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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에 대한 논평
반동세력의 공격적인 민족주의, 반혁명적인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민족주의로의 전환(특히 대러시아인 민족주의로, 그리고 폴란드인,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등의 민족주의로), 그리고 끝으로 당 강령을 침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다른 ‘민족의’(즉 대러시아 민족이 아닌)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동요의 증대−이 모든 것들은 민족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민족24)
1. 언어 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코카서스 지방의 비러시아계 민족체들의 대표자들 자신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고자 애쓰고 있다. 이러한 예는 아르메니아의 교회학교인데 거기에서는 러시아어 수업이 의무적이지 않다. 러시아에서 가장 널리 배포되는 자유주의적 신문들 가운데 하나인 [루스코에 슬로보](제198호)는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고, 러시아에서 러시아어에 대한 반감은 ‘오로지’ 러시아어를 ‘인위적으로’(‘강제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입하려는 데서 ‘발생한다’는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민족25)
“러시아어의 운명에 대해 염려할 필요는 없다. 러시아어는 스스로 전 러시아에서 인정받을 것이다”라고 그 신문은 쓰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진실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교환의 필요가 하나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여러 민족체들로 하여금 (그들이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한) 다수민족의 언어를 학습하도록 강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정치체제가 더욱 민주적으로 될수록, 자본주의가 더욱 강력하고 신속하며 광범위하게 발전할수록, 경제적 교환의 필요는 더욱 긴급하게 다양한 민족체들로 하여금 전반적인 상품관계에서 가장 편리한 언어를 배우도록 강제할 것이다.(민족25)
그러나 이 자유주의적 신문은 서둘러 자신의 뺨을 때리고, 자신의 자유주의적 무정견을 드러내보인다. “러시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러시아와 같이 거대한 나라에서는 단일한 공용어가 있어야만 하며, 그러한 언어는 오직 러시아어뿐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그 신문은 말한다.(민족25)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인이 그들의 공동의 의회에서 종종 프랑스어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몇몇 야만적 경찰법(스위스에는 결코 그러한 것이 없다)에 의해서 위협받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적 국가의 개화된 시민들이 스스로 다수가 이해하는 언어를 기꺼이 선택하기 때문인 것이다.(민족26)
모든 특권이 사라진다면, 그리고 어떤 한 언어의 강제적 통용이 그친다면 모든 슬라브인들은 쉽고도 신속하게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상이한 언어로 하는 연설을 공동의 의회에서 들어야만 한다는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교환의 필요가 상업적 이해관계에서 다수에게 유리한 그 나라의 언어를 결정할 것이다. 이 결정은 다양한 민족체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채택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확고할 것이며, 민주주의가 철저할수록, 그 결과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할수록, 그러한 결정은 더욱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될 것이다.(민족26)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모든 정치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 그대로 언어 문제에 접근한다−한 손에는 (공공연하게) 민주주의를, 다른 손에는 (은밀하게) 봉건주의자와 경찰을 틀어쥐고 있는 위선적인 행상인처럼. 특권에 반대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외친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에는 이런, 다음에는 저런 특권에 대해 봉건주의자들과 몰래 말다툼한다.(민족26)
‘민족문화’라는 슬로건 아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서 모든 민족의 부르주아지는 사실상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며, 민중의 권리와 자유를 팔아먹기 위해 봉건주의자들과 흥정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민족26-27)
노동자계급 민주주의의 슬로건은 ‘민족문화’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범세계적 노동자계급운동의 국제문화이다.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다양한 ‘적극적인’ 민족강령들로써 민중을 기만하도록 내버려두자.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에게 대답할 것이다−민족 문제에는 오직 하나의 해결책이 있을 뿐이며(그것이 자본주의세계, 즉 이윤, 언쟁 그리고 착취의 세계에서도 일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한에서), 그리고 그 해결책은 철저한 민주주의라고. 그 증거는−오랜 문화의 나라인 서유럽에서의 스위스와 젊은 문화의 나라인 동유럽에서의 핀란드이다.(민족27)
노동자계급 민주주의의 민족강령은: 어떤 한 민족이나 어떤 한 언어를 위한 특권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민족자결이라는 문제의 해결, 즉 완전히 자유롭고 민주적인 방법에 의한 모든 민족의 국가로의 분리이다. 하나의 민족에게 어떤 특권을 제공하고 민족간의 평등이나 소수민족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농촌이나 도시, 또는 시읍면 등등의) 수단의 힘으로, 국가 전체에 대한 법률을 공포하는 것은 불법이며 무효로 선언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국민일지라도, 그러한 수단은 탈헌법적인 것으로서 무효이며 그것을 유효하게 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를 가질 것이다.(민족27)
