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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호-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방법
생애의 빛에서
강병국 목사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 어떻게 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다시는 죽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죄의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구원이라기보다는 영생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구원이란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류가 창조 받았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범죄하고 반역하여 타락하기 그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역사에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본래의 마음과 품성으로 회복시키는 일이 선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복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우리의 마음과 믿음과 됨됨이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역사적인 실재 사건과 이야기를 통하여서 설명해 놓은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축하는 사업을 기록한 말씀 속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전쟁을 하면서 성전을 재건축하였습니다. 온갖 방해와 시련들 속에서 성전을 재건하였지요. 이것은 우리를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상징하는 기록입니다. 구약에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지만, 그 말씀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의 성전과 또한 눈에 보이는 교회와 진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가정과 영성: 신앙이 그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기독교 신앙이 그대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켰는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은 그대를 위선적이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는가? 그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발견했는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면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에 소개하고자 하는 세 가지 원칙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만일 그대가 이 세 가지 원칙들을 그대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대의 삶은 변화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대의 삶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원칙 1. 시편 46장 10절의 말씀을 받아들이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be still)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기 원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성경 절을 암송하며 감동적인 책을 골라서 읽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이 마음의 양식을 위하여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대가 책을 통하여 읽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가만히 있어 (be still)? 본 적이 있는가? 시간을 따로 떼내어 하나님을 생각하며 명상하고 있는가? 시편 139:17,18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아침에 깰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없이 하루를 시작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적다. 아침에 일어나서 단지 짧게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대화에 충분한 시간을 보내야 된다는 말이다.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먼저 그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기 원하는가?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조용하고 잠잠한 아침 일찍 일어 나셨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8).
원칙 2. 기도하고 말씀을 읽을 때, 친구에게 마음을 열듯이 하나님께 그대의 온 마음을 열어야 한다. 다윗 왕이 하나님께 간구했던 회개하는 영을 그대에게도 달라고 간구하라. 그리고 그대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라.
성경을 그대를 위하여 쓴 하나님의 편지로 읽어라. 오늘 아침에 읽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하면 오늘의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그렇게 할 때에 성령께서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내가 배운 것 전부는 어떤 것은 하고 어떤 것을 하지 말라. 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성경의 원칙들을 내게 가르쳐 줄 때 나는 그것이 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무거운 짐을 진 채 성경을 읽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릴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신앙은 나를 변화시켰는데 불행과 참담함 속에서 살아가도록 변화시켰다. 마음에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 없이 모든 규칙과 원칙들을 따라가기 위하여 애쓰는 삶의 연속이었다.
형제자매들이시여,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한다. 그대들 역시 과거의 나와 동일한 형편 가운데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 신앙이 그대들의 삶을 참담하게 변화시켰는가? 아니면 거룩하고 행복한 삶으로 변화시켰는가? 만일 우리가 올바른 길 위에 있지 않다면,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만 한다. 오늘날 두 종류의 기독교 가정이 존재하는데, 한 종류의 가정은 혼돈 가운데 있는 가정이고 다른 한 종류는 온 가족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나아가는 가정이다. 그대들은 어떤 종류의 가정에 속하는가? 좀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그대는 자녀들 앞에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거나 부부 싸움을 하는가? 그대 자신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면서 자녀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하면 그들을 꾸짖는가? 자신도 세속적인 것들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자녀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신앙을 요구하고 있는가? 자신은 하지 못하는 것을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는가? 자신이 지키는 원칙을 자녀들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는가? 우리 부부도 그러한 형편 가운데 있었다. 부모인 우리의 위선과 진실되지 못함 때문에 아이들이 신앙을 떠날 수 있으며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형제와 이웃이 마음의 문을 닫을 수도 있다. 말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나타낼 수 있다.
원칙 3. 작은 일부터 신실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0).
앞에서 언급했던 말처럼 매일의 일상사에서 실족했던 것들은 작은 일들이었다. 우리는 작은 일들에서부터 먼저 진실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들만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 부부는 가까운 일에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더럽고 정리가 안 된 자동차를 깨끗하게 정리하였다. 가정의 부엌 살림을 정돈하였고 경제적 살림 규모를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하고 절제하였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습관을 가정 속에 심어 나갔다. 이것이 우리 가정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결심하면서 시작한 일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높은 구름 위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믿기만 하면 그 나머지 일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 신앙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보기 원한다. 세상이 그리스도인 가정 속에서 진리와 사랑과 질서를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와 가족에게 일어난 변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나와 우리 가족은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들, 즉 무엇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불평하는 대신에, 우리 모두의 모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와 규칙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멍에가 되지 않았다. 그러한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이제 성경은 더 이상 나에게 부담과 짐을 지우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알려주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펼칠 때마다 나의 열린 마음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원칙과 진리에 대한 밝은 이해를 알려 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은 나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이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
하나님께서는 나의 눈을 열어서 그 동안 소홀히 여겼던 의무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셨다. 예전 같으면 뭐, 내가 지켜야 할 규칙이 또 있단 말이야?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할 필요가 있어? 라는 말로써 불평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입에서는 더 이상 그런 말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알려주시는 당신의 지혜와 사랑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의 구원에 최선의 유익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들을 알려주시는데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진실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망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분명한 변화를 보라. 나는 너무나 바보처럼 살아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지혜로서 주신 성경의 여러 가지 교훈과 원칙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까다로우신가!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거야? 성경을 율법주의로 해석하면 안되지. 라고 불평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음악을 듣는가에 대한 나의 결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의 신앙과 영적 분위기를 부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문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원칙과 교훈이 싫었기 때문에 나의 결정과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항상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해 내었다. 형제자매들이시여, 내가 걸었던 넓은 길은 파멸을 향한 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돈과 재물 그리고 세속적인 쾌락은 마귀가 나에게 주었던 것들이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행복하지 못했다.
하나님께 온 마음과 생애를 드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님, 그 동안 내 멋대로 살아 온 나의 삶이 정말 싫습니다. 이제는 정말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이후로 내게 있어서 성경은 새로운 책이 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여서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흥분시켰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명과 교훈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내게 이해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경우 과거에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내게 있어서 그런 문제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적 황홀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일상사에서 의무에 충실하고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며 따라가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믿는 바대로 살아감을 뜻한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령의 평화와 쉼을 주신다.
이제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생애를 변화시키셨다! 고 말할 수 있다.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전에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게 되었다. 전에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고 깨끗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와서 어떻게 해서 당신들이 이렇게 변화하게 되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과거에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그들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하여 답을 줄 수 있었다. 나의 자녀들도 친구들로부터 여러 가지 질문과 유혹을 받지만 그들 역시 아니,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관심도 없단다.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부부와 함께 자녀들도 그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선택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세상과는 분명하게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과 다른 선택과 결정을 해야만 할 때도 종종 생긴다. 그들로부터 율법주의자 또는 꽉 막힌 사람 이라는 놀림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안위를 찾았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은 외롭지만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어도 되었었는데&. 이제 남아 있는 짧은 세월 동안이라도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차 안에서
서정희
욕심 내어
창가에 앉았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안고 가는
기차 안에서
곧 밤이 온다는 것을
잊은 채
시간이 지나
어둠만 보이는 창밖을 보며
욕심의 결과를 봅니다.
