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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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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스크랩 <백제역사재현단지> 단청의 문제점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230 12.04.19 23:4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신라의 옛 도읍인 경주와 달리 "잃어버린 백제"의 도읍이었던 부여는 상대적으로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무녕왕릉' 등 후대에 발굴이 되어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한 경우도 있었고 '금동대향로'의 출현으로 백제 시대의 섬세한 공예술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여군에 지금 대단위 공사가 진행중에 있는데 그 이름하여 "백제역사재현단지"의 조성입니다. 문화재청과 충남도가 2000억원 가량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그 동안 경주에 뒤졌다고 여겼던 단지화 사업을 단숨에 일으켜 보겠다는 야심 찬 의지를 담고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부소산성 낙화암 백마강 맞은편에 자리잡은 <한국전통문화학교>와 인접한 이 단지는 궁궐을 비롯하여 양반가옥과 일반 가옥등 대단위 단지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궁궐은 우리 나라의 건축 양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목조건축물에 일반화 되었던 "하앙식"이라는 건축공법을 사용하여 엄청난 규모로 공사가 진행되어 현재는 외부 단청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그런데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백제 건축물(실은 이 건축물이라는 것도 백제의 건축 양식에 의한것이 아니라 일본에 남아있는 목조건축이 백제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여 일본 건축물을 참고한 것이지만...)의 단청작업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애초부터 어느곳에도 없는 백제 단청의 흔적을 백제의 각종 공예품에 나타 난 문양을 기본으로 하여 현재의 단청을 참고하며 제작하겠다는 의도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고 이러한 단청은 공사 완료 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발생 될 소지가 다분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우리가 확인 할 수 없는 백제 단청에 가장 근접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으며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백제 건축물의 단청은 당연히 현재 남아있는 중국의 양나라 시대의 건축물의 문양이 참고가 되어야 하는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공사 초기에는 우리 나라 단청계를 대표하여 前 민속박물관장 Y선생과 D대학원의 G 교수, 그리고 S대학의 P 교수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문양을 기획하게 되었고, 이 분들 지도아래 작성된 문양이 재현되는 백제 건축물에 적용 되었습니다. 이 단지의 첫 단청 공사는 동궁이었으며 바탕색을 온통 녹색 바탕으로 칠했는데 바탕을 온통 녹색계통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내록이나 양녹(이는 청동에 생기는 녹을 수습한 것으로 무척 독성이 강한 화학물이지만 목재의 장기보존을 위해 사용합니다)으로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문양을 넣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동궁의 단청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사업체에서 단청 작업을 하청받은 H某씨는 자문위원의 문양을 무시하고 멋대로 작업을 하였으며 자문위원이 지정한 색상보다 훨씬 많은 색상과 문양을 사용하므로써 불필요한 공사비의 증액을 가져오게 된것입니다. 사실, 단청작업에 있어서의 색상의 양은 업자가 제시하기 나름이기에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기에 불필요한 부분에까지 자문위원을 배제하면서 까지 단청 작업을 한다는 것은 업자의 불순한 의도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단청의 예산이 거의 100억원대에 육박하도록 증액까지 된 상태이니 이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그저 기가 막힐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청업자인 H某씨는 이 과정에서 자문을 맡은 3사람을 배제함은 물론이고 3사람의 자문에 의하여 작성된 문양마저 무시하고 평소 자신이 일반공사시에 시행했던 문양 내용대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자문위원이었던 3사람이 관계 요로에 진정을 하는 사태로 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공사비도 수십억원이 증액 되었는데 이러한 증액 내용이 단순히 한 업자의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실제 증액이 필요한가에 대한 검증 절차가 있었는지도 의구심이 생기지만 쉽게 승인이 난 상태로 막대한 예산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할 처지입니다만 이 문제는 관련 당국에서 해결할 문제이기에 저로서는 왈가왈부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국가의 중대 사업을 수행하는데 만에 하나 불순한 의도에 의한 예산 부풀리기라면 마땅히 엄벌에 처해져야 할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백제의 문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문양이 불상이건, 기와이건 또는 금속공예나 벽돌이건 백제의 문양을 찾기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 수도 지극히 적을뿐만 아니라 일단의 조형물에 나타난 문양이 과연 백제의 단청에도 사용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문양이라면 미루어 짐작하여 한 시대의 양식과 조류로써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겠으나 불행하게도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백제의 유물에서 문양을 알 수 있는 것을 살펴보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머리받침과 발 받침의 문양과 왕관에서의 문양...