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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흥유(羅興儒) 연보
나흥유(羅興儒, 1316년경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 생~1390년 고려 공양왕(恭讓王) 2년 몰; 향년 75세)
고려의 학자
고려 유학의 지도자
―중순당에서 제자 교육
고려 후기 문신•무신
―고려 후기 나주 출신 무신(武臣)이나 장군(將軍)으로는 고려 문신•무신 저헌(樗軒) 나공언(羅公彦), 변란의 공신 나광만(羅光滿), 서천 진포 대첩의 해도원수 나세(羅世) 장군, 일본과 원나라 원정의 나유(羅裕) 대장군, 고려 무신 나익희(羅益禧), 고려 무신 나흥유(羅興儒) 등이 있다.
고려 공민왕조 당대의 유명한 문인(文人)
―한시인이자 옛 이야기꾼
―역사가, 저술가, 지도 제작가
―공민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고 고속 승진한 고려의 관료
―전대와 선대의 옛 사적(史籍)을 잘 알고 있고 이해하기 쉽게 서술한다는 평가를 받음.
우리나라 개벽부터의 왕조사와 국경 변천사를 기술한 인물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
―이전에도 일본으로의 고려 사신의 파견이 있었으나, 100여 년 단절된 일본과의 수교를 기준으로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라고 일컫는다.
―첫 통신사로 일본에서 구금이 되었으나 무사히 귀국했으며, 일본 막부로부터 왜구를 금지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통신사
고려 초대 통신사
고려-일본 최초의 수교(修交) 공훈 공신
―나흥유가 일본 통신사 친선 사절로 다녀온 이후 고려와 일본 사이에 최초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와 일본 외교 사상 최초의 수교 공신
―조선 시대 김건서(金健瑞)의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권5 「통신사행」(通信使行)은 우리나라가 일본과 1375년 홍무(洪武) 초 고려 후기 신우(우왕) 원년 2월 10일 수호(修好)했다고 기록했다(“日本於洪武初與我修好”).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과 고려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일본 외교의 충신 3인으로 평가
―일본 파견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로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최초의 외교적 국교 수호(修好)로 평가(김건서, 『증정교린지』)
우리나라 외교의 아버지
『고려사』(高麗史) 권114 열전 권27 「나흥유 전」의 주인공
―고려사 기록상 최초의 통신사(친선 사절)
―스스로 일본 통신사를 자청해서 일본으로 간 최초의 통신사
―해학(諧謔)에 능했고 민첩했으며 골상이 가벼워서,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나이를 150세라고 거짓말을 해서 유명해졌으며, 700여 년 후에는 일본이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가 되었다.
고려 후기 저명한 지도 제작자
―나흥유 이전의 지도: 고구려 요동성총 벽화 「요동성도」, 『백제지리지』(『삼국유사』 인용),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여행지리지, 작자 미상 「고려도」, 『동문선』 「삼국도후서」
―나흥유 이후의 지도: 나흥유의 『고려 지도』와 중국 지도,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 조선 『고려사』 지리지, 조선 태종조 김사형•이무•이회 공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최초의 세계 지도), 이회의 「팔도도」, 세종조 정척의 「조선국회도」•「양계지도」, 양성지의 「황극치평도」(행정 지도), 영종조 정상기의 「동국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 조선 지도의 백미)•「대동여지전도」•「해좌전도」•「도리도표」 조선전도
고려 지도 『5도양계도』의 저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이전 고려 지도의 저자
―김정호의 선배 지도 제작자
우리나라 지도의 선구자
―우리나라 개벽 이래 왕조의 흥망사와 국경의 변천사를 기술
―고려 지도와 중국 지도를 제작하고, “옛적 사적을 좋아하고 학문이 훌륭한 군자는 이것을 보면 가슴 안에 또 하나의 천지가 생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려사』 권114 「나흥유 열전」).
―나흥유의 고려 지도 「5도양계도」 이전에는 작자 미상의 「고려도」와 「삼국도」가 있었다.
―공민왕조 나흥유의 「5도양계도」는 이후 조선 태조조 이첨의 「삼국도」, 조선 태종조 이회의 「팔도도」, 그리고 최초의 세계 지도 「역대제왕혼일강리도」의 우리나라 지도의 기본도로 영향을 끼쳤다.
고려 최초의 생전 시문집 『중순당집』(中順堂集)의 저자
고려의 대표적인 건축가
고려 멸망기 파사계 1대 파사계주
고려 유학 지도자•고려의 학자
―서당 중순당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해 과거에 급제시킨 고려 유학의 지도자
고려 후기 공민왕조~우왕조 판서공 문신•장군
중랑장•종5품 영전도감판관•예의총랑•사재령•종4품 사농소경•내부령•종3품 중정대부•3품 직질•일본 통신사•정3품 판전객시사(판전사 지리박사)•육자표 공신(고려-일본 재수교 공훈 공신)•육조 상서 역임.
정4품 고려 무신 장군•정3품 판전객시사•육자표 공신•정2품 육조 상서
금성인(錦城人)
본관 금성(錦城) 금성 나(羅) 씨 15대손
금성 나 씨 시조 나총례(羅聰禮)의 15세손
조부 봉순대부 나천규
—금성 나(羅) 씨 13대손
부 고려생원•밀직부호군 나락
—금성 나(羅) 씨 14대손
—전라도 금성 출신
자녀 2남
1남 판전객시사•판서공 나흥유
2남 판관 나계유(羅啓儒)
본인 정3품 판전객시사•고려공신•판서 나흥유
—금성 나(羅) 씨 15대손
—고려 공민왕조 과거 급제•정3품 특별 승직
자호(自號) 우수(迂叟)
―나주 교외 남쪽 금남(錦南)의 우수라고 불림.
