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明)나라 선종(宣宗)때, 조내(曺鼐 : 시호 文忠公)는 세공(歲貢)으로 학정(學正)에 제수되었다가 머지않아 태화전사에 임명되었다. 한 번은 도적을 체포하다가 역마차 정자에서 [잡혀 있던] 한 여자를 발견하였다. 그 여자는 몹시 아름다웠는데, [고마움의 표시로] 조내에게 몸을 허락하려는 뜻을 내 비추었다. 그러나 조내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찌 양가의 처녀를 범할 수 있겠는가?’라고 결연히 말하면서 종이조각을 꺼내어, ‘조내는 할 수 없다(曺鼐不可).’라고 네 글자를 써서 불살라 올렸다.
천지신명께 자신의 의지를 아뢰는 소지(燒紙)였던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밝자 그 여자 집을 찾아 데려가도록 건네주었다. 그 뒤 조정에서 실시하는 과거에서 대책(對策 : 시험의 한 종류)을 작성하는데, 홀연히 종이 조각 한 장이 펄럭이며 조내의 책상 앞에 떨어지기에 살펴보니, ‘조내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조내는 정신이 번쩍 들며, 일필휘지로 답안을 써내려갔는데, 그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2. 비릉군(毗陵郡)에 전(錢)씨 성을 가진 노인이 있었다. 그는 선행을 많이 하는데도 애석하게도 자식이 없었다. 같은 동네에 유(喩)씨 노인이 있었는데, 세도 있는 부호의 착취로 진 빚을 갚지 못하고 처자식까지 굶주리게 되자, 전씨 노인에게 돈을 좀 융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전씨 노인은 달라는 액수대로 주고, 차용증도 받지 않았다. 급한 일이 해결된 뒤에, 유씨 노인은 처자식을 거느리고 전씨 노인을 찾아와서 사례를 올렸다. 이 때 전씨 노인의 부인이 유씨 노인의 딸을 보니 단정하고 예뻐, 첩으로 들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씨 노인 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반겼으나, 전씨 노인은 도리어 정색하며 물리쳤다.
“남의 급박하고 어려운 처지를 틈타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짓은 어질지 못하고, 본래 순수한 뜻으로 선행(善行)을 시작했다가 욕망으로 끝나는 것은 의롭지 못하오. 차라리 자식이 없어 대(代)가 끊길지언정 감히 그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이에 유씨 부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거듭 감사의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그날 밤, 전씨 노인의 부인 꿈에 한 신명(神明)이 나타나 일러주었다.
“그대의 남편은 음덕(陰德)이 매우 크므로 그대에게 귀한 아들을 하나 내려 주겠노라.”
과연 1년 뒤에 아들이 태어났다. 이에 하늘이 내려 주었다는 뜻으로 ‘천사(天賜)’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18세에 과거에 급제하더니, 관직이 도어사(都御史)에 이르렀다.
3. 안휘성(安徽省) 휘주부(徽州俯) 출신의 상인(商人)인 왕지인(王志印)은 30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하루는 어떤 관상가가 그에게 10월 중에 큰 환란이 닥치겠다고 예언해 주었다. 왕지인은 평소 그 사람의 관상술을 신통하게 여겼으므로 급히 소주(蘇州)로 가서 팔 물건과 재물을 모두 챙겨 숙소로 되돌아 왔다. 어느 날 해질 무렵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한 여자가 물속에 투신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황급히 황금 열 량을 꺼내어 고깃배를 불러 타고 가서 그녀를 구해 냈다. 그리고 자살하려는 이유를 묻자,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편은 날품팔이로 하루하루 보내며, 저는 집에서 돼지를 길러 세금을 겨우 내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어제 돼지를 팔고 받은 돈이 알고 보니, 뜻밖에 모두 가짜 은(銀)이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와 책망할 것을 생각하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그만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왕지인은 그녀의 사정을 측은히 여겨, 돼지 판돈의 배를 주어 보냈다. 그 여자는 집에 돌아가 자초지종을 남편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남편은 믿지 않고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왕지인의 숙소에 직접 대질하러 찾아갔다. 그러나 왕지인은 이미 잠이 든 뒤였다. 그래서 여자가 문을 두드리며, “물에 투신했던 여자가 찾아와서 사례(謝禮)를 올리려고 합니다.”하고 불렀다. 그러자 왕지인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대는 젊은 부인이고, 나는 홀몸으로 있는 나그네 신세인데, 어두운 밤중에 서로 만나는 것이 어찌 옳겠소.”
이 말을 들은 여자의 남편은 깜짝 놀라면서, 정신이 번쩍 들어 입을 열었다.
“저희 부부가 함께 밖에 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왕지인은 옷을 입고 그들을 만나 보러 나왔다. 그런데 그가 문을 열고 집밖으로 빠져 나오자마자 벽이 갑자기 왕창 무너져 내리면서 그가 누워있던 침대를 덮쳐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 광경을 본 부부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정중히 사례를 올리고 작별하였다. 나중에 왕지인이 집에 돌아와 관상 보는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러자 그는 크게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얼굴에 음덕(陰德)의 무늬가 가득 나타난 걸 보니, 이는 필시 남의 목숨을 구해 준 결과요. 앞으로 복록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겠소.”
