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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수필의 형식과 미학
저-신재기 수필비평집 (경북 의성 1956년 출생-고려대문학박사. 현 경일대교수)
출- 서정시학
독정-2018.2.19.
문학은 인간 삶의 체험을 재료로 한다. 특히 수필의 재료는 작은 일상의 조각이다. 무위와 무위자연은 수필 한 편에 담기에는 무겁고 욕심내면 현학적이 되고 가볍게 다루다 보면 상투적 계몽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
수필의 화자가 여성이면서 남편을 화자로 내세워 자신을 말한다. 재미있는 시도다.
< 디지털 시대의 수필에 대한 재인식>
우리는 지금 디지털 문화를 호흡하고 산다. 디지털 문호의 특징은 우리 일상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깊이 침투하여 사유 방법을 바꿔 놓고 감정의 통로까지 통제한다. 예술과 문학의 지형도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매체 전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무게 중심이 문자 매체에서 영상 매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빠른 이동은 기존 질서와 체계에 균열을 가져와 현실 반영과 심미성이라는 전통 문학이 퇴색해간다.
이런 시점에서 수필 창작방법은 디지털 환경과 수필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통적 인문학이 통용되던 시대에는 작가의 말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권력자의 명령과 같았다. 독자는 권력자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 가능할 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면서 사이버라는 새 공간이 작가 중심의 위계 권력 구조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가상공간 문에 들어오면 누구나 자기만의 언어를 구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이제 가상공간에서 문자 행위나 문학 창작 활동은 누구에게나 개방적이다. 접속하는 개인을 막힘없이 신속하게 연결하는 네트워크 구축이 정보 기술의 궁극 목표다. 사이버 공간에서 행위 주체는 탈신체화 된다. 현실 공간에서 이동은 몸이 뒤따라야 하지만 가상공간에서는 몸과 무관하고 나의 존재는 자유롭게 이동하여 인터넷망이 연결되기만 하면 어디서든 접속하여 그 공간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다. 그 결과 문학을 소비하는 독자로만 알았던 잠재적 작가 등이 사이버공간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통적 글쓰기에서 권력을 독점했던 교수나 문인이 힘을 잃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 가운데 글쓰는 능력을 쌓은 사람들이 주도건을 잡게 되었다. 이제 가상공간에서의 글쓰기는 불특정 다수의 공유물이 되었다. 사이버 공간에서 통용되는 글은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급선무다.
그 예로 2010년부터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는 23종으로 바뀌었는데 이 교과서에 구록된 작품 중 좋은 작품을. 국어교과서 작품 읽기 중 1 수필> 책에 선정 작품과 관련하여 편자의 말은 이렇다.
「중학교 1학년 수준에서 스스로 읽어 재미있고,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른들이 마구잡이로 고른 작품이 아니라, 중학교 1학년 눈높이를 가려서 고른 작품으로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시, 소설, 수필의 교육 과정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살펴보았습니다. 수필은 나와 가족, 사회와 자연, 여행기와 전기, 고전 작품으로 나누어 묶었습니다.」
여기 수록된 44편은 전국 중학교 국어 교사들이 선정하였다. 고전과 외국 작품을 제외하면 수필가 이름은 없다. 시인, 소설가. 사회 명사이 글들이다. 소설가로는 성석재, 양귀자, 최성각, 이문구. 동화작가는 정채봉 글. 시인은 김용택, 나희덕. 곽재구. 도종환. 류시화, 장석주, 복효근이다. 안철수, 장영희, 한비야, 박원순, 윤구병, 엄홍기, 박영석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명사의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축구선수 박지성의 글도 있다. 한 마디로 전문 수필가 글은 없고 다른 분야 전문인이 쓴 수필이 선정되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문학작품은 평생 동안 그 사람의 의식에 훌륭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디지털문화 시대의 패러다임에 부응하며 수필문학의 최소한의 고요로움을 지키자면 적응과 대항이다. 문화의 큰 흐름에 적응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상처 받은 부분을 치료해야 한다.
