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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자본지배시대에서의 상식
특정 시점과 특정 공간의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공통적인 관념이 존재한다. 그리고 공통적인 관념에 바탕하여 공통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공통적인 행동을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행동의 근원에는 공통적인 관념이 바탕한다. 따라서 특정 시점·특정 공간의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행동을 야기하는 공통적인 관념을 상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상식이 생성될 수 있는 원인은 특정 시공에서의 동일한 경험과 동일한 지식이 바탕이 되는데 동일한 경험이나 동일한 지식만으로 상식이 생성될 수는 없다. 상식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성되는 것인데 인간의 마음에 공통적인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관념이 개별 인간들의 마음 사이에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한 경험과 동일한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동일한 능력 역시 상식이 생성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제각각인 인간의 마음이 동일한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동일한 능력을 비롯되게 하는 근원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육체는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개별 인간의 마음은 개별 육체와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물질은 아니다. 따라서 물질이 아닌 개별 인간들의 마음이 한 곳에서 비롯되었으되 분할되었다면 한 곳의 능력을 모두 동일하게 지닐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면 한 곳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관한 내용은 경제철학의 영역을 지나치게 벗어나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짓도록 하자.
다음으로 상식이 생성되는 데에 바탕이 되는 공통적인 능력을 살펴보자.
마음에 존재하는 관념은 개념에 바탕하여 만들어진다. 그러면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1. 점은 쪼갤 수 없는 것이다.
2. 선은 폭이 없는 길이만 있는 것이다.
4. 직선은 점들이 쭉 곧게 있는 것이다.
(기하학원론㉮, 유클리드, 이무현 역, (주)교우, 2017년, p3)
지식으로 습득하는 모든 개념은 '~은 ~이다.'라는 형식을 지닌다. 만일 지식을 전혀 접할 수 없는 상태라면 어떻게 될까? 지식으로 직선의 개념을 습득하지 못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직선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직선'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점들이 쭉 곧게 있는 것을 직선이라고 규정한다.'
즉 '~을 ~이라고 규정한다.'라는 형식이 개념의 형성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 규정을 통해 어떤 존재를 인식하고 인식된 존재는 '~은 ~이다.'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직선은 점들이 쭉 곧게 있는 것이다.'와 같은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을 ~이라고 규정한다.'라는 규정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직선의 개념을 보자. 직선의 개념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점에 대한 개념이 존재해야 하고 선에 대한 개념이 존재해야 하고 곧음에 대한 개념이 존재해야 한다. 즉 점에 대한 개념과 선에 대한 개념과 곧음에 대한 개념이 결합하여 직선에 대한 개념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규정하면서 다양한 개념들을 만들어 내고 또한 다양한 개념들을 결합하여 또 다른 개념들을 만들어 내면서 인식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이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모든 인간들이 마음에서 갖추고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동일한 과정이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일한 경험 속에서 동일한 개념을 지닐 수 있고 동일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동일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으며 특정 시공에서 동일한 행동의 근거가 되는 동일한 관념이 상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규정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은 항상 올바른 것인가? 하는 부분이 발생한다. 만일 인간의 마음에 육체가 만들어 내는 감정이 배제된다면 마음에 만들어지는 개념은 정신의 순수한 작용에 의해서만 만들어져 올바르겠지만 규정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이 작용하게 되면 규정은 인간적인 감정이 결합되는 관계로 인간적인 개념이 형성되고 인간적인 개념은 세상에 진실로 존재하는 개념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정신의 규정하는 작용이 인간의 감정 작용과 결합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특정 시공의 사회 구성원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는 가운데 동일한 인간적인 감정이 결합하여 규정이 이루어진다면 동일한 개념과 그 개념에 바탕한 다양한 관념들이 생성될 수 있는데 그러한 이유로 사회 구성원들이 그릇된 관념을 상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간의 감정 작용이 결합되어 형성되는 개념과 순수한 정신 작용에 의한 개념을 구별하고자 하는 노력이 구도자들, 즉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 사이에는 비밀스럽게 전해지곤 하였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 노자, 이창성 역, 나무의 꿈, 2017년, p16)
