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
한동안 소란스럽게 세인의 주목을 끌던 「홍범도 장군」논쟁이 최근에는 잠잠해졌다. 하지만 언제 다시 비슷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나타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간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갑론을박의 부질없는 논쟁은 마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처럼 비치면서 보통사람들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다.
모든 이슈가 늘 그렇듯이 어느 일방의 완승으로 끝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그만큼 명백한 사실의 규명이 어렵기도 하지만 각 주장에 동조하며 이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과 다른 평가를 하는 일은 충분한 사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책임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무작정 소신을 앞세운 설익은 주장으로 진실을 왜곡하거나 호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인간이 후손을 남기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가 그들로 하여금 마땅한 공적을 기리고 빛내는 일이다. 이는 대부분의 집안에서 사당이나 서원 등을 세워 이런 역할을 감당하였다. 직계의 자손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후학 혹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시대의 인물로 추앙을 받게 된다. 애국은 거창한 구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이웃을 위한 일에 헌신하는 일이다. 하물며 그 안위를 고려하지 않고 목숨까지 바치면서 노력한 인물들에 대한 인정과 예우는 오늘을 사는 후대의 마땅한 몫이다.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나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그의 조부(1884~1972)는 한 말의 유명한 의병대장(일명, 번개대장)으로 군자금을 조달하고, 여러 명의 일인 군경과 조선인 밀정을 처단하여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한일합방이 되면서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사면을 받아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
3.l 만세 시에는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와 함께 「손병희(孫秉熙)」선생을 방문하여 만세 시위를 권유받고 고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1 년간을 옥살이 하였다. 내내 혹독한 가난으로 어렵게 생활하다보니 자식의 교육조차 할 수 없었고, 한 때는 친구의 선친께서 단신으로 상경하여 생계를 꾸려가기도 했다. 천만다행으로 손자로 태어난 친구가 조부의 애국헌신의 위업을 계승하여 만천하에 공명을 날리게 되었으니 그나마 만시지탄의 보은을 받은 셈이다. 아울러 고향에 세워진 동상은 두고두고 위대한 의병장의 위업을 전파하고 있다.
바로 그 친구의 조부와 함께 청주와 청원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던 「배창근(1867~1909)」의사(義士) 일가와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구한말의 청주 진위대에서 부교(副校)로 근무했는데 당시 의병활동을 하던 친구의 조부에게 무기와 장비를 조달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배창근」의사는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되고 나서 그의 동료와 함께 일본국 헌병 2명을 살해한 죄로 1909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배창근」의사의 아들이 「배민수(1896~1968)」목사인데 당시 대전에 거주하던 그가 1964년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조부와 함께 오래전의 의병 활동과 「배창근」의사와의 관계를 이야기를 나누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배민수」목사는 평양 출신으로 「김일성」의 선친인 「김형직」 및 「장일환」과 더불어 가장 어린 나이로 1917년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또한 「조만식」선생등과도 교유하면서 농촌개혁운동을 펼쳤다. 다양한 애국활동으로 「배창근」의사와 「배 민수」 목사 두 분 모두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수훈자다.
이후 「배 민수」 목사가 사망하고 그의 후손이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게 되면서 서로가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배 목사의 아들인 「존·배」씨가 작품전시회 차 서울에 들어와 소식을 주어 친구와 대면했다고 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철공예작가’로 진즉 「백남준」 작가와도 교유했으며 금번 전시회의 제목은 “기적의 조우”라고 하였다. 근 120년 전의 인연이 이어져 손자들이 회동하여 조부 및 선친과의 숨은 사연을 이야기했으니 얼마나 감동적인 사연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뜻 깊은 교유가 성사된 것이다. 모두에게 잔잔한 가르침을 주고 제 역할을 한 후손들에게도 보람차고 영광스런 일이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세교(世交)의 전범(典範)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친구의 호(號)는 ‘야청’(也靑)이다. 항상 푸르고 푸르게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가라는 뜻이다. 항상 청청한 소나무처럼 세파에 안주하거나 세상의 이득에 연연하지 않고 지내라는 의미다. 바로 젊은 시절에 집에 온 아들의 친구에게 선친께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친구의 조부님의 호가 ‘청암’(淸巖)이다. 맑은 마음으로 사념(邪念)없이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이름에도 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다. 인연은 돌고 돌아 친구는 선친의 시비(詩碑)제막식을 적극 성원하였다.
누구나 잘 아는 내용이지만 시대상황을 거두절미하고 결과만을 가지고서 역사적 진실을 재단할 수 없다. 그야말로 모든 재산과 생명을 바쳐서 일제와 싸웠던 애국지사들을 억지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매도하면 곤란하다. 부분적인 오류를 부각시켜 전 과정을 무시하고 단순히 그 결과만을 평가하는 것은 인문사회과학을 하는 입장에서도 틀린 일이다.
아무리 이 세상이 혼탁해도 이처럼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바로 그 후손들이 제 정신을 갖고 멀쩡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고 본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섣부른 이론으로 ‘역사의 숨결’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일이다.
(2024.9.16.작성/9.18.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