ㆍ수필은 개인의 인격이 재료가 되는 자기표현의 글쓰기다. 수필 창작과 소비에서 작품보다 작가와 독자가 크게 두드러진다. 수필을 매개로 독자와 수필가 두 인격체자 만나는 것이다.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로 문학이 생산되어 소비되기까지의 유통은 문자 텍스트로 이뤄진다. 이때 관련성을 지니는 디지털 문호는 사이버 문화로 문학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성격 및 방법까지 바꾼다. 사이버 공간에서 텍스트의 유통은 상방향적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구분이 없고 생산자이면서 소비자, 즉 프로슈머(prosumer)다. 인류 진화 과정에서 소통 언어, 즉 매체는 음성언어-문자언어-활자언어-디지털 언어로 전환되었다. 한 편의 글이 생산되어 컴퓨터 기기를 떠나 머물 때 아예 그곳에서 끝까지 소비되는 경우로 구분해 볼 때 갈수록 컴퓨터나 인터넷은 단지 도구 차원이 아니다. 글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환경으로 디지털 공간이 글의 내용과 그것을 구성하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활자 텍스트의 전통에서 존중되었던 가치, 즉 활로 고정된 데에서 오는 안정성, 창조물이라는 기념비성, 작가의 권의 같은 가치는 이제 보장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디지털 글쓰기의 개념적 공간은 저자와 독자의 사이 유동성과 상호작용적 관계가 특징이다. 디지털 언어는 새로움과 전통성 모두를 유지한다.
비평의 심각한 문제점은 개별 작품에 대한 나열식 비평이다. 특정 지면에 발표된 작품을 뚜렷한 기준 없이 자기 주관적 인상을 중심으로 대가가 초보자에게 창작방법을 조언하는 형식이나 작품 찬사에 일관된 글로 작품 주제에 집중한다. 잡지나 신문이 대표 주자인 비평가를 내세워 자기 매체에 발표된 작품을 비평하도록 기획하는 방식이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과 이기심을 반영하는 비평이다. 비평가는 매체 측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못해 중립적 태도가 되어 작품을 공정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전국 문학 종합지 중에는 자기 사람 챙기기 비평의 월평 형식을 버리고 이슈 중심 내지 작가론으로 전환했다. 해설은 작품집 발간에 부티는 축사가 되어버렸다. 개인의 인생은 나름의 가치를 가지는데 비평가가 어찌 남의 인생을 따지고 간섭하나 평가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다. 작가가 말한 것을 비평가의 입을 통해 다시 말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평문이 온통 작품 인용으로 그득하다. 비평가의 평문과 작품의 인용이 반반이다. 비평이 작품에 자리를 내주고 있어 비평이 해야 할 마지막 과업인 평가를 못하고 있다. 수필비평가의 자기반성과 점검이 필요하다.