도는 섭리의 작용으로 보면 되고 명은 규정에 의해 생성된 개념으로 보면 되는데 '명가명(名可名)'은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어 형성되는 개념으로 보면 되고 '상명(常名)'은 순수한 정신 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개념으로 보면 된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정신 작용에 의해 형성된 개념들을 구축하지 못하면 다루는 대상에 대한 내용은 바른 내용이 되지 못하며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정신 작용에 의해 형성된 개념들을 구축해야 비로소 바른 내용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표상들을 인간의 감정 작용을 배제한 채 바른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서양에서는 귀납법이라고 하였고 동양에서는 가관(假觀)이라고 표현하였다. 명칭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다. 바른 개념들을 바탕으로 하여 바른 내용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서양에서는 연역법이라고 하였고 동양에서는 공관(空觀)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역시 명칭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다. 흔히 귀납법 혹은 가관과 연역법 혹은 공관은 반대의 방식으로 그릇되게 인식되는데 정반대로 인식하는 방식이 아닌 쓰임새가 다른 방식일 따름이며 이 두 방식은 선천적으로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정신 작용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음의 작용이 아니다. 중관(中觀)이라고 함은 연역법, 혹은 공관을 통해 만들어진 내용을 현실과 결합하여 살펴보는 것을 가리킨다. 가관, 공관, 중관을 불교에서는 삼관(三觀)이라고 불렀고 도교에서는 삼절(三節)이라고 불렀는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三節)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의 뜻을 잘 알지 못한 듯하므로 불가에서 말하고 있는 공관·가관·중관이라는 세 가지 진리(三觀)를 보는 입장에 비유하여 설명한다.'(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 여동빈, 이윤희·고성훈 역, 여강출판사, 2011년, p120)
이러한 방식들은 정신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선천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러한 방식들을 활용하여야 비로소 제대로 된 탐구가 가능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자본지배시대의 상식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상품의 경우 판매자는 다른 가격을 제시하는 구매자들이 있을 경우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구매자에게 상품을 판매한다.
개념을 만들고 개념에 바탕하여 관념을 만들어 내는 작용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듯이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서는 비교하는 작용 역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비교 작용이 발생하는 원인은 인간의 마음은 양(量)을 감지하여 양의 크기를 잴 수 있고 크기가 다른 양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양은 문자처럼 표시될 수 있는데 문자처럼 표시된 양을 숫자라고 한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에서는 감지된 양에 어떠한 작용이 발생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감지한 대상이 무엇이건 표현하여 인식하려 한다. 그러한 이유로 양에 적용되는 작용 역시 표현되는데 표현된 작용은 식으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숫자를 분석하면 인간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양에 대해 알 수 있으며 식을 분석하면 인간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양에 적용되는 작용을 알 수 있다. 실상 숫자와 식을 통해서 양과 양에 적용되는 작용을 탐구하는 것이 가장 쉽다. 양과 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그러한 지식에 이치를 결합하여 인간의 마음에서 다루어지는 양과 양에 적용되는 작용을 파악하는 방법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한다고 하여 반드시 양과 양에 적용되는 작용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서는 양과 수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목적이 아니고 자본지배시대의 상식을 탐구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니 쉬운 방법을 택해서 기틀을 신속히 만든 뒤 상식의 탐구를 계속 진행하도록 하자.
5 더하기(+) 5의 답을 물으면 누구나 10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5cm 더하기 5kg의 답을 물으면 누구나 정답을 얘기할 수 없다. 10cm라고 답해도 정답이 아니고 10kg이라고 답해도 정답이 아니다. 계산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단위가 다른 두 수를 더하고자 하는 작용이 마음에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5 더하기 5를 10이라고 답하는 이유는 두 수의 단위가 같다는 전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즉 인간의 마음은 같은 단위의 숫자만 더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10 빼기(-) 5의 답을 물으면 누구나 5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10cm 빼기 5kg의 답을 물으면 누구나 정답을 얘기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더하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같은 단위를 지닌 숫자들에서만 빼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의 마음에는 단위를 지닌 숫자들을 만들어 내는 작용이 존재하고 같은 단위를 지닌 숫자들을 더하거나 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단위의 종류를 살펴보면 길이, 넓이, 부피, 무게 등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실체가 지닌 속성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각각 하나의 질(質)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실체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을 파악하고 속성에 내재한 양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에 속성을 파악하고 양(量)을 감지하는 작용이 발생함을 가리킨다. 실체도 1개, 2개, 3개로 표시하고 더할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는데 이는 실체를 수량화할 수 있는 속성, 즉 하나의 질로 전환시켜 양과 연결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체를 속성화할 수 있는 원인은 속성은 부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길이, 면적, 부피 등은 실체가 지닌 부분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 실체는 세상 속의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실체 역시 인간의 마음에서 속성화되어 하나의 질(質)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양을 가지고서 더하고 빼는 작용이 발견되는데 더하고 빼는 작용은 물리적 결합과 분리를 가리킨다. 즉 감지된 양에 작용하는 물리적 결합과 분리의 논리가 더하기(+)와 빼기(-)로 표시되는 것이다. 물리적 결합과 분리는 곱하기와 나누기에서도 발견된다. 곱하기는 더하기의 중첩이다. 예를 들어 3×5는 3을 다섯 번 더하라는 규칙이다. 나누기는 가능한 빼기의 수를 묻는 규칙이다. 예를 들어 10÷2는 10을 2로 몇 번 뺄 수 있는지 묻는 규칙이다. 따라서 더하기, 빼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천적인 작용이고 곱하기, 나누기는 선천적인 작용에 바탕하여 계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후천적인 작용임을 알 수 있다.
