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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칭기즈칸, 그리고 그의 후예들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 걸친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며 팍스 몽골리카를 연다. 몽골제국 5대 카안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바꾸고 남송 정벌에 이어 바다 건너 일본으로 눈길을 돌린다. 쿠빌라이는 1차 일본 원정에 앞서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고려의 태자를 사위로 맞이하기로 한 것, 고려와 몽골 황실 최초의 혼인, 이는 두 나라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광용/아나운서; 1274년 5월, 원(元) 나라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몽골 제국 5대 카안 쿠빌라이의 딸, 16살 소녀 쿠틀룩켈미쉬 공주의 결혼식이었는데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의 금지옥엽, 그 짝이 된 행운의 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오~ 공주납시요!--------------
이광용: 쿠빌라이 카안의 사위가 된 이 남자는 바로 고려의 태자 왕심(王諶)입니다. 훗날 고려 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이죠. 그런데 당시 왕심은 1남2녀를 슬하에 둔 무려 39살의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에 자신의 부인인 태자비를 놔두고 무려 23살이나 어린 몽골 공주에게 새장가를 든 거죠.
이시원/배우: 아니~ 이게 말이 되나요. 그 대단한 쿠빌라이의 딸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두번째 부인으로 들어와요?
이광용: 좀 이해가 안 돼죠? 대칸의 딸이 같은 몽골인도 아니라 고려의 남자인 태자와 결혼을 한다니까.
최태성/한국사 강사: 게다가 유부남!
이광용: 그러니까요!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되는 39살의 유부남과~
이시원: 나이 차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광용: 우리 고려가 어떤 나라입니까. 몽골제국과 무려 28년간이나 항쟁을 했던 그런 나라가 아닙니까~ 고려의 태자 왕심과 몽골의 공주 쿠틀룩켈미쉬, 이 두 사람의 혼인이 향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역사저널 그날에서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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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정/KBS 아나운서: 332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오늘부터 토요일 저녁 8시 5분에 찾아뵙게 되었는데요. 몽골제국의 공주와 고려 태자의 결혼으로 시작을 해 봤는데 사실 이 시기 몽골제국은 쿠빌라이 카안 치세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때인데 왜 갑자기 쿠빌라이가 자기의 딸을 고려에 보내려고 그러시는 거죠?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프로포즈는 고려에서 먼저 합니다. 그 당시에 고려의 왕권이 불안했어요. 무신 집권기였고 임연이란 사람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원종폐위 사건-1269년 6월, 고려 무신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옹립한 사건). 그때 마침 태자가 몽골에 있었어요 (원(元)에 머물던 고려 원종의 태자 왕심), 쿠빌라이에게 이야기를 하죠. 고려에서 큰 사건이 있었다 (태자 왕심-쿠빌라이에게 고려 원종의 폐위 소식을 알림), 쿠빌라이가 임연에게 압력을 넣어서 고려 원종을 복위시키자마자 다시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달려갑니다. 나에게 군대를 주면 고려의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오겠다. 그것과 동시에 청혼을 합니다. 내 아들이 있으니 당신 딸과 결혼시킵시다.
이시원: 군대도 달라 거기다 딸까지 달라~ 그러면 이거 무리한 부탁 아닌 가요?
허준/방송인: 요기까지만 딱 들어보면 빚을 젖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속국이 되었거나 그런 느낌이에요.
최태성: 그래서 쿠빌라이가 이렇게 얘기하죠.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왔지 않은가? 다른 일은 청병이잖아요. 나중에 사신을 보내서 요청을 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
이시원: 어떻게 보면은 아무리 완곡하게 말하긴 했지만 약간 거절한 의사이고 한데 원종이 순순히 포기하나요?
권용철/단국대학교 북방문화연구소: 순순히 포기하지 않습니다. 거절을 당했으니 다른 전략을 쓰면서~
허준: 그러면 원종이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보는게~ 이러다가 갑자기 칼을 목에 대면서 적당히 하자~? 이런 느낌이에요.
최원정: 몽골제국의 공주라하면 푸치니의 오페라가 몽골제국의 공주가 모티브라면서요 (오페라 투란도트-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가 몽골 2대 카안 우구데이의 증손녀 쿠툴룬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 거기에 보면 공주를 데리고 올려면 가서 수수께끼를 맞추어야 하는데 못 맞추면 참수당하고~ 지금 어마어마한 일을 우리가 요청을 한 거예요. 딸을 주시오~ 하고
권용철: 청혼을 한 이후에 원종은 태자를 몽골로 보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몽골의 숙위로 들어간 겁니다. 숙위라고 한다면 몽골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서 속국의 왕족들이 볼모로 머무는 황제를 곁에서 지키는 임무를 맡으니까 황제를 자주 볼 수 있겠다. 황제의 측근이 될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마치 통과의례처럼 다음 고려 왕위 계승을 하려면 몽골에서 숙위 생활을 쌓아야 된다는 거죠.
최원정: 공주를 쉽게 얻은 건 아니었군요.
권용철: 아니죠, 그래서 태자가 숙위생활을 하던 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쿠빌라이가 비로소 국혼(國婚)을 허락하게 된 겁니다.
이시원: 혹시 여기서 드라마적인 추리를 해보자면 이제 숙위를 하면서 타향살이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걸 본 공주가 모성애를 느껴서 로맨스가 시작된 게 아닌가요?
권용철: 약간 찬물을 끼얹은 건 데요. 숙위 처지가 그렇게 애처롭고 불쌍하고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고요. 그리고 궁궐의 공주를 직접 대면했을 가능성도 사실 높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세기의 로맨스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원정: (최태성씨를 향해) 아버지의 입장에서 나이 않은 남자한테 자기 딸을 줄 수 있나요?
최태성: 아~ 저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쿠빌라이와 원종 둘 간의 개인적 교감 관계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요즘 크게 유행하는 거 있잖아요?
일동: 우리는 깐부잖아요~!!
최태성: 뭉케 카안이 죽은 다음에 쿠빌라이도 다음 카안 자리를 노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지금 동생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때 몽골에 싸워가지고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던 고려에서 자기 발로 들어온 거란 말에요 (직접 만나 고려 태자(원종)의 강화 요청을 카안 즉위에 활용한 쿠빌라이).
이시원: 본인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거니까
최태성: 그렇죠, 이렇게 해서 정통성이 확보되었던 그런 모습 그리고 나중에 고려에서도 원종이 죽으면서 쿠빌라이가 밀어주잖아요. 그러니까 서로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도움을 줬던 이런 관계가 적용된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서로의 즉위를 도운 원종과 쿠빌라이-고려와 몽골의 국혼으로 이어진 인연).
이시원: 둘 다 이제 왕 위에 올랐으니까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가 형성 되었을 것 같애요.
권용철: 당시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으로 원정을 가기 위해서는 고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일본 원정을 위한 파트너를 만들기 위한 측면에서 국혼이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구요. 그리고 또 이때는 남송을 정복하기 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남송과 고려의 연합을 사전에 차단 해야한다. 즉 고려 몽골 양 국가의 이해관계가 다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보니 성사될 수 있었던 거죠.
이익주: 이 쿠틀룩켈미쉬로 말할 것 같으면 쿠빌라이가 45세에 낳은 딸이에요. 마흔다섯에 낳은 10대의 딸이란 말이에요. 이 딸을 고려라는 먼 나라로 보내는 결정을 해야 되는 거잖아요. 쿠빌라이로서도 굉장히 큰 결심을 한 거에요.
허준: 이런 가능성은 있습니다. 물론 늦으막에 낳은 딸 예쁘다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요. 요 나이 때가 질풍노도의 시기다. 사춘기 딸 때문에 나 너무 힘들어~
이시원: 너 그렇게 말 안 들으면 고려로 시집보낸다~
이익주: 그것도 내 수첩에 적어 놓을게요.
권용철: 몽골 황실의 혼인 스타일을 보면 한번 맺은 혼인관계는 대대로 갑니다. 일대로 끝나는 게 아닌 거에요. 어느 가문이 몽골가문과 통혼을 하는 범위 속으로 계속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청혼을 받은 쿠빌라이도 아마 연구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들을 대대로 나와 혼인한 집안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청혼해서 결혼식 까지 (1270년~1274년)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돼죠.
최원정: 겹사돈이 되는 구나.
최태성: 그러면 그냥 가족이죠.
허준: 단순한 집안끼리 만나는 게 아니고 이건 섞여서 가족이 되어버리는 거죠.
이시원: 그 정도면 4년의 고민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닌 거 같애요.