어두워질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겠다고
무엇이 욕심인지
매 순간 알려달라고
욕심을 버릴 수 있는
하늘의 마음을 달라고
두손 모아 기도해 봅니다.
건강: 숨겨진 이야기, AIDS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AIDS, 에이즈)라는 진단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공포를 일으키게 만든다.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대부분의 에이즈 환자들이 그 질병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내에서 이 두려운 병(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1981년에 처음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57만 5천 명 이상에게 발생되었는데 그 중 35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주로 25세부터 44세까지의 연령층에 발병한다. 현재 에이즈에 걸려 있는 사람들 중에 오직 39%만이 살아남았다. 대부분 인생의 절정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숫자는 약 2천백만 명인데 매일 8500명이 감염되고 있다. 2000년까지 에이즈로 인하여 약 8백만 명이 사망하고 5백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감염되며 5백만 내지 1천만 명이 에이즈 때문에 고아가 될 것으로 추산하는 통계가 오래 전에 발표되었다.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의 90% 이상이 개발도상국가에 집중되어 있는데 아프리카의 5개 국가에는 국민의 10% 이상이 감염되었다고 한다.
에이즈는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을 의미하는데 이 이름은 질병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내 준다. 첫째, 에이즈는 면역 체계 결핍을 수반한다. 즉, 이 질병은 면역 체계 약화로 인하여 암이나 다른 치명적인 질병들에 대하여 무기력하게 만든다. 둘째, 에이즈는 증후군 으로 정의된다. 증후군이라는 것은 여러 증상과 문제가 이 질병에 걸렸을 때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에이즈로 인해 소화계 이상, 신경계 변환, 그리고 다른 많은 문제가 여러 충격적인 암과 감염들을 동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에이즈에 대한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면역 체계의 악화를 가져오는 이 증후군은 후천적이다. 정상적인 면역 체계를 가진 사람도 후천적인 이유로 인하여 손상된 면역 체계를 가지게 되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게 된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
에이즈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에이즈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1. 성적인 접촉: 이성 간의 전염, 동성 간의 전염
2. 혈액 주입
"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혈액과 혈액제재를 수혈 받을 경우
" 정맥 마약 주사 사용자들끼리 주사기를 공유할 경우
" 의료인들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주사 바늘에 찔릴 경우
" 개방된 창상이나 점막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노출될 경우
3. 신생아: 임신 중에 자궁 내에서 감염되는 경우와 출산 중에 산도를 나오면서 감염되는 경우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은 사형 선고인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에게는 조만간 그것과 관련된 증상을 나타나게 될까?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에이즈에 걸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1980년대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이 최초로 발견된 이래 미국 내 감염자들 수천 명을 추적한 결과 나타났다. 감염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단지 50% 사람들에게만 에이즈가 발병되었다. 그러므로 이 결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에이즈 병에 걸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 같은 시기에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에이즈가 발병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에이즈가 발병되지 않을까? 이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에이즈의 발병을 늦추거나 막기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바이러스에 감염될 당시나 감염된 이후의 면역 체계(저항력)의 건강 상태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어떤 사람은 에이즈 바이러스에 자주 노출되지만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드러났다. 왜 그럴까? 에이즈에 대하여 연구하면 할수록 에이즈 바이러스 자체보다는 감염된 사람의 면역 체계 상태에 의해서 에이즈의 발병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에이즈 병에 걸린 두 남자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에이즈 진단을 받기 전에 그들의 아내들과 오랫동안 부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인들은 모두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 미국의 미시간 대학의 생리학 연구실에서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에이즈 질병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일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에이즈가 발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체내에 들어온 에이즈 바이러스는 면역 체계(저항력)가 강할 때에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여러 요인들에 의하여 면역 체계가 약화되면 그때에 에이즈가 발병하게 된다. 그런 요인들 중에는 아편계 약물, 고농도 카페인, 아밀 나이트레이트, 술 그리고 담배 등이 있다. 그러므로 면역 체계를 강화시키는 건강하고 건전한 생활 습관을 갖는 것은 에이즈 예방 및 치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에이즈를 막는 방법
우울증과 관련된 스트레스는 면역 체계를 약화시켜서 에이즈 발병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심한 스트레스는 에이즈 감염자가 에이즈 질병으로 발병할 수 있는 확률을 4배나 증가시킨다. 면역계를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다. 또한 혈액 내에 비타민 E의 농도가 가장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에 비해서 에이즈에 걸릴 확률이 34%가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완전 채식을 하는 사람의 경우 파이토 케미칼을 풍부하게 섭취하기 때문에 혈액 내에 비타민 E의 농도가 매우 높게 된다.
비타민 B12의 혈중 농도 또한 중요한데 이것이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보다 2배 이상 에이즈 발병 확률이 높다. 식물 중에는 비타민 B12가 많지 않기 때문에 채식을 하는 사람의 경우 에이즈의 예방을 위해서는 비타민 B12를 보조제로 섭취하는 것이 좋다. 채식을 하는 사람의 경우 강력한 항산화제인 혈중 글루타치온 수치가 높은데 이것은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 속도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높은 글루타치온 농도를 가진 에이즈 환자의 경우 3년 내 생존률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강력한 면역 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철저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97%의 에이즈 환자들이 성관계나 마약과 같은 약물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았었더라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세우신 가정과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에이즈 예방법이고 치료법이다. 평생가약의 배필에게 맹세한 결혼 서약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허락한 최고의 식단으로 식사를 하고 옥외에서 노동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항에이즈 치료법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창 2:22-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29).
건강: 동성애를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18: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4, 26, 27)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 남색 이란 말의 헬라 원어적 의미는 한 남성이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 설탕이 건강을 해치는 59가지 이유 - 제2부
Lick the sugar habit의 저자인 Nancy Appleton 박사가 제시한 설탕의 문제점.
본 기사는 지난 호 건강 기사 설탕이 건강을 해치는 59가지 이유-제1부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31. 설탕은 다발성경화증을 일으킬 수 있다.
32. 설탕은 치질을 유발시킬 수 있다.
33. 설탕은 정맥류를 일으킬 수 있다.
34. 설탕은 먹는 피임약을 사용하는 사람의 포도당과 인슐린 반응을 상승시킬 수 있다.
35. 설탕은 잇몸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36. 설탕은 골다공증의 발병 위험을 높인다.
37. 설탕은 타액(침)을 산성화시킨다.
38. 설탕은 인슐린 민감도를 감소시킬 수 있다.
39. 설탕은 포도당 내성을 감소시킨다.
40. 설탕은 성장 호르몬 분비를 감소시킬 수 있다.
41. 설탕은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킬 수 있다.
42. 설탕은 혈압을 올릴 수 있다.
43. 설탕은 졸음을 초래한다.
44. 설탕은 편두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45. 설탕은 단백질 흡수의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
46. 설탕은 음식물 알러지를 초래한다.
47. 설탕은 당뇨병의 유발 위험을 높인다.
