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죄와 칭의와 참 생명
죄에 대한 오해
나는 한동안 '의'를 철저하게 '도덕적 완전'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 어느 교인이 내게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거침없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싶다"는 뜻으로 "완벽한 안식일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었다. 심지어 그 당시 난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신앙적인 생각과 일을 하느냐에 따라 의가 양적으로 증가한다는 설교를 하기도 했었다. 당시의 내 대답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었다. 지금 누군가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나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의에 대한 당시의 이와 같은 이해의 결과로 난 자연히 '죄'도 '비도덕적 행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상 죄에 대한 이런 오해는 아무 공로도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예수 믿음을 근거로 의롭게 여긴다는 성서적 칭의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바르게 이해해야 의와 구원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전도자 무디(Moody)는 구덩이에 빠진 양의 비유로 다음과 같이 적절히 설명하였다.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알아야 건져내 준 것을 감사할 줄 안다.” 그의 말은 죄의 실상을 깨달은 자만이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의 넓이와 깊이
죄는 어느 한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 죄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단적인 증거가 바로 죽음이다. 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은 죄의 궁극적 결과이며 결정적인증상이다. 죄는 인간의 생명을 삼켜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에도"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히 2:15) 한다.
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겨울 방학의 어느 몹시도 추운 일요일 아침이었다. 고향인 강릉 내곡동 집에 가 있던 나는 학생반 모임을 위해 교회에 가려고 집 앞의 남대천을 가로지른 시멘트 보 위를 건너고 있었다. 차가운 날씨에 바람이 불어 보 위로 물이 넘쳐 얇게 얼어 몹시 미끄러웠다. 조심스레 건너는데 맞은 편에서 엄마와 아이가 건너오고 있었다. 마주 보며 건너는데 어린아이가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면서 물에 빠졌다. 아이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아이는 벌써 물살을 타고 보 아래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이 엄마와 함께 그를 안고 미친 듯이 바로 앞에 있는 강릉 도립 병원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심장마비로 숨져 있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긴 일이었다. 병원에서 나온 나도 충격으로 허공을 걷는 듯했다.
그렇게 교회에 도착한 나는 겨우 진정하며 학생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선생님 우리 오빠 죽었어요." 며칠 전 중학교를 졸업한 기준이란 학생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눈이 어지럽다며 안경을 새로 맞추어 쓴 건장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며칠 사이에 급성 뇌종양으로 숨진 것이었다. 연락을 듣고 온 어른들과 그의 집으로 갔다. 그가 누워 있던 방의 벽에 구멍이 나 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자 벽을 손으로 친 것이다. 난처음으로 염을 하는 장로님을 돕기 위해 시신을 만졌다. 너무 가난하여 수의를 마련할 수 없어 그의 태권도복을 갈아 입혔다.
두 사건이 모두 하루 사이에 생긴 일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한동안, 길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시체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난 꽤 오랫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무슨 일을 해도 죽음이 떠오르고, 특히 어디서든 자리에
눕게 되면 언제나 사람이 이렇게 죽을 것이란 생각이 떠올라 여러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이런 엄청난 죄의 세력을 인간이 어찌 자신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처음부터 죄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뿐만 아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죄의 영향력은 참으로 엄청나다. 그것은 생각의 가장 깊은 곳까지 장악하고 있다. 죄의 침투력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도저히 인간의 의지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자연인은 내버려 두면 자연적으로 죄로 기운다. 교만과 이기심이라는 죄의 양상은 모든 인간을 사로잡고 있다. 아무리 율법을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탐내지 말라"는 열번째 계명에 가서 걸리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를 찾아와 당당하게 "내가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하던 부자 법관도 여기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마 19:16~22).
믿음으로 얻는 칭의
물론 독자들은 오해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 말은 결코 죄의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선하게 되기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아니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히 12:4).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런 노력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에 의하면 죄는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대죄나 소죄(小)가 없다. 죄는 그냥 죄다. 그러나 죄를 양적으로 계산하여 100이라 치고 그 100을 1로 줄였다 하더라도 그는 그 1 때문에 여전히 죄인이다. 그런데 인간은 결코 죄의 수량을 0으로 만들 수가 없다. 어차피 자기중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친 목소리로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소위 영적인 사람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명분은 늘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듣고 보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내가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교만이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일 뿐 다 마찬가지이다. 나는 심지어 성녀(聖女)라 불리던 테레사 수녀도 교만과 이기심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절대로 믿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설사 재림교인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존경할 사람은 있다. 그러나 스스로 죄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한 길밖에 없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스스로 의로운 유일한 사람이며, 동시에 그 의를 십자가를 통해 인류에게 나누어 주신 유일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의 모든 행위, 심지어 그것이 선행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가 없음을 알고 철저하게 예수 안에서 의를 얻고자 그를 의지하는 것을 곧 믿음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고전 12:3)다. 이렇게 인간이 이루는 선행은 전혀 무의미하고,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그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붙잡는 사람을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근거로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라고 한다.
의의 삯은 생명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이 사실을 반대로 말하면 “의의 삯은 생명이다."그러나 인간의 의는 결코 인간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인간은 그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의는 죽음을 이기신 분에게서 와야 한다. 그가 이름 자체가 '구원'이신 예수이시다. 이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참종교는 인간에게 '참 생명'을 제공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단순히 죽을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도덕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생명 종교'이다. 우리가 예수를 메시아(Messiah)로 믿는 것은 그가 위대한 교훈을 주신 '인류의 스승이나 거룩한 생애를 사신 성자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마침내 썩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생명이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마련하신 '참 생명의 길'이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것을 믿는 신앙이다.
참된 의는 '죄를 해결한 의'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께만 있는 의로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인간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때 사람에게 '참 생명'을 준다. 이 의를 받아들이고 생명의 질을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 혹은 '중생(生)'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간단하고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인간에게 완전한 생명을 주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인간의 공로도 가미될 수 없다. 인간은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이 예수의 공로로 인하여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 '참 생명 회복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