—“금남의 우수”라는 뜻의 금남우수(錦南迂叟)가 호처럼 쓰이거나 시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당호(堂號) 중순당(中順堂)
―재야 학자 나흥유가 20대~30대 젊은 시절 과거 급제 전에 운영하던 자신의 학당의 명칭에서 유래
―생전 간행 시문집 『중순당집』(中順堂集)이 고려의 대표적인 문집으로 알려져 있다.
시호(諡號) 노생(老生, 또는 이름)
―전대의 사적을 옛이야기로 전하고 기술해서 왕이 나흥유를 총애해 생전에 붙인 이름(『고려사』 권114 「나흥유 열전」)
자(아들) 조선 이조참의 나득경
—금성 나(羅) 씨 16대손
—조선 태조 계유년 문과 과거 급제
남동생 고려 판관 나계유
—금성 나(羅) 씨 15대손
—판전객시사 나흥유의 남동생
—고려 공민왕조 과거 급제
—나흥유의 남동생 나계유의 후손은 금성 나 씨 21대손까지 승계되었다.
남동생 나계유의 자 조선 종7품 직장 나득의
—금성 나(羅) 씨 16대손
남동생 나계유의 손자 조선 흥해부사 나진강
—금성 나(羅) 씨 17대손
남동생 나계유의 증손자 조선 정6품 사간원정언 나유수
—조선 태종 무자년 문과 과거 급제
—금성 나(羅) 씨 18대손
금성 나 씨 15대손 판서공 나흥유의 후손 집성촌
—전라도 금성 출신으로, 고려 초기부터 고려 수도 송악 부근에 거주하다가, 중부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조선 초기에 충청도 이남으로 이동했고, 조선 중기에 이북 지역으로 진출했다. 현재는 이북 지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안남도 용강, 맹산, 초산, 증산 지역에 집성촌 형성
—남동생 고려 판관 나계유의 후손들은 21대손까지 이어졌고, 그 이후의 후손들은 이북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계주 후계자
광산(光山) 김(金) 씨 김종연(金宗衍) 장군
―1대 파사계주 나흥유 사후 파사계 2대 파사계주
―전라도절제사 출신으로 이성계 살해 모의에 연루되어 옥사
1316년경 1세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 전남 나주(羅州) 남쪽 교외 향리 금남(錦南)에서 금성(錦城) 나(羅) 씨 15세손으로 출생
―평소에 금남의 우수(迂叟)라고 불렸다는 기록으로, 전남 나주 남쪽 교외 금남(현 나주시 금남동)을 출생지 및 향리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후에는 경기도 여주 부근에서 학당을 열고 제자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1375년 일본 통신사 파견 당시 나 판서의 나이를 일부는 60세에 가까웠다고 하기도 하고, 일부는 60여 세로 60세를 넘었다고 하기도 한다.
—나흥유의 후손들이 이북 지역 평안남도에 집성촌을 형성한 것으로 말년에 북한 지역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
1336년~1346년 충숙왕 복위 4년~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 21세~31세 재야 학자. 젊은 시절 경사(經史)를 이루었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학교를 열어 후진 양성
―왕의 총애를 받았고, 한시에 능했으며, 사서에 통달해서, 문신 정3품 판전객시사와 정2품 판서에 오름.
1351년~1373년 36세~58세 고려 공민왕(恭愍王) 1년~공민왕 22년 중랑장, 영전도감판관, 예의총랑 역임
—공민왕조에 남동생 나계유와 같이 과거에 급제했으며, 고려 문신으로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영전도감판관으로 공사 감독을 잘해서 예의총랑 승진
―목반룡(木蟠龍)을 만들고 전문(殿門)의 장식 공사 감독
사재령, 사농소경 승진
―고려 지도 「5도양계도」와 중국 지도 제작
―왕조 흥망사와 국토의 역사를 연혁으로 서술
―고사(古史)에 밝아 옛 이야기꾼으로 총애를 받음.
1366년 51세 공민왕 15년 중랑장. 공사 감독으로 손에 깃대를 쥐고 돌 위에 서서 깃대를 흔들며 소리쳐서 공사를 지휘하고, 목반룡(木蟠龍)을 기교 있게 잘 만들어 여러 차례 승진(『동사강목』(東史綱目) 第15上). 3품 직질(職秩) 임명
―공민왕조에 나주 남쪽 교외 금남(錦南)의 우수 나흥유가 현릉(玄陵)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받고 연구(聯句)를 지어 3품 직질로 승진하자, 고려 신하들과 사대부들이 나 판서를 축하하며 90편의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1373년 58세 공민왕 22년 고려 수군(水軍) 창설
1374년 59세 공민왕 23년 6월 내부령. 사헌부에서 영전도감판관 재임 시 재목 횡령으로 탄핵을 받고 파면
1375년 60세 고려 우왕(禑王) 1년 2월 판전객시사 복귀
1375년 2월~1376년 10월까지 60세~61세 우왕 1년~우왕 2년 1년 8개월간 일본 통신사 친선 사절 파견
1375년 60세 우왕 1년 2월 통신사. 나흥유가 일본과의 화친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일본으로 통신사로 파견됨.
―일본 패가대(覇家臺) 박다(博多)에 도착해서 첩자로 오인되어 구금되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고려 진주 출신 일본 귀화 승려 양유가 구금 해제와 고려와 일본 서로 간의 화친을 청했다(『동사강목』(東史綱目) 제16상).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일본 통신사를 자청했으며, 일본을 방문해서 왜구 금압(왜구 출몰 금지) 요청
―고려•원나라 연합군의 왜군 정벌 이후 100여 년 일본과 국교가 단교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첩으로 의심받고 구금
―고려 진주(晉州) 출신 귀화 승려 양유(良柔)의 중재로 석방되었고, 왜구 금압 협상에 성공했으며, 고려와 일본이 국교 회복
―일본에서 자신의 나이 60세를 150세라고 속이자, 왜인들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찬을 짓기도 했으며, 나흥유에게 한시를 짓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12월경 일본 교토 천룡사 운거암(雲居庵)에서 왜인들의 요청으로 한시 1수 「봉사일본」 작시
―일본에서 체류하는 1년 8개월간 250편의 한시를 지어 자신의 생전 시문집 『중순당집』(中順堂集)에 수록했다고 한다.