이익주: 그 4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삼별초 항쟁이 있어요. 그러니까 청혼을 처음 했을 때는 무신정권이 무너지기 전이고 그 다음에 삼별초가 진도 제주도로 가면서 항쟁을 하는데 그게 끝난 다음에 허락을 해요. (삼별초 대몽항쟁 (1270~1273)-원종의 개경환도 명령에 반발하여 삼별초 군대가 일으킨 반정부-반몽골 항쟁), 그러니까 쿠빌라이가 볼 때 지금 고려 왕실이 좀 불안하다 하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그 불안 요소가 사라진 후에 허락을 하는 그 시간표가 만들어질 수 있죠.
최원정: 그러고 보니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몽골공주와 혼인한 고려왕실~
이시원: 이게 몽골어로 저희가 그때 배웠던 게 형제처럼 끈끈해 지는 관계가 안다~ 그리고 사돈관계가 쿠다 라고 들은 거 같은데~
권용철: 쿠다 관계가 서로 남성 여성 교환을 통해서 일종의 정치적인 동맹을 형성할 필요성이 있었던 거구요. 특히 카안의 가문이 당연히 아무 하고나 혼인하지는 않았겠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대칸의 친딸이 이것도 타국인과 결혼했다고 하는 것은 이건 고려와의 처음이라고,
최원정: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을 허락 받고 고려 태자는 귀국을 하는데 귀국길이 통곡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일이죠?
----------------이광용: 1272년 3월, 쿠빌라이 카안에게 결혼을 허락받고 귀국한 고려 태자 왕심, 그런데 귀국 길에 이 왕심의 모습을 본 신료와 백성들이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최원정: 너무 말라서, 피골이 상접해서~
이광용: 우리 고려의 태자가 이렇게 몽골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시원: 몽골로 보내놨더니 몽골 사람이 다 돼서 왔네 라고 신하들이 그랬을 것 같애요
--------------------모자를 벗는 태자, 충격! 몽골식 변발!----------------
최태성: 이건 아니지~ 변발!
이광용: 맞습니다. 이 머리 모양! 정확히 말하면 몽골식 개체변발 이라고 부릅니다. 앞머리와 좌우머리만 남겨두고 정수리 부분은 완전히 삭발을 했고 그리고 살짝 뒤로 돌아보시면 양쪽 귀 뒤에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린 이런 헤어 스타일~역대 몽골제국 카안들의 초상화를 보면 다 이런 머리 스타일이잖아요.
최태성: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이건 보통이 아닌데~
이광용: 당시 이 같은 태자의 모습을 본 고려의 백성들 엄청난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통곡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고려사 세가 원종 13년 (1272년) 2월-나라 사람들은 세자의 변발(辯髮)과 오랑캐 옷차림(胡服)을 보고 모두 탄식하였으며 심지어 우는 자도 있었다). 그 만큼 고려 사람들 사이에서 몽골, 그리고 몽골 사람에 대한 어떤 거부감, 저항의식이 강했다는 방증이 아니었을까. 1274년 5월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고려 태자 왕심, 같은해 고려 25대 충렬왕이 됩니다.
최원정: 태자의 변발호복은 혼인의 조건으로 몽골의 강요가 있었나요?
이익주: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애요. 원종이 태자로 쿠빌라이를 만났을 때 받은 약속이 있죠.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의 풍속을 몽골식으로 고치지 않는다. 헤어 스타일이나 복장은 토풍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고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분명히 받았던 건데 그래서 아까 이것은 정치적인 선택일 것이다. 자신이 몽골 지배층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는 거죠. 그러면서 몽골이 나를 지지하고 후원한다 하는 이 사실을 고려의 관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고려 신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충격적인 저 모습을 연출했던 거로 보여요.
최원정: 아무튼 몽골과 고려는 이렇게 사돈이 되었는데~ 제국대장 공주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최태성: 원래의 이름은 쿠틀룩켈미쉬, 그리고 음역어로 하면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홀도로게리미실을 음역어로 하면 옛날에 이탈리아를 이태리(伊太利),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이런 식으로 음역을 한 건데 말씀하신대로 우리 한테는 제국대장공주가 익숙하구요. 제국대장공주라는 것도 죽고나서 받은 시호예요.
이시원: 근데 노국대장 공주, 제국대장 공주, 이름에 다 대장(大長)이 들어가요.
최태성: 질문이 진짜 많이 나와요.
이시원: 대장, 그게 최고로 높은 공주다 이런 뜻인가요?
권용철: 대장공주(大長公主) 라는 말은 황제의 고모에게 부치는 칭호입니다. 그래서 공주가 사망하고 난 다음에 쿠틀룩켈미쉬의 조카였던 원나라의 무종이 시호를 내려주었기 때문에 우리 고모, 대장공주의 칭호가 붙은 거지요.
이익주: 대장은 그런 뜻이죠 그런데 지금 이야기한대로 정말 힘이 있어요. 그 당시 고려에서 가장 힘이 센 여성, 몽골 대칸의 딸이잖아요. 아까 그 귀한 딸이 어떻게 두번째 왕비가 되느냐고 걱정했잖아요. 누가 누굴 걱정합니까.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이시원: 한국 딸 걱정은 하는 게 아니에요?
이익주: 그럼요. 여기 와 가지고 먼저 있었던 태자비 시절부터 부인이 있었죠. 그 부인을 뒷자리로 밀어냅니다. 와서 아들을 낳았는데 잔치를 하는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제국대장 공주가 내가 여기서 가장 힘센 왕비야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아들이 다음 후계자가 되도록 하는 거잖아요. 여기에도 힘을 써요. 먼저 부인한테서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은 중을 만들어요 (1279년 충렬왕 첫 부인의 아들을 출가시킨 제국대장 공주).
최원정: 몽골의 공주가 이렇게 무섭구나 그러면 부인 서열도 뻔한 건가요?
최태성: 제국대장 공주가 충렬왕 자기 남편하고 어느 사찰을 갔나봐요 그런데 시종들의 숫자가 기대보다 적었던 거라 그러니까 제국대장 공주가 열을 받은 거에요. 내가 왔는데~내가 떴는데~ 이거 밖에 안 하는 거야 라고 해서 남펀한테 지팡이로 때립니다.
허준: 신하들 보는데~
최태성: 이게 뭐야 사람들이 없잖아 하는 모습이 기록에 있어요.(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비 제국대장 공주-배종하는 이들이 적다고 성을 내며--- (중략)--- 공주가 지팡이를 들고 맞이하여 나와 왕을 때리자---), 이걸 어떻게 봐야될지?
이익주: 그렇게만 하는 게 아니에요. 충렬왕이 사냥 좋아하고 정사 안 돌보고 그런데 말을 하죠. 여러가지 간언을 하는데 민폐를 끼치니까 사냥을 줄이시라 이런 식으로 국정에 대한 충고도 해요.
최원정: 그런데 이런 부부관계도 그렇고 이쯤 되면 몽골과 고려의 상하관계가 확실해졌을 것 같애요.
최태성: 실제로 고려에 대한 몽골의 통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요. 예를 들면 고려의 관제였던 2성6부, 이거 우리와 비슷한데 바꿔~ 첨의부 4사로 격하시키는 거죠. 그리고 왕실에서 쓰고 있는 용어들 예를 들면 태자를 세자로, 또는 폐하를 전하로 격하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허준: 이름도 생각해 보니까 충렬왕이요, 열심히 몽골제국에 충성한다는? 충성할 忠, 열렬히 충성?
최원정: 25대 충렬왕 부터 30대 충정왕 까지 6대가 忠자 들어간 왕들이 있잖아요?
이익주: 그런데 거기서 더 의미가 있는 것은 忠자가 아니라 왕자예요. 왕의 이름을 정할 때는 그전에는 무슨 祖나 宗이잖아요. 태조(1대), 혜종(2대)~~고종(23대) 원종(24대) 다음 이때부터 충렬왕(25) 충선왕(26) 충숙왕(27) 충혜왕(28) 충목왕(29) 충정왕(30) 이런 식으로 한 단계 격하된 걸 보여주는 거죠.
이시원: 그런데 충렬왕 이거 왕이 어떻게 보면 사위가 되었는데 이렇게 얻어맞기만 하고 얻는 게 없나요? 혜택이라도 있어야죠, 맞기까지 하는데~
권용철: 당연히 황실의 사위로서 위상의 변화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황실의 사위 그러니까 우리가 부마라고 부르죠. 부마의 지위는 공주의 혈통으로 결정이 됩니다. 지금 제국대장 공주는 대칸 쿠빌라이의 딸이에요. 그리고 칭기즈칸의 증손녀, 몽골제국 내에서 충렬왕의 서열이 높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카안을 선출할 때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에 쿠릴타이라고 부르는 회의를 소집하는데 충렬왕도 쿠릴타이에 참석할 수 있는 일원이 되는 거죠. 엄연한 몽골황실의 일원이 되고 그래서 기록을 보면 황제가 마련한 연회에서 7위 서열에 앉았다 그리고 그 공주 곁에는 감히 대등하게 앉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로까지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허준: 그런데 7위라면은 현대국가를 생각을 해도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그리고 다섯번째가 국무총리고 여섯번째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거든요.
