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침묵속에서의 마리아, 서론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이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기 위함이었으니 곧 우리가 아들되는 자격을 받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4,4-5). 신약과 교회 역사 안에 나타난 마리아에 관한 초기 관점은 대략 A.D. 57년경에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로의 서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것은 그 후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저술 속에서도 중점적으로 부각되고, 봉헌과 전례 안에, 그리고 교회가 선언하는 공적 가르침과 모든 사람에게 계시된 진실 속에도 나타난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전된 교회 가르침의 기본 노선은 이미 성바울로 서간에서 제시된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아들 안에 아들들로 만드신 하느님 아들의 강생, 죽음, 부활을 통한 신앙의 신비다. 이러한 신앙의 신비는 성삼위(聖三位)의 제2위격인 '여자의 몸'에서 태어날 때 실현되어지고, 제2의 하와인 이 여인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중심적 신비인 새로운 아담에 속한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위치는 우리 구원자인 신비의 심장부에 자리하며,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녀를 통해서 그 아들 안에 계시된 것이다. 마리아는 성령의 힘을 통해서 성부 아들을 잉태한 하느님의 어머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마리아를 그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반열에 둠으로써 그녀는 하느님의 영원한 반열에 들게 되고, 그녀의 존재는 아들의 잉태를 준비함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에 한몫하게 된다. 하느님은 때가 찼을때 마리아를 통해서 역사에 개입하셨고, 마리아는 신약과 구약을 접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 마리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떻게 발전되어왔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진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진술된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교회 전통의 내용과 마리아의 근본적인 사도적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요한17,13참조). 교황 비오 12세의 진술은 그가 교황으로 임명되기 전인 1939년 밀라노에서 행해진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첫 번째 사유(思惟)이다. 하느님은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녀를 선택한다. 하느님의 이같은 은총 때문에 마리아는 축복을 받게 되며, 창조주를 위해서 응답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교회는 주의 길의 시작에서 마리아를 택한다." 교황 비오 12세가 정의한 성모승천 교의의 의미는 하늘의 영광 안으로 마리아의 영혼과 몸을 들어올린다는 것이다 (munificentissiumus Deus, 1950년 11월 1일).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성바울로의 갈라디아 서간 4장 4-5절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내용,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 성모 무염시태(無染始胎) 교의가 정의되고,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성모승천 교의가 정의되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교의가 성서 안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은 성서에서 발견된 것을 기초로 하며 교회는 굳이 불필요한 것을 고집하거나 거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가톨릭 교회는 성서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루터교회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성서에서 찾아내고 판단해야 했기 때문에 성서만을 교회의 판단, 규범, 법칙으로 생각한다(고백록 769면 참조). 이와같이 루터교회는 성서의 핵심을 긍정하면서도 '성서'의 의미를 한정된 이해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권위는 교회가 항상 성서를 존중하면서 지속시킨다는 전제 아래 성전과 함께 성서를 신앙의 최고규범으로 간진한다. (Dei Verbum 21참조). '성서는 성전과 함께' 라는 말은 가톨릭적인 성서이해를 아주 잘 대변하고 있다. 하느님은 그 자신을 책 속에서 계시하지 않고, 다만 그 아들의 강생의 인격 안에서 계시한다. 지금도 성령의 힘을 통해서 그의 신비체의 ]교회 안에서 계시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초는 성전과 성서가 증거하는 것으로서 교회의 존속이다. 성전과 성서는 상호 긴밀한 연관을 갖고서 양쪽 다 신적근원을 갖고 갖는다. 성서는 성령의 감도를 받고 씌어졌으며, 성전은 하느님 말씀을 포괄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침투함으로써 진리의 정신에 의해서 조명된 그들의 후계자에게로 전해진다. 성전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성서는 하느님 말씀을 사도들의 특별한 설교 방법에 의해서 표현한다. 성전과 성서는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그 말씀은 소멸되지 않는다. "사도들로부터 전해진 모든 것은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거룩하게 인도하고 믿음을 북돋워주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리와 생활과 전례에 있어서 교회 자신의 모든 것과 교회가 믿는 모든 것을 항구히 보존하며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전한다" (Dei Verbum 8참조).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성실히 보존하기 위해서 교도권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에게 넘겨준다. "성전과 성서와 교회 교도권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하여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어떤 것도 성립될 수 없으며, 이세 가지가 동시에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하나의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효과적으로 기여하도록 상호간에 연관되고 결합되어 있음은 명백한 일이다" (Dei Verbum 10).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이 세 가지 요소- 성전, 성서, 교도권-를 통해서 명확히 정의되어지고, 하느님의 계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교회를 자극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며, 서로를 각각 대립시키지 않고 상호 완성시킨다. 그것은 어떤 교회의 교의든 '성서적으로 필요하다'는 데서 의미를 갖는다. 즉, 교회의 가르침은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간에 거룩한 성서 안에(Scripture)그 근원을 둔다. 만약 교회의 가르침이 성서에서설명될 수 없는 경우에는 교회 가르침과 성서 사이의 근본적인 조화는 성전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 가르침에 대한 성서적 기초가 시도되었던 때를 상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서의 개별 텍스트가 아니라 기초적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기초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를 성서적으로 추적하고 성전의 증거를 환기시켜야 한다.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주된 내용의 하나는 마리아 위치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위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마리아 없이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 이면에서는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과장된 표현의 반응이 나타난다. 이러한 반응은 교회의 가르침 속에 드러나지 않고 마리아 신심의 봉헌 안에 드러난다. 마리아 신심에로의 과장된 표현은 사랑이 감성주의에로 깊이 치우친 곳에, 또는 엄숙한 신앙의 견고한 기초를 통해서 종교적 감정이 삭막해진 곳에 나타난다. 그리하여 교회는 헌신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완성을 위해서 지혜에 대한 신뢰를 상기시키게 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의 권고 안에 있는 "마리아의 예식"(1974.2.11)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마리아 신심 속에 나타난 오류를 경고했다. 교황의 주된 메시지는 마리아에 관한 잘못된 상황을 일깨우기 위해서 마리아의 용기, 진실, 그리고 봉헌된 삶을 전하고 있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공경은 교회의 본질적 부분이다. 그러한 공경은 성전에 의해 증거되지만, "보라, 이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루가1,48)하는 말씀은 마리아 자신에 의해서 예언된다. 어찌 되었던 이러한 사실들을 진실하다.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그녀를 특히 나자렛 여종의 위치로서 부각시키며, 그 여종의 위치 안에서 실재를 주장한다. 마리아가 주님과 유일한 관계를 맺듯이, 믿는 자들은 "마리아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와 관련되고 그에 의존한다" (교황 바오로 6세의 마리아의 예식).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아들에게로 그 초점을 두어서 최근에는 기독교 성서학자들도 구원의 역사 속에서 마리아의 위치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인 역사와 인간의 삶 속으로 침투한 하느님의 실재를 마리아와 관련짓지 않음으로써 육화의 신앙의 위기를 낳고 있다. "누구나 그의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예수에 대해서도 기술할 수 없다" (A. Asmussen). 교회의 가장 최근의 가르침은 하늘 안에서 영혼과 육신이 수용된 성모 마리아의 승천 교의다.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이 어떻게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이해되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육화의 실재로부터 근거해서 정의를 내린다. 그것은 극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적이고 구체적인 그리스도 인간성의 신비를 상기시킨다. 그리스도 인간성의 신비는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을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가 그 여인의 팔과 젖가슴에서 성장되었음을 말한다. (Munificentissimus Deus 43참조). 2. 마리아 교의, 우리가 마리아의 교의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의 영역을 교회의 신앙, 교회의 생활, 교회의 본성 등을 통하여 각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1. 교회와 신앙 '신앙'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의 신앙 고백은 세상 마지막날까지 세세대대로 전해온 사도적 가르침에 따른다. 교회가 선포한 최근 두 개의 교의인 성모 무염시태와 성모승천 교의는 교회의 공적인 의미를 아주 명백히 드러내고있다. 교회가 이러한 교의를 선포한 목적은 죄와 죽음을 물리친 하느님의 승리에 영광을 드리며, 시대의 왕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의 특성 안에 삼위일체의 영광을 드리며, 그 아들의 어머니에게 위대한 영광과 공경을 드리며, 그 아들의 어머니에게 위대한 영광과 공경을 드리며, 가톨릭 신앙을 새롭게 하며, 그리고 전체 교회의 기쁨과 환희를 주기 위해서 교의의 형식으로 정의한 것이다. 랏징거 추기경은 교회의구원자의 어머니를 찬미하는 가장 완벽한 표현의 길로서 성모 무염시태 교의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그리스 정교회는 마리아의 무죄성을 마리아 찬미가의 형식 안에 표현하며, 로마 교회는 교의의 형식 안에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교의는 전례의 형식, 즉 신앙의 전례다. 마리아 교의에서 표현된 것들은 다른 모든 교의에도 포함되어 있다. 교의는 현양의 형식이며 우리에게 그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께 영광과 권위를 드리는 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신적 찬미의 형식으로 모든 권위적 가르침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고백, 즉 교회의 신앙은 하느님 자신의 계시를 긍정하고 응답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행위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성숙된다면, 믿음의 목적과 신앙의 신비는 흠숭의 행위를 통한 신앙의 변화다. 또한 전례가 모든 흠숭의 절정인 성체봉헌에 이른다면, 그 전에 신앙은 이미 미사 안으로 흡입된다. 교의는 낡은 신앙을 단순히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참으로 새롭게 함으로써 두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사랑에로의 신앙을 새롭게 해주는 구체적 응답이다. 그 하나는 우리의 신앙이 불확실하고 무기력하며 부정되어진 곳에 용기와 확실성을 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교의와 교회의 권위적 가르침이 신앙의 깊은 이해 안으로 침투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살아 있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진실이다. 성모승천 교의를 정의한 목적은 전교회의 기쁨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하느님의 표징이다. 최근에 교회가 마리아에게 주는 공경의 환희는 루가복음에서 발견된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초기교회의 공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 교의는 믿은 자들의 마음속에 심원한 기쁨을 안겨줘 교회 신앙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신앙은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전망(vision)에 대한 참여의 일종이다" (Ott, [가톨릭 교의의 기초], p. 23). 2. 교회의 생활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이 교회의 생활 속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일차적으로 마리아 교의는 교회의 모든 생활이 본질적으로 마리아적임을 우리에게 재인식시키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전반적인 교회생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느님으로부터 환대되어진 마리아의 삶은 하느님에게로의 완전한 응답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마리아의 자세는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수용되어졌고, 환대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생활이며 교회의 기본 자세이기도 하다. 이차적으로 마리아 교의는 교회의 생활 속에서 부인의 중심적 역할과 관련하여 교회에 빛을 던져준다. 그러므로 이 교의의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 어머니에 대해서는 공경을 드러기 위함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교의는 교회와 사회 모두를 위해 추진하는 내용을 담는다. 교황 비오 12세는 그의 사도헌장 안에서 성모 승천에 대한 정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성모승천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요청으로서,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그리스도 신비체를 위한 마리아의 모성애를 발전시킨다. 마리아의 교의에 대한 정의는 마리아의 영광스런 삶의 표본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보다 나은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 성부의 뜻을 충만시키는 것이며, 다른 이의 행복을 보살피는 것이며, 또한 세상을 영혼과 육신의 현양에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의 영육승천은 그 교의를 정의할 당시의 유물론적 이론과 대립된 상황 속에서 하늘의 영광 안에 희망을 심어준다. 마지막으로 성모승천에 대한 믿음은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Munificentissimus Deus 47-51참조). 3. 교회의 본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리아론은 교회와 마리아의 주체적 관계를 통해서 잘 보존되어왔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에 대한 어떤 개별적인 칙서를 공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 교부들이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어머니를 교회 본성의 내용으로 택하게 됨으로써 마리아의 위치가 교회헌장 속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성암브로시오에 의하며, 하느님의 모친은 신앙, 사랑,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주는 교회의 전형이다(교회헌장).