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주는 맛, 묵은지 된장 지짐이 / 박선애
우리 교회는 구역 모임할 때, 집에서 밥을 먹으며 교제하라고 권한다. 식사를 같이 하면 빨리 친해진다는 이유에서다. 일식삼찬으로 간소하게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집을 개방하고 음식을 나누고 나면 확실히 한식구처럼 느껴진다. 나는 요리를 잘못하니 부담스럽지만 이런 것이 좋아 일 년에 한두 차례 힘닿는 대로 준비한다. 같은 구역을 했던 사람 중에서는 우리 집 반찬의 주 종목으로 묵은지 된장 지짐이를 쳐 준다. 묵은지를 이삼일 정도 물을 갈아가며 우려서 짜고 신맛을 대강 뺀 다음에 멸치, 된장, 마늘, 들깨 가루 등을 넣고 끓이다가 약한 불에 뭉근히 지진다. 빛깔도 모양도 볼품은 없지만 맛은 좋은 편이다.
올해는 코로나로 아이들 없이 근무하려니 급식을 하지 않아 날마다 점심이 문제였다. 떼 지어 식당을 찾는 것은 사회적 거리 두기 시책을 어기는 것 같아 꺼림칙한데다 매번 사 먹는 음식은 탐탁지 않았다. 한 분이 함께 장만해서 먹자고 했다. 솥과 쌀을 준비해서 밥은 바로 짓고, 반찬은 집에 있는 것으로 한 가지씩 싸 오기로 했다. 내가 만든 음식은 내 입에는 맛있는데 남 앞에 내놓기에는 자신이 없다. 그나마 인정을 받은 바 있는 묵은지 된장 지짐이를 해갔다. 다행히 인기가 있었다. 요리 못한다고 해서 진짜인 줄 알았더니, 맛있다고 감탄해 주는 사람도 있어 기분이 좋았다.
이 음식에는 추억이 담겨있다. 요즘 쓰는 말로 나의 소울 푸드라고 할 수 있다. 내 마음 속 깊숙이 자리 잡아, 먹을 때면 단순히 혀로만이 아닌 내 영혼으로 느끼는 행복한 맛이 있는 음식이다.
네 개 마을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가장 큰 우리 동네에 있었다. 지금은 학생들이 없어 문을 닫았지만 그때는 우리 학년만 해도 90명쯤 되는 꽤 번성한 곳이었다. 몇 분의 선생님들은 가족과 함께 관사에서 살고, 다수의 총각 선생님들은 마을에 있는 하숙집에서 사셨다. 점심시간에 거기로 가서 식사를 하셔야 해서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졌던지 우리들도 집으로 먹으러 다녔다. 도시락 먹는 옆 마을 친구들이 부러워, 나도 도시락 한 번 싸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집에서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이 김치밖에 없는 도시락보다 훨씬 좋은 거라고 하면서 동심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개 너머 바닷가 마을에 살던 숙희가 “선애야, 오늘 내가 진짜 맛있는 반찬 싸 왔으니 너 집에 가지 말고, 내 도시락 같이 먹자.”라고 했다. 그 바라던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거기에 맛있는 반찬까지 있다니 설렘과 기대로 오전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자 그 애들은 항상 그랬던지 자연스럽게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학교 뒤 언덕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맑은 초록색 보리가 봄바람에 몸을 맡기고 밀려갔다 밀려오는 밭가에 자리를 잡았다. 숙희가 하라는 대로 보자기를 머리 위로 올려 한 쪽씩을 잡아 다른 아이들은 넘보지 못할 어설프나마 우리만의 공간을 만든 후에 도시락을 열었다. 집에도 못 가게 잡았던 맛있는 반찬은 바로 묵은지 된장 지짐이었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 봄이 되면 김장 김치는 쉬어지고 군내가 난다. 어머니들은 그것을 씻고 우려서 된장으로 지져 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도 해마다 봄이 되면 먹던 음식이었지만 그날의 맛은 특별했다. 처음 도시락을 먹는 들뜬 기분까지 더해져 최고의 맛을 느꼈던 것 같다. 그 후로 맛있는 반찬과 묵은지 된장 지짐이는 나만의 동의어가 되었다. 숙희는 중학교 다니다 전학한 후로 한 번도 못 만났지만 그날 도시락을 먹던 그 언덕 위의 반짝이던 푸르름과 부드러운 바람과 검누런 묵은지 지짐의 구수한 맛과 친구의 따뜻한 마음은 잊히지 않는다.
오늘은 점심시간에 학교 탈출한 몇 명의 학생들을 찾으러 나섰던 학생부장 선생님이 편의점에서 나오는 여학생 두 명을 데려왔다. 몰래 나간 이유가 급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라고 한다. 윤기 흐르는 따뜻한 쌀밥과 영양소 따져가며 고기 빠진 날 없다시피 골고루 주는 반찬인데도 말이다. ‘나 때는 말이야, 묵은지 된장 지짐이 한 가지에 보리밥 도시락 나눠 먹으면서도 최고로 맛있다고 행복했었다'라고 하고 싶어지는데, 그랬다간 아이들로부터 돌아올 말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첫댓글 제가 좋아하는 반찬 중 하나가 묵은지 된장 지짐입니다.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