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5. 1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는 말이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됐을 때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자는 맥락에서 비유적으로 쓰이는 표현이지만, 틀니조차 없던 옛날에는 말 그대로 이가 빠진 뒤에는 잇몸으로 씹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먹는 게 부실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잇몸 덕분에 제한된 음식이나마 씹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물론 지금은 임플란트 덕분에 갈비도 뜯을 수 있게 됐지만.
그런데 시각은 얘기가 다르다. 눈이 없으면 또는 기능을 상실하면 부실하게나마 이를 대신할 신체기관이나 조직이 없다. 수정체가 탁해져 볼 수 없는 백내장은 인공 수정체로 바꿔 시력을 되찾을 수 있지만, 망막이나 시신경이 손상돼 생긴 실명은 약물이나 수술로 되돌릴 수 없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바로 인공시각 기술이다. 사실 보는 건 눈이 아니라 뇌이기 때문에 시각 정보를 감지하는 눈을 대신하는 시스템을 뇌의 시각피질에 직접 연결하면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술지 ‘셀’ 5월 14일자에는 인공시각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을 담은 논문이 실렸다. 이를 계기로 인공시각의 세계를 들여다보자.
▲ 인공시각 시스템은 1960년대 시각피질 보철이 먼저 개발됐지만 효과가 낮아 2000년대 망막 보철로 넘어갔고 2011년 망막 보철 시스템인 아르거스 Ⅱ가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망막 보철도 실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밝혀져 최근 다시 시각피질 보철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다. 왼쪽은 안구 안에 넣는 아르거스 Ⅱ이고 오른쪽은 전극 60개로 이뤄진 임플란트(array)가 심어진 망막의 모습이다. / ‘Expert Rev Med Devices’ 제공
50여 년 전 처음 시도돼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실명인 사람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아이디어는 거의 100년 전에 나왔다. 실명인 사람을 대상으로 뇌의 뒤쪽(후두엽)에 있는 시각피질에 전극을 대고 전류를 흘려보내자 “불빛이 보인다”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자극하는 시각피질의 영역에 따라 공간적으로 특정 영역에서 불빛이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자들은 이 불빛을 ‘포스핀(phosphene)’이라고 불렀다.
동물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시각피질에는 망막표면을 반영하는 2차원적 ‘망막지도(retinotopy)’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좌우상하가 뒤바뀐 배치로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오른쪽 위에서 들어오는 빛 정보는 왼쪽 시각피질의 아래 지점으로 연결되는 식이다. 따라서 시각피질에 카메라 CCD처럼 전극 여러 개가 2차원으로 배열된 조각을 붙인 뒤 외부 시각 정보를 담은 신호를 보낸다면 시각피질은 이를 해석해 시각 패턴을 재구성해 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 런던대의 생리학자 자일스 브린들리는 1960년대 최초로 시력을 잃을 사람들의 뇌(시각피질 표면)에 전극판을 심어 이들에게 시각을 되찾아주려고 시도했다. 이런 유형을 ‘시각피질 보철(visual cortical prosthesis)’이라고 부른다. 전극에 전류를 흘려보내자 이들은 빛이 번쩍이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사물의 형태나 글자를 식별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 시각피질에는 망막표면을 반영하는 2차원적 ‘망막지도(retinotopy)’가 존재한다. 그림은 뇌의 좌우반구를 뒤쪽에서 펼친 상태로, 후두엽 시각피질의 망막지도가 대상의 좌우상하가 뒤바뀐 배치임을 알 수 있다. / ‘계산신경과학의 경계’ 제공.
그 뒤 미국의 괴짜 과학자 윌리엄 도벨이 바톤을 이어받아 한 세대에 걸쳐 시각피질 보철 연구에 매진했고 2000년대 초 그의 시스템을 이식받은 시각장애인이 실내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을 갖게 되자 큰 화제가 됐지만 열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장치의 수명이 짧은 데다 막상 실생활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몇몇 과학자들은 시각피질 보철이 시기상조라고 보고 관심을 망막 보철(retinal prosthesis)로 옮겼다. 전극으로 시각피질을 직접 자극하는 대신 망막에 연결된 신경을 자극해 시각정보를 뇌로 보내 처리하게 하는 방식이다. 뇌의 입장에서는 좀 더 정교한 방식이지만 망막색소변성증 같은 망막 질환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
