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4
본래 광장민주주의(agora democracy)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했다. 1만여명 정도 되는 아테네 시민(아테네에 살던 모든 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상대적 소수를 의미)은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 위치한 광장에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물론 토론도 있었는데, 반드시 평화적이어야 했고 폭력은 금지됐다.
광장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라프 파라노몬(Graphe paranomon)’이었다. 광장에서 불법적인 제안을 하거나 다른 시민을 조롱 또는 위협하는 발언을 하면 처벌받는 규정이다. 이는 아테네 광장민주주의가 공공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를 되도록 배제하고 중용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토론의 주도권을 갖도록 했다. 이를 통해 중용민주주의가 실현됐다.
‘광장민주주의’ 용어가 요새 우리 정치권에 등장했다.
지난 10월 5일 서초동 집회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공감하는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광장민주주의의 부활’이다. 광장에는 오직 평화와 질서, 적폐에 대한 심판과 개혁의 요구가 있었을 뿐”이라고 논평했다. 과연 민주당 주장처럼 서초동 집회를 광장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민주당은 10월 3일 있었던 자유한국당의 광화문 집회에 대해 ‘동원된 폭력집회’라고 규정했다. 한국당도 이에 질세라 10월 5일 서초동 집회를 관제집회라며 평가절하했다. 한마디로 서로 우리 쪽 집회는 자발적인 집회로 국민의 뜻을 읽을 수 있는 집회고, 상대편 집회는 ‘동원된 집회’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집회는 광장민주주의가 아니다. 서초동 집회도, 광화문 집회도 의견이 같은 이들이 뭉쳐 치우친 주장만 난무했다. 찬반 토론은 전혀 없었다. 토론을 통한 타협의 모색이 아닌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인 듯 보였다. 이런 집회는 광장민주주의도 아니고 직접민주주의도 아니다. 직접민주주의와 광장민주주의는 자신의 의견과는 다른 소수 의견이라도 경청하고 역지사지하며 이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 집회에서 나온 구호는 중용과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그저 ‘광장 투쟁’에 불과하다. 진정한 광장민주주의의 일환이 되려면 최소한 상대에 대한 증오와 공격은 없어야 한다. 한 예로, 조국 법무부 장관 자택 압수수색에 투입된 검사 3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김 모 검사에게 쏟아지는 사이버 테러를 들 수 있다. 지금 상황이 광장민주주의는커녕 정치적 이견을 표출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사회적 분열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뿐인가. 주술까지 동원해 윤석열 검찰총장을 저주하는 사진이 SNS에 돌아다닌 바 있다. 이 정도면 아주 심한 분열 상태다.
▲ 조국 법무부 장관 퇴진과 검찰개혁을 둘러싼 맞불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제8차 사법 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좌)와 10월 9일 광화문광장에서 범보수단체 주최로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퇴진 집회’ 모습. <연합뉴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 현상에는 관성이 있다는 데 있다. 물리학에서 관성의 법칙은 공기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물체에 힘을 가하면 그 방향으로 물체가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현상도 그런 성향이 강하다.
정치·사회적 균열구조도 일단 한번 형성되면, 그 균열의 정도가 계속 심화되는 성향을 보인다. 그 사례로 17대 국회를 들 수 있다. 17대 국회 이전에는 여야 의원끼리 몸싸움을 벌이다가도 저녁이면 소주 한잔 기울이는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7대 국회 이후 여야는 완전히 갈라졌다. 17대 국회 때 이른바 ‘탄돌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그 역풍 덕분에 국회에 입성한 이들을 일컫던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은 정치권에서 여야 간 균열구조 심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균열구조는 18대, 19대 국회를 거쳐 현재까지 점점 더 심화됐다. 이제는 상대를 진짜 적으로 여기는 듯하다.
두려운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번 사태는 표면적으로 조국 장관을 두고 벌어진 것이지만, 조국 사태가 어디까지나 분열의 계기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사회적 균열구조는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번 사회적 균열구조 또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벌어진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탄핵이라는 것이 정치 혹은 사회적 차원의 균열구조를 상당히 심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또한 지금처럼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사회적 균열구조는 더욱 심해진다. 정치란 사회적 갈등을 제도라는 이름의 링 위에 올려놓고 사회적 갈등의 주체 대신 싸워서 갈등 규모를 축소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가 기능을 상실하면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앞으로 제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도 들지 않는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0월 5일 초월회에 불참했다. 초월회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주재해 여야 5당 대표가 매달 한 차례씩 국회 사랑재에 모여 오찬을 함께하며 정국 현안을 논의하는 모임이다. 이 대표는 초월회에 불참하며 “초월회가 민생을 위해 도모하는 장이 아니라 정쟁을 위한 성토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어 태풍 피해, 아프리카돼지열병, 일본 수출규제 등으로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국민 마음을 고려해 불참을 결정했다”고 했다. 좀처럼 동의하기가 힘들다. 상황이 이럴수록 정치권이 만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권이 ‘서로 담쌓고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찬 대표는 그런 기회를 거부했다.
이해찬 대표 논리대로라면 문희상 의장이 먼저 그 모임을 취소했어야 옳다. 하지만 문 의장은 모임을 취소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럴수록 여야 간 소통이 절실하다 판단했기 때문일 터다. 결국 이번 불참은 여당이 진영 논리에 빠져 정당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기능을 자각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여당은 국민을 분류하지 말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동시에 역지사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더불어 자신만의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해 때로는 청와대와 맞서며 정당으로서 확고한 독자적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여당에서 그런 모습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상황이 이러니 사회적 균열은 더욱 깊어지고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7일 조국 장관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하나로 모이는 국민의 뜻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 보장 못지않게 검찰개혁이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맞는 말이다. 조국 장관에 반대하는 측도 검찰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왜 조국 장관만이 개혁의 적임자인가 하는 부분이다. 대통령은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해줘야 한다. 대통령이 임명했기 때문이다. 결자해지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조국 장관에 반대하는 측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것이다.
내일신문과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9월 26일부터 10월 2일까지 전국 성인 1200명에게 전화면접조사(CATI)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신뢰수준은 95%, 표본오차는 ±2.8%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를 보면,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32.4%까지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권 차원에서 보면 이제 지지율이 위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장관 거취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을 해야 한다.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율 /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29호 (2019.10.16~2019.10.22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