그리고 무덤을 이루고 있는 전돌의 문양(이 전돌은 중국 양나라에서 사용하던것과 똑 같은 문양으로 수입품인지의 여부도 검토가 되었으나 백제에서 모사하여 제작한 제품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백제 금동대향로에 나타난 문양이나 부여 외리에서 발굴된 연꽃 귀면무늬 전돌이나 산경치 귀면무늬 전돌,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우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광배에 담긴 문양과 그리고 저도 직접 가서 조사를 해 보았지만 일본 호류지(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상(이 관음상에 백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백제의 작품이라고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는 불상입니다)의 광배의 화염문과 연화문...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등입니다. 특히 비조사는 불 타 없어졌지만 비조사 경내에 보관하고 있는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은 백제의 문양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문양들이었습니다.

 이런 문양에서 고구려나 신라의 문양과 비교를 하면 금방 알 수 있는것이 연꽃문양의 연잎이 6엽이 아닌 8엽으로 통일이 되어 사용되었던것등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문양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양들이 과연 백제시대의 건축물에 사용이 되었는지는 1500여년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는 타임머신을 이용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양의 사용은 당 시대의 보편적인 사용이 전제이기에 당시에 사용되었던 문양이라고 억지로 꿰맞추어 사용할수밖에 없습니다. 문양이야 그렇다치고 그럼 바탕색은 무엇으로 해야할지가 문제가 됩니다. 바탕색은 주로 말씀드린대로 내록과 양녹을 사용하는것 같은데 이런 바탕색 사용은 상당한 문젯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단청 비용이 한 두푼도 아니고 몇 십억이 소요되는데 국적도 없는 단청이 된다면 이는 웃음거리 그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삼국의 회화나 건축물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서 연구가 가능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도교적 영향으로 사람이 죽어서도 이승에서의 영생불멸을 한다고 믿었기에 벽화의 구성이 사람이 살아있던 당시와 똑같이 꾸며져 있습니다.
  집의 형태를 그대로 옮겼음은 물론이고 부엌과 푸주간등...그리고 수레와 사냥모습 등등 생전에 망자가 생활속에서 해왔던 내용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인물 조차도 생전 모습 그대로 정좌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일부 고구려 고분에는 입구가 건축물의 기둥 형태로 제작되기도 했으며 일부 고분에는 차마 제작을 할 형편이 아니었을 경우에는 그림으로 기둥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구려 고분 벽화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사적 입장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며 그 형태등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 당시의 단청 모습은 단지 문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건축물과 같이 요란한 단청은 없으며 황색, 또는 회색 바탕에 당초문등의 문양으로 단청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단청의 색상은 돌로 만들어진 기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석회를 발랐기에 색상 표현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고구려인들은 피부색까지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사신도에서 보면 세부 색감 표현을 위해 상당히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망자에 대한 예우는 오히려 살아 있을때 보다 더욱 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이승을 떠났을 뿐이고 저승에서 또 다시 영생을 보낸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요즘 고궁 건축물이나 절간에 칠해지는 단청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단청작업이 있었던것만은 사실입니다. 단청에 대해서는 중국의 송나라때 집필된 "영조법식"이라는 책에 건축물의 구조와 더불어 어떤 그림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는 단청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지금처럼 요란한 채색이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하나의 규범으로 "영조법식"이 만들어 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조법식은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전의 상황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불행하게도 No입니다.  