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접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마리아 자신의 본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중점적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교황 비오 9세와 비오 12세는 마리아 교의를 경건한 마음으로 정의하였다. 그러한 정의는 궁극적으로 최고의 교도권의 실행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성서와 성전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가톨릭 주교와 신앙에 대한 동의다. 이러한 동의의 근원은 교회 안의 성령의 현존이다. 그 동의는 단지 인간적 요소나 인간적 힘에 의해서만은 불가능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들에 의해 이루어진 보편적인 동의를 신학의 기술적 언어 안에서 신앙의 의미(sensusfidei)로 표현하고 있다. "성령의 도유(塗油)를 받는 신도들의 총체는(1요한2,20.27참조)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니, 주교들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할 때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 신앙심에서 이 특성이 드러난다" (교회헌장 12). (교회헌장 해석자에 의하면 신앙의 의미(sensus fidei)는 교회의 일원이 신앙의 사실 속에 소유하는 감각과 관련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 있는 조직이며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몸과 영혼은 근본적으로 성령이다. 최근에 마리아의 교의 안에 이러한 교회의 내적 본성이 그 자체로 드러나고 있다. 교황은 새로운 계시를 정의하지도 않고 정의할 수도 없다. 교황은 주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성실하게 섬기도록 하며, 주교들은 신적 동의와 교의에 대한 성전의 증거를 시험하고 최종적으로 성서적 기본 안에 성전을 시험한다. 주교들은 이러한 교의가 신적 계시의 부분임을 믿고 마지막으로 교도권에 인장을 찍는다. 그래서 그들은 교의가 신앙의 자유에 속한다고 말한다. 성모 승천에 대한 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의 권위와 사도 성베드로와 성바울로의 권위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 의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시고 원죄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가 하늘의 영광에로 영육이 들어올려졌음을 교의로서 정의하며 제정하고 선포한다." 1.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 우리는 이 장에서 구원자의 어머니와 관련해서 교회가 공적이고 권위있는 사도신경으로부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가르침의 기초를 성서와 성전 속에서 발견하고, 이러한 교의의 내적 관계를 상호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깊게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의 후기 과제는 마리아로의 의미를 고려하는 것이다. 예컨대 마리아론은 마리아의 모든 것에 대한 기초적인 원리와 질서를 성서와 성전으로부터 근거를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론의 의미를 추적하기 전에 먼저 성서의 기본적 근원과 전통의 보존으로부터 마리아의 실재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내용을 명확히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1. 마리아 교의에 관한 개요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개요는 칼 라너가 언급한 '현존하는 자유'를 주요 핵심으로 삼고 포괄하려고 한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어머니시다." 이러한 모자 관계는 자연적인 방식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얻어진 신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자유로이 처분할 때만이 이해가 가능하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그녀의 태중에 잉태해서 그 아들이 일찍이 취한 인간성과 가정적 결합에 의해서 참으로 '주님의 어머니'(루가1,43참조)가 된다. (그리스도 강생 후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신적 모자 관계는 '그녀의 신앙'에 의해서 성립되어진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축복받았으며 당신 태중의 아기 또한 축복받았습니다"(루가1,42). "시므온은 영에 이끌리어 성전으로 갔다. 부모가 아기에 관한 율법 규정을 지키려고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자 시므온은 아기를 두 팔로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여 이렇게 말했다. '주재자시여,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야 당신 종을 평안하게 풀어주시나이다. 과연 제 눈으로 당신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친히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신 것, 이방 민족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로소이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루가2,27). 이 사건은 결코 생물학적인 발생이 아니다. 이 사건에 대한 마리아 신앙의 결과는 그녀의 개인적 삶의 역사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모자 관계에 대한 확고함에 속한다. 달리 말하면, 전체 구원사의 공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신적 모자 관계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자유로운 의지의 수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강생을 이룬 은총은 세상을 위한 수용이며, 그것은 인류를 위한 하느님 구원 행위에로의 진실된 참여다. 요한 복음 19장 26-27절은 십자가 아래 서 있는 마리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십자가는 구원의 나무며, 마리아는 그 구원의 나무 밑에 단순히 한 '여인'으로 서 있다. 그녀는 두번째 하와며 구원자의 어머니다. 여기서 구원의 은총을 수용하는 마리아의 기능이 그리스도의 어머니에 속한다. 그 기능은 그녀의 전생애를 통해서 구원의 '시간'에로까지(요한2,4참조) 이어진다. 마리아가 공속자로 불리우는 것도 바로 그 구원의 시간까지의 역할이며, 아직도 그 공속자의 개념이 가톨릭 신학에서는 쟁점이 되고 있다. 구원사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신적 모자 관계)과 마리아의 거룩한 인격 (마리아가 믿었기 때문에 축복받았다)은 마리아 자신 안에서 결합되며, 하나는 다른 하나를 상호적으로 소통시킨다. 교회는 구원사업에서 마리아의 중심적 역할이 인류를 위해 구원자를 잉태함과 동시에 마리아 자신을 거룩하게 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칼 라너에 의하면, 마리아는 영육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된다고 했다. 즉, 마리아가 우주의 여왕이 되어서 모든 죄악과 죽음을 물리친 승리 안에 최고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 우주의 여왕이라는 개념은 하느님의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영원한 현존의 실재상을 지시하며, 구원사 속에서 마리아의 역할이 그녀의 승천과 더불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교회의 삶과 개개인의 신앙 속에서 자신의 일부분을 지속시켜 나간다. 결국 마리아가 모든 은총의 공급자이며, 우주의 여왕이라는 자격은 아들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2. 다른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 공동체, 명백히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톨릭 교회와 비교되는 권위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아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기도책이나 전례, 그리고 그들의 고백의 입장이나 그들 관상 신학자들의 견해를 통해서만이 겨우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마리아에 대한 다른 교회의 입장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희랍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모친과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깊은 공경을 바친다. 그들의 가르침과 공경은 찬미가와 전례에 표현되어 있으며, 마리아 축일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주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모승천이나 무염시태 교의를 정의한 교회의 해석에는 뜻을 같이하지 않지만 교의의 본체(Substance)에는 동의한다. 성공회(High Church)는 정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마리아에 대해서 폐쇄적이다. 성공회 공동체의 공적 예속 속에서의 마리아의 위치는 어느 면으로나 정교회와 비교될 수가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즉, 성공회는 보통 마리아에 대한 최근의 교의를 승인하지는 않지만 소수의 그들 신학자들은 교회 전통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특별히 마리아에 대한 내용의 기술에 있어서 공속자와 은총의 중재자를 승인한다. 복음 성공회는 일반적으로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는 회의적이지만, 성서 안에서의 마리아의 위치는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근원을 신앙 안에서 갖지 않고 단지 자연종교 안에서 갖는다. 다른 모든 기독교들도 복음 성공회와 비슷한 관점을 갖는다. 그러나 최근에 이들 모두에게 공통된 생각은 구원사 안에서 마리아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적응을 갖는 것은 희망의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루터교는 다른 기독교 종교와 비교하여볼 때 여러 모로 폐쇄적이다. 그러나 다른 기독교들보다 마리아에 관한 교회가르침에 대해서는 개방적이다. 최근에는 마리아에 대한 루터 자신의 신심을 재발견함으로써 새로운 감명을 주고 있다. 루터교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마리아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루터교도 일반적으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기피하며, 특히 공적인 공경의 형식을 피한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마리아에 대해서 이중 관점을 진술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관점은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언론기자들이 그들 가운데 몇 명이 마리아의 지위를 낮게 평가했다고 보도함으로써 공의회 교부들의 의향을 왜곡시켰다. 공의회의 주제는 오늘날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회헌장 속에 어떻게 포함되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 분리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주된 안건이었다. 처음에는 마리아에 대한 특별 헌장을 봉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없이 교회를 언급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1953년 9월 30일에 이탈리아 주교가 마리아에 대한 문서를 교회에 관한 문서와 접근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산토스 추기경과 더불어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 사람들은 마리아가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교회 문서 안에 마리아의 특권이나 영광을 접목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퀘니히 추기경과 그의 동조자들은 마리아는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교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만약에 마리아를 교회와 분리시켰을 경우에 겪게 되는 괴로움과 고통은 마리아에 대한 특수한 신심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신심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와 기독교인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겸손해질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공의회가 이러한 질의 등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의 마리아의 위치를 낮게 평가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실 이러한 질의들은 이미 공의회 이전에 던져진 것들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마리아의 위치를 교회문서로 포함시킬 것인지, 아니면 분리된 문서로 보존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투표결과를 통해서 결정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문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표가 1,114표 나왔고, 분리시켜야 한다는 표가 1,074표 나와서 마리아에 관한 장이 교회의 문서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교회헌장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천주의 모친 동정녀 동정 마리아에 대한 제8장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주목을 끈다. "신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 성도들과 교류하는 것이니,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공경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교회법 1).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자는 자발적으로 마리아를 공경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자들과 성도들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들은 마리아의 공경에 적응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 공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연적인 일부분이다. 마리아에 대한 공의회 가르침의 전체 내용이 이 부분에 확장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마리아에 대한 두 가지 긍정적인 면을 재확인하게 된다. 우선 하느님 은총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을 포괄한다. 그러나 모든 창조물 가운데 마리아의 위치는 하느님의 모친으로서, 구원자의 모친으로서, 성부의 딸과 성령의 궁전으로서 축복받은 성삼과의 유일한 관계 안에 있다. 이것은 마리아가 현양 안에 구원되어 있고, 그녀의 아들 구원자와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아담 계열의 지체인 마리아의 인간성으로 하여금 마리아는 구원되어 있는 자들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마리아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우리와 일치함은 그녀가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인간성을 통해서다. 마리아의 이와 같은 역할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일치하는 것이며, 사랑의 자유로운 응답 안에 교회 신도들의 신앙을 심어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는 교회 지체들의 어머니로서 구원되어진 자다." 라고 말했다. 마리아는 교회 지체의 선구자며 신앙과 사랑의 표본이다. 공의회는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을 달리 설명하지는 않지만, 혈육을 취하신 말씀과 하느님의 신비 속에서 복되신 동정녀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모친이며 인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구원기능에 대한 의무를 성실히 밝히고 있다. 구원사 안에서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그녀의 유일한 기능을 완성시키고 있다. 마리아는 인류를 위해 하느님 아들의 잉태를 준비하였고 완성시켰다. 하느님은 그 사실을 예언자와 구약의 백성에게 암시하였다. 따라서 마리아는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 아들로부터 새로운 구원 계획의 시작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에 의해서 인형처럼 단순하게 사용되어지지 않는다.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는 하느님 육화와 우리 구원의 근본적인 부분을 이루며, 그녀의 전생애는 구원의 신비를 얻기 위해 아들과 함께 아들 밑에서 아들의 인격과 행적을 따른다. 구원사업에 있어서 그녀의 협조는 신앙의 순명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협조를 "전인류와 마리아 자신을 위한 구원의 동기로서 신앙의 순명"이라고 했다. 마리아는 새로운 하와다. 