1376년 61세 우왕 2년 10월 고려 진주 출신 일본 귀화 승려인 회신사 양유(良莠)와 같이 귀국해서 개성 도착
―고려 출신 귀화 승려 양유와 함께 귀국했으며, 일본에서 비단, 꽃 병풍, 장검, 금용두(龍頭) 장식 술잔 등을 예물로 보내왔고, 일본 승려 주좌(周佐)의 서신을 동봉했다.
―일본인 승려 득종주좌(得宗周佐, 도쿠소 슈사, 1324년 생~1400년 몰)의 서신 내용: 서해도 일대 규슈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세금 납부를 거부한 지 어언 20여 년이 지났다. 그런 이유로, 쓰시마섬 등 서변 해도의 왜구 해적들이 고려를 침략하고 있다. 일본의 소행이 아니라 해적들의 소행이며, 규슈만 평정하면 왜구는 금압될 것이라고 언급(『고려사절요』 권30 신우 1376년 병신 2년;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6상 참조; 일본인 승려의 이름이 득종주좌(得宗周佐)가 아니고 덕수주좌(德叟周佐)라는 설도 있다.)
경기 여주 백애촌에서 학당을 열고 제자를 교육하며 파사계의 파사계주로 활동
―왜구의 침략으로 6월 전주가 함락되고, 10월 무안으로 진격하자, 광산 김 씨 정6품 낭장 김종연(金宗衍)이 왜구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여주 백애촌의 학당에서 나흥유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김종연은 중랑장에서 정4품 장군으로 승진했다.
1377년경 62세 우왕 3년 여섯 글자의 시호로 공신(“六字表功臣”) 칭호를 하사받음.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 설치
―명나라에서 고려에 화약과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을 제공하기로 합의
1380년 65세 우왕 6년 고려 수군 해도원수 나주 나 씨 나세(羅世, 1320년 생~1397년 몰) 장군이 서천 진포 대첩에서 서해부원수 최무선 장군과 세계 최초의 화력전으로 왜구 격멸. 9월 전북 남원에서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황산대첩에서 왜구 섬멸
1385년 70세 우왕 11년 이후 판서공
―귀국 전후에 동료 관료들 사이에서 판서라고 불린 것으로 보아, 일본 통신사의 공훈으로 판서의 품계로 승진한 것으로 추정
―고려 후기 문신 이달충(李達衷)의 시문집 『제정집』(霽亭集)에 「나 중정(羅中正)을 전별하며 쓴 시에 붙인 서문」 수록(조선 세종조 이달충의 손자 이영상이 간행)
1388년 73세 우왕 14년 12월 이성계(李成桂) 장군의 위화도 회군으로 압박을 받은 창왕(昌王)이 최영(崔瑩) 장군 참형
1389년 74세 고려 공양왕(恭讓王) 1년 고려 수군이 고려군 병선 100여 척으로 일본 왜구의 근거지 대마도(쓰시마섬)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왜구의 침략이 저지되었다. 전라도 원수 김종연이 쓰시마원정에 참가했으나, 최대 공로자 김종연은 이성계 일파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1390년 75세 공양왕 2년 파사계주 판서공 우수 나흥유 서거. 향년 75세
―전라 원수 광산 김 씨 김종연 장군이 나흥유의 파사계주 승계
―1390년에 우수가 서거하고 김종연이 승계했으며, 나흥유가 유서에서 김종연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파사계가 만수산 두문동에서 김종연을 신임 계주로 추인하고, 계원 수를 100여 명으로 늘렸다.
―1390년 11월 15일 나흥유가 변안열에게 거병을 권한 날짜가 사전에 발각되어 거사가 실패했고, 12월 16일 반이성계 연합군 공모 파사계주 김종연 옥사
1392년 조선 태조(太祖) 1년 고려 왕조 멸망
1393년 태조 2년 계유년 아들 나득경 문과 과거 급제 후 이조참의 역임
1408년 조선 태종(太宗) 8년 남동생 나계유의 증손자 나유수 문과 과거 급제 후 사간원정언 역임
2020년 2월 이영, 「우왕 원년(1375) 나흥유의 일본 사행 당시의 규슈 정세와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의 왜구 대응의 배경」, 『한국중세사연구』 제60권, 한국중세사학회, 363~398. (논문)
―정3품 판전객시사 나흥유의 일본 통신사 친선 사절 방문 이후로 왜구 침략이 급감했다는 내용
2022년 7월 권경률, 『모함의 나라』, 빨간소금 간(제1부 왜구 전쟁 「나흥유」 수록) (단행본); 10월 백락영 역해, 『시인의 마음을 읽다』, 고려한시삼백수, 이비락 간(1장 「일본에 사신으로 오다(나흥유)」); 12월 이승한, 『개경에서 한양까지 1―권력투쟁으로 본 조선 탄생기』, 푸른역사 간(제2장 「이인임 정권, 명과 북원 사이에서」, 1. 이인임 정권, 「일본 통신사 나흥유」 수록)
2024년 4월 20일 금성인 나흥유 저•나주인 부사공파 26세손 나종혁 편찬 『중순당집』(中順堂集, 고려 부전(不傳) 시문집) 복원판 전자본 발행(PDF 전자책 한문 원문 142쪽)
저서
『중순당집』(中順堂集, 부전 시문집)
―고려의 중요한 유가 시문집의 한 질로 기록(김휴,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유득공(柳得恭)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고려 문집의 한 질로 기록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卷14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집」(文集)에서 나흥유의 『중순당집』 1질이 『용재총화』(慵齋叢話) 권8에 기재되었음을 기록
―나흥유 생전에 그의 귀국과 승진을 축하하여 경북 상주(尙州)에서 시문집 간행(「나판서장간중순당집어상주…」(羅判書將刊中順堂集於尙州…, 『목은시고』 권23)
―이색(李穡), 「중순당집서」(中順堂集序, 『목은문고』 권9), 「발나흥유하시권」(跋羅興儒賀詩卷, 『목은문고』 권13)
―이색에 따르면, 나흥유의 연구(聯句)에 사대부들의 축하 시 90편, 나흥유의 일본 사신 기간 쓴 시 250편, 승려 등 일본인 증시 20편, 총 360편으로 나흥유를 축하하는 시문집을 생전에 상주에서 편찬했다고 한다.