cm(센티미터)와 in(인치)는 길이를 재는 단위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동일한 길이를 재더라도 표시되는 단위가 다르다. 따라서 표현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길이를 재어 인식하는 데에는 어떤 단위를 사용하더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데 cm이건 in이건 이러한 단위들이 존재한다는 말은 마음은 모두 동일하게 일정한 양을 정하고 일정한 양에 바탕하여 특정한 양을 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cm는 실재에서 길이의 특정 양을 가리키고 1인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마음은 특정한 양을 다르게 정할 수 있지만 특정한 양을 정하여 다른 양을 잰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이때 마음에서 정해지는 양을 정량이라고 하는데 정량이 수로 표현되면 단위수라고 한다.
1. 단위(단위수)란 이것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만드는 것이며, 이것을 1(일)이라고 부른다.
(기하학원론㉯, 유클리드, 이무현 역, (주)교우, 2017년, p99)
그러면 단위수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10은 단위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발생한다. 10 역시 단위수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으니 마찬가지로 단위수이다. 따라서 단위수 10과 같이 단위수 1이 아닌 수들을 단위수 1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단위수 1은 바탕이 되고 재는 데에 있어서 기준이 되니 척도가 되는 단위수로 규정할 수 있다. 정량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탕이 되는 정량은 척도가 되는 정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이 부분에 대한 규정이 없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도 완전하지는 않다.
그런데 단위들 중에는 밀도를 나타내는 g/ℓ, g/㎤와 같은 단위와 속도를 나타내는 m/s, km/h와 같은 단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단위들을 이용한 수들은 두 개의 다른 단위를 지닌 수들을 나누는 방식으로 성립한다. 예를 들어 2ℓ의 부피에 500g의 무게를 지닌 물체의 밀도는 250g/ℓ로 표시할 수 있는데 이는 500g에 2ℓ를 나눈 것이다. 앞에서 물리적 분리와 결합은 더하기와 빼기만이 존재하고 곱하기, 나누기는 더하기와 빼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더하기와 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곱하기와 나누기 역시 다른 단위들 간에는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밀도와 속도의 단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위수들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보아야 하고 여기서의 결합은 어떠한 결합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더하기, 빼기는 물리적 분리와 결합 작용을 표시한 것임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밀도와 속도는 물리적 분리와 결합의 논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무게와 부피가 결합하여 생성된 단위들 g/ℓ와 g/㎤은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도 아니고 부피를 나타내는 단위도 아니다. 즉 새로운 개념인 밀도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이는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두 물질과 속성이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인 물이 생성된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결합은 화학적 결합이며 이 화학적 결합은 물리적 결합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면 이러한 화학적 결합은 어떤 원리에 의해 생성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무게와 명도(색의 밝고 어두움)를 결합한다고 가정하자. 1kg(무게 단위수)과 N5(명도 단위수)는 곱하건, 나누건 결합이 되지 않는다. 이는 무게와 명도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결합 작용이 마음에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학적 결합의 원리는 두 속성 사이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에는 관계를 파악하고 관계를 짓는 작용이 발생한다는 사실 알 수 있다. 밀도나 속도의 단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속성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화학적 결합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단위들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나누기는 측정을 위한 뺄샘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화학적 결합의 작용을 표시하고 있다. 곱하기 역시 더하기에 바탕을 두지 않고 화학적 결합을 표시하는 데에 독자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면 생산량과 기능의 곱에 의하여 개선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생산량과 기능의 곱으로 인해 현현한 것을 만족도라고 규정하겠다. B의 비중이 증가함으로써 1kg의 생산물의 기능이 두 배가 증가하였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같은 1kg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기능이 2배 증가한 생산물의 만족도는 2기능·kg(기능·kg은 단위이며 여기서의 수는 제니텀임)이 되고 기능이 증가하기 전 생산물의 만족도는 1기능·kg이 된다.'(참조 : 경제철학(입문 편2), (3) 핵심 개념3)