마리아의 이러한 일치와 협조는 원죄 없이 잉태한 첫 순간에서부터 이루어진다. 그녀는 은총을 가득 입었다(루가1,28참조). 공의회는 마리아가 동정잉태의 시간으로부터 그 아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구원사업 안에서 아들과 함께 공속자이었음을 개괄한다. 57절에는 그리스도 출생 이전, 출생 동안, 출생 이후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이 잘 표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이고 역사적이며 성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56절에는 예수 유년사와 그 유년사 안에서 마리아가 예수 어머니로서 했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가나에서 갈라비로에 이르기까지 아들의 공적 삶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이 기술되어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동정녀 마리아의 신앙은 십자가 아래 고통하는 어머니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마리아의 최종적 동의(신앙의 순명)는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에서 결론 맺는다. 교회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이 성령강림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술되어 있다. 성령강림을 위한 기도도 개요되어 있다. 하늘로의 영육의 승천과 만물의 여왕으로서의 마리아 현양은 무염시태의 영원한 결론인 동정녀의 삶과 그 아들에 대한 완전한 표현으로 암시된다. 공의회는 인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기능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묵상을 파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요시한다. 더 나아가 마리아 공경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신앙의 일치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진전시킨다고 했다. 마리아가 구원사업의 일치 안에서 함께 협력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마리아는 은총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시다. 은총의 계획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영보의 그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은 후에도 마리아의 모성은 당신 아드님을 형제들을 돌보아주신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또 표본으로서 교회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어머니와 표본은 상호 긴밀한 일치를 이룬다. 신앙의 순명을 통해서 마리아는 성부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았고, "그분께서는 미라 알아(택하신) 이들을 당신 아드님 모습과 한 모양이 되도록 예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드님이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로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8,29). 마리아는 신도들의 어머니가 되셨고, 이 신도들을 기르는데 모성애를 통하여 협력하셨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신앙,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 안에 교회의 전형이다. 공의회는 마리아가 어떻게 신도들과 교회의 전형으로서 이해되어지는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마리아의 깊은 성덕에 의해서 교회는 마리아 자신이 된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와 동정녀로서 마리아의 내적인 본성을 실현한다.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낳았고, 동정녀로서의 교회는 신랑에 바친 완전한 신의를 깨끗이 지킨다. 마리아 안에서의 교회는 이미 마리아가 완덕(에페5,27참조) 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모든 신도들은 마리아가 완덕을 따름으로써 마리아를 교회의 전형으로 바라본다. 교회는 마리아를 묵상함으로써 더욱 깊이 육화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다. 마리아는 그녀의 인격 안에서 신앙의 중요한 요소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마리아와 그 아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받고 따르는 것을 설교해야 한다. 교회 사도직 활동 역시 그리스도를 낳으신 마리아를 따르고 본받음으로써 그 아들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도록 구해야 한다. 여기에서 공의회는 마리아 공경에 대한 뿌리를 초기교회에서 찾아 우리에게 새롭게 환기시켜주며, 신도들로 하여금 마리아를 공경하도록 북돋워준다. 또한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그러한 공경을 상기시켜주며, 하느님 모친에 대한 특별한 존엄을 호칭하는 것에서부터 더욱 경고해 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4년 2월 2일 그의 사도적 권고에서 마리아 공경에 대한 서간을 보냈다.) 하늘의 영광 속에 영혼과 육신이 들어올려진 마리아는 교회의위상이며 이 세상에서 모든 교회가 완덕에 임하게 하는 시발점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희망의 표본이다. 마리아에 관한 구절과 교회의 모든 헌장은 하느님의 어머니와 인류의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기도로 끝맺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장 거룩하게 일치된 삼위일체에 영광을 드림으로써 간구한다. 르네 로랑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포괄적인 변화가 '특권'에서 '참여'로 변경되었음을 기술했다. 마리아가 우리와 함께 참여한 것은 마리아의 인간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녀에게 준 하느님의 은총이다. 공의회는 마리아가 어떻게 인간의 상황 속에 참여하였고 우리의 구원에 참여하였는가를 제시한다. 동정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와 교회의 어머니로서 모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헌장이 베드로 대성전에서 선포된 이후,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리아를 엄숙하게 '교회의 어머니'로 천명하였으며, 그 천명이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칭호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내린 이유는, 마리아가 그녀의 희생을 통해서 하느님 은총에 가장 완벽한 응답을 드러냈으며 모든 사람을 위해서 마리아는 교회 삶의 표본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는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하느님 부름에 응답했으며, 특별한 의미에서 하느님에게로 우리의 응답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하여 아들 안에서 그 아들들의 어머니, 즉 교회의 어머니가 되었다. 2. 성서 안에서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위치 1. 서론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신학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 사이의 내적 관계뿐만 아니라 교회 가르침의 표징에 대한 체계적 조명을 비춰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교회 가르침의 성서적 기초를 체계적으로 시도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을 위해 먼저 교회 가르침에 대한 성서의 기본적인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며, 다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어떠한 발전을 거쳐왔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 성서는 사도교회의 긴본 가르침을 보다 확실히 증거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참된 해석과 관련해서 교회만이 궁극적인 말씀을 줄 수 있다. 성령은 교회와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며 성서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하느님 백성과 신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것은 특히 교회 안에서 사도의 권한을 통해서 인도된다. 성령이 우리를 성서 해석에로 인도함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교도권을 통해서 주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삶을 알고 그를 따르기 위해서 성서를 공부한다. 우리는 성서에서 초기교회가 어떻게 활동하였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작용했는가를 알게 된다. 성서 해석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우리의 성서 해석은 신구약 성서 안에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 의향의 반사를 통한 하느님을 묵상하는 형식이어야 한다. 성서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며,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 속에 드러낸 구원사건의 징표다. 에언자들과 구약성서의 징표를 이교인들에게 보여준다. 이러한 사건의 징표는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누구이며, 그분이 무엇을 행하였는가를 그들에게 계시한다. 그리하여 신약의 사도적 교회는 인류 역사 안에 하느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징표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세상에 선포한다. 초기교회의 예언자와 가르치는 자, 사도들과 복음 사가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누구이며,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선포한다. 그들은 구약에 바탕을 두어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하느님 구원의 새로운 징표를 보여주었으며,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되어 있고 역사는 그리스도가 심판하기 위해 오실 마지막 의미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특수한 시간과 장소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적의 징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그들의 의향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성서에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보도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특히 신약에 있어서는 중요한 사실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보려고 한다(루가1,43참조). 그러나 그러한 시각을 갖기 전에 마리아에 대한 공적 선언을 조명한 사도의 교회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리아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던 사도들의 설교가 언제, 어디서 행해졌으며, 왜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원에 대한 해석의 조명 안에서 행해졌는가를 재확인하는 데 접근해야 할 것이다. 2.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초기교회의 조명 1. 부활 전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의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가 첫 기적을 베풀 때 뒷전에 조용히 물러나 있었으며, 제자들도 보통여인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였다. 그들은 마리아를 스승의 어머니로서 존경하였지만 마리아는 그들로부터 간격을 두고 지냈다. 제자들 역시 마리아보다는 예수에게 더 관심을 두었다. "이윽고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는데, 그들은 밖에 서서 그분을 불러내려고 누군가를 들여보냈다. 예수 주위에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게는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마르3,31-35;마태 12,46-50;루가8,19-21참조).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 현존한다.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던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시오.'하셨다. 그래서 그 시간부터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집)에 모셨다"(요한19,26-27). 제자들은 에수의 공생활 동안 예수의 존재와 그의 선교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 전에는 마리아의 징표를 이해할 수 없었다. 2. 부활 이후 부활과 더불어 사도들과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예수가 누구였으며 그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무엇을 이룩하였는가를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사도시기는 보다 완전히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사업을 이해하는 시기로서, 사도들과 초기교회는 그리스도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그가 행한 많은 징표들을 알기 시작했고, 그의 공적 활동시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율법서와 예언서에 의해 미리 예언되었던 것들을 완성시켰는데, 그것들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렸다(루가24,27참조). 우리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이러한 복음선포 과정을 통해서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졌음을 암시받는다. 마리아는 교회 중심에서 오른쪽에 좌정하게 되며, 사도들은 나자렛 예수가 누구인가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실현을 통해서 알게 됨으로써 마리아를 그들의 중심에 모시게 된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리아의 다른 친척들 (주님의 형들)이 다락방에 함께 모여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사도2,14참조). 3. 성령강림과 그 후 성령강림과 더불어 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 두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곧 여러분이 십자가형에 처한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사도2,36)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예수가 나자렛 마을에서 갈릴래아 지방에 이르기까지 기적을 베풀고 선교하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통해서 그의 신적 선교를 제시하였다. 백성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성령강림 아침에 생겼던 사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인격의 표징을 알렸다. 그는 예언자들이 어떻게 복음이 완성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구약을 끌어냈던 대로 오랫 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고, 그래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졌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이미 선포된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도 나자렛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며, '주님'이고, '하느님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사도3,12-26;4,8-12;7,2-53;8,30-35;9,20참조). 사도들의 보여주었던 것은 주님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이다. 그러나 주님 스스로 그 어머니를 요한과 사도들의 어머니로 모시게 한 것 외에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가 초기교회의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전통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자, 주님의 어머니는 에페소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고, 최근의 탐구는 요한을 통해서 유년사의 많은 것들이 전해졌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마리아가 돌아가신 후 교회의 공적 선언의 일부가 되었고 그래서 교회조명의 대상이 되었다.) 4.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 밖에서 초기교회의 선교 초기교회는 유대 백성들의 범위 안에서 나자렛 예수의 설교와 기적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며, 교회의 공적선언은 그의 공적 활동의 사건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고르넬리오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사도행전10,37-43)는 요단 강에서 요한에 의한 그의 세례시기로부터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공적 활동에 대한 말씀의 선포로 총괄한다. 