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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입성 / 마 21:1-11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서 일하던 농부가 호두나무 밑 그늘에서 앉아 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농부가 쉬면서 우연히 눈이 가서 바라보게 된 것은 호박 넝쿨에 매달린 큼직한 한 개의 호박이었다. 농부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무거운 호박이 약한 넝쿨에 매달리게 만드셨담? 넝쿨은 약하고 호박은 무거우니, 딱할 정도로 거의 땅에 닿을듯이 매달려있지 아니한가?’ 그러면서 머리 위의 호두나무를 바라보니, 더욱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그 크고 든든환 호두나무 가지들에 겨우 작은 호두들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혀를 ‘쯧쯧’ 차면서 농부는 그늘에 잠시 눕자 곧 단잠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딱’ 하고 호두가 하나 떨어지면서 농부의 머리를 때렸다. 깜짝 놀란 농부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픈 머리를 얼른 어루만지며 크게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이쿠! 만약 저 큰 호박이 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면, 나는 정말 큰일 날뻔했구나! 하나님, 저 호박 넝쿨에 큰 호박을 매다신 일도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따질 것 없다. 순종하면서 그저 감사로 살라. 나중에 다 깨닫고 알게 될 때가 온다.
초대교회 당시 이교도들은 예수님을 나귀머리라고 조롱하였고, 기독교인들은 나귀머리를 신으로 떠받든다고 비난하곤 했다. 그들의 눈에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경배한다는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그래서 예수님과 기독교를 조롱했고, 그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놀려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움이요 치욕이라고 이야기할지라도 그 십자가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고전 1: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고 이어서 22-24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능력이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주는 능력이다.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게 어떻게 능력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십자가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를 어리석다고 말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가?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진 않나? 십자가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요, 무능력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변화산 체험 이후에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만 생각하셨고, 예수님의 눈에는 십자가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십자가만 바라보고 걸어오신 걸음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수님은 이미 예상하고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6:21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 17:22-23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가셨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귀를 타오 오신 예수님을 왜 사람들은 그렇게 열렬히 환영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동네인 벳바게에 도착하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라고 말씀하신다. 벳바게는 예루살렘에서 바라볼 때 감람산 정상 너머로 약 10분쯤 걸어가면 만나는 산등성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작은 산이고, 벳바게는 감람산보다 더 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예수님은 어디서부터 나귀를 타셨을까? 감람산 동쪽인 벳바게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나? 아니면 감람산을 넘어와 예루살렘 성문 가까이에서부터 나귀를 타셨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획된 사역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자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했었던 어린 양과 같은 존재로 이 땅에 보내주시겠다고 선지자를 보내서 예언하셨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였다. 그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유월절을 기다리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는 유월절이 되기 엿새전이었다. 이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때가 바로 이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엿새전에 먼저 감람산을 오르신다. 이 산마루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벳바게였고 다른 하나는 베다니라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감람산의 등선에서 불과 100m 떨어진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예수님께서 제자 두 명에게 아주 중요한 일감을 맡겼다. 그 일감은 다름이 아니라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귀새끼를 풀어서 끌고 왔다. 그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며 만유의 주제가 되시는데 하필이면 길들이지도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셨나? 마치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아서 당선된 예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티코를 타고 들어가는 모습과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주었다. 이때 제자들은 12명의 제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눅 19:37절에서는 거기에 모인 제자들을 지칭하면서 ‘제자의 온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에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오시던 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70명을 전도자로 파송하신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눅 10: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따로 70인을 세우셨다’는 말씀은 12제자 외에 70인이라는 말이기도 하고, 많은 제자들 가운데 70인을 따로 세우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뿐만 아니라, 70명의 제자도 있었고,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제자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 제자들이 벳바게에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다 겉옷을 벗어 펴놓았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눅 19:37상) 그 제자들이 그 동안 자기들이 본 일들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람산 내리막길‘이라는 말은 벳바게에서 감람산 정상을 넘어 예루살렘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건너편인 벳바게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감람산을 넘어와서 예루살렘 성문 가까이 왔을 때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 정상을 넘어오시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펴기도 하며 예수님을 환영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소나무처럼 이스라엘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나무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성서에서 종려나무는 거룩함의 상징이었고 승리와 번영의 상징이기도 했다. 종려나무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 있다. 주전 2세기 이스라엘이 헬라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시리아 출신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모욕하며 죽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 당하고 유대교가 조롱을 당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립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을 마카비 전쟁이라 부른다. 약 12년간에 걸친 그 마카비 전쟁에서 결국 유다 마카비 장군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유다 마카비 장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수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비록 약 100년 후인 주전 673년에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20년 전에 있었던 그 유다 마카비 장군과 같은 메시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나타나셨다. 비록 유다 마카비 장군과 같이 위엄 있는 군마를 타고 오신 것은 아니지만, 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그런 기대를 갖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그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다.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 일이 예수님을 더욱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았다. 죽은 사람을 살릴 정도로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로마로부터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나타나시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예수님을 환영했다.