—『충순당집』(忠順堂集)이라고 표기된 사례도 있으며, 오기(誤記)이거나 후손들이 충청도 이남으로 이주해서 출간한 충청판 문집 이름으로 추정된다.
고려 지도 『오도양계도』(부전 지도)
통신사 사행록(부전 사행록)
나흥유 축하 시권(詩卷)(부전 시권)
동시대 및 동시대 이후의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 나흥유의 한시와 나흥유에 대한 시문 수록
한시(漢詩)
―고려 왕이 총애해서 옛 이야기를 하거나 한시를 짓게 했고, 그 자리에서 한시를 지으면 바로 글로 써서 사관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1년 8개월 동안 250편의 한시를 지었다.
「봉사일본」(奉使日本, 현존)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지은 칠언 절구 한시
―『동문선』(東文選) 권21 수록
―1375년 12월경 일본 교토 천룡사 운거암(雲居庵)에서 지은 한시이며, 시에서 못은 조원지(曹源池), 누각은 용문정(龍門亭)으로 추정된다.
* 나흥유(羅興儒) 가문의 한반도 분포: 우리나라 지도의 기본도인 「오도양계도」를 제작한 우리나라 지도의 선구자 우수 나흥유 선생의 가문은 나흥유의 부친 고려생원•밀직부호군 나락이 전라도 나주를 본향으로 했으며, 나흥유도 어린 시절을 전라도 나주(羅州) 남쪽 교외 금남(錦南)이라는 마을(현 나주시 금남동)에서 자란 금남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흥유는 금남의 우수(迂叟)라고 불렸다.
나흥유 가문은 본래 고려 왕조 초기부터 대대로 고려의 수도 송악(현 개성)에서 나주 호족의 일부로서 고려의 명족으로 살았다. 고려 초기 이후 나흥유 가문은 세력이 중부 지방으로 확대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충청도 이남 지역으로 세력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나흥유의 아들이 조선 전기에 이조참의를 했고, 나계유의 증손자가 조선 태종조 사간원정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충순당집』(忠順堂集)이라는 『중순당집』의 이본이 나온 듯하다. 조선 시대 중기에 이르러, 나흥유 가문은 이북 지역으로 이동해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현재는 평안남도 용강과 맹산 등지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나흥유 가문은 금성 나 씨 후손으로서, 조부가 금성 나 씨 13대손 봉선대부 나천규이고, 부친이 14대손 고려생원•밀직부호군 나락이며, 본인은 15대손 판전객시사•판서공 나흥유이고, 아들은 16대손 조선 태조조 이조참의 나득경이다. 나흥유의 남동생 15대손 고려 판관 나계유(羅啓儒)는 그의 아들이 16대손 직장 나득의이며, 손자가 17대손 흥해부사 나진강이고, 증손자는 18대손 사간원정언 나유수이다. 나계유의 후손은 21대손까지 기록에 있고, 그 이후는 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지역 집성촌은 평안도와 함경도이다.
* 『고려사』 권114 열전 권27 「나흥유전」의 주인공 나흥유(羅興儒): 정3품 판전객시사 나흥유는 고려 시대 후기 공민왕조에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자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료에 발탁된 화제의 인물이었다. 나흥유는 나주(羅州) 출신 금성인(錦城人)으로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서당 중순당(中順堂)을 설립해 재야 학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과거에 급제시킨 고려 유학의 지도자이다. 고려 후기 공민왕(恭愍王)이 과거 시험 채점에서 사용하는 음묵(飮墨)과 예소(曳素)의 유래에 대해서 하문했으나, 아무도 답변하지 못하자, 중순당의 나흥유가 음묵과 예소의 유래에 대한 글을 명쾌한 답과 빼어난 글로 올렸다. 공민왕이 그의 시문을 재차 확인한 후에 정5품 중랑장에 특채하고, 정4품 예의총랑, 종3품 사재령으로 고속 승진시켰다. 문관 정3품 판전객시사에 올라 일본 통신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고려 후기 당대의 유명한 문인으로, 많은 한시를 창작했으며, 전대의 옛이야기를 포함한 개벽 이래 우리나라의 왕조사와 국경선의 변천을 획정했다. 고려의 학자이자 고려 유학의 지도자로서, 또한 우리나라 지도(地圖)의 선구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이기도 하다. 『고려사』 권114 「열전」 권27 「나흥유전」의 주인공이며, 우리나라의 건국 이래 왕조사와 국경선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기술한 인물이다. 판서공 나흥유는 통신사 귀국 후에, 외교 공훈 육문자 공신에 책봉되고, 육조 상서에 올랐다.
