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26-38 |
루카 복음은 전통적으로 루카가 저술하였으며, 루카는 사도행전도 기록한 것으로 본다. 루카는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이교에서 개종한 이방인 출신 신자였고, 의사였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친구이자 충실한 제자였고, 협력자였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순교하는 마지막까지 함께한 인물이었다.
루카 복음은 은 기원후 63 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고, 70 년 전후, 또는 80-90 년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복음서의 기록 목적은 바오로 사도가 세운 교회의 신자들, 즉 거의 대부분 이교에서 개종한 이방인 신자들을 위해서 쓴 복음서이다.
루카 복음은 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이심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루카복음은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태오복음은 오래 기다려온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모든 피조물이 따라가야 할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러나 루카복음은 전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사랑과 자비와 연민이 가득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그래서 루카복음을 ‘자비의 복음서’, ‘사랑의 복음서’라고 부른다.
26 절-38 절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루카가 구전 자료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아마도 일차 자료는 마리아 자신이 직접 사도들에게 이야기해 준 내용일 것이다. 그 내용을 신학적인 해석이 합해져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그때에’는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여섯째 달을 뜻한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루카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 앞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유년 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친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음을 나타낸다.
천사 가브리엘은 미카엘, 라파엘 천사와 함께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세 천사 중 하나로서 하느님의 말씀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로 등장하고 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루카 복음 1 장에 루카는 이 책을 테오필로스에게 헌정한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그리스 작가들은 어던 특정 인물에게 책을 헌정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 관습대로 루카도 루카복음을 ‘테오필로스’라는 인물에게 드린다고 나온다.
테오필로스가 누구인지 전하는 내용이 별로 없다. 그래서 루카가 자신의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로 사용했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조카 띠뚜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였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루카가 ‘존귀하신 테오필로스’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아 이 인물은 실재 존재했던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루카의 친지나 은인이거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느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테오필로스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 있었으며 그 신앙을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루카가 자신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고 본다. 4 절 참조.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당시 어떤 책이 어떤 인물에게 헌정될 경우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헌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책을 권위 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하는 경우는 관례였고 그 이유는 책이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루카 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책이라는 점에서 루카 복음은 이방 세계 특히 그리스 문화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전 세계 모든 신앙인들에게로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에서 ‘존귀하신’은 존경을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성경에서는 대부분 어떤 특정한 지위나 관직에 있는 신분이나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테오필로스’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서의 수신인 ‘테오필로스’는 유대의 작은 지방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나자렛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자렛은 예루살렘과 비교가 된다. 천사는 호화롭고 화려한 대도시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외진 마을을 찾아갔다. 요한복음 1 장 46 절에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나자렛’ 은 형편없는 마을로 취급받았던 동네가 나자렛이다. 구약성경에도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지명이고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말이었다.
예수님은 공생활 이전의 삶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보내셨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113km 떨어진 이즈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나자렛 왼쪽에는 칼멜산이 오른쪽에는 타보르산이 있다. |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다윗 집안의 요셉’, 요셉이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요셉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이 법적으로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유대 관습에 의하면 여자는 12 살이 지나면 약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하기 1 년 전에 약혼을 한다. 샴마이 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29 절과 34 절 등에서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처녀’라는 단어의 원어는 ‘파르데노스’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경 외 다른 문헌에는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34 절에 기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동정녀를 뜻한다. ‘마리아’는 히브리어로 ‘미리암’인데 ‘높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천사가 즈카리야에게 나타난 것과 같이 마리아에게도 나타난다. 즈카리야의 경우와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즈카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평화가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인사를 하지 않은 반면에(8- 24 절 참조) 마리아의 경우에는 이 같은 천사의 인사가 있던 점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마리아가 은총을 받은 상태가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뜻으로 이 문장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천사와 마리아 간의 대화는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1 차 대화는 28 절, 29 절에서는 천사의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을 2 차 대화 30-34 절에서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언급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나온다. 그리고 3 차 대화 35 절-38 절에서는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은 분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에 대해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를 앞당겨 받으시고, 은총이 충만한 분, 지극히 높은 성덕에 이르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셨다는 교리로 교회가 선포했다.
‘기뻐하여라’,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말이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곧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인사말이었고(판관 6;12) 이 말은 원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한 말이었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셨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마리아가 놀란 것은 천사를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천사의 인사말에 놀란 것이다. 즉 마리아를 높게 표현한 인사말의 내용에 놀란 것이다.