노동자계급 민주주의는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와는 정반대로, 언어 문제 등을 둘러싼 다양한 부르주아 정당의 민족주의적 말다툼에 대하여, 모든 노동자계급조직−노동조합, 협동조합, 소비조합, 교육조직 등등−으로의 모든 민족체 노동자들의 무조건적 통일 및 완전한 융합의 요구를 대치시킨다. 오직 이러한 형태의 통일과 융합만이 민주주의를 떠받칠 수 있고, 자본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보호할 수 있으며−이것은 이미 국제적이며, 더욱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모든 특권과 착취를 제거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향해 인류의 발전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민족27)
2. 민족문화
모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 가장 커다란 타락을 낳으며, 자유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라는 대의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주아적(그리고 부르주아적-봉건제적) 경향은 ‘민족문화’라는 슬로건 뒤에 은폐되고 있으므로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흑백인조와 교권지지자, 그리고 모든 민족의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더럽고 반동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민족문화−대러시아의, 폴란드의, 유태의, 우크라이나의 민족문화 등등−의 위장 하에서이다.(민족28)
민족문화라는 슬로건은 부르주아지의(또한 종종 흑백인조의 그리고 교권지지자의) 사기이다. 우리의 슬로건은 민주주의와 세계노동자계급운동의 국제문화이다.(민족28)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문화의 요소들은 미발달된 형태일지라도 모든 민족문화 내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 내에는 노동하고 착취당하는 대중들이 있으며, 그들의 삶의 조건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민족이 또한 단순히 ‘요소들’이 아니라, 지배적인 문화의 형태로 부르주아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그리고 대부분의 민족은 반동적이고 교권지지적인 문화 역시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민족문화’는 지주, 성직자, 부르주아지의 문화인 것이다.(민족29)
이러한 근본적인, 그리고 맑스주의자로서는 초보적인 진실이 이 분트파에 의해 은폐되어왔다. 즉 그는 독자에게 계급의 간격을 폭로하고 명확히 하는 대신에, 단어의 뒤범벅 속에 진실을 ‘익사시키고’ 사실상 은폐시켰다. 사실상 그는, 자신의 모든 이익으로부터 초계급적 민족문화에 대한 믿음을 널리 퍼뜨리기를 요구하는 부르주아지처럼 행동했던 것이다.(민족29)
‘민주주의와 세계노동자계급운동의 국제문화’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각 민족문화로부터 오직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요소들만을 취한다. 즉 우리는 그것들을, 오직 그리고 절대적으로 각 민족의 부르주아 문화와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취한다. 어떠한 민주주의자도 그리고 분명히 어떠한 맑스주의자도, 모든 언어는 동등한 위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또는 자기민족의 언어로 자기‘민족의’ 자본가에 대해 논쟁하고^ 자기‘민족의’ 농민과 프티부르주아지 사이에서 반교권적이고 반부르주아적인 사상을 옹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트파는 이러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실을 논점, 즉 참된 쟁점을 흐리기 위해 사용한다.(민족29-30)
문제는, 민족문화 슬로건을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맑스주의자로서 용인할 수 있는가, 아니면 모든 지방적이고 민족적인 특수성을 잘 ‘파악하면서’ 노동자들의 국제주의라는 슬로건을 모든 언어로 옹호함으로써 맑스주의자가 민족문화를 반대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민족30)
민족문화 슬로건의 의의는 주어진 나라와 세계 모든 나라들의 객관적인 계급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민족문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리고 반복하건대,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지는 지주 및 교권지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 노동자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공격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을 고삐로 끌어갈 수 있도록 그들을 망쳐놓고 분열시킨다−이것이 오늘날의 근본적인 사실이다.(민족30)
프롤레타리아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을 단결시켜야만 하며, 국내와 국외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맞서 확고하게 싸워야만 한다. 민족문화 슬로건을 옹호하는 자들의 자리는 민족주의적 프티부르주아지 사이에 있지, 맑스주의자들의 사이에 있지 않다.(민족30)
대러시아 맑스주의자가 민족문화, 즉 대러시아 문화라는 슬로건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 그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하는 자는 누구나 민족주의자의 대열에 서야 하지, 맑스주의자의 대열에 설 수는 없다. 우리의 임무는 대러시아의 지배적인, 흑백인조 및 부르주아지의 민족문화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며, 오직 국제주의적 정신으로, 그리고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긴밀히 동맹하여 우리의 민주주의운동과 노동자계급운동의 역사에 존재하는 맹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대러시아인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하라. 국제주의의 이름으로 그들의 ‘문화’에 맞서 투쟁하라.(민족30)