공적 활동의 다양한 사건들이 재현되어졌고, 그것들의 참된 징표가 부활의 조명 속에 드러났다. 이것이 베드로와 바울로의 설교의 기본 내용이며, 복음을 확장하고 교회를 설립했던 사도들의 설교의 기본 내용이기도 하다. 그들 설교의 기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릭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하느님의 능력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고린1,23-24). 바울로의 서간은 구원사건의 결과로서 성장하는 유년기 교회 안에서 신도들의 삶을 규칙적으로 이끌고 오해를 정정하고 있다. 특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 대한 공경을 갖추고 있다. 강생 후 54-55년경에 에페소에서 씌어진 갈라디아 서간은 바울로의 최초의 서간들 중의 하나로 보존되어 있다. 갈라디아 4장 4절에서 바울로는 '시간이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이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그는 마리아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모두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출생시킨 여인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속한다는 심원한 징표를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동정녀 출산에 있어서 오로지 '여인'에 대한 면만을 보기도 한다. 3. 동정 마리아에 관한 신약성서의 기초적 조명 1. 마르코 복음 사도의 가르침이 사도적 교회 안에서 대화를 필요로 할때, 복음사가는 복음이라는 형태 안에서 사도적 선포를 존재케 한다. 이러한 최초의 주제가 마르코복음이다. 전통에 의하면 마르코는 베드로의 제자이다. 따라서 그의 복음 주제 또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기초로 하고 있다. 마르코복음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것은 복음의 기초 형태와 유대 백성의 견고성을 복음화하기 시작할 무렵의 사도의 기본 설교 내용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르넬리오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 과정에서 보았듯이, 마르코복음은 요단 강의 세례로 시작해서 죽음과 부활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복음은 마르코가 예수 집단에서 알게 된 주님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관찰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예컨대, 마르코는 예수의 공생활 속에 나타난 아주 흥미있는 두 가지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가 설교하는 동안 어머니와 친척들이 군중 속에 와 있음을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알렸는데 예수는 놀라운 표현을 하였다. 사람들은 예수가 율법의 완성을 설교하는 자로서 구약의 네 번째 계명 (출애20,12참조)을 따르고 있음을 알았으나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그분은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게는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마르코는 두 가지 사실, 즉 '예수 어머니외 실재성과 역사성'을 확고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육적인 모성보다 영적인 모성이다. 성부가 말한 대로 마리아는 그녀의 태중에 아이를 잉태하기 전에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예수를 잉태한 것이다. (마르코가 영혼과 육신 사이의 대조를 명백히 밝히는 반면, 루가는 영육의 대조를 포괄하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 여기서 예수는 요셉과 관계없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의 형제'다. 최근에는 예수와 그의 형제들 사이의 친족관계와 관련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4세기 말에 헬비디우는 마리아가 예수를 출생하고 난 후 에 요셉과 결혼했으며 그 후 다른 아이들을 출산하였는데, 그들을 복음에서는 예수 형제들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교회는 이러한 이론을 무시하고 있지만 기독교 성서학자들은 지지하고 있다. 헬비디우는 마르코 복음 6장 3절에 기초해서 그의 논쟁을 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마리아와 요셉 사이의 아이들을 예수의 '형제 자매'라 부르지 않고 단순히 '형제' 즉 '친척'이라고 부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마리아의 아들'은 '예수'라고 부르고 있다. 성에피파니우스 (4세가 말 유프러스 살라미스의 주교)는 '예수의 형제'들은 결혼 후에 얻은 요셉의 아이들이라는 이론(異論)을 제기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이론을 지지하는 자는 거의 없다. 성제롬은 헬비디우스의 이론과는 달리 '형제는 예수의 사촌이라고 논증한다. 이러한 논쟁은 그 동안 교회에서 자주 거론되어왔던 쟁점이다. 제롬 이후에 그 논재은 초기교회의 해석을 증거하는 데서 제시되어졌고, 최근에는 이러한 모든 증거와 이론들이 자세히 분석되고 검토되고 있다. 존 맥휴는 그의 책 [신약에서의 예수의 어머니]에서 제롬이 택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는 역사적 증거는 아니지만 예수 형제는 실제로 사촌들로서 혈연 형제가 아닌 의붓 형제로 보고 있다.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세례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공적 사명에 집중하여 사도적 교회의 초기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성실히 반영하고 있다. 마리아는 실제로 예수 어머니로서 수용되어졌고, 아들과의 모자관계는 마르코 복음 3장 31-35절에 집중됨으로써 영육의 자연적 결합을 인정하고 긍정했다. 따라서 마리아에 대한 마르코 복음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초기 삶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고 있다. 2. 마태오복음 마태오복음은 초기교회의 선포와 반응 안에서 새로운 발 전을 조명한다. 교회가 늘 그러했듯이, 교회 삶의 시작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공적 사명을 배경을 갖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년사의 설화"는 마태오복음에서 발견되고 루가 복음에서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다. 여기서는 마태오복음의 그리스도의 유년사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텍스트와 관련해서 문제점들을 지적해보기로 하겠다. 가. 정보의 근원 어디서 마태오와 루가가 예수 유년사의 정보를 끌어왔는가?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정보는 유대인의 공동체 (슐만)에 의해서 보존되었거나 전승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0년경에 마태오와 루가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공적 선언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유대 공동체는 예수 친척들과 '예수의 형제들' (야곱은 최초의 주교가 되었고, 사촌 시몬이 그의 뒤를 계승하였다. 사도 1,14 참조)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예수의 출생에 대한 전통을 보존하였다. 마태오복음의 예수 유년사는 먼저 요셉과 관련되며, 루가 복음의 예수 유년사는 마리아와 관련을 맺고 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당신 마음속에 새기어 곰곰이 생각하였다"(루가2,19)."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자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가2,51). 나. 유년사에 대한 역사성 최근 들어서 일부 성서학자들은 예수 출생과 유년기와 관련된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유년사의 역사적 실재는 객관적으로 후기에 이르러서 그 가치를 지니며, 그리스도 강생 후 60년이 지나서 사적인 것이 교회의 공적 선언으로 접근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핵심을 신학적 주제로 조명하여 역사적 사건의 구원적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의 주제가 교회 안의 상황을 공적으로 만든다. 다. 유년사의 문학적 형식 우리는 이러한 역사성에 대한 의혹보다 문학적 형식에 더 큰 의문을 갖게 된다. 이미 예수 출생과 유년기와 관련된 전통은 예수를 추종했던 무리들에 의해서 보존되고 전승된 것으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부활의 빛과 구약성서의 약속안에서-특히 메시아적 약속을 이어받은 다윗 가문과 관련된 곳에서-완성된다. 마태오와 루가가 이러한 전통을 수용한 것은 그것의 의미와 신학적 표징을 반사한 것으로서, 그들은 사건의 이면에 있는 것들의 신학적 의미의 중요성을 알고 끌어냄으로써 사건을 현실화한다. 문학적 형식은 유대의 미드라쉬(Midrash)에서 주님의 유년기를 현실화하는 것으로 적용한다. 이러한 유사점들은 일부 성서학자들이 유년사 설화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데서 생기게 되며, 최근에 학자들은 "전설적이고 상상적인 자료들이 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유년사 설화와 미드라쉬 사이의 상이성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유년사 설화는 성서의 텍스트에 관한 주석은 아니지만 성서의 사건에 관한 주석이다. 이러한 사건의 징표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서의 텍스트는 미드라쉬니즘에 사용되어진 절차의 역전처럼 인용되었다. 어쨌든 유년사 설화는 메시아 탄생의 구원적 징표를 보여주려는 점에서 흥미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안에 하느님의 중재를 선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화는 '하느님 구원의 복음', 즉 '유년기 복음'이라고 불린다. 마태오는 물론, 이교도인 루가 역시 '유대적 사유'의 세상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오복음에 나타난 예수 유년사의 문학적 형식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마태오는 유대 전통을 따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인격의 표징을 명백히 하였다. 예컨대, 나자렛 예수는 메시아며, 왕이며,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 구원자며,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했다. 마태오가 주님의 탄생을 요셉의 관점으로부터 현실화하였을지라도 그 핵심은 다음의 다섯 가지 관점에서 '아이와 어머니'에 초점을 두고 있다. 1. 마리아와 함게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한 다음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 유향, 몰약을 드림(마태2,11). 2.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 피난길에 나섬(마태2,14) 3. 아기와 그 어머니는 헤로데가 죽을 때가지 이집트에 머뭄(마태2,14). 4. 천사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일러줌(마태2,20) 5. 아기와 그 어머니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옴(마태2,21). 그런데 독자들은 여기서 주님의 어머니와 기적의 장소를 둘러싸고 논쟁을 일으킨다. 즉, 성령의 현존을 허용함에 있어서의 논쟁이다. 여기서 요셉은 성령에 의해 동정녀 태중에 잉태된 아기에 의해 가리워졌다(마태1,18-19참조). '아기와 어머니'를 위한 하느님의 예증과 보살핌은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나타난 사건일지라도 그것은 죄없는 아이들의 살해와 이집트 탈출사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따라서 출생과 유년기에 대한 마태오복음의 분위기는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마태1,23참조). 그리고 작가가들은 어떤 장소의 명칭에 대한 긍정을 쟁점으로 삼고 있다. '베들레헴-이집트-나자렛'과 같은 장소는 이미 잘 알려졌고 확산되었다. 마태오의 관심은 무엇이든지 구원의 역사 속에서의 그들의 징표와 장소적 사건이다. 이러한 장소는 성부와 약속되었던 곳이며, 예언자에 의해 이미 언급되어진 곳이다. 마태오의 유년기 설화는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진 것들이며 구약의 예언자와 약속되어진 충만된 것으로 특징지우고 있다. 여기서 '충만되었다'는 개념에 의미는 기대했던 것을 실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예언자에 의해 암시된 것이 통과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실재는 예언자에게 던져진 기대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서 예언의 충만이다. 그러면 마태오의 유년기 설화의 구조와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ㄱ) 유년기 설화의 구조 ⊙주제의 현황 (마태1,1) ⊙족보 (마태1,2-17) ⊙잉태 (마태1,18-25) ⊙출생 (마태2,1-12) ⊙유년기 (마태2,13-23) (ㄴ) 유년기 설화의 분석 주제의 현황은 개방된 상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서 그는 다윗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이며, 그의 근본은 무엇인가다.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와는 다른 의미로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로 약속되었으며, 어떻게 예언자에 의해서 예언되었으며, 그리고 구원사의 시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한 약속을 지켰는가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창세 12,3과 22,8을 보라. 다윗에게 한 약속은 그의 왕권과 관련해서 2사무엘 7,12-16과 시편 89,20-31, 그리고 132, 11-18을 보라.) 족보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해서 전체 구원사의 내용 안에 예수와 그 어머니를 담고 있다. 족보의 단계는 삼단계 시기로서, 1)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에게로 2) 다윗으로부터 유배로 3) 유배로부터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분리된다.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를 능동적 역사로 끌어올렸는가를 보여주며, 동시대의 역사가 신적 기원에서 기인되었음을 보여준다. 마태오복음 1,15-16절은 이 텍스트의 열쇠로서 족보의 규칙적 바닥을 깨고 있다. '...의 아버지'는 극적으로 파괴된다. "엘리훗은 엘르아잘을 낳았고 엘르아잘은 마딴을 낳았으며 마딴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마태1,15-16). 요셉은 법적 사실을 통해서 예수의 아버지며, 예수의 출생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 실행된 것이다. 예수는 다윗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다. 마태오의 유년기 설화는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고 확장한다. 마태오는 예수 잉태를 설명이 필요치 않는 단순한 것으로 본다. "...그들이 동거하기 전에 몸가진 사실이 드러났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마태1,18). 예수 잉태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는다면 그것은 다윗 가문에 약속한 것이 실현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요셉 (다윗의 아들이라 불리움, 마태1,20참조)과 아이 사이의 법적관계를 통해서 설명되어진다. 루가는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를 부르지만 마태오는 요셉을 통해서 예수를 부른다(마태1,21과 1,25참조). 이러한 '부름'(이름)은 매우 중요한 징표다. 예수는 요셉을 통해서 약속을 이행하게 되며, 사람의 기대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약속을 이행한다. 마태오복음 1장 18절에서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살기 전'에 이미 인간과 상호관계를 갖는다. 이 사실은 마태오복음 1장 25절에서 재확인되었다.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서 아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설명이 필요치 않는,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한 사실이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은 예수가 '우리와 함께 하는 하느님'이라는 사실로부터 주어진다. 복음사가들은 마리아가 자연적, 또는 초자연적 상태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아들과 마리아의 일치는 성령에 기인하며, 마태오복음 1장 20절에서 반복된 사실에 기인한다.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서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추어진 무엇이 있다. 즉, 동정녀 잉태에 대한 암시는 가려진 신비로 남아 있으며, 기적을 통해 묵상되어진 하느님의 중재의 사실로 남아 있다. 마태오복음 1장 19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가능한 해석이 나온다. 성유스틴과 성암브로시오에 의하며 "요셉은 불성실한 마리아를 의심하다."라고 해석한다. 