이시원: 일곱번째는?
허준: 여당 대표,
최태성: 쿠빌라이의 사위로서 충렬왕 개인의 지위뿐만 아니라 고려도 거기에 걸 맞는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잖아요. 저렇게까지 올라갔는데 기록에 보면 고려에 굉장한 흉년이 왔을 때 원나라에서 강남(江南)미 10만석을 보냈다 라는 기록이 있어요. 실제로 쿠빌라이가 뭐라고 얘기 했느냐면 지금 짐은 고려를 일가(一家)처럼 여긴다. 우리 집안으로 본다. 고려의 어려움이 있다면 어찌 짐이 고려를 구하지 않겠는가.
이익주: 그래서 충렬왕을 위해서 변명을 하자면 스스로 변발까지 해가며 충렬왕은 무엇을 얻었을까. 그래서 부마의 지위를 이용해 고려의 국왕의 지위를 높이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몽골에서 고려로 사신이 왔을 때 이 사신이 대할 때는 몽골의 부마로서 대해요. 그러면 사신들이 자기 황제의 부마인데 그리고 외교에서 실리를 추구하는데 아주 유명한 담판이에요. 충렬왕이 즉위 4년만에 직접 원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납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요구해서 관철시키는데 첫번째가 뭐냐 하면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을 모두 철수시켜라. 이래서 이걸 허락을 받아요.
이시원: 소득이 있네요.
이익주: 그리고 또 있어요. 다루가치라는게 있어요.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서 파견했던 관리, 이것도 군대와 같이 왔는데~ 다루가치도 이제 소환해라. 부마로서 이렇게 할 말은 다 하는 거에요. 또 있어요. 호구조사, 고려에서 호구조사 한 것을 내놔라. 이게 전까지 몽골에서 요구한 거거든요. 이건 세금을 걷을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이걸 이제 보고하지 않기로 이때 담판을 벌려요.
최원정: 세금문제 내정간섭문제 몽골군 주둔문제 굵직 굵직한 사안들을 해결했네요.
허준: 내가 숫자 얘기해 줄 테니까 그냥 그거 믿어 이런 거잖아요.
이익주: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게 고려라는 국가가 없어진 건 아니다 그 나라의 국왕이 바로 나고 고려의 일은 국왕인 나에게 맡겨라. 그리고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 나는 들어줄 수 없다 이렇게 까지 아주 못을 박아버려요.
최원정: 지난 편을 계속 봤을 때는 몽골군에게 저항하면 멸족을 당했잖아요. 그거에 비하면 이건정말 대단한 외교의 승리에요.
권용철: 고려의 특수한 지위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어요. 나중에 원나라 황제인 무종이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社稷)을 보유하고 왕위를 누리고 있는 자는 오직 삼한뿐이다. 여기서 삼한은 고려를 일컫는 것이죠. 즉 그 강대한 몽골 제국을 상대로 고려가 나름대로 국가를 유지하면서 독립성을 지킬려고 노력했다 하는 점이 원나라 황제의 말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허준: 몽골에 굴복한 고려를 비굴하고 자존심 상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전 몽골편을 보면 몽골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동물 울음소리, 누굴 추모하는 울음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고 다시는 문명을 복구 못한 나라가 수두룩한데 고려는 그대로 살아남았고 후손들도 이어서 나라를 지켜왔다는 거잖아요.
-----------------응애~ 응애~---------------
최태성: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이시원: 애기 울음 소리?
최태성: 충렬왕과 제국대장 공주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게 아들입니다.
이시원: 매는 맞으면서도 애는 만들었나 봐요?
최태성; 그런데 이 아들이 누구인가면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 그리고 칭기즈칸의 고손자!
이시원: 이건 금수저가 아니고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거에요.
최태성: 그렇죠, 그의 이름이 바로 왕원(王願), 몽골식 이름은 이질부카인데요. 바로 이가 충렬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는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참 보기 드문 혼혈왕자라고 볼 수 있겠죠.
이익주: 이 세자 왕원은 네살 때 1278년에 처음 원 나라에 가요. 그때는 한번 다녀온 거죠. 그리고 18살에 1292년에 원에 숙위로 갑니다. 그리고 원에서 생활하면서 일이 있으면 고려를 다녀가는 이런 생활을 하다가 24살 때까지 원에서 계속 생활을 합니다. 그때가 원의 쿠빌라이의 전성기 때에요.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원의 가장 전성기를 목격하게 되는 거죠.
최태성: 쿠빌라이를 비롯해서 원 황실, 어른 들이 충선왕을 그렇게 귀여워하고 예뻐했대요. 이질부카 라는 이름도 몽골에 갔을 때 거기 태자비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허준: 우리가 그냥 흔히 생각해도 어렸을 적 생각하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특히나 많이 사랑 해주시거든요
최태성: 그러니까요,
허준: 저는 이쯤되면 슬슬 한두 대만 지나면 몽골제국 대칸 노려볼만~
일동: 웃음~
허준: 고려가 대칸을 차지하면~
최원정: 아니 그전에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사위이기 때문에 서열 7위였잖아요. 그런데 이제 왕원은 쿠빌라이의 피가 섞인 사람이니 서열이 얼마나 높았겠어요.
이익주: 이 왕원 고려 세자가 결혼을 하는데 상대가 누구냐 하면 이게 굉장히 몽골 황실 족보에서 직계예요. 노른 자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쿠빌라이의 둘쩨 아들, 친킴이라는 사람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일찍 죽었어요. 그 친킴의 맏 아들의 딸, 결혼한 공주의 이름이 부다시리고 한자로 계국대장 공주 (薊國大長 公主), 이렇게 해서 쿠빌라이의 외손자 더하기 몽골 황실의 부마,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게 되는 거죠.
허준: 조금만 더 있으면~
최원정: 가자~ 카안~ 아무튼 몽골에서는 고려에서도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존재, 귀한 royal family 인건 분명하네요. 그런데 몽골제국에서는 양국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해설: 몽골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5대 카안 쿠빌라이가 1294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쿠빌라이 사망전 그의 아들들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몽골제국의 6대 카안으로 쿠빌라이의 손자인 테무르, 원 성종이 즉위한다. 원의 새 황제 성종 테무르의 즉위는 고려 왕실에 거대한 변화를 초래한다.
최원정: 쿠빌라이가 죽고 손자가 즉위하네요. 어쩌면 아들들이 다 그렇게 세상을 떠요.
권용철: 쿠빌라이가 굉장히 오래 산 거죠. 팔순 딱 돼서 죽었으니까
최태성: 조선의 영조 같은 분이시네~
이익주: 고구려의 장수왕 같은~
권용철: 그래서 후계자가 될만한 아들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결국 손자가 후계자가 됩니다. 그 사람이 테무르, 몽골식 이름이 테무르이구요. 원나라 성종은 중국식 칭호이구요. 이제 칭기즈칸의 여러 후손들의 내분,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쿠빌라이가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일본 원정은 이제 그만 중지 선언을 하면서 국내 국외적으로 평화를 이루는 황제로 기억을 하면은 됩니다.
허준: 얼굴도 그렇고 평화롭고 태평성대를 이룰 것처럼 생겼어요.
최원정: (허준씨를 향해) 비슷해 보이네~
일동: 옷 색갈도 그렇고 혹시 원 성종의 환생?
이익주: 머리만 좀 깎으시면~
최원정: 실제 왕원은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잔뜩 받고 있고 그러니까 사촌형이 원의 황제가 된 거잖아요. 상황이 좀 바뀌는 건가요?
최태성: 이제 원나라의 성종 테무르와는 사촌입니다. 성종은 즉위 후 고려 세자 왕원을 고려로 돌려보내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어마 어마한 관직을 만들어가지고 보내게 됩니다. 원래 고려 최고 관직은 판사(判事)였어요. 그런데 판사말고 그 위에 다가 영사 라는 관직을 만들었어요. 이 영사를 바로 세자 왕원에게 주어가지고 보내는 거에요.
이익주: 관직을 주는데 판사 위에 영사 라는 걸 만들잖아요. 그런데 도첨의사사 영사(領事)는 일 안 하는 명예직이에요. 너 이만큼 높인 이것만 그냥 주는 건데 세자가 와가지고는 실제로 내가 영사야 하고 출근을 해요. 도첨의사사로 진짜 일을 합니다. 국왕 충렬왕의 역할과 지위가 위협을 받게 되죠.
