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德菴公(錫奎) 遺稿[덕암공(석규) 유고]
덕암공 휘 석규(1883~1913)는 아버지 초헌공(樵軒公) 휘 윤조(胤祚)와 어머니 수원 백씨의 장남으로 관산 당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을 잃은 시기에 성장하며 국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성리학(性理學)에도 일가견을 가질 정도였던 공은 국내에서 머물면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마침 독립투사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일제에 의해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24세의 열혈청년 덕암은 손톱․머리카락 등 유물을 남기고 나라를 등졌다. 만주로 가서 운동을 벌였으나 청나라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 러시아도 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2년간 활약하다 니콜라이로 가서 활동했다. 그러나 공은 8년간의 독립운동을 하다 급환으로 1913년 이국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유고집)
■ 言志 (의지를 밝힘)
「湘水滔滔于海宗先聖旣沒邈不可從滔滔湘水于宗于海悠悠我思曷曰其己與也」
〈해설〉상수(중국 소상강 호수)가 도도히 흘러 바다에서 서로 만나네. 옛 성현들은 이미 가셨으니 멀어서 쫓아 갈 수 없구나. 저 상수의 호숫물은 바다에서 서로 다시 모이건만 간절한 나의 생각 어느 날이나 그치련고.
「庭園之樹有鳥好音我之懷矣迨其今兮泰山巖巖我其瞻止箕伯前驅千里萬里與也」
〈해설〉정원 가운데 나무에서 새가 노래하네. 나의 마음 나라 걱정 밤낮으로 간절하구나. 저 큰 산 층층바위에 올라서 바라보고 싶건만. 풍백신이 앞을 막아 천리만리 멀구나.
「進退一步燕越乃縣操舍一念亦豈繇天廣居在右泉源在東四隣明月一牕淸風與子逍遙攜手以從賦也」
〈해설〉앞으로 나아갈까? 뒤로 물러설까? 내 한걸음 연나라와 월나라 두 나라의 먼 길이네. 나라 걱정 더해 볼까? 포기할까? 나의 일편단심 또한 어찌 하늘의 운명에만 맡길까? 살기 좋은 나의 집 오른편에 서 있고, 맑게 흐르는 샘물은 동쪽에 있어. 동서남북 사방으로 밝은 달은 비추고. 한 창문으로 맑은 바람 서서히 불어오네.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놀아 볼까?
■ 聞削髮令下奮筆書壁 (단발령을 듣고 분해 벽에 글을 붙임)
「上天降此仁吾性非吾身傷毁元非義生無不死人」
〈해설〉하느님께서 이 몸을 태어나게 해 주셨네. 천성은 하느님이 주셨으니 내 몸이 아니네. 내 몸을 상하고 훼손하는 것은 도의가 아니네. 살아 있으나 모두 죽은 사람과 같구나.
■ 力行 (힘을 다하여 실행함)
「泰華接天雄登登最用功一朝眼界豁四海自西東」
〈해설〉태산과 화산의 높은 산이 하늘 높이 솟았으니 오르고 또 올라 정상까지 오르리. 하루아침에 시야가 넓어져 사방의 바다 한 눈에 다 보이네.
■ 秋月(가을 달)
直到天心處 = 가을 밤 밝은 달이 중천에 높이 떴으니
雁橫星正稀 = 기러기는 높이 날고 별은 드물게 보이구나
堯夫一去後 = 요부(아황과 여영)는 한 번 간 후로는
料得少人知 = 가을 달의 밝고 청쾌한 것을 아는 사람이 적네
■ 次朱父子遠遊篇寄再從姪致均 (주부자원유편을차해 재종질치균에 부친 글)
「天之生男兒奚爲使曠游善性具衆理雄略包九州是非東西界順逆胡越疆最羨千仞鳳可怕覂駕驤學博思必慎知圓行欲方熊魚在取舍生死何樂康懷中月長照面上風正光大道是坦平歧路忽彷徨萬里立脚跟千斤着脊梁鬼獸自彼至禮義從此傷紊亂王法政蠱惑民心腸毁我前聖弁裂我先王裳昏衢燭誰揭頹波柱孰剛功利莫滔滔講討是當當重任難遲待遠道豈徐行志慮可矯揉邪欲最洪荒曰爾景陽子抱經歸山堂」
〈해설〉하늘이 남아로 태어나게 함은 호탕하게 놀게 하려함인데. 타고난 천부지성은 우주의 모든 이치를 갖추었고. 웅장하고 넓은 지략은 온 천하를 포용할 수 있네. 옳고 그른 풍습은 동서양의 차이가 있는 것이며. 순리와 역리는 호족과 월나라의 구분이네. 수천 길 높이 나는 봉황새가 가장 사랑스럽고. 멍에 벗고 여기저기 뛰어다닌 말이 가장 두려워라. 배움이 많으면 반드시 생각이 신중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행동은 법도를 지키네.
