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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인 삶과 축복 / 신 11:18-25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EBS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 제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하나있는데, 서양인들은 명사로 말하고 동양인들은 동사로 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더 마실 것을 권할 때에, 서양인들은 ‘More Tea?’라고 묻는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더 마실래?’라고 묻는다. 서양인들은 ‘Tea’라는 명사를 강조하는 반면에, 동양인들은 ‘마시다’라는 동사를 강조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교육’이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서도 동양과 서양은 차이를 보인다. 동양에서 ‘교육’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전인 ‘맹자’에 처음 사용되었다. 곧 ‘맹자’의 ‘진심편’에 나오는 ‘득천하 명재이 교육지’(得天下英才而敎育之)라는 구절에서이다. 그런데 한자의 가르칠 교(敎)는 본래 ‘모방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교육이란 ‘위가 하는 바를 아래에서 모방하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지식이나 기술의 전달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영어에서 ‘교육’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는 ‘education’이다. 그런데 이 ‘educ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educo’에서 유래되었다. 라틴어 ‘educo’는 ‘꺼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서양에서 교육이란 ‘내재하고 있는 능력이나 발달 가능성을 꺼내어 그것을 발전하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가능성의 성장조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이처럼 교육에는 동양에서 이해하는 ‘지식이나 기술의 전달’이라는 면과 서양에서 이해하는 ‘내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성장하도록 한다’라는 성장조성의 면이 있다. 이 두가지 면 중에 어느 편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교육관이 달라진다. 여러분은 어떤 교육관으로 자녀들을 교육하고 있나? 만약 여러분이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좋은 부모이다. 왜냐하면 교유관이 없이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교육은 교육기관에 맡겨버리고, 뒷짐지고 구경하는 부모가 많다는 말이다.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배우고 가르치는 체계적 교육의 존재이다. 부라우닝은 ‘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이다’라고 말하였다. 몰랐으니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이다. 존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지가 고의적인 경우일 때에는 무지 그 자체가 범죄이다.’ 그렇다. 배우지 않은 것이 죄요, 가르치지 않은 것이 죄이다.
마 18:6-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녀교육에 대하여 힘주어 말씀하시고 계신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우리는 얼마나 자녀들을 실망시키고 있는가? 자녀들을 위한답시고 하는 일이 오히려 자녀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은 없는지 생각해 보라.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교육의 사명이 새로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교육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국민들만큼 교육열이 대단한 사람들도 없다. 모두들 교육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생활비 중 자녀교육비의 비율만 보아도 얼마나 교육에 열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교육을 해왔는데도 세상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공부도 많이들 하였다. 옛날보다 얼마나 많이 아나? 얼마나 똑똑하나? 얼마나 유능하나?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못돼가고 있다. 심지어는 ‘교육이 손들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길이 없다’라고 탄식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하나의 길 이 있다. 남은 길이 있다. 바로 신학적 교육, 신앙교육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율이요, 계명이요, 명령이다. ‘가라, 먹지 말라, 오라, 행하라, 떠나라, 사랑하라.’ 명령이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십계명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설명이 없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말씀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게 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장하게 하고, 말씀을 심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 이것이 신학적 교육 곧 신앙교육이다. 단순하고 유치한 방법이다.
언젠가 청교도 교육법에 관한 책을 읽어보았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간 청교도가 미국을 건설하였는데, 도대체 이 청교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발견한 그들의 교육철학은 단 세가지였다. 첫째로, ‘자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철학이다. 내가 낳았으나 내 자식이고 내 소원을 이루어야 하고, 내게 효도하고,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하여 자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끔보면 가정에서 문제되는 것들이 이런 유이다. ‘내 자식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내가 공부 하지 못했으니 너는 공부해야 한다’라고 아예 못박아 놓는다. 내 마음대로 될 줄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착각이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요, 사명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맡아 내가 키워가고 봉사하고 있는 것일뿐, 내 생명도 아니요, 내 생명의 연장도 아니요, 내 소유도 아니다. 철저하게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사람일뿐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선생은 내가 아니고 성서뿐이다. 내가 무엇을 가르치겠나? 내 능력으로 무엇을 하겠나? 내가 가르쳐서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청교도 교육법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가르칠 때의 교육방법이다. 어른들은 대부분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 맞는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합니다만, 청교도 교육법은 그렇지 않다. 우선 성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어느 책 몇장 몇절을 펴보라 해서 읽게 한다. 아이는 ‘거짓말하지 말아라,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라는 구절을 읽는다. ‘그래, 어떠냐?’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제야 ‘그러면 거짓말하지 말아라.’ 하고 가르친다. ‘내가 명하노니...’가 아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다. 성서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서만이 선생이다. 아주 철저하다. 이것이 청교도의 교육이다. 셋째로, 교육은 설득이 아니고 계율이요 훈련이다. ‘교육은 철저한 훈련이다. 생각하는 것, 마음먹은 것, 뜻하는 것, 행하는 것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훈련받는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훈련받는다.’ 힘들고 어려워도 숙달이 되도록 삶에 적용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청교도의 교육철학이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금식하셨다. 성서는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2)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40일 금식하시고 배가 고픈 바로 그 시각에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여기에 기독교 교육이 있다. 보라. 