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나를 영접하는 자는 Date 2011. 9. 4
Text Mt 10,40-42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 요즘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지요? 일본에서는 한 TV 방송국이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방영한다고 그 방송국을 대하여 데모까지 한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 재미있는 드라마의 중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사랑 이야기’입니다. 모두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얘기이긴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사랑도 참 다양하지요? 불굴의 며느리는 한 집안의 혼자된 며느리들이 다른 한 집안의 아들들을 사랑한다는 얘기지요. 하여간 죄다 사랑 얘기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친구 수백, 수천 명 보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인간입니다. 온 대한민국 사람이 다 내 친구라 해도 그 친구들 우정 모두보다 한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사랑의 힘이 더 큽니다. 왜 그런가 하고 성경을 보니까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궁극적으로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얘기입니다. 주님도 당신의 성도들을 보호도 하시고, 양육도 하시며, 인도하시고 가르치시지만, 무엇보다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하십니다. 오늘, 그리고 9월 교회생활을 통하여 충만한 사랑을 확인하고 아낌없이 마음껏 사랑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2.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해주신 말씀 일부입니다. 너희들을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너희가 아닌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제자라는 이름으로 영접한다면 그도 제자의 상을 잃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과 동격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말이 있습니다. 왕과 백성, 아버지와 자녀, 목자와 양, 스승과 제자, 신랑과 신부 등입니다. 이 여러 표현 중에 가장 높은 단계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왕과 백성에게는 보호와 충성이, 부모와 자녀에게는 양육과 공경이, 목자와 양에게는 인도와 순종이, 스승과 제자에게는 가르침과 존경이 서로에게 요구된다면, 신랑과 신부는 공히 서로에게 ‘사랑’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성도들에게서 왕으로 충성을 받으시고, 아버지로서 공경을 받으시며, 목자로서의 순종, 스승으로서의 존경도 좋지만 궁극적으로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바로 신랑으로서 신부에게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인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을 성도에게 주시면서, 주님도 성도들에게 신부가 신랑에게 하는 것과 같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셔서 자리를 잡고 앉으셨는데 그 동네에서 죄를 지으며 사는 한 여성이 들어와서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으며 가지고 온 옥합을 열어 향유를 그 발에 붓기를 계속했습니다. 초청한 그 바리새인은 속으로 ‘이 사람이 진짜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 행동을 금했을 것인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리아도 비슷한 행동을 했는데, 그 때 가룟 유다는 ‘저 비싼 향유를 돈 받고 팔면 족히 3천만 원은 받을 수 있는데 그 돈으로 수십 수백 명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터인데’ 하면서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이 여자의 행동을 제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섬김을 즐거이 받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제자를 꾸짖으시고 초청자 바리새인에게는 충고를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충성과 헌신, 구제와 봉사, 그것들보다 내가 더욱 간절히 원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눅7,36ff 요12,1ff)
마22,34ff에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 묻는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온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도, 천사의 말을 하는 신령함도, 아주 치밀하고 똑똑한 업무처리능력도, 산을 옮길만한 대단한 믿음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사랑하고 싶어 하시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제자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주님은 사랑을 원하실까요? 요일4,18에 쓰기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을 쫓아내니, 평안과 행복이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싶어 하시고 사랑 받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이 사랑하는 믿음이 되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3. 둘째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도 또 한 가지의 놀라운 비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교역자보건주일이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도 하지만 평소에 주의 종을 잘 접대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괜히 목사가 철면피처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에게 잘 하라고 하는 얘기로만 들으신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성경에 사람이 하나님께 복 받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만, 하나님의 사람을 잘 접대하여 복을 받은 얘기보다 더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얘기도 없습니다.
먼저 창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잘 대접하고서 평생소원이었던 아들을 낳는 복을 받았고, 유황불로 멸망하는 소돔 고모라에서 조카 롯과 그의 식구들을 살아남게 하는 복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삼상1장에서는 한나가 자기 심정도 몰라주는 제사장이었지만,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믿어 순종하여,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던 평생불행에서 해방되는 복을 받았음을 또한 보여줍니다. 다윗은 그렇게도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을 도리어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단지 그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왕으로 대접을 하였더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요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주의 종을 잘 대접하여 드라마틱하게 복 받은 사람은 왕상17장에 나오는 사르밧 여인입니다. 온 나라가 몇 년 동안 연속 기근이 들어 여기저기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을 때 사르밧에 아들 하나를 데리고 근근히 살던 여인이 있었지요. 이 가난한 여인은 더 이상 캐 먹을 풀뿌리도 없고 나무껍질도 없어 마지막 한 끼를 먹고 죽기를 기다리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여인에게 선지자 엘리야가 왔습니다. 배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는 것이었지요. 한 끼 양식밖에 없다고 하는데도 엘리야는 그 남은 한 끼 양식을 자기를 위해 준비해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남은 한 끼 양식을 달라니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입이 막혀 말이 안 나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르밧 여인은 비록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시골 아낙네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죽으려 하던 양식으로 선지자를 대접했습니다. 마지막 양식을 먹어치우는 선지자를 보면서 어린 아들이 칭얼대는 소리를 속으로 삼키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는데, 죽으려고 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3년 반 동안의 기근이 다 끝날 때가지, 다시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날까지 가루통에 가루가,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 뒤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을 주의 종으로 예우하고 대접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복 받는 방법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깨달아지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자꾸 대접, 대접 하는데 뭘 어떻게 대접합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역자’로 대하고 예우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나에게 알려주는 ‘선지자’로 인정하고 예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일하는 의인으로 모시고 예우하라는 것입니다. 또 뭐죠? 주님을 멘토로 삼고 주님처럼 살고자 하는 ‘제자’인 줄 알고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려고 애쓰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함께 살 때 가르쳤습니다. 특별한 날이 되면 꼭 날 지도해 주시는 교회학교 선생님, 전도사님, 부목사님에게 정성껏 선물을 마련하여 드리라고, 혼자하기가 애들한테 눈치 보이면 몇 명이 함께 돈을 모아서라도 꼭 드리라고.
대접이 무엇입니까? 고전4,1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전16,18 말씀처럼 마음을 시원케 하여주고 그 수고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빌2,25과 빌4,16 말씀처럼 쓸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히13,17 말씀처럼 즐거움으로 일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좋은 차를 사주지 못하면 “더 좋은 차를 마련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얼른 여유가 생겨서 좋은 차를 타게 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돈이 없어 자녀교육비를 세우지 못하게 됐으면, “어려운 것 뻔히 알지만 이 정도밖에 못했습니다. 이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뭐라합니까? 형편사정 뻔히 다 아는데... 절대로 “알아서 하이소. 장학금 받아서 학비 조달하이소” “봉고 차 타고 다니는 목사님이 보기 좋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복을 깎아먹어서는 안 되겠지요.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