①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바라보면 어느 나무 어느 가지 하나도 오달진 눈을 지니지 않은 것은 없다. 탐스러운 꽃을 잉태한 야무진 꽃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의 수피 속에는 강인한 생명이 충만해 있다. 손으로 나무줄기를 어루만져 보노라면 나무와 나의 생명이 서로 하나가 되어 흐르는 듯한 삶의 신비를 느낀다- 류달영의 <겨울 정원에서>
② 나무는 덕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않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 말하지 않는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자족의 현인이다. 불교의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이양하의 <나무>
*① 대상의 아름다움 발견- 자기 감정을 나무에 이입이나 ②도덕적 선함을 나타냄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화자의 것으로 치환되어 서정성을 추구하는 수필에서 자아의 고상함과 도덕적 선함이 징표처럼 달라붙어 있다. 이를 자기반성(성찰)이라는 창작 원리로 미화하기까지 한다면 야심찬 기만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라는 서정성의 원리는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은 그것을 꿈꾼다. 원초적으로 예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의 세계에 대한 꿈꾸기다. 그러나 이런 수필은 서정성을 매개로 작가의 순간 쾌락에 머문다. 자아는 자기회귀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아와 연결된 맥락과 타자를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정성의 메카니즘에서 자아는 타자와 단절된 채 자기 목소리에 취해 함께함과 나눔이 부재된다. 이는 수필의 가장 큰 함정이고 결핍으로 독자에게 외면당하는 까닭이다. 순수는 환상이다. 순수하지 않다고 제외했던 것을 문학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오늘날 문학이 나갈 길이다. 순혈주의를 앞세워 문학 영역을 좁히면 문학은 소외된다. 수필만의 고유성을 가장 잘 살릴 때 수필은 살아남는다. 생산은 증가하는데 소비가 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으로 작품 가치가 떨어진다. 과감하게 자신을 버리고 문학이 아니기를 실천해야 한다. 작품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디지털 시대와 수필은 궁합이 잘 맞다. 현재 팽창하는 수필은 과거 순수 문학성을 추구하던 수필과는 다르다. 수필의 확대를 가져온 원동력은 탈문학적 요소와의 결합이다. <국어교과서 작품 읽기 중1 수필>은 문장이 평이하고 말하는 바가 선명하다. 화자의 복잡한 심리상태나 감정을 담으려 애쓰지 않고 옆 사람에게 쉽게 이야기 풀어놓은 느낌이다. 개인의 체험을 아주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생활 체험 중심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심오한 사상과 철학을 애써 말하려 안는다. 관념이 배제되고 말하기보다는 보여주는 쪽이다. 일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과 생각을 생생하고 재미있게 보여준다. 자기 고상함과 도덕심을 다치지 않으려고 수사를 동원하지 않는다. 작품 구성도 단출하고 투사된 작가 의식도 투명하다. 건조하고 단조롭고 꾸밈이 절제되었다. 일상생활 체험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 수필의 가장 기본이다. 개성이 강한 다양한 형태를 포용하는 것이 우리 수필이 가야 할 길이다.
ㆍ<아파트 뜰 사이로 나타난 그의 등이 편안해 보인다. 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굳이 모른 체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지금, 그는 나에게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 여자보다 우리 그녀인 당신이길 바란다고-김은미 <우리 그이와 우리집 남자>
남편을 호칭하는 두 유형을 두고 자신과 남편이 함께 꾸려온 삶을 비추며 은근한 사랑으로 연결된 인간관계를 확인 잔잔한 화소가 동원 되었다. 화소의 결합, 선별적이고 응축된 제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 그 내면에 숨은 의미를 건져 올리는 태도 등이 선택적 구성으로 드러난다. 메시지를 성급하게 드러내겠다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고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의미를 직접 노출하는 부분에서 자기를 자제하고 거리를 둔다. 노련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철물점 앞이다. 촌로 한 사람이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지폐를 침을 발라가며 몇 번인가 셈하며 바꿔 쥐는 호미 한 자루, 주름투성이의 손에도 봄 햇살이 내려앉았다. 저 농부, 꽝꽝한 무쇠가 강아지 귀때기만큼 낡삭을 때까지 또 얼마나 땅을 파고 긁어야 할지, 서둘러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뒷모습이 낯설지 않다. 김해남의 <봄볕> 농부는 호미의 무쇠가 닳아 칼이 되도록 땅을 파고 긁지만, 살기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아껴야 할 정도
로 빠듯한 형편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찬란한 봄의 목소리에 속아 오늘을 참고 견디는 가난한 농부들, 그들이 살아가는 시골 장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 개입 없이 객관적 거리에서 풍경과 인심을 그리는 이 작품의 기본 정신은 리얼리즘이다. 현실에 관한 관심이 주조요. 자아의 주관적 감정이 타자를 덮지 않고 뒤로 물러나 타자가 주체가 되도록 배려한 시선을 자아 밖으로 나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문학작품의 심미성까지 적절하게 확보하고 있다.