48. 설탕은 임신 기간 중에 임신 중독증을 유발할 수 있다.
49. 설탕은 어린아이들에게 습진을 일으킬 수 있다.
50. 설탕은 심장 혈관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51. 설탕은 유전자 구조를 손상시킬 수 있다.
52. 설탕은 단백질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다.
53. 설탕은 콜라겐의 구조를 변경시킴으로써 피부 노화를 촉진할 수 있다.
54. 설탕은 백내장을 유발할 수 있다.
55. 설탕은 폐기종을 유발할 수 있다.
56. 설탕은 동맥경화증을 유발할 수 있다.
57. 설탕은 나쁜 콜레스테롤(LDL)의 수치를 상승시킨다.
58. 설탕은 혈액 내에서 유리기(free radical)를 만들어 낸다.
59. 설탕은 효소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신앙: 1부 - 무너진 성전 건축에 관한 이스라엘의 역사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많은 깨달음과 영적인 교훈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역사들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또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계가 된다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신앙 기사에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성전 재건축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 역사가 현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영적인 교훈을 주는지에 대해 연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재건축은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의 빛의 회복, 그리고 우리 마음의 영적인 성소의 재건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으며, 아울러 현재에도 계속되어야 할 영적인 개혁 사업과 종교 개혁 운동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남은 무리의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번 숙고해 보아야 할 주제이기도 합니다. 필독을 바랍니다. - 편집실 -
Q.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나요?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들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선민으로 삼으실 때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 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출 19:5).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을 잘 들으며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을 잘 섬기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번번히 어기며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오랜 세월을 고통 중에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먼 이방 나라에서 오랫동안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은 이방 땅에서 사는 포로 생활에 만족하거나 그 땅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이방의 풍습을 좇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 다시 조국인 이스라엘로 돌아가 그들의 허물어진 성읍과 성전을 건축하며 살게 하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수의 사람들은 구속의 때가 다가오기를 믿음으로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Q. 이스라엘의 해방은 예언되어 있었나요?
어느 날, 고레스가 지휘하는 메대와 바사 나라의 군사들이 바벨론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구원될 날이 가까이 이르고 있다는 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벨론 나라를 쳐들어온 메대"바사(페르샤)의 고레스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은 고레스 왕이 탄생하기 한 세기 훨씬 전에 성경에 기록된 것이었는데, 성경은 고레스 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때가 되면 그가 바벨론 나라를 정복하고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예언을 함께 볼까요?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사 45:1~3).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을 입으리라 하는 자니라 ,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44:28, 45:13).
Q. 바벨론은 어떻게 함락되었나요?
바벨론은 예로부터 난공불락의 성으로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큰 강이 그 성 주위를 감싸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성을 함락시키려면 그 물줄기들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샤(당시의 이름; 바사) 나라의 군사들은 강물 줄기를 몰래 빼돌린 후, 그 마른 강 바닥을 따라 무방비로 느슨해 있는 바벨론 성안으로 쳐들어갔고, 그 예기치 않던 공격에 그 강하던 바벨론은 항복하고 졸지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박하던 자들이 돌연히 멸망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열국의 사건들을 조종하고 계신다는 현저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고레스 왕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유일한 예언은 아니었습니다. 이외에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쓴 예언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구원받기 전에 경과할 기간이 분명히 정해져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사자를 통하여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 (렘 25:12)리라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예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9:14). 바야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구속의 때는 가까워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Q. 다니엘은 어떻게 기도했나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다니엘은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예언들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사건들의 신속한 진행이 열국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을 나타내는 것들을 보면서,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에 관하여 깊이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이 메대"바사 나라에게 함락되기 직전, 다니엘이 예언들을 묵상하고 그때를 알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을 때에 그는 나라들의 흥망에 관한 일련의 계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계시와 함께 예레미야의 예언, 곧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칠십 년 동안의 포로 기간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단 9:2).
확실한 예언의 말씀 위에서 다니엘은 이 약속들이 신속히 성취 되기를 위하여 믿음으로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탄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자복하였습니다. 비록 다니엘이 하늘로부터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자유롭게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성벽과 성전을 건축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Q. 성경은 고레스 왕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메대
"바사가 바벨론 나라를 함락시킨 지 2년이 못 되어 첫 번째 왕이었던 다리오가 죽자 고레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고레스 왕의 통치 원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온 지 칠십 년이 되는 중요한 해였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구원받은 사실은 고레스 대왕의 마음에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견지명이 있는 정치가이며 하나님의 훌륭한 종이었던 다니엘이 바사의 통치자인 고레스 왕에게 특별한 은총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은 자신이 탄생하기 수백 년 전에 자신에 대한 기록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언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이 어떻게 함락될지에 대한 것과 또 자신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는 말씀을 보고 고레스 왕은 놀라운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라는 하나님의 선고와, 또한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사 45:4~6, 13)고 하신 영감의 기록들을 읽을 때에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사명을 성취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포로들을 자유롭게 돌아가도록 하고 그들을 도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복구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Q. 포고문에는 무슨 내용이 써 있었나요?
고레스 왕은 온 나라에 포고문을 반포하여 히브리인들의 귀환과 그들의 성전 재건을 돕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 포고문에서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스 1:1~4)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성전 건축에 관하여 지시하기를 이 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전 금, 은 기명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에 둘지니라 하였 (스 6:3~5)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예언된 대로 꼭 70년이 차는 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롭게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성을 건축하게 되었고, 바벨론 나라에 빼앗겼던 성전의 보물들과 기물들을 도로 다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고레스 왕의 조서는 왕의 영토 안에서 가장 먼 곳까지 전달되었으며 분산되어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어느 곳에서나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들 중 신실한 사람들은 다니엘처럼 예언들을 연구하고, 그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때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고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다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친구들은 그들을 빈손으로 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황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과 보물로 도왔 습니다. 이외에 다른 많은 자원하는 헌물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 갔던 하나님의 전의 기명들이 추가되었으며, 바사 왕 고레스는 신하에게 명령하여 재건될 성전에서 사용할 만큼의 금, 은 기명 오천사백 을 주었습니다(스 1:5~11 참조).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는 신실한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복구하는 일에 즐거운 사명을 띠고 멀고 험한 귀향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황폐한 광야를 건너는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무너지고 파괴되었던 그들의 성읍과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에 즉시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던 일, 무너지고 황폐되었던 하나님의 성전을 보수하는 역사적인 일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신앙: 2부 - 성전 건축에 대한 다른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한 조서는 세 차례에 걸쳐서 내려졌습니다. 메대"바사의 또 다른 왕이었던 아닥사스다도 성경 역사에 등장합니다. 그의 치세 동안에 에스라와 느헤미야 선지자가 살아서 봉사했으며, 그는 BC 457년에 예루살렘의 복구를 위하여 세 번째이자 마지막 조서를 내린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에 에스라의 인솔로 이스라엘의 한 무리가 고국으로 귀환했고, 느헤미야와 그 동료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었습니다.