최태성: 묘한 상황이네~
이익주: 더군다나 가장 든든한 후원자 쿠빌라이가 죽었잖아요.
이시원: 끈 떨어졌어~
이익주: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 있었는데 3년후 충렬왕 부인 쿠틀룩켈미쉬 제국대장 공주가 죽어요.
이시원: 뒷배가 다 사라진 왕이 되어버렸네요.
이익주: 충렬왕은 원 황실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거에요. 게다가 새로 황제가 된 테무르 원 성종하고는 관계가 서먹서먹 했어요. 일단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때 성종이 즉위할 때 1294년 30세인데 충렬왕은 무려 59살이에요.
이시원: 서열로는 고모부뻘인데~
이익주: 나이만 고모부이고 부담스럽죠
최원정: 게다가 피 한 방울도 안 섞였는데~
이익주: 이 상황에서 충렬왕이 고려 국왕의 본능이 발동하죠. 내 지위를 이용해서 외교적인 실리를 취하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충렬왕이 조카(원 성종) 한테 가서 몇 가지 요구를 합니다. 탐라 (제주도)가 삼별초 항쟁 이후로 원이 지배를 하고 있었거든요. 이걸 돌려달라~ 그래서 탐라를 돌려 받아요. 실제로 돌려 받아요. 그리고 요동에 가서 살고 있는 고려 사람들을 고려로 돌려 줘야지 왜 안 돌려주느냐 이거 요구하고 또 한 가지 나한테 관직을 높여 주어야겠는데 태사 중서령~ 이게 당시 원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에요. 이걸 지목을 해서 이 관직을 나한테 줘야 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요구를 한 거에요.
이시원: 카안의 입장에서는 고모부가 요구하니까 어쩔 수 없이 들어주기는 하는데 굉장히 불편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나이 많은 외국인 고모부가 자꾸 이것 저것 요구하면~ 이거 달라 지는데~
이익주: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요구까지 해오니까 원 성종이 결심을 해요. 고려 국왕을 바꿔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돼죠.
최태성: 그 전에 왕을 교체하겠다는 시나리오가 짜진 거잖아요. 이런 걸 할 수 있는 계기가 1297년 제국대장 공주가 죽게 됩니다. 이러자 세자 왕원이 작전을 펼치는 거에요.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난 이후에 바로 당시 아버지 충렬왕이 총애했던 무비(無比)가 있습니다. 무비를 처형시킵니다. 바로 어머니 제국대장 공주의 죽음은 이 무비 때문이다. 뭐로 엮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무비 뿐만이 아니라 충렬왕의 수족들을 모두 제거하거나 귀양을 보내버립니다. 이렇게 되니까 당시 충렬왕이 63세 였거든요. 내 아들 충선왕에 의해 이렇게 가는 구나! 환멸을 느끼면서 네가 왕 해라 하고 충선왕에게 양위를 합니다.
허준: 이건 제국의 끈 싸움이에요. 끈 떨어지자 바로 뒤집힌 것이잖아요.
권용철: 그렇죠, 고려 제국에서 원 제국에 양위를 요청하게 되면 원 나라 쪽에서 당연히 왜 그래? 살펴보고 조사도 해보고 당연히 절차가 필요했을텐데~ 그때 아무 조사도 없이 수락을 하게 됩니다. 그런 걸 보면 충렬왕의 양위가 원나라 조정 측에서는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게 아니냐
이익주: 충렬왕이 자기 뜻으로 양위를 한 거는 분명히 아니에요.
최태성: 진짜 이렇게 돼서 아버지 충렬왕은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의 아들 고려 26대 충선왕이 24세에 1298년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이시원: 꽃 길만 있을 것 같은데~
최태성: 그렇죠, 그런데 24살 꽃 길 위에 올라온 이 충선왕이 8개월만에 폐위당합니다.
최원정: 8년이 아니라 8개월이요?
최태성: 기록에 의하면 몽골 계국대장 공주와 혼인한 충선왕이 부부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라고 해서 폐위당하였다고 합니다.
최원정: 충선왕으로서는 사위로서 역할을 잘 해야 권력이 유지될텐데~부부의 도리를 어떻게 든지 이어가야 되는 거 아닌가요?
최태성: 충선왕이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하기 전에 4명의 부인이 있었어요. 그 중에서 누구를 좋아했느냐면 조비(趙妃)를 너무 좋아한 거에요. 그러니까 계국대장 공주가 질투가 난 거죠. 일러요. 원 태후에게! 나 정말 열 받았어요. 여기에 조비란 여자가 나를 저주하기 때문에 왕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라는 편지를 씁니다. 원 나라 왕실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허준: 공주가 직계 여식인데요.
최태성: 그러니까요, 조비 뿐만 아니라 일가족이 모두 원으로 압송되어 갑니다. 사신이 와서 충선왕의 옥쇄를 뺏어가지고 충렬왕에게 건네 주어버려요.
허준: 차라리 골치 아픈 고모부가 낫다.
이시원: 근데 몽골공주 파워 쎄다. 이게 어떻게 보면 서신 하나에 고려 왕위가 왔다 갔다 하네요.
이익주: 충선왕 폐위의 표면적 원인은 조비 사건인데 사실은 좀 더 정치적인 이유가 있죠. 충선왕이 즉위한 다음에 가장 먼저 한 것이 아버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처형합니다. 정치적으로 부패했다는 이유죠. 그리고 고려의 정치제도를 다 바꿔요. 문제는 이걸 전부 원과 상의를 안 한 거예요. 원에서 볼 때는 충선왕이 뭔가를 하는데 너무 독단적이다. 그러니까 불안한 충선왕 보다는 예측 가능한 충렬왕이 고려 왕으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을 했다고 봐요.
최원정: 충선왕이 즉위 8개월만에 폐위가 되고 원으로 소환되잖아요. 그 이후 10년간 원 나라에 계속 머무르죠? 그런데 그곳에서 또 한번 양국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광용: 1307년 원 나라의 수도인 대도에서는 몽골판 사랑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 세 명은 원나라의 황제인 성종, 그리고 그의 아내인 황후 불루간, 나머지 한 명은 성종의 형수인 다기였습니다. 성종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 속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둘째 형이 죽은 뒤로 혼자 남겨진 다기 형수가 자꾸 눈에 밟히고 마음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몽골 유목사회에서는 연하의 친족이 죽은 형이나 아버지가 숙부의 아내를 취한 수혼제 라는 게 있었습니다.
최태성: 옛날 고구려의 형사취수제와 비슷하네요.
이광용: 이 초원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혼자가 된 여성이 가정을 꾸려간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그래서 수혼제가 있었던 거에요. 하지만 수혼제가 있어도 절대 안돼!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누구였을까요? 성종의 아내인 불루간 황후였습니다. 때 마침 병약한 성종이 몸져 눕자 불루간은 이때 실권을 장악하고 다기와 그의 둘째 아들을 멀리 유배를 보냅니다.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불루간과 다기의 갈등! 이들 사이에 또 한 남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바로 11년전에 폐위됐던 고려의 전왕 충선왕이었던 것이다.
일동: 충선왕이 왜 거기서 나와?
이광용: 몽골판 사랑과 전쟁,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찌될 것인가?
최원정: 원 황실에서 펼쳐진 사랑과 전쟁,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충선왕, 원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익주: 사료에 있는 걸 저렇게 얘기하니까 정말 막장이네요. 사료를 읽을 때는 그런 느낌까지는 없었어요. 원 황제 테무르 성종과 불루간 황후 부부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어요. 있었는데 일찍 죽었습니다. 후계자가 없어요. 형수 다기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가 있어요. 지금 얘기한대로 성종이 아프니까 불루간 황후가 섭정을 하면서 둘째 아들 아유르바르와다를 멀리 유배를 보냅니다. 첫째 아들 카이샨은 이미 그 전에 군대를 이끌고 멀리 가 있었어요 다 먼 곳으로 쫓아내다시피한 상태에서 1307년 성종이 죽습니다. 이때부터 치열한 카안위의 쟁탈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차기 카안 유력 후보로 3명이 떠오르게 됩니다. 한 사람은 불루간 황후가 지지하고 있었던 성종 사촌 아난다, 나머지 두 사람은 다기의 두 아들 장남 카이샨과 차남 아유바르와다 입니다. 이 세 사람인데요. 먼저 기선을 제압했던 사람이 아유르바르와다였습니다. 아유르바르와다가 1307년 3월 궁정에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불루간 황후가 지지했던 아난다를 사로 잡아서 숙청해 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 두 명 중에서 황제 카안이 되어야 하는건데~ 사실 이렇게 되면 형제간에 싸움이 터질뻔한 상황이 되었는데 극적으로 협상을 해서 카이샨 이라는 형이 즉위를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원나라 7대 황제 무종입니다.