나중에 그는 연이어 11명의 아들을 낳았고, 96살까지 장수하면서 아주 건강하게 살았다.
4. 절강성(浙江省) 귀안현(歸安縣)에 사는 심동(沈棟)은 집안이 가난하였다. 그래서 집안 형님인 손주(遜洲)의 추천으로, 그의 인척 집에 가서 훈몽(訓蒙:가정교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주인은 젊은 과부인데다가, 아들은 아주 어렸다. 어느 날 밤 그 부인이 몰래 찾아와 정(情)을 통하기를 부탁했다. 심동은 단호히 거절하고, 다음날로 훈몽을 사양한 채 되돌아 왔다.
부인은 말이 새어 나갈까 두려워하여, 예를 갖추어 간곡히 다시 오라고 부탁했고, 그래도 안 오자 손주에게 직접 가서 모셔 오라고 여러 차례 재촉하기도 하였다. 하도 가지 않으려 하기에 손주가 그 까닭을 거듭 캐물었으나, 심동은 끝내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단지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더니 다음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이 순무(巡撫:지방 최고 장관)에까지 이르렀다.
5 . 명(明)나라 때 문정공(文正公) 사천(謝遷)은, 젊었을 때 비릉(毘陵)의 아무개 집에서 학관을 연 적이 있었다. 그 때 한 처녀가 부모 모두 외출한 틈을 타서, 집을 뛰쳐나와 사천에게 찾아 들었다. 이에 사천은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타일렀다.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 남에게 정조를 잃으면 평생의 오점이 되오. 부모와 친족들은 물론 남편 집안에까지 장차 체면이 없게 만든다오.”
그리고는 단호한 낯빛으로 거절하자, 그 처녀는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사천은 다음날로 곧장 학관을 사양하고 귀가했다. 그는 나중에 헌종(憲宗) 성화(成化) 11년(1475년)의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고,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그 아들 비(丕)도 궁시랑이 되었다.
6. 하징(何澄)은 의술로 이름이 높았다. 같은 군에 사는 손(孫)씨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낫지 않자 하징을 집으로 초빙하여 치료를 부탁했다. 그런데 하징이 손씨의 집에 도착하자, 그의 아내가 가만히 이렇게 하소연했다.
“남편의 병이 오래 지속되어, 치료비를 마련하느라 집 재산을 거의 다 팔아먹었습니다. 부디 제가 몸으로 약값과 치료비 대신 갚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하징은 정색을 하고 부인의 부탁을 거절하며 대답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소. 걱정 말고 마음 푹 놓으시오. 내가 무료로 정성껏 치료해 줄 테니, 혹시라도 그런 생각으로 나를 모욕하고, 낭자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조심하시오.”
이에 환자의 아내는 한편으로 위안이 되어 감사하면서, 한편으로는 내심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물러 나왔다.
그날 밤 꿈에 하징은 한 신선이 자기를 어떤 관공서에 데려가서 그 장관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대는 의술을 베풀어 공덕이 적지 않은데, 다시 위급하고 가난한 환자를 치료해 주면서, 부녀자의 절개를 어지럽히지 않았으니, 참으로 가상하오. 상제(上帝)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대에게 녹봉이 5만전(萬錢)이 되는 관직 하나를 특별히 하사하겠소.”
그 뒤 얼마 안 되어 황태자가 병이 걸렸다. 그러자 황제는 하징에게 조서를 내려 치료하도록 명령했는데, 한 번 지어준 약을 먹고 바로 나아버렸다. 그리하여 하징은 꿈속에서 본 그대로 5만전의 관직을 하사 받았다.
7. 청(淸)나라 세조(世祖) 순치(順治) 16년(1659년)에, 곤산(崑山)의 서립재(徐立齋)는 전시(殿試)에서 장원으로 막 급제한 무렵이었다 . 어떤 사람이 성화묘에서 기도하면서 그곳에 머물러 잠자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신(神)이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자리에 올라앉아, 자기를 불러 이렇게 분부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대는 서씨가 장원에 급제한 까닭을 아는가? 서씨 집안은 대대로 사음(邪淫)을 저지르지 않고, 오랫동안 덕행을 쌓아왔기 때문에, 위로는 천심(天心)을 크게 감동시켰느니라. 지금 장원급제한 것은 단지 그 공덕이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니라. 사람들은 공명(功名)을 떨치는 사람을 보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신기하게 여기지만, 그것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며, 공명은 그 과보가 나타난 것일 따름이다. 이러한 이치를 이제 그대에게 모두 말해주노니, 어리석은 생각으로 온갖 사악(邪惡)을 다 저지르면서 공명을 구하려는 세상의 모든 자들을 일깨워 주기 바란다.”
말을 끝내자 신(神)은 자리에서 일어나 행차를 떠나갔다. 그 사람은 삼가 이 사실을 그대로 적어 널리 유포시켰다. 그 뒤 서립재의 동생인 건암(健庵)과 언화(彦和)가 각각 1670년, 1673년의 과거에 급제하여, 한 집안의 삼형제가 정갑(鼎甲:과거 시험에서 최상위 셋)에 뽑히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그들의 자손들도 줄줄이 급제하여, 집안이 크게 일어났다.
출처 : 불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