마리아가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라는 말씀은 마리아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다.
‘생각하다’의 원어는 ‘디엘로기제토’인데 ‘여러 개의 논증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치다.’라는 뜻과 ‘추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놀라는 한편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어떤 말이나 일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묵상하는 분이셨던 것이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12 절을 보면 즈카리야는 천사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고 무서워했으나,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무서워했다. 천사는 놀라고 당황하는 마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받았다’라는 동사의 원어는 ‘휴레스’인데, 이 말은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단순 과거형이다. 즉 ‘하느님의 은총은 발견되는 것이지 결코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고 해석한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나 공로를 요구하지 않은 채 주어진다. 그런 언제든지 주어지는 그 은총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하느님은 마리아를 특별히 선택하시고 은총을 주셨고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하고 순종의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 구절은 이사야서 7 장 14 절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말하는 구절이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징을 예언한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는 아기 이름이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천사는 이사야서 7 장 14 절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서 처녀인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하지만 아기 이름은 ‘예수’라고 하라고 말한다.
‘예수’는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인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그리스어의 음으로써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기원후 2 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 세기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사도 13:5; 골로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피했을 것으로 본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들과 예수님을 구분하기 위하여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마태 21:11), 다윗의 자손(마태오 27:37; 마르 10:47-48; 요한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였다.
지금 천사는 이사야서 7 장 14 절의 예언이 마리아에게서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마리아가 낳게 될 아기는 구세주가 되실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이 구절은 태어날 아기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한 구절이다.
‘큰 인물’, 가브리엘이 요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어투를 사용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제한적 어투를 사용했으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
‘큰 인물’은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호칭은 왜 위대한 인물인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앞의 15 절에서 요한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는데, 요한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즉 제한적이다. 반면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큰 인물이시기 때문에 그 위대함은 요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대함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메시아 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이 단어는 70 인 역에서 하느님을 나타내는 명칭, 특히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모두 9 번 사용되었는데 그중 일곱 번을 루카가 사용하였다(32, 35, 2:14:35; 8:28; 19:38).
‘불리실 것이다.’라는 수동태는 아기의 위대함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나타낸다.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31 절에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리실 것이라고 하고 있다.
마리아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은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을 지니시게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신성과 인성을 지니시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리실 것이라는 말은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뜻이다.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당시 대중적인 메시아에 대한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할 수 있다.
‘왕좌’는 ‘등 받침이나 발받침 또는 발받침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 형태는 왕이나 신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골 1:16). 주 하느님께서 아기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고 이 말은 아기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왕권을 주 하느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인간적인 왕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왕권이다.
‘그분의 조상 다윗’이라는 말은 앞의 27 절의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말과 연결된다. 즉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또 법적으로 다윗 가문의 후손이 된다는 것이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왕권을 계승할 메시아를 뜻한다. |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야곱 집안’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하느님 백성을 뜻한다.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이 말씀에서 ‘영원히’는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인다(55 절. 요한 6:51). 특히 이 단어가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는 ‘영원성’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영원히 다스린다는 말은 여러 왕들이 계속 계승하면서 영원히 다스린다는 뜻이었는데, 여기서는 메시아 자신이 영원히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분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면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이다. 메시아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나라와 달리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나라임을 밝히고 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마리아도 18 절의 즈카르야처럼 질문을 한다. 그런데 즈카르야의 질문은 믿지 못한 상태에서 표징을 요구하는 질문이었지만, 마리아의 질문은 천사의 말을 믿기는 하지만(38 절, 45 절)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설명해 주기를 요구하는 질문이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현재 성 경험이 없는 동정녀인데 인간적인 성관계 없이 어떻게 잉태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천사의 대답은 아기 잉태는 인간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될 것이라는 대답일 뿐이며, 그 일이 언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하느님의 힘이 덮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여기서 ‘성령’과 ‘하느님의 힘’은 같은 뜻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현존이 마리아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이다. ‘힘’은 신체적, 지적, 영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힘과 메시아가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시 110:2; 이사야 9:5; 미가 5:5). 이러한 힘은 일차적으로 왕적인 능력이지만 예언자의 능력도 포함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점에서 예언자의 능력, 힘을 능가한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께하였으며, 당신의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친히 행하셨다(4:14,36).