이시원: 그래서 충선왕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한 거에요?
최태성: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충선왕은 원으로 가서 숙위한 것이 무릇 10년이었다.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충선왕과 함께 같이 자고 일어났으며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완전절친~, 인종을 받들어 내란을 일소하고 무종(카이샨)을 환영하여 옹립했는데 그 공을 제일로 삼아 충선왕은 심양왕(瀋陽王)에 책봉되었다. 인종이 황태자가 되고 충선왕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삼았다. 즉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기록에 보면 무종과 인종의 즉위에 어떤 식으로 든 역할을 했다는 거에요.
허준: 이거 평행이론이잖아요. 쿠빌라이가 고려 원종을 만나서 쿠빌라이 카안 즉위에 도움을 주었는데 지금은 마찬가지로 고려 충선왕이 킹 메이커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
최원정: 저는 아까 충선왕이 갑자기 등장했다고 격앙되게 얘기를 해서 충선왕이랑 다기가 자기 사이가 된 줄 알았는데~ 굉장히 치열한 황위 다툼문제에~
권용철: 훨씬 더 깊숙한 정치에 개입하게 돼죠.
이시원: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 사이에서 충선왕이 중재역활을?
권용철: 그런 추론도 가능하고요. 또 하나 추론은 아까 아유르바르와다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잖아요. 그때 충선왕이 직접 참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같이 숙위를 하고 카안을 호위하고 그런 사이였으니까 황위 쟁탈전이 극심한 대립이었죠. 충선왕이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황위계승 전쟁에 뛰어든게 아니냐 그 공을 인정 받아서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요양, 심양지역을 통치하게 되는 심양왕에 책봉됩니다.
이익주: 당시 심양은 현재의 심양보다 더 넓은 지역이에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러니까 심양왕도 높은 직위인데 1308년 7월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이 죽어요. 그러니까 고려왕이 또 되는 거지요.
이시원; 겸직을 하게 되는 건가요?
이익주: 그렇죠, 심양왕이면서 또 고려왕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에 있을까~ 심양에 가 있을까 아니면 원의 수도 대도에 가 있을까 아니면 고려 개경에 가 있을까?
최태성: 세 군대를 순회해야 돼요.
이익주: 이 가운데서 충선왕은 원의 수도에 있는 것을 택합니다.
이시원: 왜요?
이익주: 원의 수도 대도는 권력의 원천이거든요. 자기 모든 권력의 원천이 몽골 황실에서 일어난 내전을 정리하면서 황제로부터 신임받는 데서 온 것이니까 거길 떠날 수가 없죠. 심양왕은 원래 가 있을 곳도 아니고 거기에서 필요한 것만 받아내면 되는 것이고 문제는 고려인데, 고려왕이 고려에 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비대면 원격통치를 합니다.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에게 전지라고 해가지고 글을 보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해 가면서 정치를 하죠. 나중에는 다 이상하잖아요. 둘 중의 하나는 내 놔라는 이런 이야기가 원에서 나와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심양왕을 내놓고 고려로 돌아가기를 바랐거든요. 그런데 뜻 밖에도 나 고려왕을 그만둘래~
최원정: 심양왕을 취하고 고려왕을 그만두겠다고요?
이익주: 네, 심양왕을 취하고 고려왕을 포기합니다. 대신 아들을 고려왕에 세워놓고 뒤에서 조종을 해요.
일동; 영리하다. 심양왕, 고려왕, 둘 다 놓치지 않겠다!
이익주: 둘 다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또 실제로 하는 일은 대도에서 원의 정치에 개입을 하는 거에요. 원에 과거제도 라는 게 있는데 이걸 시행하면 좋습니다. 해서 과거제를 시행하게 하고~
이시원: 그게 영특한 사람이네요.
허준: 원 간섭기가 아니라 몽골에 고려 간섭기에요. 고려에 의해서 지금 많은게 움직이고 있어요!
최태성: 교수님, 너무 당황해 하시는 데~
이익주: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할까봐 너무 걱정돼요. 그리고 만권당이라는 걸 설치하는데 당대에 유명한 학자들이 여기로 몰려들어요. 뭐냐하면 고려의 국왕이 한(漢)족 학자가 몽골 조정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원 나라 안에서 충선왕이 자기의 자리를 굉장히 넓혀나가죠. 충선왕이 고려인이야 몽골사람이야 이런 의문이 들거든요
이시원: 다국적 왕!
이익주: 맞아요, 다국적 자기 정체성을 가진 충선왕, 그런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고려왕이라고 하는 자기 자리를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래서 표현에 우리나라 라는 표현도 하고 우리 태조께서 라는 말도 하고 왜 우리나라는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가 없나 이런 질문도 하고 고려의 문제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고 고려에서 개혁정치를 또 한번 해요. 그러니까 고려 국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라는 것 만큼은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는 거죠.
최원정: 원나라는 무종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고려의 왕 이름도 많이 나오면서 도대체 나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이시원: 궁금한 게 우리나라 학생들은 태정태세 문단세~ 이렇게 하면서 왕 이름을 외우잖아요. 그러면 몽골사 공부하셨으면 왕 이름을 외우는 방법이 있나요?
권용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고요. 그냥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중국식 칭호+ 몽골 이름~
태조(太祖) 칭기즈칸- 태종(太宗) 우구데이- 정종(定宗) 구육- 헌종(憲宗) 뭉케- 세조(世祖) 쿠빌라이- 성종(成宗) 테무르- 무종(武宗) 카이샨- 인종(仁宗) 아유르바르와다- 영종 (英宗) 시데발라- 태정제 (泰定帝) 이순 테무르- 문종(文宗) 특 테무르- 명종 (明宗) 코실라- 다시 문종(文宗) 톡 테무르- 영종 (寧宗) 이린친발- 혜종(惠宗) (순제) 토곤 테무르 여기 까지 입니다.
일동: 박수! 역시 몽골사 박사!
최태성; (묘호+이름) 두배로 힘든 건데~ 사실 외우기 쉽지 않은건데~
이시원: 그런데 지금 쭉 들어보니까 우리 지금 초반만 배운 거네요. 그 후 얘기가 많이 남았네요.
권용철: 그렇죠, 후반 얘기들이 많이 남아 있죠.
허준: 여기 역사가 이렇게 긴지 처음 알았어요.
최원정: 지금 무종 시대인데 그 이후의 원나라는 어떻게 흘러가는 건가요?
권용철: 무종이 즉위하고 나서 4년만에 31세 나이로 갑자기 죽습니다. 30대 초반에 갑자기 죽고 그리고 1311년에 인종이 즉위를 합니다. 그런데 아까 어떤 협상이 이루어졌냐면 무종이 자기 동생을 황태자로 삼아서 다음 재위를 물려주고 그러면 동생이 인종이 된 거죠. 인종 너는 내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라는 조건을 내겁니다. 번갈아 가면서 해야 된다는 약속을 맺었는데 인종이 그걸 지키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게 돼죠.
허준: 이쯤 되면 무종도 그냥 죽은 것 같지 않은데~?
권용철: 맞아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무종 급사 관련해서 독살 의혹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인 영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되고 그 다음에 영종은 또 반대세력에 의해서 암살을 당합니다. 일에 굉장히 복잡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데요.
이시원: 황제 자리를 놓고 암투가 반복되는 원나라~
권용철: 아까 읊었던 그 순서에서 무종의 즉위부터 혜종의 토곤 테무라가 즉위할 때까지 기간이 약26년 밖에 안 됩니다. 그 사이에 등장한 황제가 7명입니다.
최태성: 죽고 죽이는~
권용철: 정치적으로는 너무 분열이 심하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의 요소가 되면서 원나라가 조금씩 내리막 길로 접어들게 돼죠.
최원정: 오늘 아무튼 몽골 제국과 고려 왕실의 혼인을 시작으로 해서 몽골 역사와 함께 맞물려 있는 우리 고려 역사를 들여다 보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애요.
이시원; 그리고 저는 고려의 왕들, 왕들의 부부관계를 들여다 보면서 솔직히 말해서 왕들이 불쌍했어요. 나라를 위해서 신분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사랑 없는 결혼이 얼마나 힘든가 부부의 도리도 충실히 못하게 되고 매도 맞고 그런 것 보다는 저 처럼 편안한 결혼생활이 낫지 않나?
최원정: 시원씨는 아까부터 보니까 굉장히 로맨스를 꿈꾸는 아직까지 젊은 영혼의 소유자예요.
이시원: 제 인생에 만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동: 폭소!
