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탕 / 엄재국
누가 불 지폈을까?
부글부글 살구꽃 한 세상이 담장을 넘쳐 흐른다
건더기 없으면 넘치지 않을 맑은 물의 봄
사람들은 봄빛에 지쳐 쓰러지는데
약 없는 세상
누가 저 담장너머
지독한 봄을 여태 끓이고 있을까?
정비공장 장미꽃
bitl.bz
[수상 소감]
시를 쓰다가 조각과 회화, 설치미술, 개념미술, 도예등 미술의 전반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도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미술 작업을 하면서 생각나는 게, 시와 미술은 서로 깊이 연관 되어 있으며, 상호 보완적이고 상승적 관계를 형성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미술의 원천은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를 뿌리로 미술의 가지가 거침없이 자라는 것 같습니다.
시와 미술을 하면서 언어와 색채의 동질성과 변별성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시는 주로 언어를 통해 인식적, 정서적, 미학적 사유를 표현하는 반면, 미술 작업은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이러한 감정과 사유를 형상화 합니다. 시와 미술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깊이 탐구하며, 존재와 무, 유와 무의 경계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인 복잡성과 다층성을 복합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조각과 회화 설치미술, 개념미술등 다양한 예술형식을 통해 파괴와 창조, 그를 통한 자유를 만끽하며, 시에서 다룬 철학적 주제를 시각적으로 확장하고 싶었습니다.
나름,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시에서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고, 미술에서는 형태와 색깔의 경계를 허물며, 두 매체가 함께 작용하여 더 깊은 예술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시를 쓰는 감성과 미술의 작품을 결합 또는 해체 하여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탐구하는 자유를 허락받고 싶습니다.
그 자유는, 개념과 예술이라는 허구를 파괴하는 용병으로 또한 허락 될 것입니다.
이번 애지 문학상 수상이 저의 작업에 주마가편이 될 것입니다.
선정해주신 반경환 주간님 이형권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나비의 방
bitl.bz
[심사평]
올해에도 애지에 실린 시 작품들이 백화제방(百花齊放)처럼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피어났다. 공광규의 「겨울동화」, 김기택의 「수염으로 칼날 깎기」, 박분필의 「나의 고도를 찾아서」, 반칠환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 박성우의 「은행나무 길목」, 신대철의 「땅 껍질」, 엄재국의 「백비탕」, 이병연의 「백색 사원」, 이선희의 「바퀴 달린 가죽가방」, 장옥관의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 조용미의 「먹으로 휘갈긴 문장」, 「최병근의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등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인간과 존재의 본질을 성찰하는 시에서부터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소소한 감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비루하기 그지없는 타락한 세상을 향한 비판적 목소리도 주목할 만한 시적 형상을 얻고 있다. 특히 전 지구적 생태 위기와 관련된 시편들이 각별하게 눈에 들어온다.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도 언어예술로서의 수월성을 심사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대상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대부분이 애지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품성과 시의성을 충실히 확보하고 있었다. 우리 시단에서 이미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시인, 국내외의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시인의 작품도 있었다. 그런데 애지문학상은 시인상이 아니라 작품상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이력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잘 알려진 시인의 익숙한 작품보다는 우리 시단에서 낯설고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시인의 작품에 눈길을 주었다. 우리 시단의 다양성을 염원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심사위원들은 오랜 시간 고심한 끝에, 2024년 애지문학상 시부분 작품으로 엄재국 시인의 「백비탕」을 선정하였다.
엄재국의 「백비탕」은 시의 소재나 시상 전개에서 일반적인 시 문법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살구꽃”이 피어나는 봄날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이 시는 기본적으로 역설적 인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나 할까, 아름다운 꽃의 계절인 봄날에 오히려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문제 삼고 있다. “부글부글 살구꽃”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문제의식과 관계 깊다. “살구꽃”의 개화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미지로 표현하여, 봄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안정과 평화를 상실했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건더기가 없으면 넘치지 않을 맑은 물의 봄”에 암시되어 있다. 세상은 “건더기”로 상징되는 인간 사악한 욕망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아름다운 “살구꽃”이 피어도 “지독한 봄”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는 엘리어트의 유명한 시구 “사월은 잔인한 달”(「황무지」)을 생각나게 하지만, 인간 성찰과 문명 비판을 “백비탕”이라는 특이한 음식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수상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문학상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까지의 공로를 기리는 것과 함께 앞으로의 공로를 기대하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다른 시인들과는 변별되는, 새로운 시상(詩想)의 보고를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덧붙여 넘치는 수준에도 불구하고 수상작으로 선정되지 못한 작품들이 눈에 밟힌다는 점도 숙연히 고백해 둔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 심사위원 반경환, 이형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