ㆍ가난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문간방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로 보편성을 가지고 사회주변에서 소박한 꿈을 가진 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으로 완결된다.
ㆍ술떡 파는 할머니에서 “상식으로 이해 안 되는 삶의 모습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로 끝났는데 이야기 밖에서 관찰자로 있던 화자가 안으로 들어온 대목이다. 화자가 끝까지 이야기 밖에 머물고, 작가의 의도는 풍경 형상화에 흡수될 수 있도록 했다면 더욱 완벽했을 것이다.
최민자 <겨울나무 아래서>
이승의 삶을 다 살아 내어도 끝내 적멸에 일 수 없다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 수도 없고 바위처럼 무심해질 수도 없다면, 오랜 늙은 배롱나무 아래 순한 흙 거름으로 묻혀도 좋겠다. 저 마당 밑 귀퉁이에 밝고도 환한 빛으로 서서, 길 묻는 나그네의 어둠을 가만히 밝혀 주어도 좋고, 승자의 역사 속에 묻혀 버린 패장의 무덤가를 지키며 안으로 안으로만 나이를 먹어도 괜찮겠다. 불 속에서조차 소멸되지 못할 내 안의 광기들은 캄캄한 물관을 거슬러 올라 삼복 염천 석 달 열흘을 혼곤한 울음으로 타오를 것이다. 타 버린 것들만이 다시 맨몸으로 설 수 있음을 알기에. 죽어 나무가 되고 싶은 건 끝끝내 아름답고 싶어서이다. 아니면 끝끝내 살고 싶어서일까
* 서정을 통한 작가의 감정 표출은 가능한 자제해야 하는 것이 수필 창작의 기봉으로 관조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아 감정과 정서 표출이 폭발하듯 판소리체의 흔적이 묻어난다. 풍성한 아휘와 비유적 어구, 동일한 의미나 이미지의 반복, 고조된 감정 표출에 의한 호소 등이 그것이가. 과장과 넘침의 구조가 그 특징이다. 이런 문체는 자아를 드러내기 위한 것보다 청중의 호응과 참여를 얻는데 무게 중심을 둔다. “꽝꽝한 겨울 추위를 말없이 견디고 정물처럼 서 있는 한겨울 배롱나무가 서사를 버린 통찰의 결구처럼 비장미마저 느끼게 한다.”는 비유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박헬래나의 <수다>
인간에게는 얽힌 감정을 배설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원초적 욕구가 있다. 그 소통의 수단이 말이다. 말은 위험한 도구다. 날 선 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말이다. 위험한 도구는 안전하게 사용할 자신이 없으면 사용횟수를 줄이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그렇다면 말은 적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등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머와 해학이 담긴 수다. 그것은 생활의 양념이자 활력소다. 끈끈한 정의 통로다. 틀을 벗고 너울대는 언어의 유희다
* 일상의 발견, 자기성찰을 소박하고 솔직한 사유, 정체된 문장 등 좋은 수필의 일반적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철학적 설리형식이 정서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데 미흡하지 않고, 풍부한 서정성 속에 차가운 이성의 논리가 존재하는 것. 이것이 수필 기본 형식이다.
ㆍ손잡기는 가족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자식은 부모의 손을 잡고 부모는 자식의 손을 잡아 준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 그 배필에게 손을 넘겨주기 위해 잡았던 손을 놓아주어야 한다. 사랑으로 잡았던 그 세월에 쏟은 정이 너무 깊어 놓을 때 서운하더라도 부모는 자식의 손을 놓아야 한다. 그러다 부모가 병들어 힘이 소진되면 자식이 부모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도리다. 영원히 부모의 손을 놓아야 할 때 느끼는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다. <손잡기> 이 작품의 출발은 예비신랑신부가 두 손을 꼭 잡는 것을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진행 과정에서 나희덕 시인의 ‘허공 한 줌’ 시를 끌어와 어머니 약을 타러 병원 가 목격한 장면을 가져온다. 자신과 어머니의 손잡기를 통해 자아 속으로 갔다가 다시 예비신랑신부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짧은 글에서 여러 화소를 적소에 배치하여 조합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얻는다. 짧고 압축된 문장, 절제된 언어가 작품 심미성을 확대한다.