이익주: 역사 공부는 정말 이익이 많은 공부입니다.
최태성: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이시원: 왕이면 뭐해~ 황제의 딸이면 뭐해~ 평범한 게 최고구나~
권용철: 고려 후기의 정치가 몽골 제국하고 뗄래야 뗄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하게 되었구요. 여기서 들어나는 이중성 이라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 왔습니다. 고려가 몽골 제국의 부마가 되면서 왕실의 권위도 회복했고 더 중요한 건 국체를 지킬 수 있었다 라고 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 또 왕위가 몽골 제국에 의해서 마음대로 교체가 되어 버리는 상황 등은 몽골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구나 이렇게 몽골 중심의 세계 질서에 고려가 지금 자의반 타의반 포함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몽골 제국이 붕괴하게 되면 고려도 큰 변동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라는 걸 우리가 예측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익주: 오늘 몽골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흐름 속에서 그러면 고려는? 이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거죠. 이것은 그냥 고려사를 공부할 때 하고는 또 다른 관점에서 고려를 보는 거에요. 그러니까 마치 안에서 보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이런 식으로 모든 한국의 역사를 세계 속에서 한국사로 볼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는 이랬어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공부를 하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제는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알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최원정: 세계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 몽골 제국의 역사, 다음 사간에 마지막 편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32회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제국 [제6편] 고려와 사돈 맺다에서 정리).
① 몽골 제국 5대 카안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바꾸고 남송 정벌에 이어 바다 건너 일본으로 눈길을 돌린다. 쿠빌라이는 1차 일본 원정에 앞서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고려의 태자를 사위로 맞이하기로 한 것, 고려와 몽골 황실 최초의 혼인, 이는 두 나라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274년 5월, 원(元) 나라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몽골 제국 5대 카안 쿠빌라이의 딸, 16살 소녀 쿠틀룩켈미쉬 공주의 결혼식이었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의 금지옥엽, 쿠빌라이 카안의 사위가 된 이 남자는 바로 고려의 태자 왕심(王諶) (훗날 고려 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 이다, 그런데 당시 왕심은 1남2녀를 슬하에 둔 무려 39살의 유부남이었다. 프로포즈는 고려에서 먼저 했다. 그 당시 고려의 왕권이 불안했다. 무신 집권기였고 임연이란 사람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종폐위 사건-1269년 6월, 고려 무신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옹립한 사건). 그때 마침 태자 왕심은 몽골에 있었다 (원에 머물던 고려 원종의 태자 왕심), 쿠빌라이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고려에서 큰 사건이 있었다 (태자 왕심-쿠빌라이에게 고려 원종의 폐위 소식을 알림), 쿠빌라이가 임연에게 압력을 넣어서 고려 원종을 복위시키자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달려간다. 나에게 군대를 주면 고려의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오겠다. 그것과 동시에 청혼을 한다. 내 아들이 있으니 당신 딸과 결혼시킵시다.
② 청혼을 한 이후에 원종은 태자 왕심을 몽골로 보낸다. 정확히 얘기하면 몽골의 숙위로 들어간 거다. 숙위라고 한다면 몽골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이 황제를 곁에서 지키는 임무를 맡으니까 황제를 자주 볼 수 있겠다. 황제의 측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마치 통과의례처럼 다음 고려 왕위 계승 태자를 몽골로 보내 숙위 생활을 쌓케 했다. 쿠빌라이가 비로소 국혼(國婚)을 허락한다. 뭉케 카안이 죽은 다음에 쿠빌라이도 다음 카안 자리를 노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지금 동생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때 몽골에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던 고려에서 자기 발로 들어왔다.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원종)을 직접 만나 강화 요청을 카안 즉위에 활용한 결과로 정통성이 확보되었다. 나중에 고려에서도 원종이 죽으면서 쿠빌라이가 밀어주었다. 그러니까 서로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도움을 줬던 이런 관계가 적용된 게 아닌가. 서로의 즉위를 도운 원종과 쿠빌라이다. 그 인연이 고려와 몽골의 국혼으로 이어졌다. 둘 다 이제 왕 위에 올랐으니까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③ 당시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생각한다. 일본 원정을 가기 위해서는 고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일본 원정을 위한 파트너를 만들기 위한 측면에서 국혼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때는 남송을 정복하기 전이다. 혹시 고려와 남송의 연합을 사전에 차단 해야한다. 고려 몽골 양 국가의 이해관계가 다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보니 성사될 수 있었다. 이들을 대대로 나와 혼인한 집안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청혼(1270년)해서 결혼식(1274년) 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4년 동안 삼별초 항쟁이 있었다. 그러니까 청혼을 처음 했을 때는 무신정권이 무너지기 전이고 그 다음에 삼별초가 진도 제주도로 가면서 항쟁을 하는데 그게 끝난 다음에 허락을 했다 (삼별초 대몽항쟁 (1270~1273)-원종의 개경환도 명령에 반발하여 삼별초 군대가 일으킨 반정부-반몽골 항쟁), 쿠빌라이는 고려 왕실의 불안 요소가 사라진 후에 허락을 하였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몽골공주와 혼인한 고려왕실, 몽골 제국 대카안의 친딸이 타국인과 결혼은 고려가 처음이다,
④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을 허락 받고 고려 태자는 귀국을 하는데 귀국길이 통곡의 길이라고 한다. 1272년 3월, 쿠빌라이 카안에게 결혼을 허락받고 귀국한 고려 태자 왕심, 그런데 귀국 길에 왕심의 모습을 본 신료와 백성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몽골식 개체변발을 하고 귀국하였다. 앞머리와 좌우머리만 남겨두고 정수리 부분은 완전히 삭발을 했고 그리고 살짝 뒤로 돌아보면 양쪽 귀 뒤에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린 이런 헤어 스타일이었다. 당시 이 같은 태자의 모습을 본 고려의 백성들 엄청난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모두 탄식을 했다. 심지어 통곡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고려사 세가 원종 13년 (1272년) 2월-나라 사람들은 세자의 변발(辯髮)과 오랑캐 옷차림(胡服)을 보고 모두 탄식하였으며 심지어 우는 자도 있었다). 그 만큼 고려 사람들은 몽골 사람에 대한 어떤 거부감, 저항의식이 강했다. 1274년 5월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고려 태자 왕심, 같은해 고려 25대 충렬왕이 된다.
⑤ 태자 왕심은 자신이 몽골 지배층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므로 몽골이 나를 지지하고 후원한다 하는 사실을 고려의 관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려 신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충격적인 저 모습을 연출했던 거다. 태자 왕심의 몽골의 아내 제국대장 공주는 원래의 이름은 쿠틀룩켈미쉬, 우리 한테는 제국대장공주가 익숙하다. 제국대장 공주라는 호칭은 죽고나서 쿠틀룩켈미쉬의 조카였던 원나라의 무종이 내려준 시호로 우리 고모, 대장공주의 칭호가 붙은 것이다. 그 당시 고려에서 가장 힘이 센 여성, 몽골 대칸의 딸이었다. 여기 와 가지고 먼저 있었던 왕심의태자비는 뒷자리로 밀려났다. 쿠틀룩켈미쉬 공주가 와서 아들을 낳았는데 잔치를 하는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제국대장 공주가 내가 여기서 가장 힘센 왕비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아들이 다음 후계자가 되도록 하는 거였다. 여기에도 힘을 썼다. 먼저 부인한테서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은 중을 만들어버렸다 (1279년 충렬왕 첫 부인의 아들을 출가시킨 제국대장 공주).
⑥ 제국대장 공주가 충렬왕 자기 남편하고 어느 사찰엘 갔다. 그런데 시종들의 숫자가 기대보다 적었던 거라 그러니까 제국대장 공주가 열을 받은 거다. 내가 왔는데~내가 떴는데~ 이거 밖에 안 하는 거야 라고 하며 남펀를 지팡이로 때렸다고 한다. 충렬왕이 사냥을 좋아하고 정사를 안 돌보았을 때 여러가지 간언을 하는데 민폐를 끼치니까 사냥을 줄이시라 이런 식으로 국정에 대한 충고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고려에 대한 몽골의 통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고려의 관제였던 2성6부를 첨의부 4사로 격하시키었고 그리고 왕실 용어 중 예를 들면 태자를 세자로, 또는 폐하를 전하로 격하시키게 하였다. 몽골제국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忠자에다 왕이라고 호칭하게 만들었다. 그전에는 무슨 祖나 宗이었다. 태조(1대), 혜종(2대)~~고종(23대) 원종(24대) 다음 이때부터 충렬왕(25) 충선왕(26) 충숙왕(27) 충혜왕(28) 충목왕(29) 충정왕(30) 이런 식으로 한 단계 격하시켰다.