그리고 바탕색으로 사용되는 양녹이나 내록도 언제부터 사용되어졌는지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단청에 대한 연구가 매우 미진합니다. 연구라고 해보았자 실은 최근의 몇 몇 연구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회화는 하나의 기술로서 예술로 인정을 하고 있음에도 단청이라는 작업은 단순한 기능으로서 기능인의 채색작업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청에 대해서도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하나의 예술분야로서 인식이 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단청 연구 인구가 늘어갈 것으로 판단이되지만 단청이란 기껏해야 200년~300년 정도가 수명인지라 특별한 보존대책이 강구되지 않은 건축물에서의 단청을 볼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한마디로 단청의 변천과정이나 문양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청에 사용되는 문양도 어떤 통일된 문양이 없이 전국 각지에서 단청 작업자의 개인적 사고에 의하여 멋대로 행해지고 있으며 그러다보니 단청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단한 작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제에 백제 역사단지 재현 건축물에 송대의 단청 양식도 아닌 그 후대의 단청양식으로
녹색 투성이의 단청을 한다면 과연 그 건물이 제대로 백제의 단청을 재현한 건축물로서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당시에 내록이 안쓰였다고는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대에 내록이 쓰였다는 확답도 없기에 대충 그러려니 하면서 현재의 단청 바탕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평양의 동명왕릉을 정비하면서 왕릉앞에 대규모의 사당을 건축하고 그 건축물(시멘트 건축물입니다만)에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로 하는 단청 작업을 하였는데, 이 작업도 북한에서는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 단청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단청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이마저도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이렇게 옛 단청이라고 복원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여의 정림사지에 세워진 기념관에 백제의 단청이라고 하여 단청이 되어 있지만 이 단청으로 인하여 상당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과연 아무도 가보지 않은 백제시대의 단청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백제 단청의 재현이라고 했느냐는 문제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단청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요즘의 단청이 눈에 익어 새롭게 재현한 단청에는 거부감이 생길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고증에 입각한 단청이라 할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단청에 내록이나 양녹으로 푸르딩딩하게 바탕색이 칠해진다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규모의 건축물인데 건축물이 온통 푸르딩딩 하다면 과연 단청이 제 맛이 날까가 걱정입니다.  아마도 문양 작업이 선행되어 그나마 극히 일부만 남아있는 백제의 유물로 문양은 대강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이 되는데 이렇게 어렵게 만든 문양을 엉뚱한 바탕색으로 망친다면 안타까운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백제역사재현단지에 칠해진 단청을 보고 각각 자신의 기능만을 고집하는 단청인들이 어떤 말들을 할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백제의 문양도 백제 유물을 통해 나타난 문양을 그대로 사용해야지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한다거나 또는 임의로 변경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금제 관식의 화염문 속에는 꽃이 들어있는데 이 꽃을 현대적 개념의 단청처럼 연꽃이나 연등초의 형태로 변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변형은 백제의 단청 재현이 아니라 현대적 해석에 의한 현대 단청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문양 작업에 참여했던 3사람의 자문위원들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에도 동감을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문양부터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상의 광배나 기타 백제의 유적에 나타난 모든 문양을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백제 금제 관식에 나타난 화염문 속에 들어있는 꽃봉오리도 단순하게 연꽃으로 넘어가서는 안 될 일입니다. 특히나 비조사에 있는
