 불평을 호소하였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해명하도록 로마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그 당시의 소식이 전해 주는 모습은 신약성서를 통하여 확인된다. 한 번은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려고 했을 때 그는 이들을 학살하였다(눅 13:1). 그는 혁명의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였다(막 15:7 병행, 27 병행). 포악하고 난폭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산헤드린이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그에게 넘겨준 한 유대인을 잠깐 동안의 심문을 하고 나서 십자가의 사형을 선고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자렛 예수는 예루살렘의 성문 앞에서 로마 총독에 의하여 고대 세계가 알고 있었던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에 맡겨져 죽었다.
헤로데스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수도를 건설하여 통치자 황제의 영예를 위하여 이름을 티베리아스(Tiberias)라고 붙였다(참조, 요 6:1, 23, 21:1). 이 도시는 옛날에 묘지였던 지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하면 정결하지 못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들은 그 도시에서 살 것을 거부하였다. 헤로데스 안티파스는 그것에 대하여서는 별로 개의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생활하였다. 처음에 그는 다마스쿠스 왕의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그의 이복동생-별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헤로데스-의 아내 헤로디아스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로써 이혼은 허용하지만(신 24:1-4) 형제의 부인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는(레 18:16, 20:21) 율법을 어겼다. 헤로디아스는 헤로데스 왕과 마리암네의 손녀, 즉 헤로데스 왕이 그의 어머니처럼 처형하였던 아리스토불의 딸이었다. 공명심과 명예욕이 강한 여자는 헤로데스 안티파스의 아내가 되었다. 헤로데스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을 버리고 다마스쿠스 왕국의 그녀의 아버지께로 돌려보냈다. 새로운 결혼에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마가복음 6장 17-29절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수로 헤로디아스의 첫 번째 남편으로 필립푸스가 언급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영주의 불의를 적나라하게 밝혔기 때문에 체포되었으며 헤로디아스의 포악한 적대감으로 박대를 계속 받다가 결국 처형되었다.
헤로디아스와의 결혼은 헤로데스 안티파스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분노한 다마스쿠스 왕은 과거의 사위를 공격하여 그에게 참혹한 패배를 안겨 주었다. 이에 관하여 요세푸스는 많은 유대인들은 신이 세례 요한을 위하여 헤로데스에게 정당한 형벌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헤로데스 군대의 패배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였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기록은 이렇게 계속 된다-헤로데스는 처형하였다. 영혼은 이미 의로운 삶을 통하여 정결하여졌기 때문에 세례를 죄악의 도말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육체의 성화를 위하여 받는다면 세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이라고 그는 외쳤다. 그때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으며 이러한 그의 말로 인하여 그들은 고양된 자각을 하였기 때문에 헤로데스는 이러한 충고로 모든 사람들을 지도하여가는 이 사람의 영향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해결하기 힘든 사건이 되어 후회하는 것보다 그를 제거하는 것이 더 상책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혐의를 받아 요한은 체포되었으며 마케루스(Machärus) 축제에 보내져…거기에서 목이 잘렸다” (Jüdische Altertümer XVIII, 116-119). 이러한 표현 속에서 세례자의 선포가 헬라주의적인 도덕 설교의 의미에서 기록되어지기는 하였으나(참조, 123면) 그의 선포에 의하여 자극된 영향력은 그래도 적절하였다고 보여지고 있다.
헤로데스 안티파스는 예수가 살았던 지역의 영주였다. 그가 예수의 출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가 처형한 세례 요한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다(막 6:14-16). 그는 이 기적의 사람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눅 9:9). 그러나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불렀으며(눅13:32) 예루살렘으로 갔다. 누가복음에만 빌라도가 처음 심문을 한 후 예수를 유월절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로데스 안티파스에게 보내어 그의 입장을 알아보려 했다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눅 23:6-16). 그러나 이러한 수난 사화의 부연은 본래는 매우 짧은 형태였고 로마 총독에 의한 예수의 심문 이야기에 대한 전설적인 형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 2:1~2절에 따르면 지상의 왕들이 야웨와 그의 기름 부은 자에게 반항하고 세상의 주인들이 서로서로 담합하여 대적하는 것과 같이, 누가의 묘사에는 로마인 주인과 유대인 영주는 날뛰는 백성들이 그의 심판을 독촉하는 동안 예수가 그들 앞에 서있는 심판자들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 부인 헤로디아스가 그에게 왕위를 부여하여 달라고 칼리굴라에게 힘써 보라는 재촉은 끝내 헤로데스 안티파스에게 불운을 가져왔다. 영주의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였으며, 칼리굴라는 그를 의심하게 되어 갈리아로 추방하여 버렸다(기원 39년).