⑦ 고려 충렬왕은 당연히 몽골 황실의 사위로서 위상의 변화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황실의 사위 부마라고 부른다. 부마의 지위는 공주의 혈통으로 결정이 된다. 제국대장 공주는 대카안 쿠빌라이의 딸이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증손녀, 몽골제국 내에서 충렬왕의 서열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카안을 선출할 때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에 쿠릴타이라고 부르는 회의를 소집하는데 충렬왕도 쿠릴타이에 참석할 수 있는 일원이 되었다. 엄연한 몽골황실의 일원이 되고 기록을 보면 황제가 마련한 연회에서 7위 서열에 앉았다 그리고 그 공주 곁에는 감히 대등하게 앉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로까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7위라면은 현대국가를 생각을 해도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그리고 다섯번째가 국무총리고 여섯번째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다. 일곱번째는 여당 대표, 쿠빌라이의 사위로서 충렬왕 개인의 지위뿐만 아니라 고려도 거기에 걸 맞는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저렇게까지 올라갔는데 기록에 보면 고려에 굉장한 흉년이 왔을 때 원나라에서 강남(江南)미 10만석을 보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가 뭐라고 얘기 했느냐면 지금 짐은 고려를 일가(一家)처럼 여긴다. 우리 집안으로 본다. 고려의 어려움이 있다면 어찌 짐이 고려를 구하지 않겠는가. 태자 왕심이 고려로 귀국할 때 스스로 변발까지 한 것은 몽골 제국의 부마의 지위를 이용해 고려의 국왕의 지위를 높이려고 한 것, 가장 먼저 몽골에서 고려로 사신이 왔을 때 이 사신이 고려의 왕을 대할 때는 몽골의 부마로서 대하였다. 충렬왕이 외교에서 실리를 추구하는데 아주 유명한 담판이 있다. 충렬왕이 즉위 4년만에 직접 원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났다. 여기서 몇 가지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는데 첫번째가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을 모두 철수시켜라. 이걸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서 파견했던 관리 다루가치를 소환해라, 이것도 허락을 받아냈고, 부마로서 할 말은 다 하였다. 고려에서 세금을 걷을려고 호구조사 한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제 이걸 보고하지 않기로 이때 담판을 벌렸다. 세금문제 내정간섭문제 몽골군 주둔문제 굵직 굵직한 사안들을 해결했다. 가장 중요한 게 고려라는 국가가 없어진 건 아니다 그 나라의 국왕이 바로 나고 고려의 일은 국왕인 나에게 맡겨라. 그리고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 나는 들어줄 수 없다 이렇게 까지 아주 못을 박아버렸다.
⑧ 13세기 몽골군에게 저항하면 멸족을 당했다. 그런데 고려는 살아남았다. 고려의 특수한 지위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나중에 원나라 황제인 무종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社稷)을 보유하고 왕위를 누리고 있는 자는 오직 삼한뿐이다. 여기서 삼한은 고려를 일컫는 것이다. 즉 그 강대한 몽골 제국을 상대로 고려가 나름대로 국가를 유지하면서 독립성을 지킬려고 노력했다 하는 점이 원나라 황제의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몽골에 굴복한 고려를 비굴하고 자존심 상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몽골편을 보면 몽골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동물 울음소리, 누굴 추모하는 울음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고 다시는 문명을 복구 못한 나라가 수두룩한데 고려는 그대로 살아남았고 후손들도 이어서 나라를 지켜왔다. 충렬왕과 제국대장 공주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게 아들이다. 이 아들이 누구인가면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 그리고 칭기즈칸의 고손자다. 그의 이름이 바로 왕원(王願), 몽골식 이름은 이질부카다. 이가 바로 충렬왕의 뒤를 이은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혼혈왕자다. 세자 왕원은 네살 때 1278년에 처음 원 나라에 간다. 그때 한번 다녀왔다. 그리고 18살에 1292년에 원에 숙위로 간다. 그리고 원에서 생활하면서 일이 있으면 고려를 다녀가는 생활을 하다가 24살 때까지 원에서 계속 생활을 한다. 그때가 원의 쿠빌라이의 전성기 때다. 어린 시절에 원의 가장 전성기를 목격하게 되었다. 쿠빌라이를 비롯해서 원 황실, 어른 들이 충선왕을 그렇게 귀여워하고 예뻐했다. 이질부카 라는 이름도 몽골에 갔을 때 거기 태자비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사위이기 때문에 서열 7위였다. 그런데 이제 왕원은 쿠빌라이의 피가 섞인 사람이니 서열이 높았다.
⑨ 왕원 고려 세자가 결혼을 하는데 상대는 몽골 황실 족보에서 직계다. 노른 자위에 있는 사람, 쿠빌라이의 둘쩨 아들, 친킴이라는 사람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일찍 죽었다. 그 친킴의 맏 아들의 딸, 결혼한 공주의 이름이 부다시리고 한자로 계국대장 공주 (薊國大長 公主), 왕원 이질부카는 쿠빌라이의 외손자 더하기 몽골 황실의 부마,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아무튼 몽골에서도 고려에서도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존재, 귀한 royal family 인건 분명하다. 그런데 몽골제국에서는 양국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몽골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5대 카안 쿠빌라이가 1294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쿠빌라이 사망전 그의 아들들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몽골제국의 6대 카안으로 쿠빌라이의 손자인 테무르, 원 성종이 즉위한다. 원의 새 황제 성종 테무르의 즉위는 고려 왕실에 거대한 변화를 초래한다. 쿠빌라이가 죽고 손자가 즉위한다. 쿠빌라이가 오래 산 거다. 팔순 돼서 죽었으니까
⑩ 쿠빌라이는 아들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손자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 사람이 테무르, 몽골식 이름이 테무르이고, 원나라 성종은 중국식 칭호이다. 원 성종은 칭기즈칸의 여러 후손들의 내분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쿠빌라이가 하고 싶어했던 일본 원정은 중지 선언을 하면서 국내 국외적으로 평화를 이룬다. 실제 왕원은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잔뜩 받았고 사촌형이 원의 황제가 된 거다. 이제 원나라의 성종 테무르와는 사촌이다. 성종은 즉위 후 고려 세자 왕원을 고려로 돌려보내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어마 어마한 관직을 만들어가지고 보냈다. 원래 고려 최고 관직은 판사(判事)였다. 그런데 판사말고 그 위에 영사 라는 관직을 만들었다. 이 영사를 바로 세자 왕원에게 주어가지고 보냈다. 그런데 도첨의사사 영사(領事)는 일 안 하는 명예직이다. 그런데 세자가 와서는 실제로 내가 영사야 하고 출근을 해서 진짜 일을 하였다. 국왕 충렬왕의 역할과 지위가 위협을 받는다. 충렬왕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 쿠빌라이가 죽었고 3년후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부인 쿠틀룩켈미쉬 제국대장 공주마저 죽었다. 충렬왕과 원 황실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거다. 게다가 새로 황제가 된 테무르 원 성종하고는 관계가 서먹서먹 했다. 일단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그때 성종이 즉위할 때 1294년 30세인데 충렬왕은 무려 59살이었다. 서열로는 고모부뻘인데~ 나이만 고모부이고 부담스럽다. 게다가 피 한 방울도 안 섞였다.
⑪ 이 상황에서 충렬왕이 고려 국왕의 본능이 발동하였다. 내 지위를 이용해서 외교적인 실리를 취하겠다. 충렬왕이 조카(원 성종) 한테 가서 몇 가지 요구를 하였다. 탐라 (제주도)가 삼별초 항쟁 이후로 원이 지배를 하고 있었는데 이걸 돌려달라~ 실제로 돌려 받았다. 그리고 요동에 가서 살고 있는 고려 사람들을 고려로 돌려 줘야지 왜 안 돌려주느냐 이거 요구하고 또 한 가지 나한테 관직을 높여 주어야겠다. 태사 중서령이 당시 원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는데 이걸 지목 해서 이 관직을 나한테 줘야겠다 이렇게 요구를 하였다. 카안의 입장에서는 고모부가 요구하니까 어쩔 수 없이 들어주기는 하는데 굉장히 불편했을 것이다. 나이 많은 외국인 고모부가 자꾸 이것 저것 요구하면서 구체적인 요구까지 해오니까 원 성종이 결심을 한다. 고려 국왕을 바꿔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한다. 그 전에 왕을 교체하겠다는 시나리오가 짜지었었다. 이런 걸 할 수 있는 계기가 1297년 제국대장 공주가 죽게 되었다. 이러자 세자 왕원이 작전을 펼친다.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난 이후에 바로 당시 아버지 충렬왕이 총애했던 무비(無比)를 처형시킨다. 바로 어머니 제국대장 공주의 죽음은 이 무비 때문이다 라고 엮어서 처리했다. 무비 뿐만이 아니라 충렬왕의 수족들을 모두 제거하거나 귀양을 보내버렸다. 이렇게 되니까 당시 충렬왕이 63세 였다. 내 아들 충선왕에 의해 이렇게 가는 구나! 환멸을 느끼면서 네가 왕 해라 하고 충선왕에게 양위를 하였다.
