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호: 문경(文敬)
본관은 고성(固城). 공민왕 때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낸 암(嵒)의 아들이다.
원송수(元松壽)의 추천으로 지신사(知申事)가 된 뒤, 1356년에는 이부낭중(吏部郞中)의 직에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네가 전선(銓選)에 참가하였으니 대간으로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는 내치고, 현재(賢才)로 유일(遺逸)된 자는 이를 올리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친 자는 또한 반드시 이를 탁용(擢用)하라. “는 말을 들었다.
밀직제학으로 죽으니 왕이 심히 애도하고 후하게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관례상 추밀(樞密)은 시호를 내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문경(文敬)이라고 특별히 시호를 내렸다. 죽을 때의 관직이 《고려사》 세가에는 밀직제학으로 되어 있고, 예지(禮志)에는 밀직부사로 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전자는 추증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성연방록(鐵城聯芳集)에 유고가 있다.
문경공(文敬公) 이강(李岡) 시
*하남으로 돌아가는 검교 곽구주(郭九疇:永錫)를 보내며[送郭檢校九疇還河南]
나는 요해 동쪽에 살고 / 我在遼海東
그대는 천지의 복판에 사는 사람 / 君居天地中
서로 만나니 딴 세상 사람인 듯 / 相逢如隔世
한 번 보자 같은 풍임을 기뻐했네 / 一見喜同風
예모는 경중대로 하고 / 禮貌從輕重
교분은 시종을 맹세했네 / 交期誓始終
글 논할 기회 두 번 있기 어려우리니 / 論文恐難再
돌아가는 말[馬], 총총히 떠나지 마소 / 歸騎莫匆匆
*낭중 하윤원을 시로 초청하며[詩邀河允源郞中]
혼자 앉으니 그윽한 흥(興)이 도네 / 獨坐成幽興
텅 빈 집안에 이끼[苔] 깊은데 / 苔深四壁空
연못에 비 내리니 우거진 고미[菰蒲] / 菰蒲一池雨
다락에 바람 오니 서늘한 베개 / 枕簟滿樓風
병 속에는 얼음 같은 수리 있고 / 壺底氷漿冷
소반에는 빨간 들 과일이 있도다 / 盤心野果紅
이 사이의 한가한 멋을 / 此間閑氣味
그대와 함께 하길 생각하네 / 思與阿兄同
*옛 서울 분사로 가는 지평 최덕성을 보내고, 곽간의의 시를 차운하여[次郭諫議韻送崔德成持平分司舊京]
북궐에는 붉은 구름이 멀고 / 北闕彤雲遠
남주엔 백일이 더디리 / 南州白日遲
중선이 처음 부를 짓고 / 仲宣初作賦
가태부는 홀로 시사를 상심했지 / 賈傳獨傷時
낙곡에서 나누는 한 잔 술 / 洛曲一杯酒
양관의 세 첩 / 陽關三疊詩
어느 날 우리 다시 만나리 / 相逢何日是
떠도는 이 몸이라서 앞 기약 아득하네 / 漂泊負前期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장시를 지어 노래에 대신한다[予不樂樂故作長詩以代謌]
중화당 앞에는 도리 꽃이요 / 中和堂前桃李花
중화당 아래는 신선 집이라 / 中和堂下神仙家
성 안의 젊은이 늙은이 저마다 흥에 겨워 / 城中少長各饒興
신선 맞아 꽃 보려고 자하동을 찾는다 / 邀仙看花尋紫霞
옛날 가무하던 땅에 올라 / 登臨疇昔謌舞地
홀로 맑은 바람 맞으며 한숨 짓네 / 獨向淸風長吁嗟
옛사람의 기영회(나이 많고 학덕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는 다시 없거늘 / 古人無復耆英會
지금 사람 도리어 중화곡 듣네 / 今人還聽中和曲
절서가 차례차례 잠시도 멈추지 않아 / 代序鱗次不暫留
백 년이 문득 눈 앞에 지나가는 새였네 / 百歲忽忽鳥過目
일찍 들었노라 적선은 낮 짧은 것 싫어서 / 曾聞謫仙嫌晝短
밤마다 촛불 잡기를 원했다고 / 願言夜夜長秉燭
홍안이 길이 있으리라고 말 말아라 / 莫道朱顔鎭長在
바다 또한 상전으로 변했느니 / 滄溟亦變爲桑田
운연도 향기롭고 꽃은 바다 같아 / 雲煙芬馥花如海
관현 어울려 하루가 일 년이네 / 絃管啁啾日似年
한 번 읊고 한 잔 들고는 마음에 미족하여 / 一詠一觴心未足
설렁설렁 봄바람 앞에 취해 거꾸러지네 / 婆婆醉倒春風前
*곡 평재 이 문경공 강(哭平齋李文敬公岡)
한방신(韓方信)
내가 행촌(이암(李嵒)) 문하에서 나왔으므로 / 我出杏村門
자네를 형제와 같이 여겼었네 / 視君如弟昆
충성스럽고 맑음은 태어난 성품이요 / 忠淸來有種
공손하고 검소함이 홀로 무리에서 뛰어났었네 / 恭儉獨超群
창생들이 기대에 보답할 줄 알았더니 / 謂答蒼生望
어찌 점치는 자의 말과 틀리는고 / 何違日者言
이제부터 합좌소에 / 從今合坐所
높은 의론을 다시 들을 수 없겠네 / 高論更難聞
○ 고려 이강(李岡)의 시에,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하여 뼈가 신선이 되려 하니,
멀리 인간 일 생각하며 정히 망연하구나.