성전 건축 사명을 받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야기 1 - 에스라
에스라는 성경 지식뿐 아니라 메대"바사 영토 안에 있는 박사들의 책에도 정통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살기를 갈망하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선지자들의 기록들과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부지런히 연구하는 데 열중했고,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 (스 7:10)습니다.
마음과 뜻을 하나님의 지배에 온전히 맡긴 그의 거룩하고 성화된 생애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감화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선지자로 택하신 이유는 포로 시기 동안 잊혀진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에스라는 그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율법의 사본들을 모아서 이것들을 필사하여 분포하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서 영적인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적인 주목을 받았고, 왕에게 담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도 해서이지만, 그보다 에스라의 성실성에 대한 신임이 매우 컸기 때문에 그의 요구를 허락했을 뿐 아니라 성전 봉사를 위하여 값진 선물을 하사함으로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나타내었습니다.
에스라와 무리의 귀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일 장소가 지명되었고 정한 시간에 예루살렘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긴 여행을 위하여 모두 모였습니다. 에스라는 다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리라고 기대하였으나 부름에 응한 수는 실망할 만큼 적었습니다. 이방 나라에 집과 토지를 얻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을 희생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안일을 사랑하여 남아 있는 것을 아주 만족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희 처자들과 소유물 외에 성전과 그 봉사를 위한 많은 보물을 가지고 여정길에 올랐습니다. 에스라는 약탈하고 죽이려 하는 원수들이 도중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보호할 군사를 왕에게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려고 돌아가는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정월 십이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스 8:31)고 기록했습니다. 긴 여행이었지만 그들은 순조롭게 여행하여 아닥사스다 7년 5월 1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야기 2 - 느헤미야
히브리 유랑인 중 또 한 사람이었던 느헤미야는 바사 궁정에서 권세와 영광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은총을 받으며 비록 화려한 궁전에 살았지만 그의 하나님과 그 백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에서 온 사자들에 의하여 성읍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1차로 돌아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성읍의 일부가 재건되다가 방해를 받고, 성전 봉사도 저지당하고 있으며, 성벽은 아직도 대부분 황폐되어 있어서 백성들은 끊임없이 경계를 하며 위험에 노출된 채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국의 성전을 생각하고 슬픔에 억눌린 느헤미야는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였습니다. 슬픔 중에 그는 도우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자신과 자신의 백성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힘과 용기를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도와주셔서 황폐된 성전을 건축하게 해 주시도록 탄원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에 그의 신앙과 용기는 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고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를 구하는 일에 필요한 도움을 얻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자기가 직접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회복하는 과업에 착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계획이 수행될 수 있도록 왕의 목전에서 은총을 얻게 해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슬픔의 기색을 발견한 왕이 물었을 때에 느헤미야가 기도하면서 말한 예루살렘의 상태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편견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왕의 동정심을 일깨웠습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질문은 느헤미야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 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과 때에 맞추어, 또 필요한 때에 성전을 재건축하기 위해 느헤미야는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재건축을 위한 그의 희생과 열심과 사명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 3부 - 성전 건축을 향한 사단의 방해
어려웠던 성전 재건축 이야기
느헤미야가 군대의 호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자, 주위 성읍 가까이에 살고 있던 이방 족속들의 질투심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자주 유대인들에게 해를 끼치고 모욕을 가함으로 적의를 나타내던 사람들이었는데, 이 악한 사람들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사람들은 이 족속들의 추장인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들은 힘이 미치는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성전을 재건하려는 느헤미야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성전 건축 사업을 방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밤에 몇몇 신임하는 동료들과 함께 밤중에 일어나 예루살렘의 황폐를 보러 나갔습니다. 그는 성읍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의 조상의 성읍의 무너진 성벽과 문들을 조사하였습니다. 슬픔이 가득 찬 마음으로 사랑하는 성 예루살렘의 폐허가 된 시설들을 돌아보던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운 추억으로 가득 찼습니다. 비밀리에 조용히 순회를 마친 느헤미야는 남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 아침에 낙담하고 분열된 그의 동포들을 일깨워 성전 건축을 위하여 연합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열렬한 호소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방인 가운데서 당한 그들의 불명예, 즉 그들의 믿음과 하나님이 모독을 당한 것을 나타내 보였으며, 기도의 응답으로 바사 왕의 은총과 허락을 받게 되었으므로 성벽을 재건하려는 이 계획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늘의 은총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사람들이 들을 때에, 주위에 산재해 있던 이방 족속들에 대하여 가졌던 그들의 공포심은 부끄럽게 되었고,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그들은 목소리를 합하여 말하기를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 자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열심을 다하여 성전 재건사업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소망, 그의 활동력, 그의 열성, 그의 결심은 전염되어 다른 사람들을 같은 고상한 목적으로 고취시켰습니다.
방해와 어려움
성벽을 재건하고 보수하는 일이 진척되자, 주위에 있던 원수들은 유대인들이 성취하려고 하는 일을 보고 조롱하여 말하기를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 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복구하는 데는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사단의 선동을 받은 원수들은 때때로 멀찌감치 모여서 재해를 음모한 후에 일꾼들에게 가까이 나아와 그들의 주목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하였고, 반대를 일으켜 그 사업을 단념시키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반대 운동에 대표 자격인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은 직접 재건 공사를 방해하려 나섰습니다. 그들은 일꾼들을 분열시키려고 노력하였고, 그 사업이 불가능하다고 선포하고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건축자들의 노력을 조롱하였습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사람들은 친선을 공언하면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혼란과 고통을 주고 불신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적들의 음모를 대적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건축자들의 용기를 꺾으려고 노력하였고 느헤미야를 자기들의 올가미에 끌어넣으려고 음모하였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자신을 높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바사 왕에 대한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그를 돕는 자들은 모두 반역자들로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백성들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성벽과 성전의 재건 사업에 역사하였습니다.
생명의 위협
공사는 진전되어 마침내 깨어진 틈들을 다 메우고 성벽은 절반까지 쌓아올려졌습니다. 원수들은 그들의 방해가 소용이 없자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화가 나서 모여 의논하고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의 모욕과 조롱과 반대와 위협은 느헤미야로 하여금 더욱 굳게 결심하도록 일깨워 줄 뿐이었습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 하였습니다. 성벽과 성전을 건축하는 사람들은 원수들의 방해 때문에 이제 싸우면서 이 사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잠자는 짧은 시간 동안에라도 그들은 옷을 벗지 않고 병기를 놓지 않은 채 건축 일에 전념 하였습니다.
