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과 대전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고향에 있는 금적산을 등반했다.
초등학생 때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소풍간 것과, 친구들과 함께 으름 따러
올라간 기억, 그 후 20대 때에 어떤 친구가 토끼 덫을 놨으니 가보자고 해서
허탕치고 내려온 기억이 있는, 그런 아련한 추억이 있는 그 산을 어제야 겨우 올랐다.
고향, 늘 그 자리에서 우리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를 거듭한 어느 때쯤부터
우리의 기억과 함께한 산인데도, 나는 금적산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팸플릿 지식이라도 얻으려고 인터넷을 검색을 해봤다.
<높이는 652m이다. 속리산과 구병산 사이에 솟아오른 이 산은 예로부터 전 국민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보배가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며 보은군의 최고봉인 천황봉(1,058m)을 지아비산, 구병산을 지어미산,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이 산을 일컬어 아들산이라 한다. 그 때문인지 속리산과 병풍처럼 둘러쳐진 봉우리로 유명한 구병산을 닮아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이름과 관련하여 금으로 된 동물이야기를 전설로 전하고 있다. 옛날 이 산에는 금송아지와 금비둘기가 살고 있었다. 금송아지는 금비둘기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산기슭에 밭을 일구어 금비둘기가 좋아하는 여러 곡식을 가꾸었다.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바위 아래 옹달샘을 파서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그런 다음 금비둘기에게 청혼하여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금슬 좋은 부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송아지는 밭을 갈다가 넘어져 두 눈을 잃고 말았다. 금비둘기는 눈이 먼 남편을 위하여 열심히 봉양하였으나 금비둘기의 벌이로 금송아지를 먹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비둘기는 해가 거듭될수록 지쳐갔고 짜증이 깊어져 둘은 자주 다투게 되었다. 마침내 금비둘기는 날아가 버리고 금송아지는 산기슭을 헤매며 아내를 부르다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 후 금송아지가 죽은 산을 금적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금송아지가 죽을 때 머리는 북쪽으로 두고 꼬리는 남쪽으로 향하였다 한다. 때문에 지금도 꼬리 쪽인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에는 사금이 많이 나오고 머리가 있는 북쪽인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에는 부자가 많다고 전해진다.> 등등. -네이버에서-
내가 어릴 적에 들어본 설화는 아닌 것 같다. 아마 내가 미욱하여 재미있게
듣지 못했거나, 아님 들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설화를
가르쳐줄 만치 부모님들이 삶에서 여유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한다. 하지만
팽정에서 오덕쪽으로 넘어가는 금적산 아래엔 예전에 금을 채굴하던 폐광이
두서너 개 있고, 어두운 그곳에 놀려간 기억은 금적산의 기억보다 많다.
어릴 적 듣기엔 일제 강점기에 사금이 많이 나와서 그 금광의 영향으로 원남이라는
동네가 생겼다는 것, 그 시절 팔도의 힘깨나 쓰는 건달들이 많이 모여서 동네가
우악스럽고 드세다는 것, 그리고 X까고 원남장 가라는 말도 서울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는 정도가 민망하지만 설화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이다.
사설이 너무 길어졌다. 이만 각설하고 등반이야기를 해야겠다.
처음 서원리 저수지에서 친구들을 만나 눈인사를 하고 산을 오를 때만 해도
날씨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데, 7부 능선쯤 다다랐을 적엔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하여 덧옷을 꺼내 입고 산행을 하였다.
산은 20년여년 만에 처음 타는 것인데 생각보다 등산로가 좋지 않았지만,
산림이 많이 우거져 있었고, 그래서인지 피부로 느끼는 느낌은 무척 신선하고
상쾌해서 좋았다.
산행 중에 두 팀으로 나뉘어 떨어졌었는데 정상근처에서 상봉한 후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는 송신탑 2개가 있었고 그 옆에 표지석이 있었다.
모두들 상봉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인성이가 사진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사진
찍기를 강요하여 모두들 웃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인성이가 이가 나오도록 웃으라고
해서 웃었는데, 찍을 때마다 모두 같은 표정이 나오지 않았을까 살짝 걱정된다.
산 정상에서는 비구름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척 시원했고
무척 상쾌했고 무척 기분이 업 되어 행복했다. 친구가 준비해온 떡을 나눠 먹고
바로 하산을 하는데 상원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렇게 내려가면 금적산
전체는 아니지만 거의 절반을 모두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표지석에서 얼마
내려오지 않자 맹꽁묘가 나왔다. 어릴 적에 이 묘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별로 없다. 다만 막상 와서 보니 세월의 무상함과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일반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뿐이다. 비가 많아 졌다 조금 빠르게
하산을 했다. 하산하며 몇 상분의 묘를 지나고 군데군데 비탈에 메여놓은 밧줄을
잡고 상원남으로 내려 왔다. 모두 아무 탈 없이 내려와서 다행이라고 말을 건네며
차를 세워 논 서원리까지 비를 맡으며 걸었다. 참 오랜만에 오래 걷는 것인데도
그다지 힘들지 않고 좋았다.
나는 고향을 생각할 때 마다 금적산과 삼승산이 떠오른다. 아마 앞에서 이야기한
기억 외에도 내가 가억하지 못하는 많은 추억이 두산과 더불어 무의식 속에
내재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등반은 오래전부터 인성이가 이야기해서 이루어 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의미 있고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솔직히 바쁜데 번거롭게 무슨 등산인가 하는
생각도 처음엔 잠깐 했었는데, 산행을 하며 그리고 이렇게 뒷글을 쓰면서 새삼
인성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물론 같이 산행한 다른 친구들, 혹 오해나 본인들에게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남길까봐 이름은 적시하지 않으나 모두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산행에 동참하고 싶다.
산행한 친구들 모두가 고마워하는 일들이 많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만 줄인다.
첫댓글 형 같은 친구 참 고맙네 ..........
음~그런 설화가 있었네.나는 어릴적 아버지에게 '금적산은 금송아지가 뛰어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고작인데.
이름쯤 밝혀도 아무렇지들 않을건데.
뭐 어때
너무 좋아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찰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