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送人之湖南
百 濟 城 邊 見 雁 飛 (백제성변견안비) 백제의 옛 성가에 기러기들 날아 가고
湖 南 行 客 淚 霑 衣 (호남행객누점의) 남으로 가는 나그네 눈물 옷을 적시네
秋 風 馬 度 淸 江 水 (추풍마도청강수) 가을 바람에 말타고 금강을 건너나니
夜 雨 人 敲 白 竹 扉 (야우인고백죽비) 비 오는 밤에 대(竹) 사립문 두드리네
<어 휘>
百濟城 : 백제의 옛 성
霑 衣 : 옷을 적시다
淸 江 : 맑은 강, 여기서는 금강(錦江)
竹 扉 :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
<지은 이>
지은 이는 金萬重(1637~1692),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조선 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며,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이다. 또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우이며, 숙종의 초비
(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 손
이다.
공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익겸은 일찍이 1637년(인조 15)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까닭에,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모친 윤씨 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공은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인 1650년(효종 1)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인 1652년(효종 3)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1665년 (현종 6)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 길에 나갔다. 1666년 (현종 7)에는 정언(正言)을, 1667년(현종 8)에는 지평(持平)·수찬(修撰)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 9)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교리(校理)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암행어사로 신정(申晸)·이계(李稽)·조위봉(趙威鳳)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고, 1674년
(현종 15)까지 헌납·부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그러나 2차 예송(禮訟)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그로
부터 5년 뒤인 1680년(숙종 6)에 남인의 허적(許積)과 윤휴(尹鑴) 등이 사사(賜死)된 이른 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숙종 5) 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83년(숙종 9)에는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 등이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어,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遞職 : 직무가 바뀜)되었다. 1686년(숙종 12)에는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1687년(숙종 13)에는 다시 장숙의(張淑儀)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推鞠 : 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으며, 1688년(숙종 14) 11월에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그러나 3개월 뒤,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 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와 관련된 앙화(殃禍)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공은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숙종 18)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에 그의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06년(숙종 32)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선생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쳤다. 그러나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에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평가된다. 선생은 시가와 소설에 대해서 높은 수준의 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은 소설의 통속성에 대하여 진수(陳壽)의 『삼국지』나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鑑)』,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誌演義)」를 서로 구별하여 통속 소설에 대한 예술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공은 한시 시학의 표준으로 고악부(古樂府)와 『문선(文選)』의 시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율시(律詩) 이전의 시를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 점은 주희의 학시관(學詩觀)과 상통하면서도, 인간의 정감과 행동을 중요시
하는 '연정설(緣情說)'을 시의 본질로 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363수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의 주조(主調)를 형성하는 단서로 작용하였다. 위에 소개한 시의 주제는 호남지방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을 송별하는 전별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