성벽은 신속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성벽이 완성되고 문들이 세워지면 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강제로 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열심히 그 공사를 중지시키려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느헤미야를 있는 곳에서 끌어내어 죽일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를 회유하여 함께 공식적인 회의를 하자고 제안한 후, 느헤미야가 나타나면 그를 죽이려고 공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던 느헤미야는 생명의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할 수 있었고, 원수들의 공공연한 음모와 은밀한 음모에도 불구하고 건축 공사는 꾸준히 진전되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두 달이 못 되어 성읍은 방벽으로 둘렸고, 건축자들이 성벽 위를 거닐면서 패배해서 놀란 원수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에서 배우는 영적인 교훈 - 구약 느헤미야의 성전 건축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느헤미야 당시 성전을 재건축한 사실은 영적인 의미로, 현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반적인 영적인 개혁 사업과 참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재건되어야 할 성소를 건축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습니다. 즉, 성소의 재건과 회복은 영적으로 진리와 복음이 회복되는 것이요, 마음의 성소가 회복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과 성전의 보수자들이 건축하는 동안 원수와 거짓 친구들에게서 받은 공공연한 반대와 어려움과 고난과 낙담은, 오늘날 현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마음의 성소를 건설하는 일과 진리와 복음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업을 하면서 겪는 경험의 표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기 위해 헌신하며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단과 신앙의 적이 되는 사람들로부터 분노와 멸시와 모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친구와 조력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배반으로 시험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벽을 건축하며 무너진 데를 수보하기 위해서는 퍼부어지는 조소와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단은 영적인 성전의 건축을 방해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또한 영적인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이 총체적으로 완전히 회복되어 제시되도록 힘을 다하는 사람들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굳게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재건축하는 일에 충성한 느헤미야와 그의 동지들처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아의 정신으로 그분의 일을 할 것이며, 그들이 하고 있는 사업을 그분의 섭리에 맡기고 견실히 전진하여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큰 실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자기의 의지와 확실한 방벽으로 삼았습니다.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1)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고 말한 느헤미야의 반응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반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제4부에서 우리는 성전을 재건하는 사업이 현대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신앙: 4부 -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 58:12).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수행한 성전과 성벽 복구 사업과 개혁 사업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져야 할 영적 회복 사업을 묘사한다. 그 당시 성소를 건축하고 다시 회복하는 사업의 거룩한 역사(役事)가 상징하는 영적 회복은 다음의 이사야의 말에 그 윤곽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 61:4, 58:12).
1. 성전 건축이 주는 영적인 의미
성경에 나오는 과거의 역사와 기록들은 우리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으며, 그 역사의 사건들이 영적으로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는 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 재건축과 회복이 주는 영적 교훈 중, 특별히 느헤미야가 성전을 건축하던 역사는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고 있으며, 이 역사는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다시 부언하자면, 그 당시 성전을 재건축한 사실은 영적인 의미로, 현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반적인 영적인 개혁 사업과 참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재건되어야 할 성소를 건축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다. 즉, 성소의 재건과 회복은 영적으로 진리와 복음이 회복되는 것이요, 마음의 성소가 회복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2.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
사도 바울은 일찍이 우리에게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 이라고 이렇게 피력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그런데 16절에 이 말씀을 하기 전 문장인 고린도전서 3장 10절부터 15절을 보면, 건축하는 일과 터를 닦는 일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읽어 보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사도 바울은 왜 건축하고 터를 세우는 역사에 대하여 말하다가 16절에 와서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전 이라고 피력했는가? 여기에 나오는 건축하는 일 과 터를 닦는 일 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여기서 잠깐 하나 더, 베드로의 권면을 살펴보자.
3. 신령한 집을 세우는 일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4~5).
위의 성경 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도 집을 세우는 일과 건축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 라고 권면하고 있다. 즉 바울과 베드로는 둘 다 우리에게 터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신령한 집을 지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뜻이 과연 무엇일까? 이 성경 절의 의미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로 지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구약의 성전이 재건축되고 회복된 것같이 우리의 신앙과 성품도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영적인 성전이 회복된 것처럼 마음의 성전도 온전하게 복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4.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들
바울과 베드로가 언급했던 건축하는 일 과 터를 닦는 일 과 관계있는 구약의 성경 절을 하나 보자. 그 성경 절은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 61:4, 58:12).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사람들, 즉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는 사람들과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이 사람들이 바로 바울과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신령한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진리와 의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고 있는 때에 하늘나라의 기초인 하나님의 법과 원칙들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는 백성들이다. 이 백성들은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로서 이들은 하나님의 회복된 총체적인 복음을 이해하며, 그 진리의 복음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깨달은 진리 그대로 사는 하나님의 참자녀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남은 무리,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 (계 12:17, 14:12)인 것이다.
이 사람들이 바로 무너진 데를 수보하며 황폐된 곳을 다시 쌓는 일을 하는데, 곧 마지막 남은 무리인 하나님의 참 교회와 참 백성들이 무너지고 왜곡된 복음을 회복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람들은 회복된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생명을 불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남은 무리와 백성들, 곧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말한 건축자 또는 터 되신 예수그리스도 위에 신령한 집을 세우는 이 사람들은 인간의 잘못된 유전이나 가르침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 곧 변질되지 않은 복음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며, 불변하는 진리 위에 터를 닦는 자들이요, 허물어진 하나님의 원칙과 계명을 회복시키므로써 무너진 데를 수보하고 황폐된 곳을 다시 쌓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5. 재건되어야 할 마음의 성소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하셨던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8). 성소는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제도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계시기를 원하셔서, 그 함께 거하심 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신다. 인간이 비록 타락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우리와 헤어져 있을 수가 없어서 성소를 짓게 하시고 그 안에 거하시려고 의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성소는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장소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6. 마음의 성소란 무슨 뜻?
그렇다면, 현시대의 성소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반문했다. 이 말은,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말하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 예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지 않으시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주님께서 거하시는 성소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4,5).
이 말의 뜻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육신의 자아가 장사되어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함으로 이제는 마음속에 예수께서 임재하셔서 온전히 예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하나님의 임재를 가진,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소라는 말이다. 그는 또 기록하기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롬 6:16)라고 반문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성소에 예수께서 살아 좌정해 계시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순종하며 예수님의 뜻과 의지대로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후, 깨끗한 새 생애, 거듭난 생애를 살며, 그 속에 주님의 임재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곧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경험을 하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임재를 가진 성소인가요?
사람들이 자신의 품성의 건설을 게을리할 때, 그리고 외모보다 영혼의 단장이 결여될 때, 또 단순한 경건이 멸시를 받을 때, 교만과 허식에 대한 사랑이 승하게 되어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찬란한 장식과 가치없는 허례허식의 의식들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로 영광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귀중히 여기시는 이유는, 그 외적인 뛰어남 때문이 아니고 교회를 세상에서 구별시키는 경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속에 주님의 임재를 가진 성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영적 경험이 매일 더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건축물과 예술품의 아름다움을 다 동원한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성품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며, 외모에 아무 매력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품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원칙과 임재를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기뻐하신답니다.
신앙: 5부 - 성소를 통하여 배우는 구원의 도
성소의 길 - 구원에 이르는 길
성소를 알면 구원의 도를 알게 된다. 시편 기자는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내가 깨달았나이다 (시편 77:17)라고 했으며, 시편 77장 13절에는 (영어 원문) Thy way, O God, is in the sanctuary - 오, 하나님, 당신의 구원의 도(道)가 성소 안에 있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간의 구속 사업을 어떻게 이루고 계신지에 대하여 보여주시는 정확한 청사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하여 죄인들 가운데 오셔서 같이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을 치르셔야 하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한 예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 성소는 인간이 볼 수 있게 휘장으로 가리워서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성소의 모든 기구와 모형들은 모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구세주의 역할을 담당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성소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서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이다. 결국 구원이란, 타락하여 하나님과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회복되어 다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도 죽지 않고 영원히 같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죄인들에게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소 제도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즉 지성소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 위하여 죄를 어떻게 회개하고 용서 받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떻게 죄를 이기고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즉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제도인 것이다.
