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온가속기연구소 실험장치부장 이진호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 산소, 철 등의 원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이 질문에 대해 과학자들은 꽤 낭만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별이 죽을 때, 그 안에서 만들어졌어요.” 듣고 나면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실험하고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걸 정말로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 한국에 있다. 바로 대전 유성구 신동에 있는 RAON(Rare isotope Accelerator complex for ON-line experiments)이라는 중이온가속기 시설이다.
RAON의 존재 이유
'라온'은 순우리말로 ‘즐거운’이란 뜻이지만, 과학에서는 "희귀 동위원소(Rare Isotope)를 만들어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거대한 가속기 복합체"라는 의미가 있다. 이 RAON은 말 그대로 한국 미래의 ‘우주 실험실’이라고 불릴 만한 시설이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나라가 만든 미래형 실험 장비들이 매우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희귀 동위원소’라는 것이 있다.
같은 원소이지만 질량이 다른 것을 동위원소라 부르며, 그중에서도 RAON에서 다루는 건, 자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거나 금방 사라져 버리는, 말 그대로 희귀한 동위원소들이다. RAON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 방식의 희귀 동위원소 생성 기술을 함께 갖춘 세계 유일의 시설이라는 점이다. 하나는 ISOL(Isotope Separation On-Line) 방식으로, 높은 에너지의 가벼운 이온을 두꺼운 표적 물질에 충돌시켜 생성된 동위원소를 고순도로 분리해 내는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IF(In-flight Fragmentation) 방식으로, 빠르게 가속된 중이온을 가벼운 원소의 표적에 충돌시켜 조각난 동위원소들을 실시간으로 분리해 내는 기술이다. 이 두 방식을 결합함으로써, 매우 희귀한 동위원소들까지도 실험적으로 생산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왜 이런 불안정한 동위원소들을 어렵게 만들어서까지 연구하여야 할까? 그 답 중 하나가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별 안에서 벌어지는 핵반응, 초신성 폭발, 중성자별 중합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우주의 사건들을 지상에서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 희귀 동위원소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RAON을 구성하는 장치와 활용
RAON은 초전도 가속기와 함께 다양한 에너지 구간의 실험 장치들과 빔 라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 연구시설이다. 아래 <그림 1>은 RAON의 장치 배치를 보여준다. 가운데 좌우로 길게 있는 두 개의 선형 가속기 라인이 RAON의 핵심 가속부인 SCL2와 SCL3이다. 여기서 가속된 희귀 동위원소 빔은 7개의 실험 장치로 전송될 수 있다. 각 실험 장치는 고유한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RAON의 과학적 활용 범위를 넓혀주는 팔과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SCL2/SCL3 Superconducting Linear Accelerator
KoBRA Korea Broad acceptance Recoil spectrometer & Apparatus
NDPS Nuclear Data Production System
MMS Mass Measurement System
LAMPS Large Acceptance Multi-Purpose Spectrometer
CLS Collinear Laser Spectroscopy
BIS Beam Irradiation System
μSr Muon Spin Relaxation/Resonance/Rotation
< 그림 1 > RAON 장치 배치도. ISOL, IF, 초전도 선형가속기 SCL2와 SCL3, 그리고 빔 전송라인으로 연결된 7개의 실험 장치들을 보여줌
KoBRA는 가속된 입자를 충돌시켜 생성되는 핵의 에너지와 궤적을 정밀하게 분석해서 원자핵의 내부 구조와 핵반응 특성을 밝혀낸다. 이런 실험을 통해 우리는 별이 내부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어내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우주가 어떤 식으로 원소를 만들었는지를 재현하는 것이다. NDPS는 중성자를 발생시켜 다양한 물질과의 핵반응을 측정하고 데이터화하는 장치이다. 중성자는 원자로 설계나 핵융합 같은 에너지 분야, 그리고 의료 및 다양한 산업 분야 연구에도 반드시 필요한 입자로, NDPS를 활용하여 고에너지의 중성자 빔을 안정적으로 생성하고, 핵반응 데이터를 고정밀로 확보할 수 있다. CLS는 매우 정밀한 레이저를 사용하여 동위원소 하나하나의 전자 구조를 들여다보는 장치이다. 핵의 기하학적 구조와 회전 상태(스핀)를 알 수 있고,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검증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MMS는 동위원소의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해 주는 장치로, 대단히 민감하고 정확해서 아주 미세한 질량 차이도 감지할 수 있다. 이런 측정을 통해 불안정한 핵종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등을 알아낼 수 있다. BIS는 중이온 빔을 실제 생체 시료나 반도체에 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장치이다. 예를 들어 암세포에 중이온을 조사해서 암세포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멸되는지를 확인하거나, 우주 방사선(중이온)에 노출된 전자기기의 변화도 실험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미래의 정밀 암 치료 기술이나 반도체의 안정성 향상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다. LAMPS는 아주 복잡한 핵반응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는 장치이다. 마치 수많은 핵자가 사방으로 날아가는 초신성 폭발 현장을 작은 실험실 안에서 재현하는 셈이다. 그래서 별의 마지막 순간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μSR이라는 장치는 ‘뮤온(muon)’이라는 특수한 입자를 이용해 물질의 내부 자기성질을 관측하는 장치이다. 이것으로 초전도체나 자성체 같은 신소재의 특성을 파악하고, 새로운 전자재료 개발에 활용할 수 있다.
과학과 현실을 잇는 RAON의 미래
이처럼 RAON의 실험 장치들은 하나같이 고유한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초과학 연구를 넘어서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는 기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실험이 암 치료로 확장되고, 별의 탄생을 이해하는 연구는 더 안전한 에너지원 개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2024년, RAON은 국내 연구자들에게 문을 열어 빔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국내에만 30개의 실험 제안서가 접수되었다. 이어서 SCL3의 가속빔(40Ar8+)을 이용한 핵반응 실험, 우주용 반도체의 내구성(SEE) 측정, 나트륨 희귀동위원소들(21,22,23Na)의 초미세구조 연구 등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2025년 현재, 중이온가속기연구소(IRIS)에서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외 연구자들의 실험 제안 공모를 받았으며, 이를 통해 많은 공동연구가 기획되고 있다. 국내 연구진뿐 아니라 해외 연구자들도 IRIS와의 협업을 기대하고 있다.
RAON은 더 이상 과학자들만의 공간이 아니며, 국민의 삶과 미래를 연결하는 국가 핵심 연구 인프라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데이터와 기술은 미래의 암 치료법, 더 안전한 에너지 기술, 고신뢰성의 전자소자, 혁신적 신소재 개발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가속기’, ‘원자핵’, ‘동위원소’, ‘중성자’ 같은 단어들이, 이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직접 영향을 미치고, 현실 속의 기술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고, 생명을 지키며, 환경을 살리는 에너지를 개발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과학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소개
충남대학교 물리학 박사
(前)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단 초저에너지실험장치팀 팀장
국가연구개발과제 평가위원
ICABU 편집위원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실험장치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