보통 두 개 이상의 단위수들을 서로 곱하거나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이 형성된 단위수를 제니텀이라고 하는데 서로 다른 종류의 단위가 적용되는 단위수들이 관계 속에서 새로운 단위를 형성하며 생성되는 단위수가 일반적으로 제니텀이 된다. 이러한 제니텀은 단위를 지닌 수이니 단위수이기도 하다. 그러면 단위를 지닌 수로 나타나니 정량이 표시된 단위수와 관계를 나타내는 단위수가 동일한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더하기와 빼기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A자동차는 200km를 이동하는데 100km를 이동하는 데에 1시간이 소모되었고 나머지 100km를 이동하는 데에 2시간이 소모되었다고 가정하자. 처음 100km를 이동하는 데에 속도는 100km/h이고 나머지 100km를 이동하는 데에 속도는 50km/h이다. 여기서 100km/h와 50km/h를 더하면 150km/h가 된다. 단위가 같으니 더하기가 가능하지만 앞에서 정량을 단위수로 표시하여 더하기, 빼기를 했을 때는 의미가 있었는데 속도들을 더한 150km/h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A자동차가 200km를 이동할 때 총 3시간이 걸렸으니 평균 속도는 약 66.67km/h(200km÷3h)이다. 차라리 평균 속도는 의미를 지니지만 두 속도를 합한 150km/h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단위수로 표시되기는 하였지만 단위수로 표현된 양은 앞에서 언급된 정량과는 구별되는 양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평균 속도를 구할 때 두 개의 속도를 다시 각각의 거리와 시간으로 분해하여 새로운 속도를 구함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화학적 분리 작용 역시 마음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속도가 거리와 시간으로 분해되는 것은 물이 산소와 수소로 분해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마음에서 양들에 관계를 부여하는 작용에 대해 살펴보자. 양들에 관계를 부여하는 작용은 비례식으로 표시된다. 비례식에 관한 내용을 예를 통해 살펴보자. A는 길이가 10cm이고 B는 20cm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C는 50cm이고 D는 100cm라고 가정하자. 비례식은 A의 길이과 B의 길이의 관계를 10cm : 20cm로 표시하고 C의 길이와 D의 길이의 관계를 50cm : 100cm로 표시하는데 비례식에 입각할 때 관계는 1 : 2로 같다. 즉 다음과 같은 식이 성립한다.
● 10cm : 20cm = 50cm : 100cm = 1 : 2
여기서 1과 2의 숫자를 생각하자. 위 식에서 이 두 숫자 중 1은 10cm를 가리키기도 하고 20cm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2는 20cm를 가리키기도 하고 100cm를 가리키기도 한다. 1 : 2는 위 식에서 표시된 수들 이외에도 다양한 길이들의 관계로 표시될 수 있다. 30cm : 60cm, 150cm : 300cm … 등 다양한 정량들의 관계로 표시될 수 있다. 그러면 정량을 살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10cm의 정량이 다른 정량으로 변할 수 있는가? 단위를 인치로 바꾸면 다른 형태로 표시할 수 있겠지만 이는 표시하는 숫자의 방식에 의한 변화이고 실재에 대응하는 10cm의 정량을 대체할 수 있는 정량은 없다. 그런데 1 : 2에서 1은 2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2 역시 1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2가 없다고 생각하면 1 : 로 표현되는데 이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 2 역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두 수가 모두 존재하는 경우 즉 1 : 2가 갖추어져야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1 : 2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 하나의 수로 볼 수 있고 일반적으로 분수 1/2로 표현된다. 따라서 1 : 2를 하나의 수로 나타낸 1/2은 정량이 아닌 다른 양인데 이 양을 도량(度量)이라고 규정하자. 도량을 구성하는 1과 2에는 다양한 정량들이 규칙에 입각해 대입될 수 있다. 속도를 나타내는 100km/h를 분석해 보자. 1시간에 100km를 가건, 2시간에 200km를 가건 10시간에 1,000km를 가건 속도는 모두 동일하게 100km/h로 표시된다. 따라서 km/h는 정량을 표현하는 다위가 아니라 도량을 나타내는 단위임을 알 수 있다. 즉 속도를 나타내는 100km/h는 제니텀이 되면서 동시에 도량이 된다. 다음으로 도량이 마음에서 생성되는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한 개의 단위를 지닌 두 수를 사용하건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위를 지닌 두 수를 사용하건 도량은 두 양의 관계로 표현되는 양인데 여러 개의 도량들은 서로 비교될 수 있다. 예를 들어 50km/h와 100km/h는 더하기나 빼기는 무의하지만 속도를 견주어 볼 수는 있다. 