성경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이사야 59:2)고 말한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쁨이 충만하여 살 수 있도록 창조함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이유 때문에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어 다시 하늘에서 함께 사시기 위해서는, 적당히 죄를 덮어 주고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고안하셨는지, 또 과연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가져야 하나님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대면하여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제도인 것이다.
성소 뜰과 성소의 영적인 경험
1. 성소 뜰의 경험
성소 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성소 뜰의 경험은 죄를 지은 사람이 희생 제물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이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어지고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는 용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때 그는 성소를 향하여 희생 제물인 어린양을 끌고 가는 것이다. 죄인이 양을 고를 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흠 없고 정결한 것으로 준비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며, 아울러서 죄인의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순전한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지은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슬퍼하는 참된 회개의 제물이 열납되도록 준비하는 일이 성소로 가는 첫 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인이 양을 끌고 오면, 제사장은 먼저 가져온 양이 흠이 없는 제물인 것을 확인하고, 그 죄인이 자기가 끌고 온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한 후, 성소 뜰 번제단 위에서 죄인이 자기 손으로 그 동물을 칼로 죽이게 한다. 명백하게 그것은 자기의 죄가 혹은 우리의 죄가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죽게 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제단에서 그 예식을 행하는 죄인은 그것을 현실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희생 제물의 피를 번제단 주위 단 사면에 뿌리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온 세상에 효험이 있다는 보혈의 능력을 상징하고 또한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 주님의 피는 우리를 구속할 뿐만이 아니라 땅을 저주의 세력에서 구속하여 해방시킨다는 예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죄인이 양 위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한 다음에, 제사장이 이제는 용서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고한다면, 그 죄인이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제사장이 그 양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리고 그를 위하여 속죄하는 중보의 기도를 드린 후에야 속죄함이 있다고 명시한다.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레위기 4:26,35, 5:10,16, 6:7). 그것처럼 속죄는 십자가에서 시작된 것이지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중보 사업을 이루고 계시는 일은 십자가에 못지 않게 중요하며 또한 속죄 사업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식은,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기는 하지만 그저 덮어주시고 잊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죄 없는 구세주가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그 대가는 갈바리이다. 죄 없는 자(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실 정도로 계명을 어긴 죄를 그냥 묵과하실 수가 없으며, 계명을 파하실 수가 없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2. 성소의 경험
성소 뜰에서 희생 제물인 어린양을 통해 죄를 깨끗하게 씻고 거듭난 죄인은 이제 성소 안, 즉 첫째 칸 안으로 들아가서 거듭나고 깨끗하게 된 양심을 계속적으로 성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성소 안에는 금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다.
성소의 기구에서 배우는 교훈
금촛대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 119:105). 성경 스가랴 4장에는 두 감람나무가 그 촛대 양 옆에 서서 금촛대와 연결되어 계속적으로 기름을 공급하고 있는 광경에 대하여 나온다. 금촛대는 우리가 계속적인 말씀의 공급을 받고 성령의 임재하심을 충만히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주의 말씀을 통하여서 성령의 역사를 계속 체험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떡상
떡상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분은 우리가 먹고 사는 생명의 떡인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35,63). 또한 예수님은 참 만나이시다. 만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표상된다. 만나가 밤에 내렸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만나를 구하여 그날을 위한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한다. 만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한다. 그 만나를 먹으면 우리는 소생할 수 있고 모든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므로 우리는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분향단
분향단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시는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성을 상징하는 아카시아 나무에다가 정금을 씌워서 만든 분향단은 법궤나 떡상보다 그 높이가 더 높게 만들어졌다. 그것만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이해할 수가 있다. 주님의 중보의 기도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한 부분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분향단의 향이 성소 안에 자욱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쉐키나 광채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를 힘입어 매일 기도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아가야 한다.
성소의 경험- 구원을 유지하는 삶
구원이란 한 번 받았다고 영원히 자기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울러 우리가 아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을 때 우리 마음속에는 특별한 능력과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매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매일 지켜 나가야만 한다. 이것이 영적으로 성소 첫째 칸에 들어가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주 안에서 거듭날 필요가 있으며, 매일 구원의 경험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이 말씀을 미루어보아서도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이다. 라는 가르침은 성서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우리는 받은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힘입어 매일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의지를 주님께 항상 바쳐야 하며, 또한 계속적인 굴복과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행함과 노력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의지를 굴복시키는 노력이 없이 아무도 구원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성소 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소를 통과하여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종결지어지는 사실을 우리는 성소 제도를 통하여서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은혜가 마련된 것이요, 구원이 준비된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고 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 편에서 믿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요 l4:15,21).
3. 지성소의 경험
지성소는 하나님의 성소의 목적지요, 마지막 결론이다. 성소의 둘째 칸인 지성소 안에는 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고 있었고, 그 영광의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해주었다. 지성소는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곳이었다. 죄인이 성소의 과정들 즉, 성소 뜰의 경험과, 성소 안의 경험들을 통과한 것은 지성소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인 쉐키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 위함이었다. 죄인이 하나님의 광채 앞에 서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고안하신 방법을 따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20-22).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십계명이 있었는데, 그 법궤 위에 시은좌가 있었다. 지성소는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가 다시 에덴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쫓겨나도록 만든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정확하게 조사와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죄 없는 하늘에 들어가서 살기에 안전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정말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며, 죄를 버릴 마음이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신다. 또한 그 죄인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정말 죄를 미워하여 버리기로 작정했는지, 그 증거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죄를 버리며 이기고 있는지에 대하여 심판해 보신다.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의 마음과 품성이 하나님의 계명과 그 정신에 일치하는지에 대하여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있기 전까지 항상 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행함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법을 없이하고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 없이 은혜를 독립적으로 행사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독생자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통하여 인류에게 은혜의 기간을 주신 것이다. 회개하고 그 피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 은혜의 피는 영원한 용서와 생명을 주게 되지만, 그 피를 의지하지 않는 자는 결국에 가서 그 용서의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죄를 다 용서받고,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지을 마음이 없으며,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마지막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영적으로 하나님과 만나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죄를 승리하는 한 무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은 영적으로 지성소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앙: 6부 - 마지막까지 계속되는 성전 건축
옛날 느헤미야 당시에 이루어진 성벽과 성전의 재건축은 구약에 언급된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일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영적인 의미로는 마음 성전의 건축, 그리고 진리와 복음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성전을 재건축한 사실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반적으로 일어나야 할 개혁 사업과 참 신앙의 회복을 상징하며, 또한 우리 마음속에 재건되어야 할 마음의 성소를 건축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다고 우리는 앞의 기사에서 공부했다. 영적인 의미에서 성소의 재건축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터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하며, 그 거룩한 역사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 사업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1). 성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현주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현주소를 잃어버렸다. 하늘을 향하여 막연하게 기도드리지만, 예수께서 하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현주소와 그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사업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창조 후 지금까지 성소를 통하여 인류의 구속 사업을 이루어 오셨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인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마지막 봉사를 끝내고 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성소의 형태를 따라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성소의 형태
원시 성소 : 아담 - 노아 때까지
제단 성소 : 노아 - 모세 때까지
성막 성소 : 모세 - 솔로몬 때까지
성전 성소 : 솔로몬 - 그리스도의 승천까지
하늘 성소 : 그리스도의 승천(AD 31)부터 재림 직전까지
노아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경배를 드렸다. 노아가 쌓았고, 아브라함이 쌓았던 제단 성소 시대가 지나고, 모세 때에 이르러 성막 성소 시대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모세에게 보여 주신 지상 성소의 원형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이었다. 사도 바울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의 말처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속죄를 이루신 후 부활하셔서 하늘 성소로 들어가셔서 지금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하늘 성소에서 하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늘 성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각각 예수님의 임재를 마음에 지니고 사는 영적인 살아 있는 성소(living sanctuary)가 되어야 한다.