박 헬레나의 <잘 오셨습니다.>
성당 주관 새터민 가정체험 프로그램 봉사자로 참여한 체험 소재로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는 자들을 보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 개인의 삶은 바람에 날리는 홀씨에 불과하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자유와 풍요를 찾아 이 땅에 발을 디딘 젊은이들, 이곳이 자유의 땅인 만치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경쟁 사회다. 몸뚱이 하나로 스스로 방향을 찾고 어디엔가 안착을 해야 한다. 분단의 역사가 만들어 낸 인연, 이틀간 내 딸이었던 그녀,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 디지털화된 척박한 땅 어디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려는지.
*여기서 수필적 자가의 주둔자는 수필가를 벗어나 사회 한복판이다. 자기 고백과 성찰은 수필의 고유한 성격이지만 우리 수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고유성보다 사회 공공의 지평을 발견하는 일이다.
임영애의 <천사는 청바지를 입는다> 폐지 줍는 할머니의 짐이 쏟아지자 젊은 청년이 와서 짐을 들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준다. 할머니 집까지도 알고 있다고 한다. 화자에게 청년이 아름답게 보였다. 서울역 지하철 계단에서 할머니의 떡 광주리를 대신 들고 두어 계단씩 건너뛰며 올라가던 생머리에 청바리를 입은 아가씨가 오버랩 된다. 여러 해전 일본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한 이수현 청년도 청바지를 입고 웃고 있었던 기억, 천사들은 요즘은 날개 대신 청바지를 즐겨 입는 것일까? 이 작품의 압권은 청바지가 내포하는 의미가 천사같이 착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청바지를 입는다는 사실이다. 젊은 층이 버릇없고 당돌하고 도덕심이 약하다는 기성인의 시각을 반박하고 있다. 젊은이를 버릇없다고 선입견을 갖는 기성인에게 더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암시함이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함이다. 문학이 주는 감동의 요인은 주제 자체가 아니라 주제를 말하는 방식이다.
소설 쓰기는 땅 파기다. 외줄 타기다.
-일의 끝, 욕망의 끝, 사랑의 끝, 실패의 끝, 인생의 끝... 하지만 그 어떤 수식어가 붙더라도 끝은 또 다른 시작의 역설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끝에 이르러 비로소 돌아갈 길을 알기 때문이다. 훌륭한 수필가는 다른 사람이 관심을 잘 보이지 않는 작고 하찮은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거창한 것을 찬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여러 각도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포용력이 필요하다. 세계를 보는 시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상이 양끝에만 고정되지 않고 무수한 중간 항에까지 미칠 수 있어야 전체를 균형 있게 포착할 수 있다. 이것이 <그냥>이라는 작품의 주제다.
우리 삶에도 그냥이면 되는 게 너무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냥하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차거나 덥거나 좋거나 싫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라 한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찌 2분법으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으랴.
* 작가는 그냥이라는 부사를 통해 명쾌한 결정보다 대상의 다양성을 고려할 여유를 권유한다.
*작가가 흥미와 관심 두는 모든 것이 수필 글감이다. 글감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말하려는 주제와 잘 부합한다. 같은 글감을 택해도 해석하는 작가의 시각에 따라 작품은 다르다.
딸랑이 반지 한 개만 드렸더라면 시어머니가 신경쇠약에 안 걸릴 텐데 하는 자기반성으로 끝 맺는다. 누구를 위한다는 명분 뒤에는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알량한 욕망이 있었는지 모른다. 작가는 주제를 분명히 말하지 않고 가능한 교술로 직설하기보다 형상화로 암시하려 한다. 교술적 언술은 끝 부분에 살짝 배치했다. 직가의 직접적 언술을 피하고 구체적 형상화 주조로 형상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이런 창작법으로 작품 주제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여러 목소리를 낸다.