따라서 비교를 양적으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생성된 양이 도량임을 알 수 있다. 도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에는 정도(程度)가 있다. 정도는 도량의 분모를 척도로 하여 분자의 수준을 측정함으로써 현현하는 양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8시간 공부하는 학생을 척도로 두었을 때 12시간 공부하는 학생은 12 : 8, 즉 12/8로 표시되며 이 경우 공부하는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심하게 공부하는 정도는 빼기를 통해 4시간으로 표시할 수도 있고 백분율인 50%(4시간 ÷ 8시간 × 100%)로 표시할 수 있다. 반면에 4시간 공부하는 학생은 4 : 8, 즉 4/8로 표시되고 정도가 심하게 논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심하게 노는 정도는 빼기를 통해 4시간으로 표시할 수도 있고 백분율인 50%(4시간 ÷ 8시간 × 100%)로 표시할 수 있다. 따라서 도량과 척도가 결합할 때 정도(程度)라는 양이 현현하고 마음에는 표준을 정하고자 하는 작용이 존재하면 표준을 정하고자 하는 작용이 양과 결합하면 척도(尺度)가 생성됨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자본지배시대의 상식을 살펴볼 수 있는 기본적인 기틀은 마련하였다. 앞에서 다룬 내용을 접하는 이들은 수학을 다루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수학은 마음에서 형성된 특정한 양을 전제로 기술적인 부분을 다루는 학문이다. 반면에 앞에서 다룬 내용들은 수학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수의 기술적인 부분을 다룬 것이 아니고 수의 근원이 되는 양(量) 및 양에 적용되는 마음의 작용을 다룬 것이다. 양과 양에 적용되는 마음의 작용만을 별도로 탐구하는 학문을 별도로 양학(量學)으로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양과 양에 적용되는 마음의 작용을 탐구하는 일은 정신을 탐구하는 한 분야로 정신철학의 일부이다.
상식1의 경우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상품을 판매한다는 전제가 있는데 이러한 전제가 붙은 이유는 판매 시 가격 외에는 고려할 대상이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 만일 상품의 품질이나 거래하는 양, 혹은 거래 장소가 달라서 다른 조건이 첨가된다면 판매 시 여러 구매자들이 존재하는데 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한 구매자에게 상품이 판매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00개의 가공물을 판매하는 상인이 있는데 1개를 구매하려는 구매자와 전량을 구매하려는 구매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판매하는 상인은 전량을 구매하려는 구매자에게 1개를 구매하려는 구매자보다 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전량을 판매하면 일정 기간 거래 횟수가 증가하여 일정 기간 획득하는 이윤이 보다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매자의 구매량을 포함하여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는 전제가 없으면 상식1은 그릇된 상식이 된다. 동일한 양을 동일한 조건에서 구매하는데 10,000원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을 9,500원에 판매할 상인은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동일하게 비교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조건이 개입되면 어떻게 될까? 상인은 가격에 의해서만 구매자를 선택하지는 않게 되고 다른 두 개 이상의 다른 종류의 양들을 결합한 제니텀에 입각하여 구매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발생된다. 앞의 예의 경우 제니텀의 형태를 지닌 양(1개 당 남는 이윤 × 판매량)을 계산할 것이고 거래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발생하는 일정 기간 거래 금액의 증가 및 획득할 수 있는 이윤을 고려하여 구매자를 선택하게 된다. 가격을 나타내는 양을 고려하건 제니텀을 고려하건 마음에서 비교 작용에 의해 최종적으로 판매할 구매자를 결정하게 되고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비교 작용이 상식1을 성립시키는 바탕이 된다. 수식에 입각할 경우 비교 작용은 비례식에 입각해 표시할 수 있다. 만일 1개를 구매하는데 10,000만원을 지불하려는 구매자 A와 9,500원을 지불하려는 구매자 B가 있다고 가정하자. A는 10,000 : 1로 표시될 수 있고 B는 9,500 : 1로 표시될 수 있다. 따라서 10,000 : 1 〉 9,500 : 1 라는 식에 입각해 판매자는 A 구매자를 선택하여 판매하게 된다. 만일 10,000 : 1 〉 9,500 : 1, 10,000 : 1 〈 9,500 : 1 라는 두 식이 인간의 마음에 모두 생길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10,000원을 제시하는 구매자에게 판매하는 상인도 있을 것이고 9,500원에 판매하는 상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원인은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비교 작용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2.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상품의 경우 구매자는 다른 가격을 제시하는 판매자들이 있을 경우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판매자에게 상품을 구매한다.