2). 이루어져야 하는 영적 개혁운동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반쪽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교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를 그대로 받아 가지고 태어난 정죄받은 죄인이라는 원죄설 과 그러므로 죄를 지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순종이나 변화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은혜 등등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성장과 구원과 영생에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즉, 올바른 복음과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은 올바른 영적인 경험 속에 들어가기 어렵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지막 남은 무리의 사명과 조건을 이루는 일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변질되어 온 복음의 회복을 위한 영적 개혁 사업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매우 필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이 영적인 개혁 운동의 주류를 이룰 사람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온전한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이며, 성경에 나타난 빛을 따라 전진하는, 계속되고 있는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 종교 변천의 역사
그리스도와 사도 시대 이후로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교회는 부조들의 믿음과 신앙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했으며 오류의 암흑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외식적으로만 침례 교인이 된 이방의 남녀 이교도들은 그들의 교리와 행습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 후 교황권이 들어 오면서 AD 538년경에는 교회와 일반인에 대해서 강력한 통제력을 갖게 되었으며, 로마교회가 세상의 권세를 잡게 됨으로 이른바 종교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과 복음까지도 그 진정한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로마 법왕에게로 옮기어 갔다.
법왕은 세상에 있는 저들의 중보자이며, 그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저들은 배웠다. 그리고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 대신에 행함 (미사 드리는 일, 고행, 성지 순례, 연금을 드리는 일)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대치하여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납하심과 구원을 얻기 위하여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증거하는 그분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신실한 남은 백성들을 언제나 소유하고 계셨다(요한 계시록 12:14참조).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증인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성경을 인생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진정한 하나님의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증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해 보면 그 숫자가 극히 적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배도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던 것이다.
2. 종교 개혁 운동의 선구자들
하나님께서는 그 캄캄한 암흑 가운데서도 종교 개혁의 새벽별 들인 하나님의 종들을 소유하고 계셨다. 제일 먼저, 존 위클립은 14세기에 영국에서 활약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일상적인 언어로써 평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공헌한 사람이었다. 위클립은 교회 안의 사제와 감독들 사이에서 횡행되는 악폐와 그들이 행하는 성경 교리에 대한 악용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 대한 종교적 학대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대항했다. 위클립은 개신교의 명확한 교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과 성경의 절대적 확실성 에 대하여 가르쳤다. 위클립은 죽었지만 그가 불붙인 개혁의 불꽃은 다른 개혁자들을 통하여 온 유럽에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존 허스는 보헤미아에서 항거하며 일어났으며 제롬이 그 뒤를 이어 일어섰다. 순교자의 불꽃이 그들을 삼키었으나 개혁의 횃불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옮기어져서 계속 전수되었다.
마틴 루터는 독일에서 일어났는데, 그는 그 당시의 시대적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교회의 개혁과 세상의 계몽을 위한 위대한 사업을 성취시키셨다. 루터를 통해 가장 많은 부분의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 캄캄한 흑암 속에 덮여 있던 진리를 가장 밝은 빛 속으로 끌어내는 일에 성공하였다. 루터와 더불어 이곳 저곳에서 여러 개혁자들이 일어남에 따라서 교황권의 부패상이 점점 더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의해서 어둠 속에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성경의 위대한 진리들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 만을 쳐다보도록 가르침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이 교황권의 오류와 부패를 지적했을 때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파문을 당하거나 화형주의 형벌을 받거나 지옥의 정죄를 받게 되었지만, 종교 개혁 운동은 서서히 전진해 갔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도 종교 개혁들이 일어났으나 국가 지도자들의 주저함과 결단성의 결여 때문에 전적인 개혁이 성취되지 못했다. 전 유럽을 통하여 일어선 칼빈, 파렐, 벌퀸 그리고 다른 여러 개혁자들은 로마교회의 많은 오류들을 들춰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생애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인도했다.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와 경험을 가지는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행위 중심적인 신학과 개혁자들에 대한 반발 때문에, 복음의 믿음과 행함 의 교리의 균형과 중요성이 명확히 이루어지거나 다루어지지는 못했다.
3. 근대의 종교 개혁 운동
1700년대에 이르러, 요한과 찰스웨슬리 형제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르러온다. 는 가르침과 함께 순종과 선한 행실은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가 가져오는 열매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요한 웨슬리는 그의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명백한 설명 27페이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모든 죄와 모든 불의로부터 구원받게 되며, 그래서 그들은 이제 죄를 범하지 않고 악한 생각들과 악한 기질로부터 해방되는 완전에 이르게 된다.
개심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않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받은 빛에 따라서 살게 된다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조직적인 박해가 요한 웨슬리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해서 가해졌다.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는 큰소리로 개혁을 외쳤던 남녀들을 항상 소유해 오셨는데, 그들은 멸망해 가는 세상에 완전한 복음의 기별을 전해주기 위하여 그들의 온 생애를 바친 사람들이었다.
4. 진행되고 있는 종교 개혁 운동
현 기독교 안에는 많은 교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에 나오는 많은 진리와 교리 중, 어떤 한 교리만 중요시하여 그 교리에 맞는 종파를 만들어 놓고 그 교파에 안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마틴 루터 때에 완전히 개혁되고 회복되지 않은 진리의 빛은 종교 개혁을 통해 앞으로 더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한 인간이 진리의 복음을 이해하고 체험하며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과 닮은 사람이 되어 하늘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 사람들은 온 세계와 우주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것인데, 그런 사람들을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남은 무리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계 12:17).
성경은 마지막에 사단이 싸우려고 하는 남은 자손의 특징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그저 머리로만 믿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생애와 성품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거듭났으며 새로운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살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나 있는 큰 정신인 사랑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현재의 영적인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깨닫는 진리의 빛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점진적인 진리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현재 진행 중인 종교 개혁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종교 개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진리의 빛이 온전한 분량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전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시작한 진리의 개혁은 그 후예들에게 와서 중단되어 버렸다. 중단은 후퇴를 뜻하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는 모든 진리가 회복되었을 때, 그리고 교회가 그 모든 진리를 회복한 후에 그 회복된 진리로 인하여 성결케 될 때에 끝나는 것이다. 오늘날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이 있다.
