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와본 후로 두 번째의 여행은 20년 전 직장에 다닐 때 동료들과 함께였고, 경주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같이 움직이다 보니 주마간산으로 구경만 했었다. 역사에 문외한인 나였지만 뿌리의 전설이 담긴 계림을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생각이 항상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다가 먼 친척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어 결혼식이 끝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홀로 서너 곳을 돌면서 세 번째 경주 여행의 추억을 챙겼다.
올 때마다 새롭고 주변과 시내, 바다까지 신라 천년의 보물들이 점점하여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신라는 3한 시대 진한 12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하였으며 정치발전이 국가형성 이전인 군장 사회단계에서 기원전 1세기 중반 박혁거세의 출현으로 국가를 세우고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여 발전했다. 박혁거세 거서간을 1대로 하여 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이후 석씨의 시조 탈해 이사금이 왕권을 이어받아 4대 이사금이 되었고 5대 파사 이사금부터 다시 박 씨가 왕권을 쥐어 6대 지마 이사금 7대 일성 이사금, 8대 아달라 이사금 뒤로 9대, 10대, 11대, 12대 첨해 이사금까지 석 씨네가 이어오다가 13대 김 씨 미추 이사금으로 왕권을 넘겨주고 뒤를이은 14대 석 씨의 유례 이사금이 왕권을 쥐어 16대 흘해 이사금 이후 17대 김 씨인 내물 마립간 으로부터 52대 효공왕까지 왕을 계승하다가 53대 박 씨인 신덕왕과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뒤로 56대 김 씨인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신라는 막을 내렸다.
박혁거세의 개국 이후 박 씨, 석 씨, 김 씨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고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는 삼성의 시조로 출생 과정의 신비로운 내용이 시조 신화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렇게 교차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이면에는 화백 제도가 있었다. 화백 제도는 진골 이상의 귀족들이 모인 이들을 대등이라 칭하고 그들 중 자체의결을 통해 의장 격인 상대등을 선출하여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만장일치를 통한 전원 합의제로 결정을 내리는 제도이다. 그곳에서 왕을 선출하고 폐위시키기도 하는 왕권과 귀족 세력 사이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했으며 다만 왕은 참석하지 않았다.
천 년 전부터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아름다운 제도는 오늘날 의회와 비슷한 일을 하지 않았겠나 생각해 본다.
계림을 찾았다. 사적 제19호로 지정된 계림은 반월성 있던 곳을 따라 산책하는 발걸음 속에 엄숙한 마음이 자국마다 묻어나고 천년의 세월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노거수 왕버들과 느티나무 우거진 사이사이에 바람처럼 나부끼는 숲의 비밀이 언뜻언뜻 발거름을 멈추게 하고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부챗살처럼 펼쳐진 빛의 향연은 모처럼 찾아뵙는 못난 후손을 반기시는 원조(原祖)의 사랑이었을까!
계림 정문 앞에 있는 회화나무는 수령이 천 삼백년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그 옛날 화려했던 신라와 흥망성쇠를 함께한 무궁한 비밀들이 살이 되고 껍질이 되어 계림을 말없이 지켜준 고마움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돌아 흐르는 실개천엔 천년의 비밀을 토해내듯 잔잔히 물결치며 나에게 알리고 싶은 말들이 무척이나 많은 듯한 느낌에 흐르는 물 앞에서 손을 담가보기도 했건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계림비각’ 안에 있는 비문은 조선 순조 3년에 세워졌다 하며 김알지의 출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왕이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살피라 하여 신하가 가서 살펴보니 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고 아뢰어 왕은 날이 밝는 대로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보니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다 한다.
왕은 이 아이의 이름을 ‘알지’ 라 부르고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씨라 했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나라의 이름을 계림으로 바꿨다 한다.
탈해이사금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탈해 이사금 서거 후 알지는 왕좌를 양보하여 박 씨 왕족인 5대 파사왕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내물 마립간 능(신라17대)도 들려 참배를 드렸다.
안내판에는 첫 김 씨 왕이었던 미추왕의 조카라고 기록되었고 석 씨인 홀해 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뜨자 내물왕이 뒤를 이었다 한다.
계림.
알지의 자손인데 흉노족 후예일까?
근엄한 계림 숲속 닭울음 들리는 듯
나무위 금궤 상자가 찬란 한빛 발하네.
포석정으로 이동했다 사적제 1호인 이곳은 「삼국유사」 권2에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 신이 나타났다고 기록됨을 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계를 둘러놓은 돌들은 오밀조밀 포석을 보호하고 있었고, 포석 굽이굽이 물결치듯 매끈한 흐름은 신라 천년의 세월을 매오로시 가득 담고 있었고 처용의 향가 음률이 새싹처럼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듯했다.
「경주 포석정지」 안내판에 따르면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는데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의 길이는 약 22m라 한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고 음풍농월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927년 경애왕이 왕비, 궁녀, 신하들과 유흥에 취하여 놀다가 견훤이 온 줄도 몰랐던 왕은 그의 습격으로 자살을 강요받아 자결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랑세기」 에 따르면 지금의 ‘포석정’이라고 불리는 곳은 본래 포석사 란 사당이 있던 곳이라 한다. 이곳은 원래 화랑이었던 문노의 화상이 모셔진 사당이라고 전해지는데 문노의 화랑도는 호국선이라 불렸다 (위키백과) 이에 의하면 ‘포석정’은 술 먹고 즐기기 위한 유흥의 장소보다 성스러운 곳으로, 견훤이 신라를 침입할 당시에는 12월 한겨울이었고 신라 조정에서는 견훤이 이미 영천까지 진주한 것을 알고 개성으로 사신을 보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해놓아 왕건은 기병 5,000을 이끌고 오는 중이었다. 더 버틸 수 없는 위급한 상태여서 경애왕은 남산 신에게 나라를 지켜달라고 제사를 올리던 중이었음이 설득력을 얻는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라고 한다.
포석정 곡수의 형태적 특징은 몇 번의 굴곡을 주어 미학적인 완숙도를 높이고 곡수 형태는 술잔이 수로 중앙의 주류를 벗어나 주변의 와류에 붙들려 정지함으로 유상곡수의 흥취를 저해하는 일이 없도록 벽면을 매끄럽게 가공 처리했다.
포석정
포석정 유상곡수 경애왕 한 서린 곳
견훤에 습격받아 왕비와 경애왕은
별궁에 몸 숨겼지만 붙잡히고 말았지
왕족과 신하들이 견훤의 칼부림에
경애왕 자결하고 왕비도 욕보이고
천년을 흐른 세월이 현재처럼 선명해
나라를 구하려고 포석사 남산 신에
팔관회 호국 제사 정성이 부족했나
쇠약한 신라 말년을 반면교사 삼아야!
첫댓글 과거가 쌓여서 역사가되어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흔적들이 오래전 살아왔던 선조들으 손길이 가득담겨 눈앞에 있네요.
오늘도 내일도 미래가 안보이는 현실의 고난인 바이러스의 공격에 하루 하루가 지나고 있읍니다.
고맙습니다 지기님!
나라를 지키는 일, 일 분 일초도
방심해선 안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