가장 억압받고 탄압받는 민족인 유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유태인의 민족문화는 랍비와 부르주아지의 슬로건, 즉 우리의 적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유태 문화와 유태 역사에는 다른 요소들이 있다. 전 세계 1,050만 유태인 중 적어도 반 이상이 갈리시아와 러시아, 후진적이고 반야만적인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서 유태인들은 강제적으로 세습적 계층구조에 고정되어 있다. 나머지 반수는 문명 세계에 살며, 거기에서 그들은 인종차별을 받는 계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유태 문화의 거대한 세계적 진보의 특수성, 즉 유태 문화의 국제주의, 시대의 진보적 운동과 유태 문화의 일치(민주주의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참여하는 유태인의 백분율은, 모든 곳에서 그 지역 전체 주민에 대한 유태인의 백분율보다 높다)가 명확히 나타나고 았다.(민족31)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유태인의 ‘민족문화’ 슬로건을 주장하는 자는 누구나 (그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이며, 시대에 뒤진 그리고 유태인의 세습적 계층구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지하는 자이다. 그는 랍비와 부르주아지의 공범자이다. 다른 한편 러시아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여타의 노동자들을 국제적인 맑스주의조직으로 묶어내고, (러시아뿐만 아니라 이디쉬어를 통해) 노동자계급운동의 국제문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하는 유태인 맑스주의자들은, 분트의 분리주의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화’라는 슬로건에 맞서 싸움으로써 유태 민족의 훌륭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민족31)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것들은 자본주의세계에서 끝까지 커다란 두 계급진영에 일치하는, 그리고 민족 문제에서 두 개의 정책(아니 두 개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서로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인 슬로건들이다.(민족31)
3. ‘동화’라는 민족주의적 귀신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민족 문제에는 두 가지의 역사적 경향이 나타난다. 첫째는 민족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자각, 모든 민족적 억압에 대한 투쟁, 민족국가의 창출이다. 둘째는 모든 형태의 국제적 교류의 발전과 성장, 민족적 장벽의 분쇄, 자본, 경제생활 일반, 정치, 과학 등등의 국제적 통일의 창조이다.(민족32)
두 가지 경향 모두 자본주의적 보편적 법칙이다. 전자는 발전의 초기 단계에 우세하고, 후자는 사회주의사회로 전화해가는 성숙한 자본주의를 특징짓는다. 맑스주의의 민족강령은 양자를 다 고려하고 있다. 우선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그리고 이런 면에서의 모든 특권을 용납할 수 없음을(물론 우리가 뒤에 따로 다루게 될 민족자결권을) 옹호한다. 다음으로 국제주의의 원칙을, 그리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부르주아 민족주의로써 프롤레타리아트를 오염시키는 데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옹호한다.(민족32)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인정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 자는, 그리고 모든 민족적 억압이나 불평등에 맞서 싸우지 않는 자는 누구나 맑스주의자가 아니며, 심지어 민주주의자조차 아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화자’라는 이유로 다른 민족의 맑스주의자에게 욕을 퍼붓기만 하는 사이비 맑스주의자는 그저 민족주의적 속물일 뿐이라는 것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민족33)
러시아 정통 맑스주의자에 대해 ‘동화자’라고 고함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유태 민족주의자들이고, 특수하게는 분트파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특징들이 보여주는 바처럼, 전 세계 1,050만 유태인 중에서 약 절반은 ‘동화’를 위한 조건이 가장 강한 문명 세계에서 살고 있고, 그 반면(러시아와 폴란드의) 푸리쉬케비치 일파의 발굽아래 으깨어져, 불행하고 억압받으며 공민권을 박탈당한 러시아와 갈리시아의 유태인들은, ‘동화’를 위한 조건이 거의 없는 곳, 가장 심한 분리와 심지어 ‘거주지역’, 수많은 제한, 푸리쉬케비치 정권의 여타의 매혹적인 특징들이 있는 곳에서 살고 있다.(민족33)
이러한 사실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오직 반동적인 유태인 속물들, 즉 역사의 수레바퀴를 러시아와 갈리시아의 지배적인 조건들로부터 뉴욕과 파리의 지배적인 조건들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꾸로 돌려서 그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자들−오직 그들만이 ‘동화’에 반대하여 소란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다.(민족34)
세계사에서 축복받아 세계 일류의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배출해온 가장 휼륭한 유태인들은, 결코 동화에 반대하여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동화에 반대하여 소란을 피우는 것은 유태 민족의 ‘후진부분’을 공손하게 주시하고 있는 자들뿐이다.(민족34)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자본주의에 의한 민족들의 동화 과정이 가장 위대한 역사적 진보이며, 많은 궁벽한 곳들, 특히 러시아와 같은 후진적인 나라들에서 보이는 편협한 민족적 보수주의에 대한 분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민족34)
맑스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민주주의자들은 당연히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전대미문의 모욕을 강력히 반대하고 그들의 완전한 평등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단일한 국가의 경계선 안에 존재하는 우크라이나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대러시아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유대와 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며 우크라이나의 부르주아적인 ‘민족적 목표’라는 관점에서조차도 멍청한 정책일 것이다.(민족34)