‘덮을 것이다.’ ‘그늘을 지우다’, ‘덮다’, ‘역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힘을 나타내는 탈출기 40:38 절의 ‘주님의 구름’을 암시한다. 또한 공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산에서도 구름이 덮인 사실이 묘사되었다(9:34; 마태 17:5; 마르 9:7).
이 기록들에서 모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날 생명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본 구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입니다.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으로 아드님으로서 거룩하신 분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마르 1:11; 9:7) 들린 하늘로부터의 목소리에 의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의해(마태 16:16),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 의해(마르 5:7) 그리고 로마의 백인대장(마르 15:39)에 의해 불리워졌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한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성자이시고, 아들과 아버지는 뜻이 일치하시고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이 칭호는 메시아적 칭호임과 동시에 성부와 성자께서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한다.
또한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은 다른 잡신들과 구별되는 유일하고 위대하고 성스러운 분이라는 뜻이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오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37 절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과학이나 상식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다. 우리의 믿음도 그런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천사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하나의 표징, 도는 믿음의 근거로 제시한다. 여기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친척’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사촌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사람이 친척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가문도 사제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사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인 엘리사벳이 늙은 나에 아들을 잉태해서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엘리사벳의 잉태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이 구절은 창세기 18 잘 14 절의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를 인용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런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은 보편적인 믿음이다.
엘리사벳의 임신이나 마리아의 임신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로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다.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굳이 동정녀이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메시아가 세상에 오실 때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태어나면 안 되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고, 굳이 임신, 출산의 과정을 꼭 거쳐야만 하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태어날 수도 있는데, 왜 하느님은 굳이 동정녀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셨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랑으로서, 즉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시면서 하느님으로서, 또 사람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했는데, 그 일을 위해서 선택되신 분이 마리아이고,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시면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남자의 성적인 능력으로써 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주는 성령의 힘으로써 이루어진, 하느님의 자유로운 창조 행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이시다.
즉 잉태된 그 순간부터 하느님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피조물로서 태어나는 우리 인간과는 다르게 오신 분이다. 그래서 동정 잉태가 필요했다.
그러면 다시 여기서, 왜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어야 하는가? 왜 두 가지 본성을 지니셔야 하는가? 물을 수 있다.
대답은 만일 예수님이 그냥 사람이기만 하다면 피조물인 예수님이 같은 피조물인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 되고, 그러면 예수님은 존경의 대상이 될 뿐 믿음의 대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즉 훌륭하고 위대한 한 인간이지,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만일 예수님이 그냥 하느님이기만 하다면, 굳이 출산이라는 과정도 필요 없고, 십자가도, 인간의 구속 사업도 모두 필요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부 하느님이 직접 하시면 될 일이고 아들을 보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서 말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와 신론, 그리스도론, 구원론, 은총론 등 거의 모든 신학과 연결되는 기본 믿음이다.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을 믿지 못하면, 천주교의 모든 교리 체계가 무너지게 된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 문제로 많은 이단이 발생했지만 모두 배척되었다.
요즘에도 일부 종파는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위대한 예언자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은 삼위일체도 믿지 않고, 신약성경도 거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느냐에 함께 얼마나 정확하고 올바르게 믿느냐? 도 중요하다. |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보십시오’라는 말은 ‘보라’와 같이 장엄하게 선언할 때의 관용어이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말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간 비난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느님의 뜻에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하느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종처럼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은 천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청원의 말이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겠다는 뜻의 응답이기도 하다.
이런 마리아의 고백은 절대 가벼운 고백이 아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 문제는 엄청난 것이었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그리고 지탄을 받아야 하고 또한 돌에 맞아 죽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 37 절의 말씀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느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마리아의 믿음과 겸손과 순종은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건 능동적인 헌신이었고 결단이었다. 다시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의 율법대로라면 마리아가 요셉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것이 드러나게 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신명 22:13-29). 따라서 마리아의 응답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또 어떤 강요도 받지 않고 스스로 결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능동적인 헌신이 되었고,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대한 믿음의 모범이 되셨다.
마리아의 대답으로써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구원 사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대답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는 위대한 대답이 되었다.
천사는 임무를 완수하고 마리아에게서 떠나간다. 그러나 이후에도 중요한 순간에는 다시 나타나서 성가정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마태 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