ㆍ작가는 탁구로 인생살이를 해가는데 꼭 넘어야 할 과제가 마음의 힘을 빼는 일이라 한다. 이기려고 하면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가 전제된 친구로 언제나 술 두 잔을 주문해 한 잔은 자기 것, 다른 한 잔은 치구 잔이라 했다. 어느 날 슬픈 얼굴로 한 잔만 주문했다. 이유는 자신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술을 마시면 죽는다고 하여 자신은 술을 끊고 친구의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다. 은근한 우정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작품은 이런 일화를 마지막에 배치하여 주제 형상화에 개성적 면을 충분히 발휘했다.
노현희<내가 제일 잘 났어>
우리에게는 모두가 그 인물이 그 인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쏟으며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높아 보이는 가지를 치려고 안달이다. 그것은 정치판만의 일은 아니다. 크고 작은 일에 부대끼는 일상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웃자란 나뭇가지 하나를 보아 내지 못하는 내 성질머리처럼. *누르고 비난하는 현대인의 삶을 꼬집고 있다. 자기 성찰은 직접 진술로 드러나지 않고 구체 일화를 통해 간접 제시된다. 작가는 가지가 잘려나간 고목나무가 화자를 향해 “그래, 내가 제일 잘났어.”말하는 듯 하다. 어느 정도 형상화를 성공으로 이루어 낸 셈이다. 형상화를 통해 비유적으로 암시한다.
ㆍ스마트란 예리하다. 재치있다. 말쑥하다. 단정하다는 형용사로 좋다. 착하다로 확장된다.
최영애의 <동심을 파는 사람들>
소리는 어쩜 아파트인에게 꼭 팔아야 할 숙명처럼 외친다. A동에서 B동으로 술래잡기 한다. 동화 속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소리가 동 사이를 비집고 걸어 다닌다. 어렴풋이 통을 든 그림자가 살짝 비쳤다 또 사라진다. 추억은 상상의 재구성이다. 실제와 환상의 적절한 배합이 동심을 그리워하는 주제 구현에 효율적으로 작용한다.
ㆍ담배 한 개비를 태워 무는 동안 허공을 몇 번이나 움켜쥐었다 놓는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처럼 가장인 그가 부대껴 온 일상은 맨몸으로 오르기 힘든 높고 험난한 산이었을 게다. 작은 우산으로 함께 비를 파하다 보니 우산을 쓰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데 비에 젖은 몸이 초라해질 정도로 작아져 버린 우리는 안팎이 몹시도 닮아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꿈이나 정의는 모두가 원조식당이라고 이름 붙인 그 많은 해장국집 간판 중에 과거를 슬쩍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속도계의 속도가 모든 사람의 안전을 지켜 주리라고 은연중에 확신 한다. 속도계에 나타난 속도를 절대기준으로 맹신한다. 그러나 같은 속도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느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알맞거나 빠르다.
ㆍ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질문하지 않은 때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설명하려 하면 나은 더 이상 할 수 없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서
ㆍ작가의 창조적 작업은 언어와의 싸움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리는 언어 안에 있다. 모든 존재는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의 조르마>를 읽은 후 자유의 끈을 얻으려고 달콤한 것을 버렸다. 끈을 묶거나 끊는 것이 아니라 한쪽 끈을 버리고 다른 끈을 선택한 일이다. 수필에서 자기 나르시점, 자기 고백, 신변 잡기를 벗어나려면 내 이야기에서 끝내지 않고 세계 보편으로 끌고 밖으로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자가의 자질구레한 개인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작품의 완결미를 얻는다. 객관적 관찰자 시점으로 그런 척 능청스럽게 말하는 것이 수필의 종요한 방법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풍경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급하게 지폐를 줍는 사람이 있다. 지나가는 차에 수신호를 보내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인도 위에 몇 장까지 주워서 바구니에 담고, 돌멩이로 눌러 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자만 풍경화는 전혀 다른 밑그림이 그려졌다. 풍경화 속의 주인공이 버스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발길을 돌린다.주머니에 지폐 몇 장을 꺼내어 바구니에 놓고 버스 쪽으로 간다. 여인은 감사의 마음을 목례로 답하고 있다. 김한성의 <풍경화>에서 거리를 설정하여 관찰자 거리에서 수필의 취약점을 소설 비법을 통해 극복한 샘이다.