필립푸스는 북부의 동요르단 땅을 다스렸다. 그는 카이사레아 필립비라고 이름 지은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참조, 막 8:27). 게네사렛 호수가 그의 지역과 헤로데스 안티파스의 지역과 경계를 이루었으며 이 경계는 요르단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졌다. 가버나움에는 작은 국경정류장과 세관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안티파스의 위병대가 주둔하였다. 이들의 장교에 대한 언급이 마태복음 8장 5-13절과 누가복음 7장 1-10절의 이야기에 언급되었다. 필립푸스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하였던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그가 다스리던 백성들 가운데서 유대인은 소수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초상도 세우지 않는다는 유대인의 생각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필립푸스는 기원 34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팔레스틴은 잠깐 동안 한 번 더 유대인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헤로데스 왕의 손자인 아그립파(Agrippa)는 로마에 체재하면서 거기에서 칼리굴라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칼리굴라는 기원 37년 그에게 필립푸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주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추방된 헤로데스 안티파스의 지역을 그에게 주었다. 기원 41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에 대한 통치권도 그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할아버지가 다스리던 전 지역을 다시 한 번 그의 왕권 밑에 통합하였다. 이때에 커다란 충돌이 일어날 위협이 있었다. 칼리굴라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 그의 입상(立像)을 세우도록 요구했을 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폭력적인 자극이 일어났다. 이미 사람들은 성소를 황폐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세워지는 것을 알았다(참조, 막 13:14 병행). 그 무렵 기원 41년에는 칼리굴라가 암살되었고 후계자인 클라우디우스는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그가 신적으로 경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다.
헤로데스 아그립파는 스스로 율법을 정확하게 따르는 경건한 사람으로 언명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매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유대인들에게만 취하였고 그의 나라의 헬라주의화된 백성들에 대해서는 다르게 처신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그의 할아버지의 선례를 따라 건축과 기부를 통하여 명망을 높이려는 헬라주의적인 영주로서 행동하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였으며 베드로를 체포하였다(행 12:1-3).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헬라주의적인 주위 사람들에게는 신이 보내신 영주로서 충성을 받으려고 하였으며, 군주에게 명백한 신적인 숭배를 받으려고 하였다(행 12:21-23). 그가 죽자 지배권이 그의 아들 아그립파에게 넘겨진 것이 아니라 온 나라가 시리아의 식민지로 떨어져서 시리아에 있는 총독에 예속된 지방 총독들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그들의 관청소재지는 카이사레아에 있었다.
아그립파 2세는 몇 년 후에 전에 필립푸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받았다. 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감독하는 권한도 주어졌다. 그는 이러한 권리를 이용하여 마치 그에게 어울리는 것처럼 대제사장의 직위에 올랐다.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 주민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그는 또한 그의 누이 베레니케를 언제나 그의 곁에 둠으로써 감정을 자극하였다(행 25:13). 백성들 사이에는 이 오누이가 근친상간의 관계를 맺으며 산다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
나라 안에서는 로마인에 대한 증오가 증대되었으며 항상 소란이 일어났다. 혁명당원의 그룹은 폭력으로 타국의 지배권을 무너뜨리려고 했으며, 지각없고 악의에 찬 로마인들의 태도로 인하여 계속하여 도전하려는 주민들에게서는 이들에 대한 동조가 증대하여 갔다. 이 때 팔레스틴을 다스렸던 많은 로마의 지방 총독들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이 신약성서에 언급되고 있다. 기원 52년부터 펠릭스(Felrix)가 총독의 직위에 있었다. 그는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으로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호의를 얻어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다. 타키투스(Tacitus)가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온갖 포학과 욕심으로 노예의 성정에서 왕의 권리를 손아귀에 잡았다”(Historien V, 9)고 하였다. 그의 세 부인 중에서 두 번째 부인은 아그립파 1세의 딸인 유대인 공주 드루실라(Drusilla)였다. 그는 그녀의 남편에게서 그녀를 빼앗았다. 사도행전 24장 24절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은 그가 카이사레아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펠릭스와 드루실라 앞에서 변호해야 했다. 펠릭스는-아마도 기원 60년에, 그러나 그보다 더 이전일 수도 있다-명문 출신인 페스투스(Festus)와 교체되었다. 비록 페스투스는 그의 전임자들보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팽배한 긴장을 감소시키지 못하였다. 기원 62년에 그가 죽음으로써 끝난 그의 재직 기간 동안은 바울의 재판이 로마에서 판결되어야 했던 구금의 마지막 때였다(행 24:27-26:32).