상식2는 상식1과 동일한 이치가 적용된다. 상식1은 판매자의 판매 행위에 중점을 두어 살펴본 것이라면 상식2는 구매자의 구매 행위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는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상식2의 성립 바탕에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비교 작용이 있다. 상식2 역시 모든 조건이 동일하고 구별되는 점은 가격 외에는 없을 때 성립한다. 가격 외에 다른 조건이 형성되면 제니텀이 생성되어 제니텀에 비교 작용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 동일한 품질의 동일한 상품을 10,000원에 판매하는 상인과 9,500원에 판매하는 상인이 있다면 구매자는 9,500원에 판매하는 상인으로부터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반면에 10개의 상품을 구매해야 하는 구매자가 있는데 낱개로 판매하지 않고 10개를 한 묶으로 개 당 10,000원씩 판매하는 상인과 1개 외에는 판매할 수밖에 없는 상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반드시 10개의 상품을 급하게 구매해야 하는 구매자는 10,000원을 지불하고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조건이 아니라면 상식2 역시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일 10개의 동일한 품질을 지닌 동일한 상품을 두 상인이 판매한다면 구매자는 9,500원에 판매하는 상인으로부터 상품을 구매할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들의 마음에는 동일한 마음의 작용, 즉 비교 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3. 기술적, 사회적 조건 및 투자 조건이 동일할 경우 자본가는 여러 사업들 중 가장 큰 이윤율을 획득할 수 있는 사업에 투자한다.
상식3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비교 작용이 바탕이 되어 성립된다.
가치를 투입하여 조직체를 만든 뒤 이윤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의 마음에는 기대이윤율이 존재한다. 이 기대이윤율은 인간의 마음에 형성되는 것으로 주관적인 것인데 이러한 기대이윤율은 사회적으로 평균을 이루며 일반적 기대이윤율을 형성한다. 개별 인간의 마음에 형성되어 있는 기대이윤율은 개별 기대이윤율, 혹은 개인적 기대이윤율로 표현할 수 있다. 하여간 개별 기대이윤율이나 일반적 기대이윤율은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개념이다.
개별 기대이윤율이나 일반적 기대이윤율의 현현의 근원에는 실재의 이윤율이 존재한다. 개별 자본의 실재 이윤율은 제각각이지만 경제영역의 실재 평균 이윤율은 개별 자본의 이윤율을 모두 안다면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현 시대의 현실에서 실재 평균 이윤율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개별 기대이윤율은 개인의 경험 속에서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고 일반적 기대이윤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개별 기대이윤율이나 일반적 기대이윤율이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경험이 바탕이 되어 형성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윤율들의 형성의 바탕에는 실재의 개별 이윤율과 실재의 평균 이윤율이 있음은 분명하다.
투자를 하고자 하는 개인은 개별 기대이윤율에 입각하여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만일 개별 기대이윤율을 충족시킬 만한 사업이 없다면 정상적인 경우에 지니고 있는 가치를 사업하기 위해 투입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실재 사업에서 발생하는 개별 이윤율이 개별 기대이윤율과 비교가 된다. 여기서 그러한 개별 이윤율이 개별 기대이윤율 이상이 되면 비로소 투자가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개별 기대이윤율 이상을 보장하는 여러 개의 투자 가능한 사업들이 개별 투자자에 의해 발견된다면 상식3이 적용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 조건이 동일한 여러 사업들이 존재한다는 말은 고려 대상은 이윤율 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다른 조건이 결합되면 상식3 역시 성립하지 않게 된다. 어떤 사업이건 간에 초기 투자 가능 금액이 존재하고 투자 가능 금액에서 기대 가능한 이윤율이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100억을 신규로 투자하고자 하는 개별 투자자의 개별 기대이윤율은 8%인데 5억에서 10억까지 10% 정도의 이윤율이 기대되는 A사업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 사업에는 10억 이상의 투자는 불가능하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9%의 이윤율이 기대되는 B사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설사 10억을 투자할 경우 10%의 이윤율을 보장하는 A사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억을 투자하고자 하는 개별 투자자는 9%의 이윤율을 보장하는 B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아니고 투자 금액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이윤율이 낮은 사업에 투자하는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특정 사업에 경험과 지식이 충분히 있는 경우 보다 높은 이윤율이 기대되지만 경험과 지식이 없는 사업보다 경험과 지식이 있는 특정 사업을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여 더 낮은 이윤율이 기대되는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식3 역시 조건이 모두 동일하여 이윤율에 의해 투자할 사업이 결정되어야 성립하지 조건이 다르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서 발생하는 작용은 조건이 동일하지 않을 경우 동일한 조건을 가상하여 결정하기 때문이다.