참고로, 고려의 유학자 우수 나흥유는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시절에 이미 유학(儒學)을 정복하고 재야 학자로서 중순당(中順堂)이라는 학당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공민왕조 30대 후반~40대 초반에 남동생 나계유와 같이 문과 과거에 급제했으며, 종5품부터 정3품 판전객시사까지 고려 관료로 고속 승진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 고려 외교 공신과 육부 판서를 역임했다. 고려 후기 고려 왕조가 멸하기 시작하자, 나흥유는 경기도 여주 등지에서 학당을 열고 유학을 가르치고, 고려 관료들의 모임인 파사계를 창립해서 파사계주로도 활동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이자 우리나라 지도의 선구자이고, 고려 최초 생전 시문집 『중순당집』의 저자이기도 한 나흥유는 고려군이 대마도를 크게 정벌한 후인 1390년 향년 75세로 서거했다.
羅興儒
羅興儒羅州人. 骨貌輕儇善詼諧. 頗涉書史屢擧不第開塾舍以訓童蒙. 恭愍朝補中郞將. 爲影殿都監判官須鬢皓白督丁夫運石手執旗竿登石上麾而呼之王悅. 累遷禮儀摠郞. 以王命監造木蟠龍爲殿門飾遂以技巧稱. 陞司宰令遷司農少卿. 撰中原及本國地圖敘開闢以來帝王興廢疆理離合之迹曰, “好古博雅君子覽之胸臆閒一天地也.” 遂進于王王見而嘉之. 興儒能言前代故事王愛幸常目爲老生朝夕在左右或命賦詩或戱語時賜御膳至手調羹予之. 興儒輒夸語於人寫所賦命題詩送史館曰, “老臣獲紆上知類太公之遇文王賜膳給札賦詩同太白之遇玄宗. 豈無秉周柱董狐之筆者乎?” 其自飾要名類此. 憲司劾興儒盜用影殿之材免其官. 辛禑初判典客寺事上書請行成日本遂以通信使遣之. 自辛巳東征之後日本與我絶交好興儒初至疑諜者囚之. 有良柔者本我國僧也見興儒遂請釋之. 時興儒年僅六旬紿曰, “吾今百有五十矣.” 倭人騈闐聚觀至有畫像作讚而贈之者.
* 出典: 『高麗史』 114卷 「列傳」 卷27 「羅興儒」
* 우수 나흥유의 한시(漢詩): 우수 나흥유의 한시는 현재 「봉사일본」(奉使日本) 1수가 일본 통신사 체류시 250수(『중순당집』 수록분)의 1수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생전에 고려 최초의 생전 시문집 『중순당집』을 펴낼 만큼 한시 창작력이 왕성했던 시인 나흥유는 정3품 판전객시사 시절에 일본 통신사를 자청해서 일본에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로 파견되었다. 일본에 체류하던 1년 8개월 동안 지은 한시 250수가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실전시로 지은이와 시수 외에 그 제목과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일본에 파견되기 이전부터 나흥유는 한시에 재능을 보여, 고려 조정에서 한시를 짓고, 고려의 사관에게 직접 시 작품을 건네주며 기록에 남기도록 했으며, 고려의 여러 관료들과 사대부들에게도 한시를 지어주어 증시나 그들의 시문집에 수록되도록 했다고 한다. 나흥유가 생전에 쓴 한시의 숫자는 250수~300여 수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그의 한시는 「봉사일본」 1수에 불과하며, 그를 기념하는 증시로서 고려의 관료 이색, 이숭인, 이달충, 정추 등이 남긴 한시들이 몇 편 전해지고 있다.
* 종3품 중정대부 나흥유의 직질 승진을 축하하는 고려 사부대들의 헌시 90편의 시서(詩序): 고려 후기 공민왕조에 나주 남쪽 교외 금남(錦南)의 우수 나흥유가 현릉(玄陵)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받고 연구(聯句)를 지어 3품 직질로 승진하자, 고려 신하들과 사대부들이 나 판서를 축하하며 90편의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에, 고려 후기 문신 이달충(李達衷)이 「증나중정시서」(贈羅中正詩序)를 쓰고, 자신의 시문집 『제정집』(霽亭集) 권3에 실었다. 이달충(李達衷)은 『제정집』(霽亭集)에서 중정대부 나흥유를 전별하며, 공민왕조 나흥유(羅興儒)의 승진을 축하하여 고려 조정의 문신들이 바친 90편의 시권에 붙인 글이라고 했다. 후에, 판서공 나흥유는 정3품 판전객시사를 거쳐 육조 상서에 이르렀다.
贈羅中正詩序
李達衷
余雖鈍且魯, 年旣老, 閱人翫事不爲少. 凡男子之生也, 父母喜其姓, 親姻相與慶, 望望焉望其長, 而其期望必不小. 旣長之人之所稟, 殘微薄劣, 淪湮不振者, 蓋無足齒, 雖或立楊, 顯爀于世, 其爲之也, 岐而不同. 或馳騖乎車塵之後, 或趨蹌乎狗竇之旁, 梯媒族屬, 佞媚儓輿, 蠟言而梔貌. 搖尾而乞憐, 驟躡班資, 竊靡廩食, 蛾燭蟻羶而不顧其生者. 今雖無矣, 古或有之. 乃若窮理盡性, 抱負奇才, 用行舍藏. 居易俟命, 而不以窮通早晚, 介乎其心者. 蓋無矣, 無耶. 吾未之知耶. 吾所知者,惟吾羅公迂叟其庶幾乎. 君少知學, 博通經史, 歷代理亂, 君臣得失, 無不稽, 將以比肩杜武庫, 躡踵虞秘書. 但未遇知己, 眊矂科場者凡幾擧, 亦不以爲意, 乃曰中不中. 命也, “吾何慊乎, 但修吾天爵足矣.” 於是, 杜門屛處, 討論墳典, 敎養人材, 不知老之將至, 以自樂焉. 一朝遭遇聖明, 召入宸所. 年未至磻溪之老, 貌則如商山之皓. 對揚辨論, 皆稱旨, 上奇之, 擢置顯秩而寵異之. 凡懷奇蘊異之流, 咸喜其將有彙征之吉, 益礪其節操而自修者, 蓋亦羅君之爲也. 豈可與蠟言梔貌, 蛾燭蟻羶者, 同年而語哉. 一時名勝, 皆賀而詩之, 俾余爲序. 知人之瞽而爲導者, 可笑也已. 某年月日序.