민족해방을 향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력에 대한 반대자는 대러시아 및 폴란드 지주계급과 양 민족의 부르주아지이다. 어떠한 사회적 세력이 이 계급들과 맞설 수 있는가? 20세기의 첫 십년(1910년대)은 이 질문에 대한 실제적인 답변을 제공했다. 즉 그 세력은 자신의 배후에 민주주의적 농민을 결집시키는 노동자계급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민족35)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세력−그들의 승리가 모든 민족적 억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유르케비치씨는 민주주의 일반의 이익뿐만 아니라, 그의 조국 우크라이나의 이익 또한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대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행동이 수행된다면, 자유 우크라이나는 가능하다; 그러한 통일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민족35)
그러나 맑스주의자는 자신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관점에 제한하지 않는다. 수십 년간에 걸쳐 가속도가 붙은 경제적 발전의 매우 뚜렷한 과정은, 남부지방, 즉 우크라이나에서, 수십만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대러시아로부터 자본주의적인 농장, 광산, 도시로 끌어들이고 있다.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이러한 범위 내에서의−‘동화’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보적이다. 자본주의는,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벽지의 무지하고 보수적이며 고정된 무지크를,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자 모두의 민족적 편협성의 분쇄가 바로 자신의 생활조건인 유동적인 프롤레타리아트로 대체하고 있다. 우리가 조만간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국경이 생길 것이라고 가정할지라도,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노동자의 ‘동화’라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성격은 미국에서의 민족의 마멸이 진보적인 것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대러시아가 더 자유로워질수록, 자본주의의 발전은 더욱 확대되고 더욱 급속해질 것이며, 노동자들, 모든 민족의 노동대중들을 한 국가의 모든 지역과 모든 인접국가(우크라이나에 대해 러시아는 인접국가이다)로부터 광산, 공장으로 더욱 강력하게 끌어들일 것이다.(민족35-36)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대의의 일시적 성공을 위해서 두 민족 프롤레타리아트의 교류, 융합, 동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방치할 때, 유르케비치씨는 실제로 부르주아처럼, 더구나 근시안적이고 속 좁으며 둔한 부르주아, 즉 속물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적 대의가 일차적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는 이차적이라고 말하고, 유르케비치 일파, 돈초프 일파, 자칭 맑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 위에서 그 말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가 일차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의 지속적이며 근본적인 이익과 인류의 이익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익 또한 보호하기 때문이며, 민주주의가 없다면 자치 우크라이나나 독립 우크라이나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민족36)
민족주의적 보석들이 가장 풍부한 유르케비치씨의 논거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의 소수는 민족의식으로 각성되어 있고, “다수는 여전히 러시아 문화의 영향 하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말하면서 전체 우크라이나 문화를 전체 대러시아 문화와 대립시키는 것은,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총체적으로 배신하는 것이다.(민족36)
오늘날 각 민족들 가운데에는 두 개의 민족이 있다−우리는 모든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말한다. 각 민족문화들 가운데에는 두 개의 민^족문화가 있다. 프리쉬케비치, 구츠코프, 스트,루베 일파의 대러시아 문화가 있는 반면 또한 체르니셰프스키와 플레하노프의 이름으로 특징지어지는 대러시아 문화가 있다. 독일, 프랑스, 영국, 유태 등등에서와 같이 우크라이나에도 똑같이 두 문화가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노동자의 다수가 대러시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다면, 우리는 또한 대러시아의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사상이 대러시아의 교권지지적이며 부르주아적인 문화와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민족37)
후자와 같은 종류의 ‘문화’에 맞서 싸우면서 우크라이나 맑스주의자는, 언제나 전자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는 계급의식적 대러시아 노동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문헌 및 사상영역과 교류하기 위해서, 최대한 모든 기회를 붙잡고 이용하며 발전시켜야만 한다. 우크라이나와 대러시아 노동자계급운동 양자의 근본적 이익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민족37)