곰이 고기를 먹으려 잡았다 놓았다 하니. 살고 죽는 일도 어찌 즐겁고 편하다고 하겠는가? 품과 가슴 가운데 달이 깊이 비추고. 낮 위에는 맑은 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오네. 큰 길은 반드시 넓고 평탄한 것이요. 지름길은 좁아 문득 어정거리기 쉽네. 만리 먼 길도 발굽을 세워야 걸어가며 천근의 무거운 짐도 등뼈에 걸어져야 움직이네. 귀신과 짐승 같은 풍습은 먼 나라로부터 들어오고. 우리나라 예절과 도덕은 점차 무너져 가는구나.
문란하고 어지러운 우리나라 정치가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미혹케 하네. 예부터 우리의 건관(巾冠)은 다 파손시키고. 우리 선현들의 의상마저 찢어 없애 버리네. 어두운 거리에 밝은 촛불을 누가 켜서 퇴패한 세파에 굳은 지주를 누가 심을까? 공명과 사리를 너무 탐내지 말고 학문의 강론을 당당하게 힘쓰소서. 무거운 짐은 오랫동안 견디기 어렵고 멀고 먼 길은 어찌 천천히 걷겠는가? 너의 뜻과 생각을 꼭 잡으려면 불의와 사욕은 금물이라네. 경향자야! 경서를 안고 산당으로 가서 열심 배우라.
ㅁ 毅齋公(錫漢) 遺文 [의재공(석한) 유문]
의재공(毅齋公) 諱 석한(1900~1982)은 당동(堂洞) 앞의 천연기념물 孝子松을 심은 주인공인 아버지 초헌공(樵軒公) 諱 윤조(胤祚)와 어머니 水原 白氏의 넷째 아들로 1900년(庚子)에 관산 당동에서 태어났다. 공은 일제하에서 성장하면서 그들의 민족혼말살기도(民族魂抹殺企圖)에 맞서 유학발전(儒學發展)에 이바지하는 한편 門中의 中興을 위해 生涯를 바쳤다.
성균관 고문, 장흥향교 전교(典敎)를 역임하는 한편 청계공(聽溪公)을 광주 大村 황산사(黃山祠)에, 존재공(存齋公)을 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과 경상남도 합천(陜川) 옥계사(玉溪祠)에 추배(追配)하게 했다. 특히 공예태후(恭睿太后) 탄생지이자 오덕(五德)의 탄생지를 되찾은 주인공이다. 공은 위씨 문중을 위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고집)
(144-108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107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07일차에는 '덕암공(석규)의 유고 '와 '의재공(석한)의 유문' 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덕암공 유고와 의재공의 유문]
/ 무곡
밤낮으로 나라 걱정하는 덕암공의 마음과 그기개가 가는곳 마다 진하게 묻어나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무곡
천년세고 선집 밴드게재 기간을 당초에는 음미하고 사유하면서 정독하시라는 차원에서 다소 길게 계획(1년)했습니다만, 다소 늘어질까 걱정되어 게재 기간을 올해 말까지로 조정하고자 합니다.
독자제현 여러분의 깊은 양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부지런히 실어나르겠습니다./ 무곡
나라잃은 구한말의 시대상황이 눈에 떠오르네요. 특히 단발령과 덕암공의 부릅뜬 눈이 다가오네요.
힘 냅시다~/ 벽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