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백제(沸流伯帝)
[비류백제는 언제 어디서 건국되었고 언제 멸망하였는가?]
1).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 경위
「연타발(延陀勃)은 졸본(卒本:註 심양 방면)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註 길고 큰 강이라는 뜻)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註 고대에는 요하나 혼하를 구려하라 불렀다.)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장춘 방면)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註 장춘 방면)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년[註 B.C 25년) 3월이다. 延陀勃 卒本人 來往於南北曷思 而理財致富 至累巨萬 陰助朱蒙 其創基立都之功 居多 後 率衆 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 及高朱蒙聖帝 伐北沃沮納穀五千石 移都訥見 而先自願納 招撫流亡 以勤王事 以功得封於坐原 而年八十歿 多勿三十四年丙寅 春三月也」[註 어떤이는 북 갈사수는 흑굥강으로, 남 갈사수는 요하로 보고 있으나, 환단고기 가섭원부여기 대소왕 조에 대소왕의 동생이 압록곡에서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수 변두리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후 3세 47년만에 고구려에 항복했는데 고구려는 갈사왕에게 두만강 옆에 있는 혼춘을 식읍으로 주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남 갈사수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기묘년(B.C 42년) 3월에 (소서노는) 패(浿).대(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註 혼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 嘗言 曰若嫡子琉璃來 當封爲太子 召西弩 慮將不利於二子 歲己卯三月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 南奔至辰番之間 近海僻地而居之 十年 買田置庄 致富累萬 遠近聞風 來附者衆 北至帶水 西濱大海 半千里之土境 皆其有也 遣人致書于朱蒙帝 願以內附 帝甚悅而奬之 冊號召西弩 爲於瑕羅」 [註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중략..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는 문구는 소서노가 고주몽을 섬긴 이후의 상황을 적은 것인데 순서가 바뀌어 앞쪽에 적혀 있다.]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어하라국)의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 壬寅 而薨太子沸流立 四境不附」 [註 어하라 13년이 B.C 19년이므로, 소서노가 어하라에 책봉된 해(어하라 원년)는 B.C 31년이다.]
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문구에 의하면 비류의 외조부 연타발(延陀勃)은 남북 갈사를 오가며 많은 재물을 모아 고주몽을 도왔고, 비류의 어머니 소서노도 재물로 고주몽을 섬겨 고주몽으로부터 패.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에 책봉받았다. 그런데도 고주몽이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비류는 고주몽이 죽고난 후 근거지인 패대지역에서 즉위하였다.
고주몽이 창업에 공이 많은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 것은, 비류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었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와 결혼한 후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일명 卒本, 심양 방면)에 있던 하부여인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졸본천으로 도망 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우고 분열된 고구려 무리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왕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비류(沸流)는 고주몽을 친아버지처럼 섬기며 입국을 도왔는데도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다가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비류는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라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가 장악한 지역은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때 비류가 사용한 "沸流"라는 칭호는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천제의 아들 즉 지상의 임금을 뜻하며, "流"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 우리민족은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부르고 하늘나라 임금(천제)이라 믿었는데, 지상의 "불"은 천제의 아들인 지상의 임금을 뜻하였다.
2).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경위
「일설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海扶婁)의 서손(庶孫)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니 졸본(卒本)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처음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다. 우태가 죽으매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의 소생자나 같았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세워서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아우 온조더러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있어 무사마귀 모양으로 답답하게 지낼진대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한다.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 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 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三國史記 百濟本紀
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를 정리해 본다.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고 다음이 온조(溫祚)였다.
고주몽은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부여에서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고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이 자기의 소생자와 같았다.
그후 고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유류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註 위에 나오는 미추골(彌鄒忽)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고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미추왕편 참조],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즉 미추골(彌鄒忽)은 어떤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천제(天帝)의 아들이 사는 고을 즉 수도(首都)라는 뜻이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요동지역에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의 미추골은 패(浿).대(帶)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비류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일시 수도로 사용한 미추골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조금 다르게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의 인주(今仁州) 즉 인천으로 적혀 있고, 삼국유사에는 그냥 인주(仁州)로 적혀 있는데, 인주가 인천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아산만 인주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천부(仁川府)는 고려 인종 원년에 설치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아산현(牙山縣)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주(仁州)는 고려 초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이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인주가 인천이라고 적혀 있다.
「미추골(彌鄒忽)은 지금의 인천이다 세속에 전하여 오기를 문학산 위에 비류성(沸流城)의 터가 있고 성문의 문짝 판자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성 안에 비류정(沸流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 여지승람에 실리지 않아 한스럽다.」 東史綱目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미추골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이다. 지금의 인천부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남산(南山)이라 하고 또 일명 문학산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성이 있는데, 대대로 비류왕(沸流王)이 도읍했던 곳이라 전해온다. 왕이 노하여 분개하다 죽은 까닭에 애분성이라고도 이름하였다. 인천부 남쪽 10리에 해평(海坪)이 있고, 그 위에 큰 무덤이 있는데, 담장을 둘렀던 옛 자취가 완연하다. 돌로 만든 사람이 넘어져 엎드러진 것이 매우 큰데, 세속에 전하기를 미추왕의 묘(墓)라고 한다.」 增補文獻備考]
3).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멸망경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백제가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정확한 연도는 적혀 있지 않다.
「전략..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 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其 臣民皆歸於慰禮」 三國史記 百濟本紀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백제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七年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三國史記 百濟本紀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二年 百濟民一千餘戶 來投」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이 무렵은 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상류 지방의 양맥(梁貊)과 요양 서쪽 방면의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A.D 19년에 요동의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 무리가 고구려 지역으로 도망가므로써, 패.대 지역이 텅 비었다는 뜻이다.
일부 사학자는 위 백제를 온조백제로 보고 당시 온조백제의 북쪽인 황해도 지방과 평안도 지방에는 최리(崔理) 나라(樂浪)가, 함경도 지방에는 동옥저(東沃沮)가, 강원도 지방에는 동예(東濊)가 각 있었으므로, 백제인들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위 문구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비류백제, 온조백제, 구태백제의 역사가 함께 적혀 있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다. 또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는 이때 멸망하지 않고 그 후에도 온조백제 남쪽에 존재하면서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였다가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때 일본열도로 쫓겨갔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북사(北史) 등에 의하면 요서(遼西)나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동이(東夷)의 강국이 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비류가 세운 나라는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패.대 지역이 텅 비자 비류는 한반도에서 터전을 잡으려고 남은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미추골(삼국유사에는 '今仁州'로 적혀 있다)에 일시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온조가 홍성 금마 마한을 멸망시키고 전의 마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비류의 정착을 용납하지 않자 비류는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다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에게 귀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