우크라이나 맑스주의자가 대러시아 압제자에 대한 너무나 정당하고 당연한 적개심으로 인해서, 이런 적개심의 작은 부분을, 비록 그것이 단순한 불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해도, 대러시아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적 문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로 옮길 정도로까지 흔들리게 된다면, 그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라는 수렁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유사하게, 대러시아 맑스주의자가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평등에 대한 요구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할 그들의 권리에 잠시라도 눈을 감는다면, 그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흑백인조의 민족주의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민족37)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노동자는 함께 일해야 하고, 그들이 단일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한 가장 밀접한 조직적 통일 속에서 행동해야 하며, 선전에 사용되는 언어 문제와 그 선전의 순전히 지방적이거나 순전히 민족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인내를 보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공통적이거나 국제적인 문화를 향해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맑스주의의 절박한 요구이다. 어떤 민족 노동자들과 다른 민족 노동자들의 분리에 대한 모든 옹호, 맑스주의적 ‘동화’에 대한 모든 공격, 프롤레타리아트가 관련된 곳에서 전체로서의 하나의 민족문화를 또 다른 이른바 완전무결한 민족문화와 대립시키려는 시도 등등은, 무자비하게 싸워야 할 부르주아 민족주의인 것이다.(민족37)
4. ‘문화적-민족적 자치’
‘민족문화’ 슬로건의 문제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지대하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르주아적 선전과 구별되는 민족 문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선전과 선동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수없이 논의된 문화적-민족적 자치 강령 전체가 이 슬로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민족38)
이 강령의 주된 근본적 결함은 그것이 가장 세련되고, 가장 절대적이며, 가장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도입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 강령의 요지는, 모든 시민들이 특정한 민족에 등록하고 모든 민족이 그 성원들에 대한 강제징세권과 민족의회(국회)와 민족의 대신들(장관들)을 지닌 법적 실체를 구성한다는 점이다.(민족38)
프루동이 프티부르주아적이었고 그의 이론이 교환과 상품생산을 절대적 범주로 전환시켜 그것들을 완성된 극치로 찬양했던 것처럼, ‘문화적-민족적 자치’의 강령과 이론도 마찬가지로 프티부르주아적인데, 왜냐하면 그것 또한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절대적 범주로 전환시켜 그것을 완성된 극치로 찬양하고 그것에서 폭력, 부정 등을 제거하기 때문이다.(민족38)
맑스주의는 비록 ‘가장 정의롭고’, ‘가장 순수하며’, 가장 세련되고 개화된 종류의 것일지라도, 민족주의와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 모든 민족주의 대신에 맑스주의는 국제주의를 옹호하고, 한층 고도의 통일, 즉 건설되는 모든 철도와 모든 국제적 신뢰 그리고 형성중인 모든 노동자들의 연합체(그 사상과 목적뿐만 아니라 경제적 행위에서도 국제적인 연합체)와 함께 우리의 눈 앞에서 성장하는 모든 민족들의 융합을 옹호한다.(민족38)
민족체의 원칙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다. 이 사회를 마땅히 고려하면서 맑스주의자는 민족운동의 역사적 정당성을 완전^히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이 민족주의에 대한 옹호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엄밀하게 그러한 운동의 진보적인 측면에 그러한 인정을 제한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인정이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모호하게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민족38-39)
봉건적 최면상태로부터 대중을 각성시키고,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며 인민과 민족의 주권을 지향하는 그들의 투쟁은 진보적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 문제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단호하고 일관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맑스주의자의 필수적인 의무이다. 이러한 의무는 대체로 소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주의를 지지할 경우 나아갈 수 있는 한계인데, 왜냐하면 이를 넘어서면 민족주의를 강화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적극적’ 활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민족39)
봉건적 굴레와 모든 민족적 억압 그리고 특정 민족이나 언어가 누리는 특권들을 떨쳐버리는 것은, 민주주의적 세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필수적 의무의며, 민족 문제에 대한 말다툼으로 인해 모호해지고 지체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도우면서 이렇게 엄밀히 한정되고 규정된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배반하고 부르주아지의 편을 드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종종 매우 불명료하며, 분트파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다.(민족39)
모든 민족적 억압과 싸운다? 물론 그렇다! 어떠한 종류의 민족적 발전을 위해서도, ‘민족문화’ 일반을 위해서도 투쟁한다?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발전은 전 세계에 걸쳐 미성숙한 민족운동의 예들, 다수의 소민족들로부터 형성되지만 몇몇 소민족들을 희생으로 하여 대민족이 형성된 예들, 민족 동화의 예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원칙은, 민족체 일반의 발전이다. 여기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배타성이 발생하고 부단한 민족적 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민족의 발전에 대해 찬성하기는커녕, 반대로 그러한 환상에 대해 대중들을 경계시키고, 자본주의적 상호교류의 완전한 자유를 지지하며, 강제나 특권에 기초한 것이 아닌 모든 민족 동화를 환영한다.(민족39)