* 出典: 李達衷, 「贈羅中正詩序」, 『霽亭集』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송별시 「나 판사가 일본에 통신사로 감을 환송하며」(奉送羅判事使日東 本官上章自行): 도은 이숭인은 『도은집』(陶隱集) 권3 시에서 칠언 절구 4수 「나 판사가 일본에 통신사로 감을 환송하며」(奉送羅判事使日東 本官上章自行)를 지었다.
奉送羅判事使日東 本官上章自行
李崇仁
封章慷慨達宸居
白髮丹心六十餘
慙愧書生身健在
紬衾豆粥愛吾廬
扶桑萬里海波淸
初日曈曨畫舸明
好去秋風廻使節
紫宸殿下奏昇平
藤橘原平四姓賢
遙聞千載有雲玄
煩公鄭重携家乘
題紀憑將大史傳
徐生避世一乘桴
滄海橫流今幾秋
可是日東重人物
歲時祭祀未曾休
* 出典: 李崇仁, 『陶隱集』 卷三
* 나흥유의 한시 「봉사일본」(奉使日本): 1373년 2월부터 1376년 10월까지 1년 8개월간 일본에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로 체류하면서, 1375년 12월경 일본 교토 천룡사 운거암에서 지은 칠언 절구 한시 1수이다.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지은 시로 알려져 있으며, 천룡사 주변의 못 조원지와 누각 용문정이 언급된 것으로 해석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奉使日本
羅興儒
千年古國三韓使
萬里洪濤一葉舟
留滯海東驚歲暮
寂寥山月水明樓 <끝>
* 出典: 『東文選』 卷21
* 고려 후기 문신 정추(鄭樞)의 나흥유 판서에게 바치는 헌시 「나흥유 판서의 「봉사일본」 『사행록』에 싣는 헌시」(羅興儒判書奉使日本 旣廻 以行錄示予 用錄中所載 綴句贈之): 고려 후기 문신 정추(鄭樞)는 그의 문집 『원재고』(圓齋槀) 전 3권의 제2권에 나흥유 판서에게 바치는 헌시 「나흥유 판서의 「봉사일본」 『사행록』에 싣는 헌시」(羅興儒判書奉使日本 旣廻 以行錄示予 用錄中所載 綴句贈之)를 지었다. 아름다운 시구로 선림을 읊었으니 부처의 진면목이라고 칭송하는 시이다.
羅興儒判書奉使日本 旣廻 以行錄示予 用錄中所載 綴句贈之
鄭樞
勝景辭門柳
洪濤放葉舟
麻衣持漢節
蠟屐上岑樓
佳句禪林誦
眞容佛○○
却來書榻畔
應夢客雲州 <끝>
* 出典: 『圓齋先生文稿』 卷之中 詩
* 나흥유의 시문집 『중순당집』(中順堂集): 고려 후기 문신 목은 이색(李穡)은 판서공 나흥유의 시문집 『중순당집』(中順堂集)에 발문 「나흥유를 축하하는 시문집 발문」(跋羅興儒賀詩卷, 『목은문고』 권13)과 후기 「금남 우수의 전기 후기」(書錦南迂叟傳後, 『목은문고』 권13)를 써서 판서공 나흥유의 귀국과 승직을 축하했다. 또한, 이색은 「중순당집 서문」(中順堂集序, 목은문고 권9)에서 우수 나흥유가 일본에서 지은 한시 250편과 일본인 조계선자(曹溪禪者)의 증시 20편이 수록되었다고 기술했다. 이색의 시 「나판서장간기중순당집어상주」(羅判書將刊其中順堂集於尙州)는 나 판서가 상주(尙州)에서 『중순당집』(中順堂集)을 간행하려고 서문을 급하게 청하자, 그의 시에 감명받고 세상에 전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이색의 다음의 시 「위나우수기황충주」(爲羅迂叟寄黃忠州)는 우수 나흥유를 위해 황충주에게 부치는 시이다. 연구(聯句)를 짓고, 3품 직질(職秩)에 올랐음과 해외 기행에서 이국의 풍물을 담았다는 내용이다. 이색의 시 「우수견방」(迂叟見訪)은 나흥유가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 여섯 글자의 시호로 공신(功臣) 칭호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羅判書將刊其中順堂集於尙州 托書於僕 以求速成 甚矣 其嗜詩而欲其傳於世也
李穡
白髮忘生產
朝昏只詠詩
擊蒙多達宦
奉使蹈危機
佳句儒林誦
高標海國知
願公宜用力
叢錄近來稀 <끝>
* 出典: 『牧隱集』 詩藁 卷23 詩;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7 盎葉記四 「生時刊行文集」
爲羅迂叟寄黃忠州
李穡
禁中聯句搢紳誇
海外紀行風月多
繡梓流傅在公手
請看迂叟志無他 <끝>
* 出典: 『牧隱詩藁』 卷29 詩
迂叟見訪
李穡
迂叟居仙洞
乘槎海上巡
一身爲說客
六字表功臣
典故牢籠盡
詩聯鍛煉新
有時過陋巷
發語有精神 <끝>
* 出典: 『牧隱詩藁』 卷30 詩
中順堂集序
李穡
詩道所係重矣, 王化人心, 於是著焉. 世敎衰, 詩變而爲騷, 漢以來五七言作, 而詩之變也極矣. 雖其古律並陳, 工拙異貫, 亦各陶其性情而適其適, 就其詞氣而觀之, 則世道之升降也, 如指諸掌. 錦南迂叟羅判書遇知玄陵, 聯句賦詩, 進秩三品, 國中士大夫歆艶讚詠, 凡得九十篇, 如群玉府, 璀璨耀目. 自請奉使日本, 遇物興懷, 輒形於詩, 凡二百五十篇, 日本曺溪禪者所贈又二十篇, 史氏索其本謄藏之, 臺臣又請觀之, 府中縉紳, 咸願目覩, 爭求之, 今三年矣, 而猶未已. 迂叟曰, “吾之迂, 迂於世也, 而官至六曺尙書, 是果迂歟. 嗜詩甚矣, 酸寒之味, 取譏膏梁, 然亦迂而已矣, 何害於事. 載名諸儒集中, 其傳也必矣, 其幸也多矣. 然散而莫之一也, 今將聯爲叢錄, 又慮其難以傳玩也, 將刻之梓, 使人人皆得以覽觀, 而知錦南之有迂叟也.” 於是. 來請予序, 予曰, “天子採詩侯國, 蓋古制也. 異日, 是集也悉送上官, 迂叟之名, 益傳矣. 日本詩因迂叟而播于中國, 非獨迂叟之幸也, 亦日本之幸也. 況我先王崇儒盛德, 洋溢內外, 則迂叟是集, 亦一助也, 敢不備書以冠篇端.” 中順堂, 迂叟燕處之所也. 詩釐爲若干卷云.
