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르다와 마리아(눅 10:38-42)
<본문 속으로 들어가기>
*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바로 앞에 기록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선 예수를 마르다가 자연스럽게 영접하는 모습이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로 볼 때 예수와 그들이 초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요 11:1-6을 보면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동생이라고 소개된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가 죽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살아난 일이 있으며, 마리아가 그 일 직후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가족은 예수와 각별한 사이였다.
*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주체는 마르다인데, 우연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이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람어의 여성 명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다가 아니라 동생 마리아인 것처럼 보인다. 누가는 마리아를 소개한 후 바로 그녀가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라고 기록하는데, '발 곁에 앉아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다. 즉 이 단어만으로도 마리아가 예수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매우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듣고 있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역시 미완료 능동태로 되어 있어 그녀가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 채 열심히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마리아를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아래서 그의 말씀을 들었고, 죽은 오라비를 위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고(요 11:32),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에게 향유를 부었기 때문이다(요12:3). 이런 마리아의 열심과 헌신은 칭송받을만한 것이지만 언니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불만이었다.
* 누가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태도 차이를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통해 대조시킨다. 마리아와 달리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다. 이는 그녀가 예수께 대단한 정성을 쏟았음을 암시한다. 마르다는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 곁에(아래에) 앉아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여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그녀의 이름처럼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마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바쁘니 와서 도와 달라고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지도 모른다.
*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에 너무 열중해 언니의 바쁨을 눈치 채지 못했거나, 알았더라도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언니의 신호를 무시했을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 난 마르다는 예수에게 항의한다. 왜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에게 항의했을까? 아마 마르다의 항의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과 더불어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쁜 자신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예수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남성중심 사회)
<삶에 적용하기>
* 일반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은 이런 마르다의 태도보다 마리아의 태도가 더 신앙적이라 판단하고 덜 중요한 일을 하느라 바쁜 마르다보다, 더 중요한 일을 선택한 마리아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도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서는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마르다와 같은 입장에 처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에 마르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르다는 틀리고 마리아는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 중 누가 옳은지를 따지기보다 두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다는 매우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다. 반면 마리아는 조용히 사색하고 묵상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나 옳다고 믿는 것을 고집하는 신념의 소유자이다. 이들은 우리 주변을 보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여러분도 자신이 마르다에 가까운지 마리아에 가까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누가복음만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공동체의 특별한 사정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강조하던 구제와 봉사, 예배와 전도 등 여러 직분을 맡은 사람들 간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했다고 기록된 말은 공동체 내부에서 정리된 결론일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설명되듯 결론에 해당하는 예수의 말이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해석되는 것만은 아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가 두 사람의 선택을 모두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예수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많은 일”과 “하나”가 무엇을 가리키는 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음식의 가지 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때 예수의 말은 마르다가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거나 한 가지만 준비해도 족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다음으로 전자와 후자는 각각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여 예수가 접대 행위 자체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가르쳤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런 주장과 설명은 영과 육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영이 육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는 마르다의 일이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그녀의 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마르다의 항의에 대해 마리아의 선택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 역시 마르다가 마리아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 예수의 말은 마르다는 마르다의 일을 하고 마리아는 마리아의 일을 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언니는 일하는데 동생은 도와줄 생각도 않고 공부(말씀 듣기)하는 모습에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를 교회 공동체 안의 역할 분담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을 임명할 때 문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대통령은 대통령의 일을 하고, 법무무장관은 법무무장관의 일을 하며, 검찰총장은 검찰총장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 오늘 주보 표지에 실린 그림은 17세기 북구 유럽화단을 대표하는 네덜란드 사실주의 화가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가 그린 '그리스도와 마리아, 마르다(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당시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같은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던 마르다를 굉장히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다수의 그림들에서 마르다는 돌아서 있거나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으로 그려져 조연 취급을 받는데,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는 당당한 주연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선택이 공동체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상징하거나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한 방편을 상징하는 것임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다의 길은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서 행위를 상징하는 반면, 마리아의 길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임을 상징하고 한다. 