<새벽길을 나선다. 서늘한 공기가 길모퉁이만 돌아서면 금방 가을과 만날듯하다. 고단한 일상을 끝내고 곤히 잠들어 있을 사람들 위로 하루치의 희망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으리. 멀리 저 너머 그 너머를 목을 길게 빼고 볼 것은 없다. 그저 하루를 무탈하게 살아내면 그만이다 그런 하루들이 모여 삶의 마디를 이루고 한 생을 이룰 것이다. 가을은 발효된 반죽처럼 부풀어 오른 마음을 알 수 없는 힘으로 눌러 작고 단단하게 해준다. 남영숙의 <가을에는> 가을의 구체적 이미지 대신 작가 내면 의식과 정서가 채색된 추상적 가을에다 가을을 내면에 담아 발효시킨 후 들어내어 보인다. 가을의 물질성은 해석적 언어에 헤체 되어 작가의 정서와 가치로 변용된다. 철학적 사색은 자아의 내면에서 오랫동안 발표 과정을 거쳐 밖으로 표출된 것인 만틈 언제나 깊이와 향기를 견지한다.
<우리를 훈훈하고 살맛나게 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바보스럽고 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소수의 어수룩한 사람들이 다수의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극으로 치닫는 이기주의와 깨지려는 평화를 지켜 내고 있는지 모른다. 장현심의-나는 똥개가 좋아에서>
ㆍ주제 문학으로서 수필을 평가하는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제 자체이고 하나는 주제를 형성화하는 방식이다. 둘은 한 덩어리다.
<해송 사이로 다시 바람이 분다. 물안개가 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백설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짐작해본다. 백설은 가을 낙엽을 덮어주고 겨울나무와 허허로운 벌판을 감싸준다 하늘과 맞닿고 바다와 손을 잡는다. 햇살에 녹을 줄도 알고 달빛에 반짝거릴 줄도 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기도 한다. 까슬한 한삼 자락 같은 눈발이 얼굴과 몸을 휘감고 돈다. 옷깃에 눈발이 붙으면서 파르르 떨리는 전율이 실핏줄을 타고 흐른다. 지금처럼 눈발 가슴에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 내리는 하루 같은 마음을 가지면 삶이 조금이나마 간간해지지 않을까. 그러면 백의를 입은 송백에서 생명이 툭툭 터지는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다. 김정화 -눈밭에 서는 나무에서> 의미층위보다는 이런 표현 층위의 작품은 주관적 자아의 과잉으로 세계의 자아와, 현실 대상의 가상화를 극단으로 몰고가 나르시즘에 빠질 가능성이 커서 작가 개인의 울타리에 갇혀 독자와의 문학적 소통을 이루기 어렵다.
ㆍ몸으로 시를 쓰는 나무- 온몸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고목
ㆍ좋은 산문은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 단계, 짜 맞추는 직물적 단계라고 빌터 벤야민이 그랬다. 김은주의 수필 쓰기는 이미 직물적 단계에 이르렀다. 음악적 단계는 대강의 구상을 통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대가의 글쓰기. 건축적 글쓰기는 사전에 계획된 설계도에 따라 조립해 가는 글쓰기다. 직물적 단계는 전체 구도와 균형을 이루어내는 데에서 더 나아가 문장의 세밀한 부분까지 필력을 집중하는 글쓰기다.
