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아들과 딸에게 전화를 했다. 할 말이 있으니 주말에 집에 오라고. 서울에 사는 아들은 대뜸 툴툴댔다.
“전화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회사일이 주말이라고 한가하지 않아요.”
나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엄마가 평소에 너희들에게 다짜고짜 집에 오라고 한 일이 있었냐며, 얼굴 보며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들은 볼멘 음성으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갈비찜과 딸이 좋아하는 약밥을 준비해서 토요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내렸다. 아들과 딸에게는 얼음을 넣은 아이스커피를 주고, 나는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엄마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커피를 마시던 아들과 딸은 정지된 화면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아들의 눈가 근육이 경직되며 얼굴이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마음을 추스릴 시간을 주기 위해서 나는 과일을 가져 오겠다면서 부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밀폐 용기에 보관해 둔 수박을 꺼내고, 복숭아와 사과를 씻었다. 식탁에 앉아서 사과를 깎고 있는데, 한껏 목소리를 낮춘 남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우리도 치매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거야?”
“알츠하이머 유전자겠지.”
“그게 그거지 않아? 우리 엄마가 치매에 걸리다니 믿을 수가 없네.”
“치매, 치매 하지 마. 속상하니까. 알츠하이머라고 해. 알츠하이머도 치매긴 하지만. 인지 장애가 점점 심해지실 거야. 어떡하지?”
아무래도 교사인 딸이 회사원인 아들보다 알츠하이머에 대해 이해도가 높은 것 같았다.
“엄마를 요양병원에 모셔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요양원? 우리 둘 다 직장 생활 하잖아.”
“장기요양보험에서 등급을 받으면, 요양보호사가 집을 방문해서 두세 시간 돌봐주기도 해.”
“두세 시간으로 되겠어? 나머지 시간을 엄마 혼자 두면 우리가 얼마나 불안하겠어? 나는 엄마가 전문 시설에 들어가시는 편이 더 마음이 놓여.”
“아직 말짱하시잖아. 좀더 시간을 두고….”
과일을 들고 거실 쪽으로 가자 아이들은 얼른 말을 끊었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구나….”
진단을 받았을 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아버지 없이 지나온 시간들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잘 자라주었고 전공을 살려 직업을 얻고 자리를 잡았다. 이제 제 몫의 삶을 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짐이 될 것을 생각하니 정말 내 자신이 싫어졌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벌어진 일이니, 아이들도 알아야 했다.
“당장 죽을병은 아니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라.”
딸이 자리를 가까이 옮겨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어떻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엄마 혼자 계신데….”
아들의 목소리가 진지해지는 게, 내가 요양병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설득시키려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정했다. 이 아파트에서 사는 데까지 살 거야. 지금 인지기능 저하를 늦추는 약을 먹고 있어. 도네페질이라는 약이야. 내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 다시 너희들과 의논하마.”
아들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치매에 걸린 사람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치매 환자 스스로, 자신이 혼자 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는 있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지금까지 많은 걸 혼자 해결하며 살아왔으니까.”
나는 딸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엄마다운, 담대하고 강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 뭐든 혼자 해결하려 애쓰지 마세요. 제가 더 자주 들를게요.”
딸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세요. 저도 자주 전화드릴게요.”
아들의 표정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요양병원이 보이는 지점에서 건널목만 건너면 은숙 씨의 집이다. 행복아파트 102동. 호수를 확인하려 핸드폰을 꺼내는데, 승용차 한 대가 멈추어 선다. 은발이 성성한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옆좌석의 차문을 열어준다. 성희 씨다. 남편의 돌봄을 받고 있는 성희 씨에 대한 부러움이 잠깐 일다가, 미경 씨의 말을 떠올린다.
“아이구, 알츠하이머 환자가 잔소리쟁이 남편과 산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에요.”
우리 넷 중 미경 씨와 성희 씨는 남편이 있다. 진단을 받고 보니 결혼하지 않고 살아온 게 후회가 된다는 은숙 씨의 말에 미경 씨는 손사래까지 치며 이렇게 반박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남편이 살아 있다면 어땠을까? 자상스러운 성품의 남편도 나를 위해 온갖 걱정과 참견을 했을 것이다. 약은 먹었느냐, 밥을 더 먹어라, 운동할 시간이다, 이건 꼭 기억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위험하다, 이건 자꾸 연습을 해야지….
자유롭게, 천천히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행복하다. 성희 씨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며 성희 씨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나란히 행복아파트 입구에 선다.
* 이 소설은 웬디 미첼과 아나 와튼이 함께 쓴 『내가 알던 그 사람』과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에서 특히 영감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첫댓글 "그럼 우리도 치매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거야?"라는 게 자식들의 첫 반응이군요.
ㅎㅎ 그러지 않을까요? 제가 읽은 책에 의하면 부모 중 1인이 치매일 경우 자식에게 발현하는 유전 비율은 50%라고 합니다.
자식보다 독서모임보다 자조모임이 좋은 거네요.
나이 들수록 뇌에 자극을 주는 누군가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AI라도요. 기억이 사라지면 거기에 관련된 것들도 함께 사라지겠죠? 사람들, 추억들, 감정들, 물론 불안이라는 감정은 더해지겠지만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가볍지 않은 주제와 내용이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병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이 잔잔하면서 가슴 저릿합니다. 제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아서 주인공에게 더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요즘은 심지어 어제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읽었던 페이지도 또 다시 봐야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