* 出典: 『牧隱文藁』 卷9 序
跋羅興儒賀詩卷
李穡
迂叟老而見遇, 常自比太公望, 其所負不淺矣. 及讌賀客, 則以王毛仲自居, 又何其卑也. 是知迂叟胸次磊落軒輊, 出語驚人, 其得奇遇, 非幸也亦宜也. <끝>
* 出典: 『牧隱文藁』 卷之十三 跋; 『東文選』 卷102 跋
書錦南迂叟傳後
李穡
迂叟自少攻詩賦. 出游場屋間, 同進者皆推以能, 而輒不中. 及以策問爲決場。 其能如前而加工焉, 主司者又輒棄之不取. 其得者, 豈皆能於迂叟哉. 信乎其命也夫. 旣屈則退而講學, 名其所居堂曰中順. 學者日進, 其承指授爲文者, 往往高中取美仕. 於是, 迂叟亦自知其命也, 乃以迂自名, 而人亦以迂目之也. 夫孰知三數年之迂, 乃爲一旦榮遇之地哉. 今觀迂叟傳, 淸問所及, 始於擧子飮墨曳素之事, 迂叟因而進其說, 見上頷可, 則又旁引他說, 罄其所蘊, 及令賦詩, 援筆立成, 若有神助, 卽賜三品服. 顧視前日同游場屋高科膴仕者, 皆在下風, 使其與迂叟同入對賦詩, 未必皆如迂叟之能矣. 又其正言如魏文貞, 滑諧如東方朔, 博洽如張茂先, 其能不止詞翰之末. 孰謂迂叟迂哉. 叟信不迂矣. 事始末, 淡菴白先生傳之詳矣. 予獨取迂叟以迂見遇而卒不迂. 識諸傳後而歸之.
* 出典: 『牧隱文藁』 卷13 書後
* 『중순당집』 복원판 전자본: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세손 수원 계열 나종혁(羅鍾赫)이 2024년 4월 20일 전자책으로 발행한 『중순당집』 전자본 복원판에는 다음의 내용이 수록되었다. 서(序)는 이색(李穡)의 「중순당집서」(中順堂集序), 이달충(李達衷)의 「증나중정시서」(贈羅中正詩序)가 수록되었다. 시(詩)는 나흥유(羅興儒) 작 「봉사일본」(奉使日本) 1수, 실전시(失傳詩)로 일본 통신사 체류시 249수(총 250수)가 수록되었다. 증시(贈詩)에는 정추(鄭樞) 작 「나흥유판서봉사일본」(羅興儒判書奉使日本 旣廻 以行錄示予 用錄中所載 綴句贈之), 이색 작 「나판서장간기중순당집어상주」(羅判書將刊其中順堂集於尙州 托書於僕 以求速成 甚矣 其嗜詩而欲其傳於世也), 이색 작 「위나우수기황충주」(爲羅迂叟寄黃忠州), 이색 작 「우수견방」(迂叟見訪), 이숭인(李崇仁) 작 「봉송나판사사일동」(奉送羅判事使日東 本官上章自行)이 수록되었다. 실전증시(失傳贈詩)에는 고려 사대부 하증시 90수(高麗 士大夫 賀贈詩 90首)와 일본 통신사 일증시 20수(日本 通信使 日贈詩 20首)가 수록되었다. 전(傳)에는 「나흥유전」(羅興儒傳)이 수록되었다. 어(語)에는 『고려사』 「나흥유전」 나흥유어록(高麗史 羅興儒傳 羅興儒語錄), 「증나중정시서」 나흥유어록(贈羅中正詩序 李達衷書 羅興儒語錄), 「중순당집서」 나흥유어록(中順堂集序 李穡書 羅興儒語錄), 「주좌서신」 주좌어록(周佐書信 周佐語錄)이 수록되었다. 후기(後記)에는 이색 작 「서금남우수전후」(書錦南迂叟傳後)가 수록되었다. 연보(年譜)는 2024년 4월 20일 간행 나종혁 찬 「우수나흥유연보」(迂叟羅興儒年譜)가 수록되었다. 행장(行狀)은 2024년 4월 20일 간행 나종혁 찬 「우수나흥유행장」(迂叟羅興儒行狀)이 수록되었다. 발(跋)은 이색 작 「발나흥유하시권」(跋羅興儒賀詩卷)이 수록되었고, 2024년 4월 20일 간행 군주(君主) 나종혁 찬 「발금성조판서공나흥유저중순당집개간전자본」이 수록되었다(나흥유 저•나종혁 찬, 『중순당집』, 인천: drm ip, 2024년(PDF 전자책) 참조).