어떤 ‘공정하게’ 경계지어진 영역 내에 민족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특별한 국가기구에 의해 모든 민족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것이 문화적-민족적 자치의 이데올로기적 근본^이며 내용이다. 이러한 사상은 철저히 부르주아적이며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주의에 대한 어떠한 신성화도 지지할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적 차이를 없애고 민족적 장벽을 제거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것을 지지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체간의 유대를 더욱더 긴밀하게 하거나 민족들을 융합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지지한다. 이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반동적인 민족주의적 속물근성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민족39-40)
통상적인 의미의 ‘민족문화’, 즉 학교 등이 현재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성직자와 부르주아 배외주의자의 압도적 영향하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여지가 없다. 분트파가 ‘문화적-민족적’ 자치를 옹호하면서, 민족의 구성이 모든 외적 조건들과는 무관하게 계급투쟁을 민족 내부로 제한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우스꽝스러운 궤변일 것이다. 어떤 자본주의사회에서든지 중대한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곳은 주로 경제 및 정치 영역이다. 첫째 이것으로부터 교육 영역을 분리하는 것은, 학교가 (‘민족문화’ 일반과 마찬가지로) 경제 및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터무니없이 공상적인 것이다. 둘째 학교체제 등의 분리는 단지 ‘순수한’ 교권주의와 ‘순수한’ 부르주아 배외주의를 온존시키고 격화시키며 강화시키는 반면, 모든 단계에 낡고 터무니없는 민족적 장벽과 편견을 타파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생활이다.(민족40)
주식회사의 이사회에서 우리는 상이한 민족의 자본가들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장에서는 상이한 민족이 노동자들과 나란히 일하고 있다. 진정으로 중대하고 심각한 어떠한 정치적 쟁점에서도 민족이 아니라 계급에 따라서 편이 갈라진다. 학교교육 등을 국가의 통제로부터 떼어내어 민족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은, 실제로 민족들^을 통합시키는 경제로부터, 사회생활에서 말하자면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영역, 즉 ‘순수한’ 민족문화나 교권주의와 배외주의의 민족적 교양이 가장 자유로이 활동하는 영역을 분리시키려는 시도인 것이다.(민족40-41)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 그 어느 쪽도 ‘문화적-민족적’ 자치를 그들의 강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매우 후진적인 나라의 유태인 부르주아 정당들과 소위 사회주의적 그룹이라고 하는 다수의 프티^부르주아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관념을 세련된 형태로 노동자계급 사이에 유포하기 위해서 그것을 채택했던 것이다.(민족42-43)
국가의 법률에 의해 러시아의 상이한 지방이나 상이한 계급의 독일인들을 단일한 독일 민족의 연합체로 따로 분리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성직자, 부르주아지, 속물들−에 의해서는 실행될 수 있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는 결코 실행될 수 없다.(민족43)
5. 민족간의 평등과 소수민족의 권리
나는, 자본주의에서는 조금이라도 가능한 한에서 민족 문제에 관한 오직 하나의 해결책, 즉 철저한 민주주의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무엇보다도 스위스를 언급했다.(민족44)
스위스의 특수성은 그 역사, 그 지리적 및 기타 조건들이다. 러시아의 특수성은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에 전례가 없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함과, 온갖 종류의 장애와 역행의 위협하에서도 예외적으로 급속하고 단호한 진보를 객관적으로 요구하는 그 놀라운 일반적 후진성이다.(민족44)
어떤 경우에나 자본주의에서의 민족적 평화는 철저한 민주주의가 압도적인 나라들에서만(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한) 실현되었다는 것은 논박할 여지가 없을뿐더러 논박할 수도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것은 논박할 수 없으므로, 기회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스위스 대신에 오스트리아를 언급하는 것은 카데트적 술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카데트는 항상 유럽의 최선의 헌법보다 유럽의 최악의 헌법을 모방하기 때문이다.(민족45)
스위스에는 세 가지 공용어가 존재하지만, 국민투표의 경우에 법안은 다섯 가지의 언어로, 즉 세 가지 공용어 외에 두 가지의 로망쉬 방언으로 인쇄된다. 1900년의 센서스에 따르면 이 두 가지의 방언들은 스위스 주민 331만 5,443명 중 3만 8,651명, 즉 1%가 겨우 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군대에서 장교들과 하사관들에게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고유어로 말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 그라우뷘텐 및 왈리스 주(각각 인구는 10만이 겨우 넘는다)에서 두 방언은 완전한 평등을 누리고 있다.(민족45)
스위스의 경험은, (상대적이지만) 최대의 민족적 평화란 전국에 걸쳐(다시 상대적으로) 철저한 민주주의가 보장된 곳에서 실제로 보장될 수 있고 또한 보장되어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민족45)