제사 지내는 신비한 자리는 중흥(中興)한 뒤이요,
돌로 쌓은 영단(靈壇)은 태고(太古) 전의 일일세.
이미 눈은 천리 밖 땅을 보게 되었고,
황홀히 몸은 구중(九重) 하늘에 있는 듯해라.
이번 걸음엔 짝도 없이 서로 속이는 것 같으나,
환도(還都)한 첫 해를 누가 만났는가.”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부-
○공북루(拱北樓) 이강(李岡)의 시에,
“임금 모시고 남녘으로 순행(巡幸)하는 날,
누에 올라 처음 보는 풍경, 산천은 혼연(渾然)히 그림 같고,
풍경 또한 글로 표현키 어렵도다.
서리 내린 하늘은 고요하기만 하고,
안개 걷힌 들판은 훤하기만 하도다.
바로 알겠네. 천년 뒤에, 이 응제(應製) 반드시 나를 비웃으리.”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잡초를 헤치다. -목은 이색-
잡초 헤쳐 이웃 가리니 좋은 일도 많아라 / 披草卜隣幽事多
염랑은 높은 기개밖엔 아무것도 없구려 / 髥郞倜儻儘無他
제학(提學) 이강(李岡)을 가리켜 한 말이다.
별은 강피에 임해라 바람 이슬이 차갑고 / 星臨姜被風露冷
하늘은 토구에 가까워 찬 달빛 말끔하네 / 天近菟裘霜月磨
솔 그늘은 내가 편히 앉기에 가장 좋은데 / 松陰最好我盤磚
산의 뜻은 그대가 시 읊기를 바란 듯하네 / 山意似欲君吟哦
푸른 산속의 띳지붕과 흙 계단을 향해 / 茅茨土階翠微裏
흥을 타서 왕래하며 옥 굴레를 울리누나 / 乘興往來鳴玉珂
*문경공 이평재에 대한 만사〔文敬公李平齋挽詞〕
도은 이숭인(李崇仁)
검은 머리의 명실상부한 재상 / 黑頭眞宰相
공업은 기구의 가업으로부터 / 功業自箕裘
옥이 빛나는 것은 쪼아서가 아니요 / 玉潤元非琢
못이 맑은 것은 요동하지 않아서라 / 淵澄政不流
명당의 기둥을 바야흐로 세우는 때 / 明堂方作柱
밤중에 골짜기 배를 숨기지 못했네 / 夜壑莫藏舟
아 끝났도다 공 같은 이 드무나니 / 已矣如公少
이제 사책에서나 찾을 수 있으리라 / 應從簡冊求
문경(文敬) 이공(李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목은 이색 찬
선군(先君)인 가정공(稼亭公)이 일찍이 정해년(1347, 충목왕3)의 지공거(知貢擧)를 맡고서 선발한 선비들 가운데에는 저명한 인사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문경(文敬) 이공(李公)이 15세의 나이로 신채(神采)가 더욱 뛰어났으므로, 당시에 이미 부친의 풍도를 이었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 뒤에 학문이 깊어지고 식견이 높아짐에 따라 명성이 날로 더욱 중해지면서, 당당하게 재상이 될 재목으로 기대를 받았다.
