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복이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너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마 5:7).
미국에서 한 소년이 길을 가다가 노예 시장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시장안을 보니까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흑인 일가족이 시장에 상품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빠, 엄마, 아들 그리고 어린 딸의 발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노예를 사러 나온 농장 주인이 아버지를 사갑니다.
그때 아내가 “여보”하면서 남편을 붙잡고 아들과 딸이 “아빠”하면서 아버지를 붙들고 안 떨어 질려고 울부짖으며 발버둥을 칩니다.
그 때 노예상인의 무서운 채찍이 내려 쳐지면서 결국 떨어지게 되고 아버지가 묶인채 끌려갑니다.
조금 있다가 어떤 백인 아주머니가 오더니 어머니를 보고 노예상인에게 얼마냐고 값을 흥정하더니 돈을 지불하고 사갑니다.
“엄마”하고 울부짖으며 발버둥치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팔려가는 어머니의 모습, 어린 자식들을 놓고 팔려가면서 울부 짖는 어머니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두 어린 아이들도 각각 팔려 갔습니다.
하루 아침에 몇 시간만에 단란한 일가족 4 식구가 강제로 영원한 생 이별을 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는 이 소년은 자기가 당한 것처럼 마음에 찢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흑인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불쌍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소년이 성장합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노예 해방을 시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에 있던 흑인에 대한 긍휼이 노예 해방을 시킨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입니다. 긍휼은 이토록 powerful 한 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이 있도다. 긍휼이 여지는 자여! 너희가 긍휼함을 받을 것이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복있는 긍휼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 긍휼이란?
긍휼은 헬라어 Ellesmos를 번역한 말로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동정심을 가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ate라고 하는데 “com”이란 “동일한”이란 의미이고 “passionste”는 “감정을 갖다” 그래서 “동일한 감정을 갖다” 즉 “감정 이입”을 가리킵니다. 즉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보고 “얘야, 옆집에 가서 망치 좀 빌려 오너라”하고 아들을 이웃집에 보냈습니다. 조금 있다가 아들이 빈 손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안 빌려주는데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후에 아들이 아버지 보고 “아버지, 이웃집 아들이 톱을 좀 빌리려 왔는데요” 그럽니다. 그 때 아버지가 “그래, 빌려 주거라” 그럽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니, 아버지! 저 집은 며칠 전에 망치 좀 빌려달라니까 안 빌려 줬는데 우리는 왜, 톱을 빌려 줍니까?”하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앉혀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 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빌려 준다. 이것은 증오다”
“그런데 거절당한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이 그저 톱이 필요해서 빌려달라고 하는구나 생각하고 빌려주면 그것은 긍휼이다.”
긍휼은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 입장이 되어서 상대방의 필요를 체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긍휼의 극치는 하나님에게서 발견이 됩니다.
에베소서 2:1이하를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쫒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그 때에”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죽어있던 때”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그것들을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즉 불순종의 영들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성령의 소욕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성, 충성, 온유와 절제의 삶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 즉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맺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성질내고, 당짓고, 술취하고, 방탕하는 것들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서 진노의 자식의 삶 즉 마귀에게 속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던져 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죄가운데서 방황하며 사는 우리 인간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시지 않고 인간의 입장에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신 것이 아니라 심판받고 지옥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을 심판주에서 구세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즉 긍휼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이 이유는 독생자를 믿고 멸망당하지 말고 영생을 얻으라” (요3:16)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17절은 정말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아래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 사랑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신앙 원리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인간의 회개와 만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세리 한 사람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18:13) 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때 세리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이 만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의 은혜가 임해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눅 18:14).
따라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서의 회개가 하나님의 긍휼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이 날마다 만나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