성제롬과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요셉은 마리아의 순결을 확신하면서도 묵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을 발견한다."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에 의하면,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한 의무로부터 마리아를 해방시키기로 원하며, 그녀와 하느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그녀의 비밀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라고 해석하였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다(마태1,18)는 사실에서 에우세비우스의 견해는 이성적인 해석이다.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할 계획을 피하려고 결심하자, 천사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말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 마리아를 당신 아내로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 몸에 수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마태1,20). 나아가 천사의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까지 가르쳐준다. 요셉이 아기 이름까지 부르는 특전을 받음으로써 그는 법적인 아버지, 즉 아이의 양부가 된다(마태1,21참조). 마태오복음 1장 23절은 주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주셨던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예언은 이사야를 통해서(이사7,14참조) 다윗 가문에 전해진다. 이 텍스트의 의미와 관련해서 달톤은 히브리어 'almah'가 결혼시기의 소녀임을 주장하지만 동정녀라는 것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이 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적이 없는 출생이거나 구세주의 방법으로 해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오로지 마리아에 의한 동정 잉태의 결과를 구세사적 예언을 통해서 끌어낸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오가 실재와 충만을 통해서 구약의 감추어진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감추어진 의미는 다만 예언자에 의해서 드러나고, 예언을 완성에로 이끈 주님에 의해서 실현되어진다. 이 텍스트의 첫 번째 관점은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의 인물을 지적한다. 그 아이는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며, 예언자를 통하여 지시된 그 길 안에 있지 않고 육화의 실재 안에 있다. 두 번째 관점은 아이의 어머니에 집중한다. 마리아는 단순히 결혼 적령기의 소녀일 뿐만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동정녀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미가 5장 1절의 예언을 실현한 것으로 현존한다. 즉, 베들레헴의 다윗 가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가 나온다는 말씀이 실현되어진 것이다. 다윗의 아들은 단순히 인간의 지도자로 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흠숭의 대상이다(마태2,11참조). 그에 의해서 이끌어질 하느님 백성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이교도를 포함해서 선의의 인간들은 그들의 정신과 마음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들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며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후손을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창세22,17)라는 약속을 실행할 진실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이것이 육화의 보편적 특징이다. 마태오가 이러한 보편적 특징과 함께 구세적 약속의 완성을 기술하는 길에서 예수와 함께 어머니를 포괄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리스도의 유년기는 이집트로 피난가서 나자렛에 돌아올 때까지의 기간으로 요셉은 '아이와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서 행위의 책임 (마태2,13-14;2,20-21참조)을 가지지만 '아이와 어머니'는 구원의 중심이 된다. 즉, 이스라엘 구원사건의 중심적인 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완성됨을 말한다. 예컨대, 이집트에로의 피난은 탈출을 상기시키며 (신명23,22;호세11,1;마태2,15참조), 죄없는 아이들의 희생은 이사야 35장 3-4절 안에 있는 종의 고통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나자렛 사람으로서 예수는 새로운 삼손에 비유되며, 백성의 새로운 구원자와 재판관으로 비유된다(판관13,5-7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사업과 구원적 죽음에 대한 복음을 암시하는 이 부분은 그 자체가 예언의 형태인만큼 유년기의 설화 부분과 구별된다. (루가2,34-35안에 있는 시므온의 예언처럼 여기에서도 예수의 고난과 그의 어머니의 고통이 예시된다. 종의 고통은 죽음으로부터 탈출로서, 이 세상의 모든 이의 죄를 사하게 될 때 드러나는 구원자의 모습이다.) 마리아의 길에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시상되고 있는 것은 어머니와 아이의 운명의 결집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 보호대상이다. 이러한 보호의 의미는 하느님이 나자렛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나게 하는 부활을 미리 조명하는 것이며, 헤로데에 의한 악의 최종적 상징의 결론으로부터 아이와 어머니를 조명하는 것이다. 마르코복음과 비교해서 마태오복음에 있어서의 새로운 특징은 마리아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위상이다. 아이와 어머니는 마리아의 인격과 그리스도 선교의 가능한 결합의 접근을 통해서 신비의 일치 안에 놓여진다. 마리아는 아들과 함께 구원사의 중심적 사건의 인물로서 그것은 인간을 구하기 위한 하느님의 최종 의향이다. 그녀는 다윗 가문에 자리한 구세적 예언자들과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 실현의 일부분이다. 마리아는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 임마누엘의 어머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며, 제자들의 어머니기 때문에 희망의 어머니다. 아이는 성령에 의해서 여인의 태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다. 그리고 동정녀의 잉태는 마리아와 그 아들이 성령 안에서의 일치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두려움과 기적 안에서 묵상된 사실이다. 아이와 마리아의 유일한 관계는 아들의 잉태로 끝나지 않고 출생 동안, 출생 후에까지도 계속된다. 마리아와 그 아이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의 주체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도구인 요셉은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관계 밖에서 주어진다. 마리아와 그 아들이 성령 안에서의 일치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두려움과 기적 안에서 묵상된 사실이다. 아이와 마리아의 유일한 관게는 아들의 잉태로 끝나지 않고 출생 동안, 출생 후에까지도 계속된다. 마리아와 그 아이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의 주체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도구인 요셉은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관계 밖에서 주어진다. 마태오는 마리아의 인격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지만 마리아의 이름, 마리아의 정배인 요셉, 그리고 동정 출산에 대해서는 긍정한다. 마태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어머니시다."라는 교회의 공적 선언을 마리아에 대한 핵심적 신비로 포괄하고, 상호협조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바울로와 마르코에 있어서 이러한 진술은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교회 관상 주제를 형성한다. 오늘날 이러한 반사와 선언은 루가복음, 요한복음과 더불어 시작한다. 연구과제 1. 왜 유년기 설화와 마태오복음에는 있는데 마르코복음 안에는 없는가? 2. 우리는 마태오복음에서 마리아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3. 유년기 설화의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가? 4. 마태오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태1,22;2,6;2,15;2,17;2,23 5. 마태오복음의 유년기 설화 안에서 1장 16절은 왜 주요 텍스트인가? 3. 루가복음 루가는 신약성서의 모든 저자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심원하고 광범위한 마리아의 위상을 제시한다. 루가복음의 유년기 설화는 초기교회의 가르침과 반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루가복음의 핵심은 단순히 예수의 잉태, 탄생, 유년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안에서 본질적인 부분으로 작용한 마리아의 인격에 더욱 접근하고 있다. 가. 루가복음의 근원 루가는 그의 복음의 첫입문 1장 1-4절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는 사건을 끌어내어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며, 눈으로 본 것을 증거하고 하느님 말씀의 봉사로부터 건네준 것을 우리에게 정확히 보도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ㄱ.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 강림전의 초기교회다. 루가복음의 유년사 이야기의 대부분이 유대법전의 형태와 유사하게 유대인의 강한 특성을 지닌다. 즈가리야의 노래(루가1,67-79)와 마리아의 노래(루가1,46-55)는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전례에 근거를 둔 텍스트다. ㄴ. 요한의 주변에 모였던 제자들은 루가와 요한 사이의 많은 유사점에 있어서 마치 상징적인 숫자의 사용과 같은 것을 암시하였다. ㄷ. 루가 자신은 확실히 마리아가 예수 유년기 설화의 근원임을 우리에게 두 번 언급하고 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기어 곰곰이 생각하였다"(루가2,19).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가2,51). 나. 루가복음의 형태 루가가 이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 형태가 마태오보다 유대법전에 더욱 유사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루가 자신이 그의 복음 입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는 그 자신이 구원의 신비 안에서 통찰한 것을 구원으로 본다. 루가는 다른 성서 작가들이 기록한 것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그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그 근원의 자료들을 질서있게 배열한다. 그는 구원사건의 징표에서 발견되지 않은 주제를 기록된 사건으로 반사하기 위해 마음속에 간직했다. 예컨대, 유년기 설화의 역사적 핵심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마리아에 의해서, 구약의 빛에 희망을 건 예루살렘의 초기교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성에 매혹된 예수의 제자들과 성요한에 의해서 반사된다. 이 모든 것들은 루가가 그 자신의 계획에 따라 성령의 인도로 진행한 것이다. 다. 유년기 설화의 구조 그리스도 유년시절과 탄생의 현존에 있어서 루가의 기본계획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대조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구약의 마지막과 신약의 시작은 구원사 안에서 일어난다. 로랑탱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보와 탄생, 그리고 예수의 탄생 예보와 탄생을 두 개의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하나는 다른 하나를 보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음과 같은 도표의 방식으로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의 탄생 예고를 현실화한다. 루가는 예언자와 하느님 아들 사이의 차이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생물학적 양친과 (비록 그 아들 요한이 기적으로 탄생되었을지라도) 동정녀 마리아의 유일한 모성의 차이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아브라함과 사라, 엘카나와 한나(사무엘 예언자의 양친)와 비슷하게 구약을 대변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구약의 완성이다. 달리 말하면, 구약에서 예언된 것들이 마리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또한 신약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이는 구약의 법에 복종한 즈가리야-엘리사벳과 '은총이 충만한' 마리아 사이을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는 예루살렘의 성전(구약의 중심)과 새로운 통치의 궁전(신약의 그리스도 은총) 사이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즈가리야는 사제로서 거룩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는 하느님이 보내신 자를 만난다. 한편, 신이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높은 자의 영광을 전해준다. 탄생 예보의 접목판
세례자 요한 탄생 예보 (루가 1,5-25) 예수 탄생 예보 (루가1,26-28) 장소:예루살렘의 성전 장소:나자렛 촌락 아버지에게 예보 즈가리야는 사제직을 수행하는 랍비 가문의 한 사제이고, 엘리사벳의 남편이다.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과 후예다. 어머니에게 예보 마리아는 다윗 가문의요셉의 약혼녀다. 양친은 모든 명령을 의혹속에서 통찰하였으며 그리하여 하느님의 입장에서 가치를 갖는다.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 받고 주님은 그녀와 함께 있다. 천사는 인사하지 않고 나타난다, 천사 가 즈가리야에게 나타났을 때, 즈가리야는 당황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즈가리야! (하느님께서)당신의 간구를 들어 주셨으니 당신 아내 엘리사벳이 당신에게 아들은 낳아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시오"(루가1,3) 마리아는 천사 인사 를 받고 몹시 당황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마리아!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두고 보시오.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루가 1,30-31). 그는 주님 앞에서 크게 될 것입니다. 그는 포도주나(독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루가1,15참조). "그는 크게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옥좌를 그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히 야곱의 가문 위에 군림할 것이며 그의 왕권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루가1,32-33참조). 그는 이미 제 어머니 태내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터이니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로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지니고 주님보다 먼저 와서,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돌아서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들의 생각으로 돌아서게 하여, 주님을 맞아들일 백성을 마련할것입니다(루가1,15-17). "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오실 터이니,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분은 거룩하다고 불릴것이니,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루가1,35).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루가1,18) 마리아는 표징 대해서 묻지 않았다. 천사는 엘리사벳을 표징으로 삼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일이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루가1,36-37참조). "저는 늙었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루가1,18)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가1,34). 즈가리야는 신앙에 대한 회의로 벌을 받고 벙어리가 된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가브리엘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말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시오. 그 일이 일어날 그날까지 당신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입니다. 제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당신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루가1,19-20). 마리아는 믿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루가1,38).