민족과 언어의 완전한 평등을 옹호하는 것은, 각 민족의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인 (즉 프롤레타리아트적인) 분자들만을 구별하고, 그들을 민족체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체제 전체를 개선하려는 근본적이고 진지한 열망 속에서 통일시킨다. 반대로 ‘문화적-민족적 자치’를 옹호하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들의 경건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민족들을 분리시키고, 실제로 어떤 한 민족의 노동자와 부르주아지를 밀착시킨다(유태인 부르주아 정당들의 이러한 ‘문화적-민족적 자치’의 수용).(민족46)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완전한 평등의 원칙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세베르나야 프라우다]에 실린 나의 논문에서, 이러한 원칙은 나중에 맑스주의자들의 협의회에서의 공식적이고 더욱 정확한 결정과 거의 똑같은 말로 표현되어있다. 그 결정은 “어느 한 민족이 누리는 모든 특권과 소수민족의 권리에 대한 모든 침해를 무효로 선언하는 근본적인 법률을 헌법에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민족46)
맑스주의자들은 예를 들면, 세속적인 학교를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일반적 교육강령을 갖고 있다. 맑스주의자에 관한 한, 민주적인 국가 내에서 이 일반적 강령(그 속에 어떤 ‘지방적’ 주제나 언어 등등을 도입하는 것은 그 지방의 주민들이 결정할 문제이다)으로부터의 이탈은 언제 어디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렇지만 ‘국가로부터 교육적 업무를 떼어내어’ 민족들의 통제하에 놓는다는 원칙으로부터는, 우리 노동자들이 민주적인 국가 내에서 ‘민족들’로 하여금 인민의 돈을 교회학교에 쓰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서 리프만씨는 ‘문화적-민족적 자치’의 반동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냈던 것이다.(민족47)
“소수민족의 크기는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심지어 분트파가 매료되었던 오스트리아의 강령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서는 (우리의 강령보다도 더 간략하고 덜 분명하게) 이렇게 적고 있다: “소수민족의 권리는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특별법에 의해 보호된다(브륀 강령의 제4항).” 왜 아무도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질문−정확하게 그 법률은 무엇이며, 그것이 정확하게 어떠한 소수민족의 어떠한 권리를 보호할 것인가?−을 제기하지 않았던가?(민족47)
왜냐하면 모든 지각 있는 사람들은 강령에서 특수사항을 규정하는 것이 부적당하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령은 다만 근본적인 원칙들만을 결정한다. 이 경우 근본적인 원칙은 오스트리아인들에게는 암시되어있고, 최근의 러시아 맑스주의자의 협의회의 결정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원칙은 어떠한 민족적 특권도, 어떠한 민족적 불평등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민족47)
하지만 만약 나라의 헌법이 소수민족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조치를 무효로 만드는 근본적인 법률을 포함하고 있다면, 국가부담으로 유태어와 유태 역사의 특별한 선생을 채용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이나, 유태나 아르메니아, 루마니아의 아동, 혹은 한 명의 그루지아 아동을 위한 강의에 필요한 국유건물을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의 취소를 어떤 시민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평등의 기초 위에서 소수민족의 합리적이고 정당한 모든 소망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평등의 옹호가 해롭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민족체에 따른 학교의 분리를 옹호하거나, 예를 들어 페테르스부르크의 유태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를 옹호하는 것은 분명히 해로운 것이며, 모든 소수민족을 위해서, 한 명이나 두세 명의 아동을 위해서 민족적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민족48)
게다가 특별한 학교나 보조적인 과목을 위한 특별한 교사 등을 가질 권리를 위해서 소수민족의 크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은, 어떠한 전국적인 법률에서도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평등에 관한 전국적인 법률은, 지방의회와 읍, 젬스트보, 촌락공동체, 그밖의 당국의 결정과 특수한 규정을 통해서 상세히 적용되고 발전될 수 있는 것이다.(민족48)
6. 중앙집권과 자치
물론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그 발전을 위해 가능한 한 가장 거대하고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간단한 이유에서, 연방제와 지방분권에 반대한다.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항상 더욱 큰 국가를 주장할 것이다. 그는 항상 중세적 특수주의와 싸울 것이며,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광범한 기초 위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대지역의 가능한 한 긴밀한 경제적 결집을 항상 환영할 것이다.(민족49)
자본주의의 광범하고 급속한 생산력 발전은 거대하고 정치적으로 조밀하며 통합된 지역을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지역에서만 부르주아 계급은−그 불가피한 대립물인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함께−낡은 중세적, 카스트적, 교구적, 소민족적, 종교적, 그리고 그밖의 장벽들을 제거하고 통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민족49)
상이한 민족들이 단일한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동안에, 또 구성하려 하는 한, 맑스주의자들은 결코 연방제의 원칙이나 지방분권을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중앙집권적인 대국가는, 중세적 세분상태로부터 장래의 전 세계의 사회주의적 통일로 나아가는 거대한 역사적 진보이며, 오직 그러한 (자본주의와 뗄 수 없이 연결된) 국가를 거쳐서만 사회주의로의 길이 있을 수 있다.(민족49)