그들은 현재에도 진행 중인 종교 개혁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바로 영적으로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들 , 곧 느헤미야 당시에 성전을 재건축하던 사람들과 같은 건축자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전을 재건축할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마음의 성소를 회복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우리 모두 함께 성전을 재건축 하는 사업에 동참하게 되기를 바란다.
질문과 답변 : 재판이 먼저인가? 형벌이 먼저인가?
지옥에 관한 첫째로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죽자마자 처벌(심판)을 받기 위해 어떤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날에 형벌을 받기 위하여 무덤에 잠자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절도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판사가 십 년 동안 감옥에 쳐 넣으시오 그 후에 재판하겠소! 라고 말했다면 그토록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재판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 재판관조차도 그런 부당한 재판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재판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성경 속에서 주의 깊게 찾아보면 더욱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악한 자의 형벌이 언제까지 보류될까요? 심판 때 까지 입니다. 왜요?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인도 심판을 받기 전에 형벌에 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8,29).
얼마나 확실한 진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각각 생명과 형벌(저주)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무덤 속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그들이 죽은 후 부활할 때까지 어떤 보상이나 형벌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무덤에서 나온 후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심판 날까지 무덤 속에 간직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보다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하다면, 누가복음 14:14에 있는 예수님의 설명을 보시겠습니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또한 마태복음 16:27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서 그때 는 언제입니까? 바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분께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까지, 어떤 보상이나 상급도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 절이 31개나 있는데, 그것들 모두는 토론할 여지가 없이 명백한 말씀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막연하거나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악인이 부활하여,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때까지 무덤 속에서 지켜진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베드로, 다니엘, 욥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를 살펴보았습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악인들은 세상 끝까지 무덤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지옥 형벌은 첫째 죽음 이후에 즉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편지: 오늘도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당신은 아십니까?
우리는 매일 기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세상의 온갖 소용돌이를 벗어나, 고요한 마음의 공간, 그 조용한 벤치에 홀로 앉으면, 문득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생의 혼란스런 문제와 짐들을 내려놓고 비인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문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작은 기적들이 줄지어 서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작지만 큰 기적
하나; 행복한 아침의 기적
아침에 눈을 뜹니다. 나뭇잎에 맺혀 있는 물방울을 보니 어젯밤에 비가 뿌렸나 봅니다. 어둠의 그늘이 조용히 드리우던 지난 밤, 하루의 이야기들을 하나님과 나누다 살며시 잠이 드나 싶었는데, 빗소리도 못들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간 한순간 의식이 들며 다시 눈을 뜹니다. 지난 밤 가슴을 울렸던 슬픈 생각도, 하나님께 드렸어도 밑바닥에 쬐끔 남아돌던 감정의 찌끄러기도, 거듭되는 기도로 정화시키던 욕심의 끄나풀도, 검고 부드러운 밤의 장막 속으로 사라지고, 마치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오듯 새 아침에 새 생명으로 이렇게 눈을 뜨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제와 똑같이 신선하고 달콤한 공기, 목청을 다해 부르는 빨간 새의 노래, 멈추지 않고 달려와 방을 기웃거리는 아침 햇살, 이 모든 것은 오늘도 여전히 내 것입니다. 무의식 속의 깊은 잠으로 들어갔다가 마치 죽음에서 부활하듯 아침이 되면 새로운 의식으로 다시 일어나는 이 눈부신 기적! 매일 되풀이 되는 이 기적이 영적인 기적으로 매일 이어진다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자아의 죽음과 진정한 부활의 기적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둘; 마음에 별이 뜨는 기적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됩니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답답한 일로, 긴 여운을 남기며 귓가에 던져진 말로 마음이 슬픈 하루를 보낸 저녁에는, 밖으로 나가 하늘의 별을 셉니다. 보석처럼 뿌려진 별들을 세다간 얼마전 읽었던 과학 기사를 기억해 냅니다. 과학자들이 우주에 큰 구멍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기사를&. 그 우주 구멍은 60~100억 광년 떨어진 에리자누스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구멍은 지름만 10억 광년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것이며, 이 우주 구멍은 우주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의 흔적이라고 과학자들이 말했다는&. 갑자기, 너무 적은 땅덩이 지구에서 살아서 마음도 지구처럼 비좁아져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끝이 없는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별빛 속에 서 있다가, 문득 마음속에 별이 떠오르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좁은 마음과 편견, 몰이해가 부끄러워지는 밤, 별빛과 함께 사랑을 실어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 일들은 내게 너무나 작은 일이야. 그러나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네게 일어나는 일은 내게 너무나 크단다! 셀 수 없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을 총총하게 채우며 내 마음속에도 사랑의 별이 뜹니다. 이 사랑의 별빛이 지지 않고 내일 하루 종일 마음속에서 비치기를 바래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셋; 수술받는 기적
때때로 베드로처럼 성급하게 행동하고 말하다가 넘어져 코가 크게 깨진 날,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묻고 싶은 그런 날, 회개의 눈물로 무릎을 적시며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기 전에는 양들을 먹이는 데 요구되는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넘어져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부드러운 동정심을 가지고 실수하고 넘어진 사람들 곁에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창피를 당하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을 결코 잊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부인한 죄에 대한 강렬한 슬픔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영혼의 중심을 찌르며 마음을 살피게 하던 세 번의 질문은 예수님의 수술하시는 칼이었습니다. 회복하는 작업은 마음 밑바닥 근원까지 미치지 않으면 결코 철저하게 될 수 없습니다.
죄가 숨어 있는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빛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의 칼로 수술을 받는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일과 사건들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로운 작업 과정입니다. 그 잘려지는 수술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뼈아프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어떤 영혼이 시험의 과정을 다 견디고, 다시는 자아가 살아나지 않고, 시험을 당할 때 받는 상처와 모욕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수술하는 칼은 그 영혼이 참으로 자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살았다는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수술받는 기적이 일어났나요?
넷; 새 마음의 기적
세상에 존재하는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가 아닐까요? 헤어나올 수 없이 무서운 죄에 빠졌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인간의 마음속에 새 마음이 창조되는 것만큼 더 큰 기적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만큼 큰 기적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매일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떠오른 악한 생각이 금방 없어지고 선하고 좋은 생각이 즉시 새롭게 떠오르는 것, 좋지 않은 생각이나 죄악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 얼른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과 생각으로 바꾸어지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중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기적입니다. 다윗은 이 놀라운 창조의 역사를 이해하여 이렇게 기도했지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아무리 망령된 조상의 유전적인 특성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아무리 악한 선천적 기질을 물려받았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마음을 바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똑같이 닮은 생애를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과 계명을 지키기를 배우는 때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 (겔 36:26)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기적이 성취됩니다.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 그리고 품성의 변화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항상 역사하심을 보여 주는 위대한 기적입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보십시오. 마음의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보이지 않던 기적이, 들리지 않던 기적의 소리들이 파도처럼 고동치며 당신의 마음속에 밀려들어올 것입니다. 오늘 당신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