탄생의 접목판
라. 마리아의 인격 갈라디아 4장 4절은 '여인'의 신원을 소박하게 제시한다. 마르코 복음 안에 감추어진 모성은 자연적인 모성이다.
마태오는 마리아의 인격적 역할을 깊이 다루지는 않지만, 마리아와 그 아들의 운명 사이의 내적 관게와 마리아의 동정잉태가 불가능한 상태를 지적한다.
그러나 루가는 마리아 인격을 구원사건의 핵심으로 끌어내 아들 곁에서 지켜보는 육화(incarnation)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의 인격적 역할을 깊이 다룬다.
루가는 마리아가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부름을 어떻게 받았는지 보여주며, 마리아의 존재와 인격적 실존의 핵심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격이 형성된다. 이러한 인격 실현이 마리아의 모성 안에 포용된다.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마리아의 유일한 길은 지극히 높은자와 하느님 아들과 성령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삼위일체의 위격의 각자와 관련됨으로써 완전한다. 마리아의 응담이 마리아의 인간성을 완전하게 한다.
루가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 온 것을 강조한다. 세례자 요한 탄생 예보에서는 천사가 엘리사벳에게 나타나지 않고 즈가리야에게 나타났다.
유대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에게 천사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인사하고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다.
그녀는 모성의 징표가 무엇이고 일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마리아의 일치(consent)는 완전한 자유며, 그 자유가 모든 여자의 능력을 포괄하게 된다.
마리아는 천사의 아룀에 설레이거나 의심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마음속으로 찾는다.
달리 말하면, 천사가 하느님의 계획을 마리아에게 아뢰었을 때, 그녀의 반응은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나는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와같이 마리아가 마음을 열어 보이는 반응은 비판적이 아니고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확신하는 행위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하느님과의 자유스런 일치를 이룬다. "당신이 말한 것은 무엇이나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하느님과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일치다. 루가복음인 이러한 마리아의 일치, 즉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마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드러내고 있다.
마리아는 스스로 비천하고 겸손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참으로 왕다운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인격이며, 그녀의 완전한 겸손이며, 하느님 뜻으로의 순명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으로써 완전한 신앙의 징표를 남긴다.
마리아는 하느님 부름에 완전하고 완벽한 응답을 하였다.
교회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마리아가 응답한 성소를 공경한다. 루가는 이러한 공경이 신약의 초기교회에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한 최초의 표현은 루가복음의 방문사에서 발견된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축복받았으며 당신 태중의 아기 또한 축복받았습니다" (루가1,42). 엘리사벳의 이 인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우찌야가 아시라아 군의 총사령관 홀로페르네스이 목을 친 유딧에게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이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 복받은 여자입니다" (유딧13,18). 따라서 마리아는 신약의 유딧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신약 안의 텍스트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호칭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루가1,44참조) 그녀를 찬미한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가 뒤따른다. (1사무엘2,1-10참조).
마리아의 노래는 유년기 설화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구조이며, 예루살렘 안에서 초기교회의 찬미가로서 루가복음을 구성한다.
그것은 마리아 개인의 경험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고 마리아의 길을 이스라엘 역사의 내용으로 확고하게 표현한다.
마리아의 내적 자세는 그녀의 완전한 겸손을, 하느님의 위대함을, 그리고 여종에게 베푼 하느님의 축복을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이와같이 이룩한 것은 이날로부터 세세대대로 나를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위대함은 모든 이스라엘의 대변자들에게서보다는 마리아에게서 더욱 드러난다.
루가는 마리아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시온의 딸로서 보여준다. 시온의 딸은 야훼의 가난한 자를 뜻한다.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 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그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주어라.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너를 구해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스바3,14-17).
마리아의 노래는 시온의 딸의 자세다. 이스라엘의 생존자 마리아가 구원을 약속한 자에게 자신을 '주님의 여종'(루가1,38참조)이라고 낮추어 노래할 때(1사무1,11참조), 주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욥기5,11참조) '당신이 종 이스라엘'을 도우신다(루가1,54참조). 여기서 마리아는 참된 이스라엘의 대변자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을 마리아와 관련해서 실현한다. 즉, 이스라엘 구원자로서 하느님 아들의 잉태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이루어진다.
마. 마리아의 고통을 예언
ㄱ) 베들레험에서 탄생: 요셉의 등장하고 마리아는 첫아이를 낳게 된다. 첫아이의 출생이 이 세상의 옳음과 권위를 드러나게 하며 동시에 양친의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루가2,23 참조).
마리아는 정신적인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아이를 위해 항상 자신을 바치게 될 것이다. 요셉은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이 아이의 탄생을 기적으로 믿게 된다.
루가는 예수의 탄생을 구원의 보편적 징표로 보고 그 아이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음을 기술한다.
ㄴ) 성전 안에 현존: 시므온과의 만남은 또 다른 야훼의 현존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이며 이교도의 영광이 될 구원자를 보게 되는 기쁨에서 비롯된다.
시므온은 그 방향을 아버지에게 돌리지 않고 단지 어머니에게 돌린다. 시므온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고통의 일부를 받게 되며 그러기에 현양되리라는 것을 말한다.
마리아 현존의 의미는 미래의 고통과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순결은 아들이 고난의 길을 걷게 되고, 그 결과 어머니가 이 세상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줌을 의미한다.
33년 후 이스라엘 성 밖의 십자가 위헤서 이러한 상징적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을 예고한다.
ㄷ)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함: 여기서는 마리아의 또 다른 고통, 즉 그 아들의 운명을 예고해준다. 루가는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이 모든 것을 그의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는 것은 마리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당시 이 모든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의심하지 않고 단순하게 새겨 들었다.
마리아의 이러한 단순성에서 바로 그녀의 신앙이 비롯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생각과 뜻을 헤아리고 조명하며 믿는다.
그녀는 성부의 뜻을 그 아들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포괄해서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며 믿는다.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며, 죄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운 존재다. 죄는 하느님 뜻을 거역하는 데서 생겨난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성전에서 발견하는 것은 동정녀 잉태를 재확인하는 일이다.
마리아가 예수에게 "너의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라고 하자 예수는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일에 분주함을 몰랐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루가는 그의 복음에서 마리아의 가장 완전한 위상과 마리아의 인격을 소개하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데서 그녀의 성소의 완전한 징조를 소개한다. (마리아 삶의 내적 비밀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만 가능하고, 구원사 안에서 마리아의 유일한 역할은 인류를 위해서 있게 된다.)
마리아의 인격은 마리아가 인간으로서 완전히 하느님 아들의 육화에 개입하였고,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하느님 부름에 자유로이 응답함으로써 부여된다.
루가에 의해서 우리는 마리아의 위대함, 즉 그녀의 완전한 겸손, 그녀의 신앙, 하느님과 전능하신 권능에로의 그녀의 순명, 그녀의 동정성 등을 배우게 된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하느님이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하기 위해 어떻게 이 여인을 준비시켰는가를 보여준다.
하느님을 잉태하기 전에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 입었으며, 주님은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응답은 완전하고 조건이 없었다.
구원사 안에서 마리아의 징표는 다음과 같이 계시된다. 마리아는 진실한 이스라엘이며, 하느님 구원의 약속에로 성실히 남아 있는 자다.
마리아는 시온의 딸이며, 이스라엘의 유일한 생존자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궁전이며, 새로운 이스라엘(교회)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완전한 자이다.
마지막으로 루가는 구원사 안에서 여자의 기능을 통찰한다. 즉,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몸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역할은 구원사 속에서 부드러움으로 뒷전에 머물고 있다.
연구과제 1. 예수 유년사를 기술하는 데 루가가 사용한 근원은 무엇인가? 2. 루가는 어떻게 이 근원을 사용하였는가?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해석 사이의 관계를 논하라. 3. 우리는 루가의 예수 탄생 예보로부터 마리아 신원에 대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4. 루가는 마리아의 구원 징표를 어떻게 상징하고 있는가? 5. 교회의 마리아 공경을 이해하기 위한 방문사 의미의 징표는 무엇인가? 6.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7. 구원사 속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전 안에서 소년 예수의 현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8. 우리는 신약 안에 근거한 모든 죄와 욕망으로부터 마리아의 자유와 무염시태에 관한 교회의 교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4. 요한복음 루가는 마리아의 인격과 육화 안에서 마리아 역할의 구원적 징표를 제시했고, 아들의 공생활에서 실현된 구원사업 속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제시했다.
요한은 마리아 신비의 이 마지막 관점을 발전시켰다. 성령에 의해서 인도된 마지막 복음사가 요한은 구원자의 어머니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예수 공생활 속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신약의 신학적 관점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 요한복음의 성격 요한은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삶과 구원적 죽음의 신학적 징표로 사용한다. 요한복음은 마르코, 마태오, 그리고 루가복음을 전제로 한, 즉 공관 복음을 전제로 한 최고의 형태다.
공관 복음과 비교해서 요한은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삶을 신학적, 영적 전망을 주는 데 목적을 둔다.
요한은 다만 몇 개의 사건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에 대한 상기는 목격자의 확실성에 따른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작은 행위에 이르기까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 서언 요한은 마태오와 루가가 쓴 유년기 설화를 반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유년기 설화를 쓰지 않았다. 요한은 그의 복음을 소개하기 위한 작업의 주된 주제를 서언에 담고 있으며, 독자에게 복음의 신학적 주제, 빛, 삶, 진리, 등을 소개하고 있다.
다. 말씀의 육화의 어머니 요한은 자신의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항상 예수가 사랑한 제자와 관련시켜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의 어머니'로 불리우게 되고(요한2,1;19,25-26참조) 그녀의 역할은 그 아들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난다. 아들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사이에 거처하시므로 예수의 어머니는 말씀의 육화의 어머니시다.
라. 가나의 혼인잔치 요한복음에서 예수 어머니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언급되어진다. 하나는 가나의 혼인잔치(요한2,1-11참조)이며, 다른 하나는 갈바리오에서 공생활의 시작과 마침이다. 요한은 구원사업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요한2,1-11참조).
가나는 '표적'을 던진 최초의 장소이며, 이 표적(signs)은 예수의 신적 인격과 선교가 계시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표징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현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전반부(요한1,19-12,50)는 이러한 표적과 관련되어 있고, 후반부(요한13,1-20,31)는 이 표적을 실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표적의 목표는 죽음과 부활 안에서 보다 심원한 신앙의 선택이다. 여기서 '신앙'이란 단순한 신뢰를 의미하지 않고 진실로 나자렛 에수가 누구인가를 재인식하는 것이다.
재인식은 흠숭과 제자관계 안에 표현된 육화의 말씀이다. 토마는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대답한다 (요한20,28참조).