⑫ 고려 제국에서 원 제국에 양위를 요청하게 되면 원 나라 쪽에서 당연히 살펴보고 조사도 해보고 당연히 절차가 필요했을텐데~ 그때 아무 조사도 없이 수락을 하였다. 그런 걸 보면 충렬왕의 양위가 원나라 조정 측에서는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게 아니냐. 충렬왕이 자기 뜻으로 양위를 한 거는 분명히 아니었다. 이래서 아버지 충렬왕은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의 아들 고려 26대 충선왕이 24세에 1298년 왕 위에 올랐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다. 이 충선왕이 8개월만에 폐위당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몽골 계국대장 공주와 혼인한 충선왕이 부부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라고 해서 폐위당하였다. 충선왕은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하기 전에 4명의 부인이 있었다. 충선왕은 그 중에서 조비(趙妃)를 너무 좋아하였다. 그러니까 계국대장 공주가 질투가 났고 원 태후에게 나 여기 조비란 여자 때문에 왕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 라는 편지를 썼다. 그래서 조비 뿐만 아니라 일가족이 모두 원으로 압송되어 갔다.
⑬ 몽골사신이 와서 충선왕의 옥쇄를 뺏어가지고 충렬왕에게 건네 주었다. 차라리 골치 아픈 고모부가 낫다. 충선왕 폐위의 표면적 원인은 조비 사건인데 사실은 좀 더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충선왕이 즉위한 다음에 가장 먼저 한 것이 아버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 처형이다. 정치적으로 부패했다는 이유다. 그리고 고려의 정치제도를 다 바꾼다. 문제는 이걸 전부 원과 상의를 안 하였다. 원에서 볼 때는 충선왕이 뭔가를 하는데 너무 독단적이다. 그러니까 불안한 충선왕 보다는 예측 가능한 충렬왕이 고려 왕으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을 했다. 충선왕이 즉위 8개월만에 폐위가 되고 원으로 소환되었다. 그 이후 10년간 원 나라에 계속 머물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 한번 양국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원 황제 테무르 성종과 불루간 황후 부부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후계자가 없다. 형수 다기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다.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가 있다. 지금 얘기한대로 성종이 아프니까 불루간 황후가 섭정을 하면서 둘째 아들 아유르바르와다를 멀리 유배를 보냈다. 첫째 아들 카이샨은 이미 그 전에 군대를 이끌고 멀리 가 있었다 다 먼 곳으로 쫓아내다시피한 상태에서 1307년 성종이 죽었다. 이때부터 치열한 카안위의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차기 카안 유력 후보로 3명이 떠오르게 되었다. 한 사람은 불루간 황후가 지지하고 있었던 성종 사촌 아난다, 나머지 두 사람은 다기의 두 아들 장남 카이샨과 차남 아유르바르와다 이다. 이 세 사람중에서 먼저 기선을 제압했던 사람이 아유르바르와다였다.
⑭ 아유르바르와다가 1307년 3월 궁정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불루간 황후가 지지했던 아난다를 사로 잡아서 숙청해 버렸다. 그러면 이제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 두 명 중에서 황제 카안이 되어야 하는건데~ 사실 이렇게 되면 형제간에 싸움이 터질뻔한 상황이 되었는데 극적으로 협상을 해서 카이샨 이라는 형이 즉위를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원나라 7대 황제 무종이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나와 있다. 충선왕은 원으로 가서 숙위한 것이 무릇 10년이었다.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충선왕과 함께 같이 자고 일어났으며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완전절친~, 인종을 받들어 내란을 일소하고 무종(카이샨)을 환영하여 옹립했는데 그 공을 제일로 삼아 충선왕은 심양왕(瀋陽王)에 책봉되었다. 인종이 황태자가 되고 충선왕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삼았다. 즉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기록에 보면 무종과 인종의 즉위에 어떤 식으로 든 역할을 했다. 이건 쿠빌라이가 고려 원종을 만나서 쿠빌라이 카안 즉위에 도움을 주었는데 지금은 마찬가지로 고려 충선왕이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를 도와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하였다는 추론을 할 수 있고, 또 하나 추론은 아까 아유르바르와다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때 충선왕이 직접 참여했을 수도 있다. 같이 숙위를 하고 카안을 호위하고 그런 사이였으니까 황위 쟁탈전이 극심한 대립이었다. 충선왕이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황위계승 전쟁에 뛰어든게 아니냐 그 공을 인정 받아서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요양, 심양지역을 통치하게 되는 심양왕에 책봉되었다. 심양왕도 높은 직위인데 1308년 7월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이 죽어 충선왕은 또 고려왕이 되었다.
⑮ 그러나 충선왕은 실제로 하는 일은 대도에서 원의 정치에 개입을 하는 거였다. 원에 과거제도 라는 게 있는데 이걸 시행하면 좋다 해서 과거제를 시행하게 하고~ 만권당이라는 걸 설치하는데 당대에 유명한 학자들이 여기로 몰려들어와서 고려의 국왕이 한(漢)족 학자가 몽골 조정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원 나라 안에서 충선왕이 자기의 자리를 굉장히 넓혀나갔다. 충선왕은 다국적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고려왕이라고 하는 자기 자리를 절대로 잊지 않았다. 원나라는 무종의 시대다. 우리 고려의 왕 이름도 많이 나오고 몽골 제국의 황제 이름도 많이나오는데 몽골 왕 이름을 정리해 보면, 중국식 칭호+ 몽골 이름~태조(太祖) 칭기즈칸- 태종(太宗) 우구데이- 정종(定宗) 구육- 헌종(憲宗) 뭉케- 세조(世祖) 쿠빌라이- 성종(成宗) 테무르- 무종(武宗) 카이샨- 인종(仁宗) 아유르바르와다- 영종 (英宗) 시데발라- 태정제 (泰定帝) 이순 테무르- 문종(文宗) 특 테무르- 명종 (明宗) 코실라- 다시 문종(文宗) 톡 테무르- 영종 (寧宗) 이린친발- 혜종(惠宗) (순제) 토곤 테무르 까지이다. 지금 무종 시대인데 그 이후의 원나라는 어떻게 흘러가는 건가. 무종이 즉위하고 나서 4년만에 31세 나이로 갑자기 죽는다. 30대 초반에 갑자기 죽고 그리고 1311년에 인종이 즉위를 한다. 그런데 어떤 협상이 이루어졌냐면 무종이 자기 동생을 황태자로 삼아서 다음 재위를 물려주고 그러면 동생이 인종이 된 거다. 인종 너는 내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라는 조건을 내건다. 번갈아 가면서 해야 된다는 약속을 맺었는데 인종이 그걸 지키지 않았다.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무종 급사 관련해서 독살 의혹이 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인 영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되고 그 다음에 영종은 또 반대세력에 의해서 암살을 당한다. 무종의 즉위부터 혜종의 토곤 테무라가 즉위할 때까지 기간이 약26년이다. 그 사이에 등장한 황제가 7명이다. 정치적으로는 너무 분열이 심하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의 요소가 되면서 원나라가 조금씩 내리막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 아무튼 몽골 제국과 고려 왕실의 혼인을 시작으로 해서 몽골 역사와 함께 맞물려 있는 고려 역사를 들여다 보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고려 후기의 정치가 몽골 제국하고 뗄래야 뗄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들어나는 이중성 이라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 왔다. 고려가 몽골 제국의 부마가 되면서 왕실의 권위도 회복했고 더 중요한 건 국체를 지킬 수 있었다 라고 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 또 왕위가 몽골 제국에 의해서 마음대로 교체가 되어 버리는 상황 등은 몽골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구나 이렇게 몽골 중심의 세계 질서에 고려가 자의반 타의반 포함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몽골 제국이 붕괴하게 되면 고려도 큰 변동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라는 걸 예측해볼 수 있겠다. 몽골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흐름 속에서 그냥 고려사를 공부할 때 하고는 다른 관점에서 고려를 보았다. 그러니까 고려사 안에서 고려를 보는 게 아니라 고려사 바깥에서 고려를 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한국의 역사를 세계 속에서 한국사로 볼 수 있어야 되겠다 이제는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알아야겠다. 세계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 몽골 제국의 역사는 다음 시간에 마지막 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