첫댓글 헤로데스=헤롯? 빌라도 등 낯익은 이름들이 나오네요. 이번 회도 잘 읽고 공부해 보겠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인명도 낯익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내용과 같은 것이 많습니다.
저도 이번 게시물은 더 친근합니다. 공감합니다.
헤롯(Herod)
뜻 : 영웅의 아들
팔레스틴과 그 인접 지역을 B.C 55년경부터 A.D 93년경 까지 통치한 왕조의 왕들
[1] 헤롯대왕(B.C. 37-4). 팔레스틴의 통치권을 가졌던 안디바델(B.C. 55-43)의 제2자
(1) 헤롯왕가의 창시자이며 예수 탄생시의 왕(마 2:1-18).
(2) 25세에 갈릴리의 총독을 역임하고 B.C.40년에 로마황제 아구스도에 의 해 로마 왕으로 임명.
(3) 이두메 사마리아 갈릴리 지방을 쳐서 B.C.3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 고 유대 왕으로 군림하였다.
(4) 성격이 강인하고 또 현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매우 잔인한 행위도 하였으니 곧 예수의 탄생을 듣고 불안을 가져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살해한 것을 대표로 들수 있다(마 2:16).(5) 그는 많은 공공 사업을 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10인의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두었다. B.C. 4년에 악질에 걸려 70세로 죽었다.
[2] 헤롯 안디바(B.C.3-A.D39)
(1) 헤롯 대왕의 제2자로 부왕 사후 베뢰아의 영주가 되었다(눅 3:1).
(2) 세례요한 및 예수와 관계가 깊다.
(3) 성격이 교활 방종하고 미신에 깊어 예수님도 여우라고 하였다(눅13:32 , 막8:15).(4) 여러 도시를 건설 했으나 반년에 유형을 당하였다.
[3] 헤롯 아켈라오 :아켈라오.
[4] 헤롯 빌립 1세. 헤롯 대왕과 재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메 1세와의 아들. 헤로디아의 처음 남편(막 6:17) 살로메의 부친. 공직에 있지는 않았다.
[5] 헤롯 빌립 2세(B.C. 4 - A.D 34). 헤롯 대왕과 그의 다섯째 처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1)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영주가 됨(눅3:1).
(2) 헤롯 가에서 가장 존경을 받은 인물.
(3)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함.
[6] 헤롯 아그립바 1세(A.D.37-44)아그립바왕.
[7] 헤롯 아그립바 2세(A.D.50-100) 아그립바 왕.
> 참고 : 헤롯의 건축 프로그램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장코뱅 헤롯 이름 뜻을 보면 상당히 영웅주의적이네요. 그러나 그의 삶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노베 공감합니다.
아켈라오(Archelaus)
뜻 : 치민
헤롯아켈라오 헤롯 대왕의 아들.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분봉왕(B.C.4-A.D.6). 다른 형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는 왕의 칭호가 주어지 지않 고 분봉왕으로서 처리했으나 악정으로 인하여 유대인의 불평을 초래하여 드디어 로마 정부로부터 파면을 받았다(마 2:22-23).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왕이 아닌 분봉왕이었군요. 로마 정부에게 쓰임 받다가 버림 받은 자인데, 안스러운 자입니다.