마르다를 조연 취급하는 그림들은 ‘구원은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강조하는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의 모토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르메르는 후에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했던 인물이어서 마르다를 동일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 여기서 프로테스탄트가 옳으냐, 카톨릭이 옳으냐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믿음이냐 행위냐 따지는 일만큼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둘 중 하나(양자택일) 넷 중 하나(사지선다)를 선택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있다. 오강남 교수의 말처럼 either A or B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진리는 그렇게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의 길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다의 길이 옳으냐, 마리아의 길이 옳으냐 따지기보다 각자의 길을 존중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두 가지 모두를 중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선거로 꼽히는 사례가 19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이다. 당시 듀카키스와 제시 잭슨 목사가 팽팽한 접전을 이뤘지만 몇 표 차로 듀카키스가 승리했다. 보통 승자의 후보 수락 연설이 기억에 남지만 두 사람의 경우에서는 잭슨 목사의 패배 인정 연설이 더 인상적이었다. MLK의 정치적 제자이기도 했던 그의 연설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흑인이었던 그가 백인이었던 듀카키스와의 차이를 부각하기보다 그 차이의 극복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마이클 듀카키스의 부모 중 한 분은 의사였고, 한 분은 교사였습니다. 나의 부모는 하인이었고 미용사였고 경비원이었습니다. 메사츄세츠(듀카키스의 고향)와 사우스 케롤라이나(잭슨의 고향)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적 차이가 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나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종교와 인종의 차이(듀카키스는 백인, 제시 잭슨은 흑인)와 경험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그와 나의 오솔길이 한 곳에서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듀카키스의 선친은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고,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앞 세대가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든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 가지 실,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천으로 만들어진 담요가 아닙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보냈던 나의 유년시절, 어머니께선 털 헝겊, 실크, 방수천, 부대자루 등 그저 우리들이 구두나 간신히 닦아낼 수 있는 조각 천들을 모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힘찬 손놀림과 튼튼한 끈으로 조각 천들을 꿰매어 훌륭한 누비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조화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서로 그 누비이불을 만들어야 합니다.”
* 듀카키스와 잭슨의 차이는 자매였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 때문에 대립하고 갈등하는 어리석은 짓을 벌이지 않고 이해하고 포용하며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벌인 선의 경쟁과 그 이후의 결과 인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예수 제자로서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잭슨 목사의 연설에 나오는 누비이불(퀼트)는 서로 다른 재질과 모양과 무늬로 이뤄진 조각 천을 하나로 모아 꿰매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무리하기>
* 서로 옳지만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각자의 약점을 상대의 강점으로 채우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변화가 이뤄진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천 조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마 마르다와 마리아는 여성임에도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각자 잘 하는 일, 관심 있는 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며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각자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한다.
* 4년 전인 2015년 북미지역에서는 33년 만에 뜬 '슈퍼 블러드 문(Super Blood Moon)‘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보통 보름달보다 크고 밝은 슈퍼문과 개기월식이 겹쳐 붉은 빛으로 보이는 '슈퍼 블러드 문'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슈퍼 문'과 달리 북미 및 유럽, 아프리카 일부에서만 관측됐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일년중 가장 가까운 슈퍼 문은 보통의 보름달에 비해 14%가 더 크고 30% 더 밝게 보이는데 이 슈퍼 문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져 붉은 빛이 강해지면 슈퍼 블라드 문이 되는 것이다.
* '슈퍼 블러드 문'은 1982년에 이어 33년 만에 뜬 것이고 2048년에야 다시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미국인 등 서구인들은 평소 보름달을 괴기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 평소 달을 구경하지 않는다. 우리는 휘영청 뜬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도 하지만 서구인들은 불길한 징조라 여기는 것이다. 심지어 '슈퍼 블러드 문'조차 '핏빛 큰 보름달'이라 여겨지며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종말론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똑같은 보름달을 보면서도 동과 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는 셈이다,
* 근본주의자들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다. 끔찍스럽고 크나큰 주의 날이 오기 전에, 그런 일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요엘 2:31)라거나,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둠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행 2:20)라는 구절들을 들먹이며 '슈퍼 블러드 문'이 아마겟돈의 징조라고 주장하면서 종말론 소동을 부추겼다. 반면 우리의 이해인 수녀는 달빛기도라는 시에서 “너도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 둥근달이 되는 한가위 /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고대한다.
* 이어지는 구절처럼 “우리의 삶이 /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 좀 더 환해지기를 /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 좀 더 둥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정서다. 추석은 이틀 전이었지만 아직 보름달의 형태가 남아있어 밤하늘을 볼 때마다 소원을 빌고 싶은 요즘이다. 하늘씨앗들의 가정에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우리 교회 안에도 대립과 갈등과 반목보다 이해와 배려와 화합이 넘쳐나길 바란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나갈 때 우리 사회도 좀 더 아름답게 변할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