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성심심극미묘 (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은 참으로 깊고도 오묘하니
6) 불수자성수연성 (不守自性隨緣成)
자기 성품을 지키거나 집착하지 않고 인연따라 이루어지네
위의 두 구절은 연기(緣起)의 체(體)를 설명하는 말이다.
원융무애한 법성이 현상계의 차별상을 전개하는
심오한 이치는 불가사의하다. 이것은 법성을
진성이란 말고 바꾸어 사량분별심에 의해
이해하는 차원에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의 교리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란 말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뜻인데,
이 인연의 도리는 심오하여 깨달은 경계라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화장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화엄경>에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퉁겨 누각의 문을 여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진성의 심오한 문이 열려야 법계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가 될수 있는것도 진성이 발현하여 인연을
따르는 것이요, 부처가 중생으로 전락하는 것도 그렇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것(不變)과
인연을 따르는 것(隨緣)의 도리가 있다.
이를 흔히 체(體)와 용(用)이라 설명한다.
본체와 본체가 일으키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일체 만법이 생성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심오하고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비유하여 말한다면 물이 추워지면 얼어 얼음이 되고
다시 얼음이 뜨거워지면 녹아 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기온의 상태에 따라서 눈, 서리, 이슬, 안개, 비와
또 수증기, 아지랑이, 구름 등의 갖가지 형태로 변하여 달라지지만,
물의 본체 즉 H2O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변하지 않는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는 상황 따라 무한히 달라진다. 왜 달라지는 것인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불가사의하고 심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자성이 왜 수연을 하느냐 할 때,
일체법이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잠(雪岑) 김시습도 이 구절을 그렇게 설명하였다.
"일체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또한 모든 자성은 본래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으므로 고정된 주체가 없고,
고정된 주체가 없기 때문에 연을 따르는데 장애가 없다.
연을 따르는데 장애가 없기 때문에
자성을 고수할 수가 없고,
시방삼세(시방삼세)를 이룬다.
자성이란 제법의 상(相)이 없는 본래 청정한 본체가 그것이다.
(一切法 本來無性 一切性 本來無住 無住則無體 無體則隨緣不碍
隨緣不碍故 不隨自性而性十方三世矣 自性者 諸法無相本來淸淨之體)"
자성이 없기 때문에 현상이 인연따라 나타난다는 것은
화엄경에서 설한 핵심요지의 하나다.
이것은 제법의 자성이 공하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어떤 현상도
체와 용의 관계에서 연기되지만 고정된 모습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無)를 설하고 공(空)을 설한다.
또 화엄 대의를 나타내는 유명한 4구게의 하나인
"일체법이 자성이 없는줄 알아 이렇게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한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了知一體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자성이 없는 줄을 아는것이 법을 통달하는 관문이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시방삼세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도리다.
시방은 공간이고 삼세는 시간인데,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존재의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존재의 상황은 본성의 당체가 무(無)의 상황
곧 비존재의 상황이므로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없음의 상태가 모체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무(無)를 천하모(天下母)라고 표현한 재미있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