요한복음은 예수 어머니와 예수 사이의 대화의 성서다. 마리아가 마을 결혼식에서 술이 부족함을 예수에게 일깨웠을때, 예수는 최초로 그녀의 주의력을 내적 기적의 표적으로 상기시킨다.
"마침 포도주가 모자라서 예수의 어머니가 그분에게 말하였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머니에게 '부인, 부인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2,3-4).
여기서 '시간'이란 사람들에게 천상적 선물을 주는 시간이다. 예수의 어머니는 여기서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예수와 함께 현존하고 있으며, 예수는 그녀가 사람들에게 물질적 영양을 공급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영양을 공급해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예수는 어머니가 자신의 선교를 이미 알고 있음을 이해했다.
"그분의 어머니는 시중꾼들에게 '그가 무엇이든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 하시오'하고 말하였다"(요한2,5).
마리아의 이 말은 시간이 다다르면 모든 것이 상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예수의 끝없는 위대함의 보증이다.
물이 술로 변하는 기적은 첫 표적의 시초다. 예수 육화의 말씀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가져올 새로운 창조의 표적이다.
즉, 구약의 예식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변형된다. 이러한 첫 표적은 처음으로 육화와 구원자의 인격과 선교를 현시하여 결과적으로 제자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천상적 근원과 창조적 힘을 인정한다.
마. 갈바리오 갈바리오에의 실재가 되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아담의 죄로부터 인류를 정화시키고, 존재 안으로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의 피와 물의 흐름은(요한19,34참조) 교회의 성사적 삶의 근원을 뜻한다. 교회가 미래적 실체는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가 '여인'이라고 한, 사랑하는 '모든 제자들의 어머니'라고 선언한 마리아 안에서 인격화된다 (요한19,26-27참조).
마리아의 신앙이 제자들 안에서 신앙 탄생의 원인이 되며, 그것은 갈바리오에서 완성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진실로 모든 믿는 자들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이 신약에서 '공속자'로서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근원이며, 최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래서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와 모형으로 이해되고 신앙의 완전한 표본으로 이해된다.
바. 묵시록(계시의 책) 묵시록 12장에서 교회는 '태양과 더불어 빛나는 여인'으로 현존한다. "한 여인이 태양을 입었는데 달은 그 발 밑에 있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이 있었다"(묵시12,1).
교회의 상은 영광 안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로 나타난다. 지상 교회는 악마의 힘에 의해 공격받는다(묵시12,3-6참조).
요한이 그의 성서 안에서 마리아의 위상을 교회의 인격화로 기술했다면, 교회의 인격화는 천상 영광 안에 새로운 통찰이며, 그것은 또한 사탄과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상 교회의 고통 안에 참여하는 새로운 통찰이다.
요한의 태중에서 말씀이 살로 되기 위해 하느님께 응답하는 여인의 신앙을 교회로 상기시킨다. 이 여인은 교회의 공적 삶에서, 갈바리오 십자가 아래서 구원의 완성을 지켜본다.
구원사 안에서 마리아 역할은 신앙의 행위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네."라고 응답함으로써 순명하는 자세로 이어진다.
3. 교회 가르침의 전승과 발전
1. 서론 우리는 초기 사도교회의 형성시기에 신약이 어떻게 '말씀의 육화의 어머니' 마리아의 인격과 구원사적 역할로 발전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록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발전은 사도시기로 막을 내리지 않고 신앙의 신비 속으로 보다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교회의 본성과 하느님 계시의 충만을 이끌어간다.
사도교회는 마리아가 모든 인간의 마음과 지력과 상상력을 사용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교회의 반사는 그러한 반사의 무한한 근원이며, 미래적 규범이다.
신약 속에 내포된 그러한 반사는 교회의 교의 안에서 미래 발전을 위한 겨자씨로 움트고 있다.
이러한 겨자씨는 다양한 조건 아래서 발아하여 성장하게 된다. 그러한 조건들은 인간이 그리스도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함, 오해된 적용을 끌어내어 왜곡되게 한 것들과 맛서서 사도신앙의 순수함을 방어하는 것으로서 필요하다. 또한 상이한 문화와 시대에 대중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도 필요하다.
교회의 공적 가르침은 과학적 분석시기 이후로 반사되고, 토론의 시기 이후에 정의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기도와 봉헌, 공경의 시기 이후에는 교회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그릇되게 한 자들과 맞서 정의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마음의 모든 근원에로의 완벽한 표출의 결과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활동의 마지막 권위는 아니고, 다만 성령과 더불어 교회를 이끄는 하느님 자신의 권위다. 그분의 권위는 사도의 후계자(교황과 주교단)를 통해서 표출되고, 그들은 공적으로 신앙과 윤리를 통해서 전체 교회를 모으는 것으로 표출된다.
교회의 가르침을 위한 권위는 신앙의 내용을 두 가지 길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의한다.
그 정의는 규정적인것 안에 표현될 수 있는데, 무엇이 이 시기에 명확히 정의되어야 할 반사인가, 무엇이 조직으로서의 결합의 형태인가.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진정 보존되어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최근의 경우에 마리아에 관한 두 가지 교의, 즉 원죄 없이 잉태하심과 승천의 경우가 그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이러한 방법과 유사한 경우지만 그러한 교의를 통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
두 번째 길은 하느님께서 교도권에 공적으로 부여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교회 가르침은 인간 노력의 산출이며 그것은 성령의 인도와 그리스도교의 조직체로서 교회사도 권위의 결정이다.
나아가 교회의 가르침은 반사, 사유, 기도, 그리고 삶의 방법 등을 인도한다.
교회 가르침의 이러한 다양성은 진실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행위다. 진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이며,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을 사유하도록 우리를 자각시킨다.
우리는 하느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같이 않으며,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늘 신앙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적 계시와 대결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과 유사하게 닮으려는 사람들의 영원한 유혹이다.
지금까지의 교회사에서 볼 수 있듯이, 잘못된 가르침은 단지 우리 자신의 선량함 속의 한정된 이해로써 하느님 계시를 측정하는 데서 나타난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 계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측면을 놓고 무엇이 계시의 참된 해석인가를 알려준다. 교회는 주님의 권위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사도의 후계자를 통해서 그것을 수용한다.
어쨌든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 속에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기도, 반사, 그리고 사유에로의 응답을 가능케 한다.
하느님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의 한계를 일깨우고,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고,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인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가르침의 두 가지 관점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2. 일반적인 발전 교회 가르침의 다양한 단계를 우선 네 가지 주된 시대적 구분으로 나누어 통찰하기로 하자.
1. 사도시대 전과 초기 사도시대(2-3세기)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는 몽매한 세상 안에서 첫걸음을 내딛는 단계였다. 교회는 박해를 받았고(그래서 지하교회를 지켜왔다) 사회 속에서 교회의 위치를 찾는 노력이 한창이었다.
박해받는 교회로서 그 박해를 봉헌하는 삶은 신학적인 논쟁을 하는 데 능력의 한계를 낳았다. 초기 신학의 대부분은 이교도의 철학적 세계와 교회 자체 안에서 잘못된 가르침의 작용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진실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라 신학파는 3세기의 교회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요한의 작업을 통해 하와-마리아의 병행주의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구원 안에서의 마리아 역할에 대한 깊은 반응을 가져왔다. (이레네우스와 유스티노 치명자).
교회는 동정녀 출생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되고, 동정녀 그리스도 잉태는 순간으로부터 참된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이해를 하느님 육화의 말씀의 어머니로서 발전시켰다. 이때의 교회 가르침에 대한 발전은 마리아 자신에 대해 체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구원 안에서 마리아의 인격과 역할을 아들과 결부시켰다.
2. 교부들의 전성시대 (니체아 공의회(325)-8세기) 박해시기는 끝났다. 콘스탄티노 이후부터 교회는 공적으로 인정되면서 신학이 꽃피게 되었고, 전례 안에 위대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사람들은 신앙에 헌신적 삶을 바치게 되었다.
특히 희랍철학 속의 희랍문화의 풍요는 복음의 봉사에 사용되었다. 인간의 마음에 철학자들의 관점이 부각되었고, 신앙의 신비가 침투되었으며, 그리고 새로운 통찰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신앙은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이교도, 즉 아리아니즘과 네스토리아니즘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삼위일체의 신비와 관련해서 생기게 되었다.
참된 사도의 신앙, 참된 교회, 그리고 참된 신학은 마리아의 인격과 특권을 이해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러한 발전안에서의 주된 관점은 그리스도가 참된 하느님이며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페소 공의회(431)에서는 마리아가 참된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인정했다.
에페소 공의회 이후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표명은 보편적 교회 안에서 점진적으로 마리아 축일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12월 8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1월 1일은 천주의 모친 성마리아 대축일, 3월 25일은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 8월 15일은 성모 승천 대축일, 9월 8일은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로 지내고 있다.
4세기 무렵에 마리아의 동정성과 관련된 쟁점은 새롭게 전개되어 7세기에 이르러서는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진정되었고 649년 교황 말틴 1세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3. 중세기(8-15세기)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전유럽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미개인들의 회개를 통해서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문명화 과정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공경은 심원한 역할을 하게 되어 여인의 상이 인정되었고, 공격적인 지배로부터의 남성의 개념이 변형되었으며, 마리아의 동정성이 확립되었다.
이때 마리아의 신심의 다양한 형태가 발전하였다. 하느님의 동정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한 순례 장소가 확산되어갔고, 마리아에 대한 성가, 강론, 기도문 등이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축일도 확정되었다. 엘리사벳 방문 축일(7월 2일)이 제정되었고,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7월 16일)의 이름으로 교회가 봉헌되어졌고, 많은 소성당들이 마리아를 기억하기 위해서 축성되었다. 미술가들은 마리아 동상을 조각하였고 그림을 그렸다. 음악가들은 그녀의 영광을 노래하였다.
새로운 수도회의 성장, 즉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가르멜회 등이 생겨나서 그들의 신학과 봉헌된 삶 속에 축복된 동정녀에 대한 특별한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교회 신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몫은 로사리오 기도였다. 특히 도미니코회는 마리아를 위해 새로운 수도회로 선포되었도,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마리아 신비를 묵상하였다.
특히 6세기 이후에 던스 스코터스에 의해서 원죄 없이 잉태한 여인의 신비가 찬미되었다. 우리의 구원 속에 마리아 역할에 대한 이해는 갈바리오의 베르나르도와 보나벤투라, 그리고 아놀드에 의해 확실해졌다.
4. 개혁시기 전 (개혁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루터 자신은 마리아를 열심히 공경하였지만 다른 개혁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리아 신심은 루터 신앙에 대한 기초적 이해의 원칙이었다.
이때의 교회는 개혁주의자들이 마리아론을 거부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따라서 구원 속에서 마리아의 인격과 기능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새로운 사실로 등장했지만 마리아를 그리스도론의 일부로 연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세 전성기에 마리아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분리된 주제로 연구되었을 뿐이다.
마리아에 대한 이해는 성모 무염시태(1854)와 성모승천(1950) 교의에서 발전된 결과는 나타났으며 이 교의들이 신앙의 칙서로 선포되기 이전에는 교회는 단순한 마리아를 공경하고 봉헌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의 칙서로 선포되고 나서부터는 이 교의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두 교의는 마리아 찬미의 최고 형식이다.