* 일본 통신사 나흥유가 받아온 일본 막부 승려 주좌(周佐)의 답신: 일본 막부의 승려 주좌(周佐)는 고려 진주 출신 일본 귀화 승려 양유(良柔)를 회신사로 대동하고 비단과 병풍 등의 선물과 함께 서신을 동봉했다. 동봉한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서해도 구주(규슈, 九州)에서 난리가 나서 세금을 바치지 않은 지가 20여 년이 되었고, 서변 해도에서 해적이 출몰하게 되었으나, 일본 조정 막부의 소행은 아니다. 이런 고로, 일본 조정에서 장수를 파견해서 서로 다투어 구주를 거의 회복할 찰나이다. 그런즉, 해적 행위를 금할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
明年冬羅興儒還自日本, 日本遣僧良柔来報聘, 盖自辛巳東征之後絶交且百年, 至是其國僧周佐寄書曰, “維我西海道一路九州, 亂臣割㩀不納貢賦, 且二十餘年, 西邉海道頑民觀釁出寇, 非我所為, 是故朝廷遣將征討, 深入其地, 兩陣交鋒日以相戰, 庶幾克復九州, 則誓天指日禁約海寇.”
* 出典: 『星湖僿說』 卷14 人事門 「倭寇始末」
* 신라조•고려조•조선조의 대마도(對馬島) 관계: 신라 시대에 대마도는 왜구 출몰의 근거지나 경유지에 불과했으며, 신라 시대 말기에는 왜구를 치기 위해서 대마도를 직접 공략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명실공히 대마도는 왜구의 본거지였다고 한다. 왜구의 오랜 침략에 고려 말기에도 역시 대마도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신라조와 고려조에 대마도는 끊임없이 출현하는 왜구에 대한 분열적 착시와도 같았다. 신라조에 대마도는 신라와 공물을 주고받는는 관계였고, 고려조에 대마도는 상호 공물 제공이 중단되면서 왜구의 출몰이 잦아진 시대였다. 공물을 주고받는 외교적 행위는 선린 외교이며, 공물을 주고받지 않는 외교적 행위는 외교 단절이나 외교적 적대 행위이다. 조선조에는 제4대 세종조에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나, 신숙주의 대마도 회담이 실패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왜구의 위협에 강화도에 있던 고려 대장경이 경남 합천 가야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선조조에는 대마도 교주가 일본 본토로부터 소외되었음을 한탄하며 선조에게 최초의 조총을 선물로 헌납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임진란과 정유란이 터지기 전의 오판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 조선은 오랜 기간 임진란과 정유란의 양란을 겪으며 조선 후기로 접어들었다.
신라조, 고려조, 그리고 조선조의 왜란을 비추어 보면서, 남해상으로 출몰한 왜적이나 왜구는 경상도를 거쳐 수도권으로 진격했으며, 충청도 아산을 거쳐 남원으로 하향했다가 남해상으로 사라졌다. 서해상으로 출몰한 왜구나 왜적은 수도권을 공략한 후에는 역시 남원으로 진격해서 남해상으로 물러갔다. 왜란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왜구는 왜구이고, 대마도는 대마도이다.”라는 사실이다. 왜구에 대해서는 잘못된 착오도 금물이고, 분열적 착시도 금물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세종의 가야산 대장경이나 또 다른 대안적 해법이 가능할 뿐이다. 어쨌든, 우수 나흥유가 나이를 사실상의 60이 아니고 150이라고 뻥 쳤다는 일화는 역사적으로 상기할 만하다. 나흥유는 “내 나이 150살에 도술(道術)이 있다.”고 실제 나이 60세를 배 이상으로 넘겨서 속여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 나흥유에 대한 한국의 연구 성과: 학술정보서비스(RISS)에서 검색되는 나흥유에 대한 한국의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령, 「고려 우왕 원년(1375) 나흥유의 일본 사행과 미즈시마의 변: 규슈탄다이 이마가와료의 왜구 대응」, 『일본역사연구』, 일본사학회 제52권, 2020년; 이령, 「우왕 원년(1375) 나흥유의 일본 사행 당시의 규슈 정세와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의 왜구 대응의 배경」, 『한국중세사연구』 제60권, 2020년; 이령, 「고려 우왕 원년(1375)의 나흥유 일본 사행의 외교적 성과」, 『한국중세사연구』, 한국중세사학회, 2016년; 엄경흠, 「여말 일본통신사의 사행과 송시」, 『동양한문학연구』 제25호, 동양한문학회, 2007년 등의 국내 학술 논문; 한국인문과학원, 『고려시대한시문학집성 5』, 한국인문과학원, 1998년 등 단행본; 연세대 동방학연구소, 『고려사』, 한국연구재단(NRF), 1972년 등 연구 보고서가 있다. <끝> (1차 2024년 3월 30일, 수정 2024-04-19,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나각순, 「나흥유(羅興儒)」, 『민족백과사전』; 김건곤, 「중순당집」(中順堂集), 『민족대백과』; 강민경, 「150세라 일본에 뻥을 친 나흥유」, <http://history library.net/>; 도화원, 「고려-조선 시대 통신사에 대한 이해 05」, 네이버블로그; 한명기, 「고려-일, 오랫동안 끊긴 외교를 왜구 탓에 재개」, 『한겨레신문』, 2011-12-23; 김대영 기자, 「[장서 산책] 권경률 ‘모함의 나라’」, 『시니어매일』, 2022-08-21; 동산 몽천, 「우리나라의 지도발달사<펌>」, 네이버블로그; 「첫 통신사는 고려 때 나주 출신의 나흥유」, 『김민영님의 블로그』, 네이버블로그; 기타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