4. 이윤을 발생시킬 수 없는 사업에 자본가는 가치를 투입하지 않는다.
자본의 목적은 이윤 획득에 있다. 이윤 역시 소득의 한 형태이니 자본 역시 소득을 얻기 위해 자본가, 혹은 자본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본은 가치의 투입을 통해 상품 공급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공급에 사용되는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가치의 투입은 자본이 만들어지는 시점 뿐만 아니라 자본이 파멸하여 해체되기까지 이어진다.
자본이 생성되어 사라지기 전까지의 기간을 분할했을 때 특정한 분할된 기간에 항상 이윤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분할된 기간에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가치가 투입되는 원인은 발생하는 손실이 일시적이며 미래에 이윤이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만일 지속적인 손실로 인해 이윤 획득이 불가능하다고 자본가가 판단한다면 그 자본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사업에 신규 투자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즉 자본이 운영되는 기간 동안 판매하여 회수되는 전체 가치가 투입되는 전체 가치보다 작다고 기대되면 가치는 자본을 형성하는 데에 투입되지 않는다.
앞에서 다룬 내용은 절대적 측면에서 언급한 것이고 절대적으로는 이윤이 발생하지만 상대적으로는 이윤이 발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손실로 판단되는 경우 역시 존재한다. A, B 두 지역이 있는데 A에 100만원을 투자하면 1년 간 5만원의 이윤이 기대되고 B에 100만원을 투자하면 1년 간 20만원의 이윤이 기대된다고 가정하자. 투자할 자본가가 이 사실을 알며 어느 지역이든 투자가 가능하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자본가는 A지역에 투자하는 것이 손실이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이는 절대적 측면에서는 이윤이 발생하지만 상대적 측면, 즉 두 지역 중 B지역의 이윤율을 기준으로 A지역의 이윤의 적정성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5. 인간은 누구나 삶의 양식을 예외 없이 지니고 있는데 삶의 양식 속에 존재하는 '소득을 획득하는 수단'이 높은 가격으로 평가 받고 거래되기를 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발전적으로 활동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개인적인 소득의 대부분은 생존수단과 욕망충족수단의 소비에 사용되고 이러한 수단들을 부족함 없이 보다 수준 높게 소비하기를 원한다. 보다 품질이 좋은 유(有)들을 부족함 없이 소비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생존수단과 욕망충족수단을 항상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수단들을 늘 접하면서 살고 결과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인생의 목적이 한 인간의 첫째 목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인생의 핵심 목적으로 마음에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자본지배시대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의 첫째 목적은 소득 증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득 역시 절대적 측면과 상대적 측면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절대적 측면에서 누구나 현재의 소득보다 미래의 소득이 커지기를 원한다. 현실적으로 소득이 감소하는 국면에 처하면 되도록 가급적 적은 양으로 소득이 감소하기를 원한다. 상대적 측면에서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 비해 보다 큰 비중의 소득의 획득을 원하는데 이는 소득이 증가할 때나 감소할 때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조직체 전체 소득과 개별 소득 사이에 비율이 성립하고 개별 소득과 개별 소득 사이에 비율이 성립하기 때문에 상대성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득을 획득하는 데에는 수단이 존재한다. 이윤을 획득하는 수단은 자본이 되고 임금이나 봉급을 획득하는 수단은 활동지출이 된다. 이 두 수단의 가격이 상승하면 소득 역시 증가할 수 있으니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은 소득을 획득하는 수단의 가격이 상승하기를 원한다. 자본 역시 상품으로 거래되니 자본의 상승은 판매 시 부(富)의 증가를 뜻한다. 이 경우 투입 시점의 가격과 판매 시점의 가격 차이, 즉 차액이 자본의 판매를 통해 획득하는 소득이 된다. 그리고 활동지출의 가격 상승은 일정 기간 획득하는 임금이나 봉급, 즉 소득의 크기를 증가시킨다. 따라서 활동지출의 제공을 통해 소득을 획득하는 이들 역시 활동지출의 가격이 상승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6. 목적이 동일하고 구성 요소들의 성격 및 구성 요소들의 결합 형식이 동일하면 동일한 개념에 입각해 현현한 것이다.