그러다가 공이 병에 걸리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필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인물이 어찌 여기에서 끝나겠는가.” 하였는데, 급기야 공이 죽자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던가, 약물(藥物)이 혹 잘못된 것인가? 어찌하여 이런 인물이 여기에서 끝나고 말았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사대부(士大夫)들은 조정에서 서로 애도하고, 친척과 친구들은 신위(神位) 앞에서 서로 통곡하고, 길 가는 사람들 역시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상이 부음(訃音)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여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리도록 하는 한편, 태상(太常)에 시호(諡號)를 의논하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추밀(樞密)에게는 시호를 내리지 않게 되어 있으나, 내가 이강(李岡)에 대해서는 특별히 높여 주고 싶다. 문신(文臣)으로서 오래도록 복무(服務)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은 자로는 오직 정당문학(政堂文學) 원송수(元松壽)가 있을 뿐이다. 내가 그래서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몸은 달라도 똑같은 일을 한 사람이 지금 이강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시호를 의논해서 상에게 보고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는 이강 같은 사람이라야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아, 이쯤 되면 공도 유감이 없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공의 우인(友人)인 상당(上黨)의 한수(韓脩) 맹운(孟雲)과 곡성(曲城)의 염흥방(廉興邦) 중창보(仲昌父)가 한산(韓山)의 이색에게 상의하기를 “우리의 벗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서 그 누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슬퍼해도 죽은 벗을 살려 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벗이 만약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을 남겨 놓고 죽었다면, 우리 세 사람이 책임지고 드러내 밝혀 주어야 할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우리의 슬픔을 스스로 위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명(銘)은 내가 짓고 글씨는 수(脩)가 쓰고 전액(篆額)은 흥방(興邦)이 쓰기로 하였으며, 빗돌에 새기는 일은 중창보와 맹운이 실무(實務)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아, 슬프다. 내가 어떻게 차마 나의 벗의 명을 짓는단 말인가.
공의 휘(諱)는 강(岡)이요, 자(字)는 사비(思卑)이다. 초명(初名)은 강(綱)이었으나, 같은 항렬의 이름을 피해서 마침내 이름을 바꾸었다. 성은 이씨(李氏)로서,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증조 휘 존비(尊庇)는 판밀직사사 겸 감찰대부(判密直司事兼監察大夫)로 경릉(慶陵 충렬왕(忠烈王))의 조정에서 이름이 있었다. 조부 휘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다. 부친 휘 암(嵒)은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시호가 문정(文貞)인데, 서법(書法)이 묘하기로 한 시대에 이름이 있었으며, 호는 행촌(杏村)이다. 모친 홍씨(洪氏)는 시중(侍中)으로 시호가 충정(忠正)인 휘 자번(子藩)의 손녀요, 우대언(右代言) 휘 승서(承緖)의 딸이다.
처음에 가문의 공로를 인정받아 복두점 녹사(幞頭店錄事)가 되었다. 뒤에 급제하고 나서는 경순부 승(慶順府丞)이 되었다가, 전의(典儀)에서 직장(直長)과 주부(主簿)와 영(令)이 되었고, 병부(兵部)에서 원외(員外)가 되었고, 문하성(門下省)에서 사간(司諫)이 되었고, 이부(吏部)에서 낭중(郞中)이 되었고, 호부(戶部)에서 시랑(侍郞)이 되었고, 밀직사(密直司)에서 대언(代言)과 지신사(知申事)와 제학(提學)과 부사(副使)가 되었다. 그리고 내제(內制)와 외제(外制)의 관직(館職)을 두루 거친 다음에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으며,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총릉(聰陵 충정왕(忠定王))이 서연(書筵)의 강의를 행할 적에 시독(侍讀)으로 선발되었는데, 총릉이 왕위를 양보하자 공이 함께 따라가서 거하였으니, 그 뜻을 세운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상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을미년(1355, 공민왕4)에 공을 불러 보고서 기특하게 여기고는 즉시 주부(主簿)를 제수하여 부새(符璽)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항상 상의 좌우에 있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근신(謹愼)하는 자세를 보였다. 공이 이부(吏部)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때에, 공이 아뢰기를 “신이 직접 붓을 잡고서 신의 이름을 주의(注擬)하는 일은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신축년(1361, 공민왕10) 가을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다. 그때 마침 북방 변경에서 적을 제대로 막지 못한 탓으로 온 나라가 남쪽으로 피신하여 공이 다스리는 경내(境內)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갖가지 물품을 제공하고 접대하는 일이 한없이 이어졌으나, 모두 자기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하게 해 준 결과, 사기(士氣)가 다시 진작되어 마침내 흉적을 섬멸하게 되었으니, 여기에는 대개 공이 도와준 공도 적지 않았다고 하겠다.