<①섬뜩한 칼날 위에 그녀가 발을 올려놓는다. 예리한 칼날은 세속이 끝나는 자리며 신령들의 세계가 시작되는 곳이다. 양손에 대를 잡고 그녀는 서서히 몰입의 순간으로 빠져 간다. 천지 사방을 둘러보며 뭇 신들을 불러 모은다.초점 없는 눈은 먼 산을 보는 듯 몽롱하다. 출렁이던 그녀 어깨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잠시 창공에 몸이 떠오른다. 오색의 무녀복이 바람에 휘감긴다.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르듯 현의 몸은 가볍다. -김은주의 ‘절정’에서> 묘사 대상이 부각된다.
<② 작은 구멍을 통해 동해의 파도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일체의 근심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묘한 경험을 한다. 엎드려 작은 구멍을 통해 드나드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정작 흔들리는 것은 저 아래 파도인데 내 몸이 멀미를 일으킨다. 흔들흔들 파도가 노니는 대로 마음을 맡기고 파도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다가 보면 온몸에 결이 풀리고 그 소리를 듣는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런 나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소리도 사라지고 듣는 나 자신도 사라져 지극히 고요해지는 순간에 이르게 된다. 김은주의 ‘해조음’에서>묘사 주체의 내면이 드러난다. 대상의 객관적 관찰과 현실의 철저한 재편은 수필의 영역 밖이다. 수필에서 묘사를 통한 구체적 형상화는 자아 의도와 주제의식에 따른 선택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앞의 묘사 중 ①보다 ②가 훨씬 수필의 고유 벙법에 해당한다. 묘사를 통한 형상화에 치중하는 그의 수필 쓰기는 자연적 작가의 교술을 최소화한다.
<①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떠오른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자신을 가라앉힐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더 크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 가라앉음은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더 깊고 그윽하게 곰삭을 기회를 얻는다.
<② 어찌 보이는 것만이 다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눈길이 벗어난 곳에서 스스로 익어 발표의 세상을 만난다면 그 또한 진배기인 것을...... . 일 년 내도록 묵묵히 소임을 다한 웃기 돌이 햇살 아래 환히 웃고 있다. 형상화를 통한 구체 경험이 제시되고 이에 대한 작가의 의미부여, 즉 해석이 뒤따르는 것이 작품의 일반적 구성이다. 뒷부분에 제시되는 의미부여는 작가의 직접적 진술이 주를 이루는데 이것이 바로 교술이다. ①처럼 작품 중간에 들어간 교술적 진술은 흔치 않다. ②에서처럼 마지막 교술적 진술의 경우도 “일 년 내도록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한 웃기 돌이 햇살 아래 환히 웃고 있다”처럼 형상화를 통한 암시로 끝맺는다. 교술을 최소화하고 형상화에 크게 기대는 수필 창작법은 장점이다. 이런 글쓰기는 전하려는 메시지를 말하기보다 보여주고 암시하는 방법이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모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겠다는 베려다. 치밀하고 섬세한 문장은 이야기가 사물 자체뿐 아니라 자아의 생각과 느낌을 촘촘한 그물로 건져 올린다. 잘 다듬어진 언어사용으로 자아 노출이 적절하게 제어되는 작품이 수작이다. 수필은 모든 재료를 자아 내부로 가지고 와서 발표시켜 밖으로 포출하는 고백의 문학이다. 그 고백은 무엇보다 진솔해야 한다.
② 기행문 형식의 수필은 기행수필로 창작되고 있다. 기행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간이다 공간은 일상의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 새롭고 낯선 공간이다. 새로운 장소를 체험하는 것이 여행이다.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보다 주체의 체험공간을 뜻한다. 기행 수필은 대상으로서의 물리적 공간-공간체험에서 오는 주체의 생각과 느낌이라는 구조에서 양자를 조합하는 자기 나름의 고유한 미학적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행자의 공간 체험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선에서 멈춘다. 작가가 대면하는 공간과 대상에 대한 끝없는 신뢰감을 가지기 때문에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