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거세다.
부산을 다녀온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고 또 다음 주에 통도사 계획이 있는데도 동생들의 여행제안을 냉큼 받았다. 마다할 내가 아니다.
3월 15일
동생 부부와 여동생 그리고 나, 늙은 4인방은 고향(경북 상주)에서 합류하여 동생의 승합차를 타고 출발했다. 가다가 생각나면 쉬고, 먹고, 자고, 하는 제멋대로의 여행이다.
김천을 거쳐 함양을 지나 남원 실상사를 둘러 지리산을 종주했다. 아찔하면서도 상쾌했다.
구례에 이르니 봄이 왔음을 실감케 한다. 도처에는 산수유의 노랑 물결이 바다를 이루고, 갖은 꽃 몽우리들은 누가 톡 하고 건드려주기를 바라는 듯 탱탱하고 요염한 자태로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천은사를 거쳐 화엄사에 이르니 흐드러진 홍매화가 눈을 황홀케 한다. 꽃 중의 꽃, 이를 일러 군계일학이라 했던가?
짧은 지체 후에 하동으로 이동했다. 하동은 우리나라 녹차의 시배지가 있는 곳이다. 몽우리 채 앓고 있는 화계십리벚꽃길은 지나 쌍계사를 둘러 여동생 지인이 운영하는 다원에서 녹차 한 잔에 짐을 내려놓는다.
닭구이로 저녁을 달래고 K리조트에서 첫 밤을 보냈다.
3월 16일
눈을 떠 밖을 보니 선경이 따로 없다. 새털처럼 가벼운 안개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상큼한 새벽공기가....
암튼 필로서는 표현 불가다. 이래서 화개동천이란 말이 생겼나보다.
뷔페로 아침을 하고 남해로 출발했다. 섬진강 꽃길을 따라 물도 흐르고 나도 흘러 노량대교를 지나 남해에 들었다.
다랭이마을을 거쳐 보리암에 올랐다. 시작은 가벼웠으나 끝은 고난이었다. 경치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허공에 대고 주먹감자라도 하나 먹였을 터다.
상주해수욕장 인근 미조항에서 물회와 회덥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도로가에 도열해 얼굴 붉히는 애기동백의 배웅을 받으며 사천을 지나 통영으로 달렸다. 가는 길에 만났던 죽방렴의 생경한 풍광과 삼천포대교의 위용은 오래도록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통영에서 저녁거리로 회를 장만해 거제도의 외딴 바닷가에 있는 요트펜션에 도착한 것은 노을이 가시고 난 한참 후였다.
3월 17일
여행기간을 하루 늘려 3박4일이 되었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경주까지 먼 길을 가야한다.
요트를 태워주겠다는 주인장의 배려도 일정을 핑계로 거절한 채 다시 길을 나섰다.
김영삼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하고 포로수용소에서 계룡산을 오르는 모노레일에 탑승했다. 빽빽이 우거진 해송 사이에 길을 낸 왕복 3.5킬로미터의 긴 코스다. 경사가 얼마나 가파른지 현기증에 토까지 할 지경이었다.
계룡산 정상에 올라보니 거제도가 다 내 발아래다.
매일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평생을 헛꿈에 시달렸던 터라 더는 미련을 버릴 수 밖에...
거가대교를 지나 해저 50미터 깊이에 부설된 침매터널을 달려 가덕도에 닿았다.
가덕도는 신공항이 예정된 곳이다. 방앗간을 지나는 참새처럼 나도 공항예정지로 향했다. 전망대에 오르니 비행장을 취소하라는 현수막들이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쑥도다리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며 헐값에 나온 땅이라도 있나 하고 살폈으나 역시 허사였다.
가덕도를 나와 부산으로, 지난 부산여행에서 빠트렸던 스카이워크에서 오륙도를 조망하고 부산항대교와 광안대교를 누벼 경주로 내처 달렸다. 기장 해동용궁사를 잠시 들렸다가 감천 문무대왕릉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해변에는 북을 치며 죽은 대왕님께 뭔가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아마도 살아있는 놈들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
보문단지 내 불빛 어두운 리조트에 짐을 푼 것은 한밤이었다.
3월 18일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입장시간에 맞춰 석굴암에 올랐다. 옛 모습은 많이 쇠했지만 팔 벌려 맞이하는 동해의 늦은 일출과 빛내림은 역시 장관이었다. 하산 길에 불국사에 들렸다가 대릉원지구로 향했다. 대릉원 인근에는 올망졸망한 볼거리들이 많다. 분황사, 동궁과 월지, 첨성대를 걸어 멀찍이 교동 최부자집은 비켜갔다. 어차피 인연이 없었으니깐....ㅋㅋ
쌈밥으로 늦은 점심을 하고 신경주역에서 동생들과 헤어져 대전행 고속열차에 몸을 얹었다.
짧지 않은 강행군에 몸은 지쳤으나 마음은 뿌듯했다.
다 같이 경로우대권을 가진 처지임에도 끝까지 나를 챙겨준 동생들이 고마웠다.
오늘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떠난 여행, 내게는 참 행복을 일깨워 준 시간이었다.
첫댓글 풍요로운 표현에 감동입니다.사진과 함께해주셔서 보는내내 행복했습니다^^
같은여행지를 다녀와서인지 내 머릿속 여행에 시인님과 동행된 느낌받습니다.최고입니다.형제들과의 추억 부럽습니다.짱
채시인님^^
멋진 여행하셨네요. 사진도 예술이요, 글도 예술입니다. 저도 그 여행코스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코로나19 끝나면 토방회원들과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여행은 언제나 가슴 설레지요. 더구나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채시인님^^ 통도사 다녀오시면 또 멋진 사진과 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