더구나 예수님은 감람산을 넘어오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나타난다면 반드시 감람산 쪽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아직도 메시야가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반드시 동쪽에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쪽이 바로 감람산이다. 동쪽인 감람산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황금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감람산 쪽으로 나 있는 황금문은 굳게 닫혀 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이 메시야만이 들어오실 수 있다는 황금문인데, 메시야가 열고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지금도 굳게 닫혀 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반드시 동쪽 감람산에서 오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런 기대처럼 벳바게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오고 계신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 분이야말로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줄 메시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펴며 메시야를 맞아들이는 것처럼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맏아들였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메시야이긴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그런 메시야는 아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게신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오시면서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쳐주신 것 가운데 하나가 마 20:27절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는 말씀과, 마 20:28절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으로 오던 도중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할 때 하신 말씀이다. 메시야가 가시는 길은 결코 영광을 취하는 길이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고난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올라가고 있다. 나귀의 등에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래서 일부러 나귀의 등을 빌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오늘 본문 4-5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구약성서에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메시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한 것처럼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고 오시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 사람들도 그렇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와서 길에 펴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분위기라면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거기 모여든 군중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저항운동을 벌이거나 독립전쟁을 할 수 도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다. 10-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소동일 일어날 지경이 되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약 12만명 정도였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은 약 270만명에 이른다고 했다. 현대학자들은 그런 요세푸스의 기록은 과정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거나 말씀을 들었던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소문만 들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후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 가운데는 에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거기 모여든 사람들을 선동해서 독립운동을 하시려 했다면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지해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득권층을 제외한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백성들의 기대 철저하게 외면하셨다. 오히려 나귀를 타심으로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메시야임을 증명해 보이려고 하셨다. 개선장군들이 타고 오는 군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메시야가 타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말과는 달리 나귀는 힘없는 존재이다.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짐승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그래서 군마 대신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성을 들으시면서 마음은 굉장히 무거웠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고, 당신이 지셔야 할 십자가를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야로 나서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당신의 길을 가기를 원하셨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길이요, 십자가의 방법이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하는 군중들은 정치적인 해방을 기대하며 그 해방을 생각하는데, 나귀의 등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다른 방밥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세상에 없다.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가셨다. 십자가의 길 말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고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게 바로 십자가이다. 가장 낮고 천한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들은 예수님의 그 방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고 희망했던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는 ‘호산나’를 소리쳐 외쳤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아우성을 치고 만다. 자신들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연인이 있었다. 어느날 남자는 전쟁터에 가게 되었고, 안타깝게도 그만 팔 하나와 다리 한쪽을 잃게 되었다. 그는 그런 불구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여인 곁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불구의 몸은 사랑하는 그녀에게 평생 무거운 짐이 될 것이기에, 그녀를 떠나는 것만이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가자 여자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은 흘렀고, 고향을 떠나 있던 남자는 자신이 떠나온 사랑하는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결혼식이 열리는 교회로 갔다.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며 진정으로 축하해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멀리서 결혼식을 바라보던 그 남자는 그만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결혼하는 그녀의 곁에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그 남자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는 남자의 건강한 모습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그는 그녀를 위해서 눈물 속에서 곡을 하나 만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에피소드이지만, 실제의 이야기는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때로 오해한다. 내가 건강해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찬송도 잘 불러야 하고, 예배도 빠짐없이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구제하고 헌신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사랑이다. 십자가의 구원이 우리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듯,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역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거나 다 헤아릴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다. 지금 주님은 그 사랑의 길을 가고 계신다. 주님께서 나귀의 등에서 바라보시는 십자가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세상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말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사랑, 우리가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 하더라도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사랑, 우리가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묻혀 살지라도 누더기와 같은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고 구원하시는 사랑, 세상의 욕신으로 가득 차 하나님을 잃어버릴지라도 우리를 잊지 않고 다시 반겨 맞아주시는 사랑, 그것이 십지가 사랑이다. 우리 주님은 지금 나귀의 등에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그 십자가 사랑을 이루시기 이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신다. 특별히 본문 3절의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묵상하기를 바란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께 사용되지 못하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삶, 나의 시간과 몸을 온전히 드리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게 된다. 나귀새끼가 자신을 주님께 드렸을 때 주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가셨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쓰시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언제 주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하실까? 우리는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부탁받게 될 때 주저한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내가 이모저모로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나는 주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도 추하고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분은 ‘나는 주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나는 가진 것도 없습니다. 내게는 그 일을 할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충분한 것도 아닙니다. 회사 일에도 바쁩니다. 회사 일 하나만 하기에도 벅찹니다. 집안일 하나만도 벅찹니다. 공부하기에 벅찹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형편이 그렇더냐? 그럼 알았다. 네가 조금 더 준비가 되고 갖춰지고 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네가 조금 더 여류롭게 시간을 낼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라고 하시지 않는다. ‘네가 아직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도 잘 안다. 네가 아직 준비가 덜 되어있다는 것도 안다. 네 일을 하기에 너무도 바쁘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너를 나는 필요로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이다.’ 그렇다. 주님이 나를 쓰시겠다고 하실 때가 언제인가? ‘내가 모든 준비를 다 갖추고 이젠 되었습니다. 언제든 부르시기만 하십시오. 당장 달려가겠습니다.‘라고 할 때인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불러 기름을 부으실 때는 어땠나? 아직은 어리고 볼품없어 사무엘 선지자와 함께 잔치할 때조차도 들에 그냥 남겨두었지 않았나? 그런데도 사무엘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라고 하면서 굳이 다윗을 불러들여 그에게 기름을 붓지 않았나?
사 43:1절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이단은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목숨도, 건강도, 인생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다. 주님의 주권을 높여드릴 때 주께서 우리를 쓰신다. 나귀새끼와 그 임자의 헌신도 귀하다. 또한 본문 8절의 말씀처럼 겉옷과 나무가지를 길에 편 무리들의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겼다. 우리도 쓰임받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의 것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쓰임받기를 애쓰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한다. 가장 최선의 것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신다. 주님의 일을 위해 주님이 주신 인생이 값지게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의 사전에, 예수님 한분만이 내 마음의 나귀가 태우는 유일한 왕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행하시고 이루시는 모든 일들을 보고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가신 고난의 길, 우리도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7 종려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