개경(開京)으로 돌아오고 나서 원 문정(元文定 원송수(元松壽))을 대신하여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그때 바야흐로 변방의 경보(警報)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상하의 관계가 제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각자 바라는 바를 흡족하게 이루면서 높은 공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공의 힘이 많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시중(侍中)이 세상을 떠나자 상이 친히 초상화를 그려 주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상이 위대한 공신을 특별히 표창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분발시키려는 뜻도 있고 또 시중 자신의 덕이 매우 성대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공의 효성이 상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또한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공은 일에 임해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신중하게 처리하였고, 벗과 사귈 때에는 신의를 지켰으며, 착한 일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마음가짐은 항상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공을 벗으로 삼게 된 이유이다. 하늘이 혹 수명을 더 빌려 주어 공으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앉아서 모두 자기의 소신대로 큰 의혹을 결단하고 큰 정사를 행하게 해 주었다면 내가 장차 공을 스승으로 모실 수도 있었을 텐데, 끝내는 그렇게 되지 못하였으니, 이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부인 곽씨(郭氏)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휘 연준(延俊)의 딸이다. 딸 몇 명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고, 아들 하나를 금년에 낳았다. 공은 모월 모일에 죽어, 모월 모일에 성남(城南) 남촌(藍村)에 안장되었다. 향년은 36세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재질은 완전하게 내려 주고서 / 胡卑其全
수명은 어찌하여 주지 않았는지 / 而不予年
하늘의 진정한 뜻 알 수 없도다 / 夢夢乎其天之未定也
내가 이제 이 명을 새겨 / 我鐫斯銘
천년토록 전해지게 하노니 / 千載而鳴
우리 문경을 그래도 상고할 수 있으리라 / 尙有攷乎吾文敬也
文敬李公墓誌銘 幷序
先稼亭公甞知丁亥貢擧。所取士多聞人。文敬李公年十五。神采曄然。當時已謂有父風云。其後學邃識高。名日益重。堂堂乎宰相之材矣。及其病也。衆以爲必無患也。斯人豈止斯哉。及其亡也。又以爲生之不辰乎。藥物之有誤乎。何斯人而至於斯乎。士大夫相與弔於朝。親戚故舊相與哭於其位。行路爲之嗟惜。上聞之悼甚。命重賻。下太常議謚。若曰。樞密不應謚。吾特褒岡者。文臣服勞久。政堂文學松壽耳。吾是以不能忘。異體同功。今岡而已。議旣上。上曰文敬。唯岡足以當之。嗚呼。公可以無憾矣。其友人上黨韓脩孟雲,曲城廉興邦仲昌父謀於韓山李穡曰。自吾友亡。人孰不悲之。然猶未免死。吾友使可傳者傳而死。則吾三人者之責。而亦所以自慰其悲也。於是以銘屬穡。脩書興邦篆。而其刻石則仲昌父,孟雲實幹之。嗚呼悲夫。吾尙忍銘吾友也哉。公諱岡字思卑。初名綱。避同列名遂改之。姓李氏。固城人。曾祖諱尊庇判密直可事兼監察大夫。有名慶陵朝。祖諱瑀鐵城君。父諱嵒都僉議侍中謚文貞。書法妙一時。號杏村。母洪氏侍中謚忠正諱子藩之孫。右代言諱承緖之女。初以門功錄事幞頭店。旣第丞慶順府。於典儀爲直長,主簿又爲令。兵部爲員外。門下省爲司諫。吏部爲郞中。戶部爲侍郞。密直司爲代言,知申事,提學,副使。歷內外制館。職至大提學。官至奉翊大夫。聦陵在書筵。選充侍讀。及遜位公從之居。其立志可謂不苟矣。上卽位之五年乙未。召見奇之。卽授主簿。令掌符璽。自是常在左右。愈久愈謹。其在吏部當遷。公奏曰。臣執筆注臣名。臣實不敢。上益重之。辛丑秋爲慶尙道按廉使。會北邊失守。擧國南徙。入其境。供偫充斥。所至如歸。士氣復振。卒殲兇黨。蓋有助焉。旣還京。代元文定掌銓選。方邊報絡繹。上下維持。各飽所望而成駿功。公之力居多。侍中之歿。上親圖其形。雖上所以褒異大功臣。歆動衆心。其德甚盛。亦由孝誠能有以動天也。至於臨事懼交友信。好善之篤。存心以平。吾所以友也。天或假年。坐廟堂决大疑行大政。無不如志。則吾將師之而未果也。悲之庸有旣乎。夫人郭氏。考判開城府事諱延俊。女若干皆幼。男一人今年生。某月某日卒。某月某日葬城南藍村。享年三十六。其銘曰。
胡畀其全。而不予年。夢夢乎其天之未定也。我鐫斯銘。千載而鳴。尙有攷乎吾文敬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