놀랍게도 망막 보철은 2011년 승인을 받아(유럽) 상용화에 성공했다. 눈의 망막 안쪽에 전극 60개(6×10 배열)로 이뤄진 손톱만한 임플란트를 심어 낮은 해상도로나마 ‘볼 수 있게’ 해주는, 미국의 세컨드사이트사가 만든 ‘아르거스(Argus) Ⅱ’라는 제품이다. 참고로 아르고스(Argos. 영어로는 Argus)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눈이 100개인 거인이다. 2년 뒤 전극 1520개(38×40 배열)로 이뤄진 알파-IMS라는, 독일 회사의 망막 보철도 나왔다. 해상도는 화소 수(전극 수)에 비례하므로 알파-IMS를 이식받은 사람은 얼굴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을 갖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망막 보철이 카메라의 CCD처럼 화소 수에 비례해 해상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500개가 넘는 전극에서 정보를 보냄에도 알파-IMS를 이식받은 사람 10명 가운데 4명만이 큰 글씨를 겨우 알아보는 수준이었고 단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에 불과했다. 망막에 2차원적으로 배열된 전극에서 패턴을 지닌 정보(자극)를 보내더라도 시각피질에서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망막 보철에 대한 열기가 식었고(장치 구입비에 시술비를 포함하면 약 2억 원이 든다) 세컨드사이트사는 지난해 아르거스 Ⅱ 생산을 중단하고 다시 관심을 시각피질 보철로 돌리고 있다. 소형화 기술과 무선 기술이 발전하면서 좀 더 정밀하고 편리한 시각피질 보철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전극 자극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으로는 보는 능력을 향상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촉각과 청각 현상에서 영감 받아
▲ 미국 베일러의대 연구팀은 최근 촉각과 청각에서 영감을 받은 소프트웨어적인 기술을 적용한 시각피질 보철 시스템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즉 손바닥에 어떤 패턴(여기서는 ‘Z’)에 대한 정보를 줄 때 점을 동시에 누르면(위 왼쪽 ‘정적 촉각 자극’) 형태를 파악할 수 없지만 순차적으로 누르면(위 오른쪽 ‘동적 촉각 자극’)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각피질에 부착한 전극에 전류를 동시에 흘려보내면(아래 왼쪽 ‘정적 전기 자극’) 포스핀만 커질 뿐이지만 순차적으로 흘려보내며 가상 전극까지 만든다면(아래 오른쪽 ‘동적 전류 조정’) 글자를 쉽게 ‘볼 수’ 있다. / 셀 제공
미국 베일러의대 대니얼 요셔 교수팀은 차세대 시각피질 보철을 개발하기 위해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방향에서 접근했다. 전극 수를 늘려 해상도를 높이는 대신(그렇게 되지도 않지만) 전극에 자극을 주는 방식을 바꿔 시각피질이 제대로 반응하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두 가지 방식을 개발했는데, 하나는 촉각에서 영감을 얻은 ‘빠른 연속 자극(rapid successive stimulation)’이다. 손바닥에 점 10개를 알파벳 ‘Z’에 따라 찍은 뒤 이를 동시에 자극하면 우리는 ‘Z’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신 짧은 시간 간격으로 Z를 쓸 때와 같은 순서로 점들을 자극하면 ‘Z’임을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은 전극으로 시각피질을 자극할 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고 실험한 결과 정말 그런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동시에 자극했을 때는 형태가 ‘보이는’ 대신 개별 포스핀들이 합쳐져 커다란 불빛 덩어리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시각피질 보철의 경우는 시각보다 촉각에 가깝게 정보를 처리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보청기 연구에서 영감을 얻은 ‘전류 조종(current steering)’으로 구현한 ‘가상 포스핀(virtual phosphene)’으로 해상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보청기(인공 달팽이관) 역시 주파수가 다른 전극을 많이 넣을수록 소리 해상도가 높아지지만 장치가 복잡해지고 시술도 어려워지는 게 문제다. 그런데 1990년대 과학자들은 주파수가 다른 두 전극에 흘려보내는 전류의 비율을 달리하면 그 중간 어디쯤의 주파수를 지닌 전극이 자극을 주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극 사이의 전류비를 조절하면 그 사이에 여러 가상 전극이 있는 효과를 내 해상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원리를 시각피질 보철에도 적용해봤다. 전극 24개(4×6 배열)로 이뤄진 전극판에서 ‘Z’를 구현하기 위해 전극 10개에 순차적으로 전류를 흘려보낼 때 전극의 전류가 서서히 올라가다 내려가게 해 다음 전극의 전류의 흐름과 어느 정도 겹치게 하면 두 전극 사이 공간에 가상 전극이 생성되는 효과가 나면서 해상도가 높아져 좀 더 선명하게 ‘Z’를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정상 시력인 뇌전증 환자와 시력을 잃은 사람을 대상으로 위의 시스템을 테스트해 기존의 시각보철 시스템보다 훨씬 뛰어난 결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이번 실험에서 시각장애인 한 사람의 시각피질에 장착한 전극 60개짜리 보철 장치 시제품인 ‘오리온(Orion)’을 만들어 공급한 회사가 바로 세컨드사이트사다.
과거 인공시각 시스템에 대한 얘기들은 하나같이 해상력(전극 수)이 관건일 뿐 보철 시스템 자체는 완성된 기술인 것처럼 묘사했다. 필자 역시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논문을 통해 현실은 그렇게 장밋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시각을 잃은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일상에 도움이 되는 시각 정보를 얻은 것일 뿐 이를 어떤 식으로 얻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정상 시각의 메커니즘을 재현하는 방식이 효과가 낮다면 여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정통 시각 연구결과들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주변으로 ‘시야’를 넓혀 촉각과 청각 연구결과에서 실마리를 찾은 연구자들의 발상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