민주주의적인 중앙집권은, 특수한 사회경제적 조건 및 독특한 민족적 인구구성 등등을 지닌 지역의 자치와 지방자치정부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필연적으로 양자 모두를 요구한다. 러시아에서 중앙집권은 지속적으로 폭정 및 관료제도와 혼동되어왔다. 이러한 혼동은 러시아의 역사로부터 당연히 일어났던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로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민족50)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사회의 모든 주요하고 중요한 정치경제적 문제들은 전국이 관련된 중앙의회에서만 취급되어야 하지, 각 지역의 자치의회에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또한 맑스주의자로서 그녀는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에는 관세정책, 상업과 공업, 교역과 교통수단(철도, 우편, 전신, 전화 등)을 다루는 법률, 군대, 조세체제, 민법과 형법, 교육의 일반 원칙(예를 들면, 순전히 세속적 교육, 보편적 교육, 최소의 과정, 민주적 학교운영 등등에 대한 법률), 노동보호법, 정치적 자유(결사의 권리) 등등이 포함된다.(민족50)
자치의회는−나라의 일반적 법률에 기초해서−순전히 지방적인, 지역적인, 민족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들을 다루어야만 한다. 이러한 생각을 매우−과도하게가 아니고−상세하게 확대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예를 들어 지방 철도(제12호, p. 149), 혹은 지방 도로(제14~15호, p. 376) 등의 건설을 언급하고 있다.(민족50)
분명히, 독특한 사회경제적 특수성과 매우 독특한 민족적 인구구성 등등을 가진 모든 지역들에 그러한 자치를 부여하지 않는, 근대적인 진정으로 민주적인 국가는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핵심적인 중앙집권의^ 원칙은 이러한 (지방적, 지역적) 자치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에 의해 관료적으로가 아니라 민주주의적으로 적용된다. 광범하고 자유로우며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치, 즉 자본의 집적과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전국적인 규모에서의 부르주아지의 단결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촉진하는 그러한 자치의 부재로 인해, 불가능하게 되거나 적어도 몹시 지연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전히 지방적인 (지역적인, 민족적인 그리고 그밖의) 문제들에 관료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경제적⋅정치적 발전 일반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이며, 특수하게는 심각하고 중요하며 근본적인 일들에서의 중앙집권에 대한 장애물의 하나이기 때문이다.(민족51)
러시아에서 ‘근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행정의 분리가 아니라, 중세적이고 봉건적이며 공식적-관료적인 행정의 분리를, 그것도 가장 조악한 형태(군 대신에 주)를 취하면서, 근대자본주의의 조건들과 요구들을 언급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명백히 재무성, 관료제, 관습, 지주, 성직자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진정으로 ‘근대적인’ 분리에 의해서 이러한 분리들이 철폐되고 대치될 때까지는, 러시아에서 어떤 중대한 지방적 개혁의 문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적 요구의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구의 민족적 구성을 가능한 한 통일 시키는 것인데, 왜냐하면 민족과 언어의 동일성이 국내시장의 완전한 정복과 경제적 상호교류의 완전한 자유를 위한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민족51-52)
단일한 민족적 인구구성은, 확실히 자유롭고 광범하며 진정으로 근대적인 상업적 교류를 촉진하는 가장 믿을 만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단 한 명의 맑스주의자나 단 한 명의 가장 확고한 민주주의자조차도, 오스트리아의 주와 러시아의 주 및 군(후자는 오스트리아의 주만큼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나쁘다)을 지지하거나, 가능한 한 인구의 민족적 구성에 조응하는 다른 것으로 이러한 낡은 분리들을 대체할 필요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민족53)
마지막으로 모든 민족적 억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작더라도 완전히 동질적인 인구의 자치영역을 창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향해서 전국 아니 더 나아가 전 세계에 흩어진 각 민족체들의 성원들이 모일 수 있으며, 또한 그것과 함께 그들은 온갖 종류의 관계와 자유로운 결사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편협하고 관룐적인 관점에서만 반박할 수 있다.(민족53)
그러나 비록 인구의 민족적 구성이 매우 중요한 경제적 요인들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도시는 자본주의하에서 극히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하며,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대러시아 등의 모든 곳에서 도시는 혼합된 인구로 특징지어진다. 경제적으로 도시를 향해 집중되어가는 촌락과 지역으로부터 도시를 떼어내는 것은, ‘민족적’ 요인을 위해서도 터무니없을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맑스주의자들이 ‘민족적-지역적’ 원칙을 전적으로 유일하게 자신의 입장으로 취해서는 안 되는 가닭이다.(민족53)
맑스주의자들의 협의회: “넓은 지역적 자치[물론, 폴란드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모든 지역에서의 자치]와 완전히 민주주의적인 지방자치정부를 준비해야만 한다. 자치정부와 자치지역의 경계는 [현재의 주, 군 등의 경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방주민들의 경제적-사회적 조건들과 인구의 민족적 구성 등의 기초 위에서 그들 자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민족54)
여기에서 인구의 민족적 구성은, 관료제와 아시아적 야만성의 요구가 아니라 근대자본주의의 요구를 충족시킬 새로운 경계선을 결정하는 데 기초로 쓰이는 다른 조건들(처음에는 경제적 조건들 그 다음에는 사회적 조건들)과 동일한 수준에 놓여 있다. 그 지방의 주민들만이 이러한 조건들을 충분히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으며, 그 기초 위에서 나라의 중앙의회는 자치지역의 경계와 자치의회의 권한을 결정할 것이다.(민족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