때때로 우리는 어떤 처지에 부딪히게 되면 ‘할 수 없지’라고 체념하는 일이 많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굶으셨다. 그 절박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신다. 말씀이 먼저이다. ‘굶었으니 도둑질해도 된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안될 말이다. 어떤 형편에서도 말씀이 먼저다. 진리가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 중심의 자녀교육을 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들을 수 있다. 먼저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18)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라는 말씀이다. 그러고 나서 가르치라 하신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말슴과 일치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항상 보게 하고, 항상 느끼게 하고, 항상 생각하게 하라고 한다. 스스로 경건한 분위기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배될 때에 천사들이 그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가족이 될 것이다.’ 경건한 가정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야 교육이 된다고 한다. 그 다음에 가르치라고 한다. 그리고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라고 말씀한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누가 가르치는가? 부모님이 가르친다. 부모님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어디에서 가르치나? 가정에서 가르친다. 무엇을 가르치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먼저 행하고 본을 보여주며 가르친다. 미국의 작가 어빙은 ‘자식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는 나의 집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어버이는 훌륭한 어버이다’라고 말했다. 가정이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보금자리라는, 이 하나의 인상을 심어주었다면 성공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한 장로님을 소개할까 한다. 원주 어떤 침례교회의 장로이다. 큰 아들이 서울 법대를 나와 사법연수원생이었고, 둘째가 고려대 법대 재학중이었다. 어느 분이 권사인 그 부인에게 물어봤다. ‘권사님, 어떻게 자녀들을 그렇게도 잘 키우셨습니까?’ ‘내버려두어도 그렇게 크던데요.’ ‘평소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제가 본디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한데 가르치기는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저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그저 고맙고 너무도 미안해서, 아이들이 공부할 때에 옆에 앉아서 성서를 읽고, 그것들이 잘 때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보라. 아이들 공부하는데 옆에 앉아서 성서 읽는 어머니는 별로 배운 것도 없지만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이렇게 신앙교육은 먼저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 다음으로 보충되는 것이 교회교육이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교회에 다 맡겨버린듯이 무관심하거나, 학교굑육 곧 지식교육, 입시교육에만 관심을 갖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이나 현실의 문제들이 교회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만큼 최악에 와 있다. 제도 속에 있는 학교교육도 손을 들 지경에 와있으니 교회교육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교회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교육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할하시고 승천하실 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로 믿고 따르던 자들에게 명령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다. 복음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해도 좋고 안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할 교회의 사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 존 웨슬리는 ‘니는 감리교가 유럽과 미국에서 존재하느냐 못하느냐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리고 능력없는 하나의 종파적 종교로 존재할까 두려워한다’라고 언급한바 있다. 교회가 능력없는 종교집단 중의 하나로 변질되지 않게 하려면 먼저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성령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길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과 같이 하나님을 믿되 올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올바르게, 성령을 믿되 올바르게 믿어야 한다. 바르게 믿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교육적 기능이 실현되어야 하고, 기독교교육이 반드시 진흥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정이 식고, 흥미를 상실해가는 교회교육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기도하자. 다음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참석하게 하여 부모님과 함께 한 교회에서 믿음의 돌을 쌓아가자. 창 17:4-5, 7절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는 언약 아래서 태어난 상속자들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구원을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았다. 이제 자녀들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지켜 행할 때에 구원을 받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가정의 부모들은 이 하나님의 고귀하고 준엄한,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 언약이 자손대대로 이어져서 자녀가 스스로 구원에 이르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마당히 행할 길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수하는 비결, 형통하는 비결, 강댜대지는 비결, 성공하는 비결,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 뿐이요, 말씀 주도적인 인간이 되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른 길일진대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주어서는 안되고, 줄 필요도 없고 무엇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성도 여러분, 이미 내게 주신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자. 기독교교육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여러분의 가정이 살고, 가정이 살아야 이 나라가 산다. 오늘 신명기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순종하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조용한 힘이 있다. 그러나 그 위력은 대단하다. 삶의 모든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제나 조용한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햇볕은 하루종일 아무 소리없이 그 빛을 비추지만 그속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도 역시 대단한 힘이다. 만유인력에 기계 돌아가는 것같은 요란한 소리야 없지만, 세계가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힘, 우주에서 천체운동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 만유인력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이슬은 사람들이 고이 잠든 밤에 아무 소리도 없이 살짝 내리지만 모든 식물에게 새로운 생기와 놀라운 성장을 선사한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오기 전 천둥이 칠 때 그 힘은 바로 전기의 힘이다. 그러나 전기도 소리가 없다. 이렇게 대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조용함 속에 있다. 그렇지만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 역시 소리없이 조용히 우리에게 임하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을 움직이고도 남는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인 25절을 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같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16, 9.18. 지은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