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같은 할아버지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함석헌옹(85)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을때, 수화기에선 「여보세요」대신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거 보시오』
기자는 그 목소리가 하도 정정해서 그 아드님인가 하고 『함석헌 선생님좀 바꿔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요 말씀하시오』
그말에 또 좀 당황한 기자는 얼떨결에 『누구 곁에 있는 분좀 바꿔달라』고 했다. 누군가 비서격인 사람과 탐험교섭을 해야 될 것 같아서였다. 그랬더니 또 이런 말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어요. 나밖에 없으니 어서 말씀하시오』
함 옹이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함 옹 집 대문 앞엔, 무슨 공사를 하다 말았는지 한 리어카는 넘은 직한 모래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통 옆엔 난방 시설이 연탄 보일러인지 연탄재가 30여개나 나란히 줄을 맞춰 채곡채곡 쌓여 있었다.
함 옹은 비닐로 덮은 온실에서 화초를 매만지다가 나와서 취재진을 맞았다. 지금 한창 돌을 붙이고 있는 계단을 오르니 현관 앞에 불타다 만 내촌감삼전집 대영백과 사전 같은 책들이 상자에 담겨 쌓여 있었다. 지난 해 8월에 불이나서 집과 책이 다 타버렸는데, 잿더미 속에서 쓸만한 책들을 찾아 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건평 36평의 이 양옥집도 잿더미 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공사가 아직 덜 끝나서 밖에 모래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동으로 커다란 창이 난 함 옹의 방엔 아침나절 햇살이 함 옹의 흰머리와 수염에 떨어져 더욱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재색 바지저고리와도 콘 트라스트를 이뤄 머리와 수염이 더욱 희게 빛났다.
오효진 혹시 하느님 같다는 말 안 들으셨습니까?
함석헌 『왜요, 거리에서 애들이 놀다가 내가 지나가면 「저기 하느님 지나간다」고 그러지요. 요즘 텔레비전에서 하느님을 그렇게 비춰주니까니』
그러나 함 옹은 접근하기 어렵게 그렇게 거룩하지는 않았다. 탐험 얘기를 꺼내자 함옹은 만 여든 다섯 살의 노인이 여덟살도 안 된 소년처럼 수줍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 그걸 뭘 하겠다고 그래요. 거이 할 거 없어요』
함옹의 얘기를 듣자니까 그의 입에 선 니름(이름) 할슈없서, 같은 구한말의 교과서나 육전소설에서 볼 수 있었던 말들이 실제로 막 튀어나왔다.
함 옹의 말을 들으면서 기자는 함 옹의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하던 그 조선시절의 할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뿌리
그러나 그가 실제로 조선시대에 태어난 건 아니다. 그는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난 지 4년 뒤인 1901년 3월 13일 평북 용천군 부라면(府羅面) 원성동(元城洞)에서 태어났다.
생일이 당연히 음력일 것 같아 묻지 않으려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오효진 음력 생일이시죠?
또 뜻밖의 대답.
함석헌『아니야요. 양력이야요. 벌써 어릴때부터 양력으루 환산해서 썼는 걸요. 다들 태양력 쓰는 데 왜 생일은 음력으로 하는지 몰라. 난 음력 쓰는 거 아주 반대하는 사람이오』 요. 벌써
여기서부터 얘기가 술술 풀렸다.
함석헌 『내 난 데가 압록강 어구에서 한 30리 내려온 덴데, 다사도(多獅島)라고도 하구, 사자육도(獅子六島)라고도 하구 그냥 사점(사자섬)이라고도 하는 데야요. 졸망졸망한 섬이 여섯 개가 있어서 녯날(옛날)부터 그랬지요. 왜 사자라는 말이 붙었는지 몰라. 모양을 보고 그랬나? 우리나라에 사자는 없는거구. 내가 났을 때는 벌써 둑을 막아 육지와 연속이 됐지요. 그런데 거기에 일찍부터 기독교가 들어오구 신식 소학교가 서구·····』
여기까지 듣는 동안 우리는 그의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찾게 된다.
함석헌 『내 할아버지는 아주 소작농이댔어. 글자 한 자도 모르는 분이야. 우리 아버지(亨澤)는 독자니까니 힘든 일은 시키지 않았갔지. 근 20살 되도록까지 한문서당엘 다녔나 봐요. 그러구 한약방에 가서, 약봉사라구 한 3년 배와가지구 돌아와서 한약방을 하댔지. 한의였어』
아버지 형택씨는 머리가 아주 명석한 데다 그림에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그쪽에 조금만 힘을 들였더라면 유명한 화가가 됐을 거라고 한다. 그는 5살 때 집에서 천자문을 읽다가 소학교에 들어간다.
함석헌 『우리 종가에 내게 숙(叔)이 되는 함일형(一亨) 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니는 선비요, 독립유공자에도 들어 있고 이분이 한학을 했지만 열린 분이오, 그니가 그 구한말에 큰아들(錫奎)을 서울 배제학당에 보내 공부를 시켰어요. 또 둘째아들(錫殷)은 벌써 그때 일본유학을 시키구. 그래 석규씨가 서북으루 아주 외진 우리 고향에 기독교를 끌어와서 교회를 세웠어. 또 기독교에서 삼천재(三遷齋)라는 서당을 그대로 덕일(德一)소학교로 만들었던 말야. 그래서 나는 서당에도 못 다녀보고 신식교육을 받았어요. 이것 참 드문 일이오.』
오효진 그럼 한문은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월간조선 19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