가이사랴(Caesarea)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3-A)
뜻 : 털이 많다
팔레스타인의 해안 도시로 갈멜산에서 남쪽으로 약 37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백부장 고넬료와 집사 빌립의 거주지(행 10:1, 21:8). 바울이 예루살렘 소요 중에서 이곳에 이르러 2년간 구금되었던 곳(행 18:22, 21:8, 23:23-33, 24:27, 25:11, 26:1). * 주후 638년에 회교에 함락 되었다.
가이사랴는 주전 4세기에 시돈의 통치자였던 스트라토가 처음 설립한 도시로 '스트라토의 망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도시는 주전 259년 이집트 프톨레미 2세의 신하인 제논의 문서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언급되었다. 헤롯대왕(주전 37- 주전4)은 이곳에 인공적인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로마황제를 위하여 '가이사랴(Caesare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가이사랴는 약 12년간의 공사 끝에 주전 13년경에 완성되었다. 가이사랴는 규모 면에서 아주 큰 항구도시이다. 헤롯이 이렇게 큰 항구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항구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 북쪽 레바논으로 금과 백향목을 수입하던 항구 욥바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항구를 건설함으로서 로마의 문물을 신속히 받아 들이고 사마리아의 농산물을 로마에 수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과시하고자 했다.
헤롯이 가이사랴를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이스라엘 북쪽 도르(Dor)와 욥바(Jaffa) 사이에 좋은 항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니키아에서 이집트로 항해하려면 북풍이 불어도 피할 항구가 없기 때문에 폭풍 속을 그대로 항해해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해안은 남풍이 심하게 부는 지역이므로 항해 중에 폭풍을 피할 항구가 필요했다. 헤롯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자연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아테네에 있는 피레쿰 항구보다 더 큰 항구를 건설했다. 그는 깊이가 36.6m나 되는 바다를 돌로 메웠다. 바다를 메우는 데 사용된 돌들 중 큰 것은 가로 15m, 세로 3m, 높이가 2.7m가량 된다. 바닷가에 건설한 이 인공항은 너비가 61m에 달했다. 이것들 중 반은 부딪혀오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였기에 파도 첫 차단장치라고도 불렸다. 나머지 반은 그 위에 성벽과 여러 망대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항구의 시설
이 항구에는 선원들이 거주하는 수많은 아치들이 있었다. 약간 높은 언덕에는 신전이 세워져 있어서 항구를 향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항구에 물건이 도착하면 지하 통로로 지하 저장실까지 물건을 운반하기가 쉬웠다. 가이사랴는 지중해에 위치해 있어서 식수로 사용할 물을 얻기가 어려웠다. 가이사랴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가이사랴 북쪽에 있는 갈멜산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9km에 달하는 도수교(aqueduct)를 건설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도수교는 헤롯시대의 도수교에 로마시대에 한 쌍의 다리를 추가시킨 형태이다. 물은 다리 위로 흐르도록 되어있으며 모래와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뚜껑을 설치해 놓았다.
가이사랴에는 신전, 궁궐, 경마장, 야외극장 등 최고의 건축물이 있었다. 사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식 야외극장은 배우가 무대 중앙에서 말을 하면 객석의 구석구석에서 잘 들릴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가창력에 자신이 있는 여행객이라면 한번쯤 무대에서 실력을 발휘해보아도 좋다. 바다가 탁 트인 무대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라면 분위기에 취한 다른 순례자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헤롯은 가이사랴 항구 개막식을 기념하며 음악회, 짐승과 사람과의 경기, 경마와 쇼 등 화려한 축제를 개최했다. 그리고 케사르를 위하여 매 5년마다 이러한 경기를 치르도록 했다.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장코뱅 가이사랴의 원 뜻이 털이 많다는 것이 의외이고요. 배경사에 나오는 지명이 성경에 나온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팩트라는 증명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코뱅 참고자료들을 첨부해주셔서 공부에 유익합니다.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더 많은 것을 깨우칩니다. 감사합니다.
신약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배경사의 글을 올려 주셔서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적 상황들을 알면 성경의 사건들과 인물들이 더 입체적으로 보이고 이해도도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이 날 것 같아요.
@코람데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