3. 교회 가르침의 발전 방식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여기서는 교회 가르침이 어떠한 방식으로 발전되어 나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하나가 공속자로서 마리아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교의로는 정의되지 않았지만 교회의 일반적 가르침 중의 하나다. 다른 하나는 마리아의 동정성과 관련된 교회의 교의다.
1. 구원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 사도교회 이전은 구원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통찰하여, 초기 교부들은 요한 복음 안에 나타난 구원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현저하게 발전시켰다.
예컨대, 하와와 마리아의 병행은 성제롬(420)에 의해서 집약된다. "죽음은 하와를 통해서 오고, 삶은 마리아를 통해서 온다." 1세기 말엽 파피아스(요한을 따른 자)는 묵은 하와와 새로운 하와 사이의 병행을 최초로 이끌어냈다.
이 두 개의 관점은 성유스티노(166)에 의해서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리옹의 성이레네우스(202)는 그것을 신학의 관점으로 포괄했다.
"아담의 아내 하와는 그녀의 불순명 때문에 그 자신의 죽음의 동기가 된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녀의 순명에 의해 인류와 그녀 자신을 위해 구원의 동기가 된다. ... 하와의 불순명이 마리아의 순명에 의해서 근본적인 자유를 갖게 된다. 하와의 동정성이 믿음에로의 거부였다면 마리아의 동정성은 믿음을 통한 수용이다."
이러한 주제는 4세기 교부드에 의해서 채택되어졌고, 특히 시리아의 성에프라임(373)과 5세기경의 네스토리우스와의 쟁점을 갖는 동안 절정에 달하였다. 마리아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주제 아래서 총괄되었다.
1) 마리아의 역할은 죄와 구원, 슬픔과 기쁨, 불순명과 순명 사이의 쟁점을 통해서 아들의 구원적 활동 안에서 이루어진다. 2) 한편으로 마리아는 그 아들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책임진다. 따라서 그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구원의 근원"(이레네우스) "구원의 문"(콘스탄티노플의 프로크루스) "죄로 인한 하와의 고통"(에프라임) "천당에 들어가기 위한 조력자"(닛사의 성그레고리우스) "삶의 근원"(에프라임) "세상 안으로 불멸의 인도"(성요한 다마스코,749) "세상은 마리아를 통해 자유롭게 된다"(암피힐 로치우스, 394) "사탄을 발 아래 짓밟다"(에프라임)
3) 마리아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한정된다. 4) 마리아의 존재는 십자가 아래에서 인류 구원 사건을 결정하는 데서 공속자의 가치를 지닌다.
중세기에 성인과 신학자들은 천사의 아룀에 의해서 마리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로부터 성전에서 아들을 봉헌하는 역할에 주의를 모은다.
이러한 통찰은 갈바리오의 베르나르도(1153)에 의해 발전되고, 성보나벤투라(1274)에 의해 인도된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 선 마리아의 역할은 갈바리오 산에서 우리 죄와 구원의 대가를 치르기 위한 주님의 죽음을 자신의 신적 희생을 봉헌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교황 비오 12세(1958)에 의해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마리아가 아들과 그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십자가 아래에서 새로운 하와로 등장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가 갈바리오 산에서 고독하게 죽어간 아들의 희생과 일치함으로서 새롭게 태어남을 긍정한다(교회헌장 58).
2.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 교회는 성모의 동정성에 대해 세 가지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구별한다. 출생 전의 동정성, 즉 동정잉태, 출생 시기의 동정성, 출생 후의 동정성 등이 그것이다.
신약에서는 출생 전의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도적 교부(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음을 긍정한다.
그러나 출생 동안, 출생 후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통일된 의견을 갖지 못했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육화 말씀을 이해함으로써 반사와 쟁점을 가지며, 봉헌의 삶에 의해서 시작되고, 종교적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숙된다.
마리아 동정성에 대한 쟁점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종교적 경험을 갖게 하며, 육화의 실재를 부정한 도케티스트(Docetist, 그리스도는 다만 가상적인 육신을 가질 뿐이며 그것도 동정녀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자)와 대항한 싸움은 번지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의 잉태와 그의 실제적 출생을 인간으로서 정상 발전한 사실로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마리아 동정성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신약에서 발견되어지고, 이해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단순히 신학자들의 이성을 통한 가르침에 기조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진 것과 성령에 의해서 인도된 것을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수용한다.
연구 과제 1. 성전과 성서의 관계는 무엇인가? 2. 왜 교회의 가르치이 우리의 양심과 결합되어 있는가? 3. 세기를 통해서 마리아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발전에 한 몫을 담당한 요소들을 열거하시오. 4.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공경 우리는 여기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천국의 인도자인 구원의 마리아에 대한 역사적 기원, 신학적 동기, 그리고 마지막 목적을 간략히 통찰해보자.
1. 역사적 기반 이것은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져야 한다. 하느님의 파견자인 천사가 나자렛 처녀에게 보여준 존경과 영광의 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천사는 하느님이 그녀에게 행하였던 것 (은총의 충만, 주님이 함께하심)과 그녀에게 주어진 성소 때문에 존경하고 영광을 드린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마리아를 보자마자 공경을 드린다. 예수의 공생활 동안에도 익명의 여인이 예수의 어머니에게 공경을 드린다. 이러한 마리아의 위대함의 근원은 그녀의 신앙이다.
부활 후 초기교회는 그들의 중심에 마리아를 모시고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공경했으며, 예루살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공경할 무렵부터 마리아는 전례 안에서도 공경을 받게 되었다. 마태오, 루가 요한 복음에서 보았듯이 1세기 반경에 초기교회는 구원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깊이 이해했고, 보편적 교회를 통해서 마리아의 공경을 확산해 나갔다.
2세기 때는 로마 박해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마리아 공경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었으며, 3세기 때는 박해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교회확립의 과정 속에서 마리아가 교회상으로 부각되었다. 4세기 때 비로소 교회는 확립되고, 마리아 공경은 새롭게 정립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발전해왔다.
2. 신학적 동기 마리아 공경에 대한 신학적 동기는 하느님에 의해 마리아가 간택되었다는 데에 있다. 그의 성소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마리아를 선택하고, 마리아를 통해서 구원사의 중심적 사건을 준비한다.
그 간택된 사랑과 소통 때문에 마리아는 공경받을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그녀를 사랑하여 삼위의 어머니가 되도록 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은 그녀를 어머니로 모셨고, 성령은 그녀를 그 아들과의 일치 안에서 보호하셨다.
따라서 동정녀 마리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사랑되어지고, 찬미되어지고, 공경되어진다.
마리아의 간택, 즉 성소는 추상적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존재를 감싸고 있다. 하느님은 그녀와 함께 계시므로 하느님 안에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 공경은 그녀의 인사 속에 내포된 두가지 주요한 사실에 바탕을 둔다. 한 가지 사실은 하느님의 부름에 대한 마리아의 완전한 응답 (성부의 뜻에 절대적인 순명과 신앙)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과의 어머니 관계 (태중의 결실)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모든 여자들 가운데서 찬미받게 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완전하고 결함이 없이 믿었기 때문에 존재하며, 그녀의 신앙이 동정 잉태의 순간으로부터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죽음을 넘어서까지 작용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으며 찬미받는다.
3. 궁극적인 목적 하느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공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접근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구원의 마리아'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자백으로서 청원기도의 마지막이다.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그리스도와 만나기 위해서 마리아가 필요하듯이,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마리아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자녀가 되기 위해 마리아를 필요로 한다.
4. 신학적인 분석 1. 마리아 신심과 공경의 본성 마리아 공경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발생하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재인식(Recognition)과 상호성(Intercession)이다.
가. 재인식(Recognition)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행하였던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인식하는 것이며,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와 인류 구원을 성취한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목적은 그녀를 통해서 그녀에게 행해졌던 위대한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다. 이것이 교회의 공적 예식의 전례 안에서 마리아의 지위를 인정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다.
그리고 교회가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과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 사이에 갖는 구분을 짓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만이 흠숭을 받으며, 하느님만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다. 신학은 이것을 'Cultus Latriae(흠숭지례)'로 기술한다. 그러나 성인들과 마리아에게 드리는 신심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성인들과 마리아에게 드리는 것은 흠숭이 아니고 공경이다. 이것을 'Cultus Duliae(공경지례)'라고 한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과 유일한 관계를 갖는 자로서,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하느님으로부터 더욱 큰 은총을 입은 자로서 가장 높은 공경의 지위를 갖는다.
이것은 'Cultus Hyperduliae(상경지례)'라고 하며, 마리아의 신심이 하느님의 은총과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재확인이라 함은 하느님 뜻에 순명함으로서 하느님 어머니가 된 마리아의 신앙에 대한 공경이다. 이러한 공경은 십자가 아래서 그 아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그녀의 삶을 통해서 성실하게 이루어진다.
나. 상호성(Intercession) 은총의 질서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마리아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마리아가 하늘에 올림을 받은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져 당신 기도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주신다.
즉, 마리아의 모성은 자녀들이 이 지상 순례길에서 당하는 위험과 고통을 돌보아주고, 하느님 왕국에로 인도한다(교회헌장62 참조).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기도는 그녀의 협력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 속에서 그녀의 위대한 역할을 재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전례(미사와 기도문)에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의 성소 안에서 전교회를 위해 마리아의 도움을 청하며,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를 충생케 하고 성숙되도록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따르는 길에서나 묵상과 기도의 길에서 마리아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이 마리아를 공경하는 주요한 기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를 완전히 구원된 자로 내세운다. 마리아는 희망과 사랑인만큼 완전한 신앙의 모형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접근하는 길에서 그녀의 도움을 청하며, 그녀의 지지를 구하고, 신뢰를 갖고 그녀의 협조를 구한다.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물질적 필요에서부터 정신적 필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2.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의 다양한 형태
마리아 공경에는 두 가지 상이한 형태가 존재한다. 교회의 공적 예배(전례)와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의 성격을 갖는 공적 찬미가 그것이다.
전례는 교회활동의 직접적인 것이며 마리아 능력이 넘치는 것으로부터 존재한다. 모든 전례적 예배는 교회의 신비체가 그리스도 활동을 향하기 때문에 거룩한 활동이 된다.
마리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과의 유일한 일치를 이룬 복되신 동정녀며, 천주의 모친으로서 전례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그것은 미사와 기도문에서, 그리고 마리아의 여러 축일에서 알 수 있다.
한편, 교회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으로 전례와 관련해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바치며 교회의 전례 활동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그리하여 교회는 마리아와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깊이 접촉하게 된다.
특별한 기도는 전례시기와 조화를 이룬다. 특히 대림절에 마리아에게 기도할 때는 아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아들의 고통을 미라 알고 있는 마리아의 자세에 관심을 집중한다. 가장 완전한 마리아의 기도 중의 하나인 로사리오 기도는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드리는 기도다.
연구과제 1. 마리아 공경의 역사적 근원은 무엇인가? 2. 왜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를 공경하는가? 3. 마리아 공경의 본성에 대해 기술하시오. 4. 마리아 공경의 두 가지 기본형태를 기술하고, 그들 사이의 상이성을 설명하시오. 5.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킨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도된 구원사업 안에서 공속자로서의 마리아의 세 가지 역할을 기술하시오. (누가 진정 중재자인가?) 6. 마리아에 대한 묵상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으로 이끌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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