모든 개념들에서 인간의 목적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대상에서 비롯된 개념에는 인간의 목적이 발견된다. 물론 실재하는 대상의 모든 개념들에는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절대자의 목적이 담겨 있고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도 결국 절대자의 목적이 변한 것이지만 인간의 목적이 담겨 있는 개념과 인간의 목적이 담겨 있지 않은 개념은 분명히 구별된다. 인간의 목적이 담긴 개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대상의 경우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의자의 개념에는 걸터 앉고자 하는 인간의 목적이 발견되고 침대에는 편하게 눕고자 하는 인간의 목적이 발견된다. 그러한 이유로 상품, 화폐, 자본 등에도 목적이 발견된다. 반면에 공기, 물, 시간, 공간 등의 개념에는 인간의 목적이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대상이 물질적인 것이건, 비물질적인 것이건 구성 요소들이 있으며 이 구성 요소들은 형식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대상의 경우 목적이 같고 구성 요소들이 같으며 구성 요소들의 결합 형식이 동일하면 누구나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 역시 정신의 선천적인 능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의지와 목적을 구별하자면 의지는 목적이 담긴 움직임이다.
경제영역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 목적, 구성 요소, 구성 요소들의 결합 형식이 발견된다. 경제영역의 구성 요소 역시 목적, 하위 구성 요소들, 하위 구성 요소들의 형식이 발견된다. 그러한 이유로 경제영역의 어떤 대상을 접할 때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원인은 목적, 구성 요소들, 구성 요소들의 형식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인간이 지닌 정신의 선천적인 능력이 정도(程度)는 다를지라도 동일한 질(質)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지배시대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시장의 공급이나 수요에 참여하며 살아간다. 올바른 개념과 올바른 개념에 바탕한 내용을 알고서 살아가면 개인적인 이익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할 수 있지만 그릇된 개념과 그릇된 개념에 바탕한 내용을 알고서 살아가면 개인적인 손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데 그 중에는 경제영역에 대한 개념들 역시 존재한다. 개념은 아무 근거 없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생성되게 하는 바탕이 존재한다. 즉 개념이 씨앗이라면 씨앗이 생성되게 하는 바탕이 마음에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은 이 씨앗이 생성된 바탕을 직관적으로 어느 정도 감지할 수는 있지만 바탕의 구체적 형태를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씨앗을 생성시킨 바탕의 구체적 형태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바탕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선천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바탕의 구체적 형태를 언어나 수, 형태로 외부에 실현하면 된다. 즉 씨앗을 자라게 하여 씨앗을 생성시킨 바탕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의 육체에서 비롯된 마음의 작용이 결합하여 형성될 수 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개념이라고 하여 반드시 그릇되고 인간에게 이롭지 않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 중에는 올바른 개념도 있고 그릇된 개념도 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경우에는 운이 좋으면 올바른 개념이 만들어지고 운이 나쁘면 그릇된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여간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개념들 중에는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개념들 역시 존재한다. 순수한 정신 작용만을 일으키지 않는 한 개별 인간의 마음에는 바른 개념들과 그른 개념들이 혼재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내용은 부분적으로는 바르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내용에 바탕한 행위는 개인에게 이로울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개인의 행위는 타인이나 공동체에 이로울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선한 행위도 하고 악한 행위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평생을 살아가면서 행하는 행위의 대부분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행위를 결정하는 내용의 바탕을 이루는 개념들에 하나의 형태를 지닌 의지가 선천의 능력에서 비롯된 선천의 움직임과 결합하면 단순 복합의 형태를 지닌 개념들의 묶음은 내적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개념에 포섭되고 그 하나의 개념은 모든 행위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이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에 선(善)이 깃들여 있다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념이 생성되겠지만 의지에 악(惡)이 깃들여 있다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이념이 생성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에게 이롭고 사회에도 이로운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바른 개념을 얻고 그른 개념을 바르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그에 바탕하여 바른 내용을 형성하도록 힘써야 하며 항상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한다는 의지로 악을 멀리하는 데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경제철학 입문 편에서 언급해야 할 모든 내용은 끝났다.
마지막으로 경제철학을 탐구함에 있어서 바른 자세를 남기도록 하겠다.
사념(邪念)에 사로잡히지 말고 항상 정진하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