백제 와당은 상당한 문양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기와는 건축물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에 백제 와당의 문양은 상당히 소중한 자료로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백제 단청을 찾는 작업이 없이 단순하게 현재의 남아있는 문양을 기준으로 백제 단청의 문양을 만들어 내는것도 문제이며 중국과 일본의 동 시대의 문양에 대한 방문 조차 없었다는 것은 애초부터 백제의 단청 재현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바탕색에 관한 문제로 백제 당시의 단청을 내록 일색으로 푸르딩딩하게 한다는 것은 후대 단청작업자들의 어리석은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백제의 색감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지만 동 시대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색채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 시대에 특별히 다른 채색안료가 있었다면 몰라도 고구려나 백제나 동일한 채색재료를 사용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무덤과 집은 다르다고 하여 서로간의 색상의 차이를 논할수도 있으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것은 고구려 고분의 묘사는 고구려인의 실생활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덤이기에 그렇다고 운운하는 논리는 맞지 않는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 사유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발생되는 오류라고 할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실은 상당한 전문적인 내용으로 일부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이해가 어려울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단청 작업으로 인하여 발생되고 있는 업자의 횡포에 대해서는 제가 평시에 갖고 있는 생각이 필요할것 같아 말씀을 드리는바이며, 백제의 문화를 재현한다는 것은 최대한 그 당시의 모습과 근접해야 한다는 명제임을 생각할 때 관련되는 제반 자료의 종합적인 검토가 선행이 되어 충분한 논의 끝에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시행청에서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공기에 쫒겨 급하게 진행할것이 아니라 충분한 검토를 거쳐 시행토록 하여 막대한 예산의 낭비는 물론이고 잘못 시공됨에 따른 갑론을박도 충분한 자료나 관련근거의 제시로 마무리를 해야 할것입니다.

 백제에 관한 사료나 근거가 없다하여 대충 한다는것은 오히려 백제의 예술을 왜곡시키는 사례임을 관련자들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단청업자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거나 섣부른 결론으로 시행을 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른다는점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이러한 작업에 관한 사항들은 역사에 남는 일로서 관련자는 모두 우리의 역사를 되새긴다는 명확한 사명감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이 결여되어 섣부른 결론에 이르러 전혀 엉뚱한 단청이 만들어 진다면 관련자들은 그 오명을 후대에 남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백제의 단청에 근접한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할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청 작업을 조속히 마무리 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단청의 주 목적은 건축물의 장엄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목재의 보호라는 이유가 가장 우선하기에 몇 년 늦어졌다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가장 사실에 입각한 고증작업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자료가 부족하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문양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면서 제대로 된 단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제역사재현단지의 건축물부터 이론이 많으나 일단은 일본에 전래된 백제 양식을 역으로
되살려 왔기에 별다른 시비 사항이 없다고 보겠으나 백제 단청은 일본에 있는 동사(東寺)를 비롯한 옛 백제계 양식의 속에 있는 단청들도 참고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직접 가본 동사의 5중탑 내부에는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지만 단청이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사진 촬영도 했었기에 앞으로 나오는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단청과 비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백제 단청의 재현이 현대 단청과 짬뽕이 되어 나타난다면 구태어 백제의 단청이랍시고 많은 예산을 들여서 단청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냥 현대식 단청으로 작업을 하면 될일이지...백제의 단청이랍시고 시행한 작업이 전혀 엉뚱한 시대불명이요 국적불명의 단청이 되어버린다면 구태어 백제 단청을 찾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지역 언론(대전, 충남은 TJB)이 앞장서서 지역내에 건립되는 역사 재현의 제반 문제점을 파악하고 공론화 하므로써 어렵게 많은 예산을 들여 시행하는 백제역사재현 사업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간다거나 또는 공사 종료후 다시 뜯고 지을 수 없는 건축물에 대한 각종 시시비비로 시끄러워 지는것을 미리 막을 수 있도록 선도해 나가야 할것입니다.


 모처럼 백제의 옛 영토였던 충청지방에서 시행되고 있는 백제의 문화를 되살리는 작업이 별 탈 없이 시간에 쫒기면서 잘 못 시행되는 일이 없이 잘 마무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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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6.10 21:05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요즘 제기 원목 판매 덕분에 본의 아니게 한옥의 셰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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