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의 자살이 남긴 우리 시대 교사의 자화상
박진환 충남 논산 반곡초 k950108@hanmail.net
‘김해 초교 여교사 교실서 목매 자살’
2010년 12월 6일, 인터넷 포털에 올랐던 무척이나 선정적이었던 기사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김해라는 곳은 내가 한때 살았던 지역이라 더 눈에 띄었다. 더구나 고인이 된 여교사가 목을 매 자살한 까닭이 교감 승진을 앞둔 상태에서 교장과 근무평정 문제로 단판을 짓다 벌어진 것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순간, 나는 이 같은 승진을 두고 벌어지는 교원들 사이의 암투를 과연 우리 학부모들과 시민들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해묵은 승진 경쟁이 교육개혁의 큰 걸림돌인 걸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답답했다.
딴에는 이 같은 사건이 언젠가 한 번은 벌어질 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물론, 사건 장소가 교실이었다는 것만은 빼고 말이다. 그동안 나는 근무평정을 두고 미묘한 감정싸움을 벌이는 교사들을 숱하게 봐 왔다. 승진을 통해 한 학교의 교장으로 대우받으며 승자처럼 살 것인가, 아님 승진도 못하고 나이 들어 애들이나 가르쳐야 하는 초라한 패자로 남을 것인가라는 기로에서 그들의 선택은 늘 전자였다. 승진에 얽힌 일화들을 그들은 한 편의 무용담처럼 그려 내곤 했지만, 듣는 나는 늘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그 무용담 속에는 생존과 경쟁에 얽힌 쓰디 쓴 비화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 먼 ‘옵션’ 교직을 즐길 것만 같았던 한 선배가 조금씩 승진으로 길을 바꿔 가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내게 그는 대뜸 승진은 그냥 자기 삶의 옵션일 뿐이라며 지나친 해석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했다. 학급운영을 함께 공부하기도 하고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정 많고 따뜻한 선배의 변화가 조금은 낯설었지만, 굳이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좋은 교장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그것도 내가 아는 착한 사람이 훌륭한 교장이 돼 보겠다는데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준비하시라 했다. 꼭 교장이 되시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교장이 될 생각은 도무지 없다. 더욱이 승진을 교사라는 직업의 ‘옵션’이라 여겨 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철학이나 원대한 꿈을 가진 것도 아니다. 권위와 권력만 앞세우며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교장이라는 지위가 그냥 싫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초임부터 어느 자리에서건 선배 교사들이 수도 없이 전해 준 가르침은 오로지 승진하는 법이었다. 그들은 내게 승진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말라 했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분명히 후회할 거라며 그들은 애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은 나도 어떻게 하면 정말 승진을 할 수 있는지, 그 선배가 말한 간단한 옵션 정도의 것인지 살펴보기도 했다. 우선, 교사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할 건 논문과 각종 대회 참가로 얻어 내는 연구 점수다. 다음에는 점수가 되는 학교(시범연구학교, 농어촌학교, 벽지학교)는 줄을 대서라도 찾아가 부가점을 챙겨 둬야 한다. 실제로 벽지 점수를 얻기 위해 어떤 교사들은 몇 년을 가족들과 떨어져 살기도 한다. 1급 정교사 자격 연수 때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고, 부장 경력도 7년을 채워야 한다. 특히 교감 되기 10년 전부터는 연수 점수를 잘 관리해 두어야 한다. 이제 막판이다 싶을 때는 최고점의 근무평정을 얻기 위해 교장의 충복이 돼야 한다. 이 밖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할 일은 더 많았다. 내게는 이런 과정이 마냥 험난해 보이기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교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수긍할 수 없었다. 나 같은 평범한 교사가 할 일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선배의 ‘옵션’이라는 가벼운 표현은 내게는 그저 버겁기만 했다. 무엇보다 ‘옵션’ 정도로 받아들이기에는 교원승진제도가 가지고 있는 폐단이 훨씬 커 보였다.
롤모델이 없는 학교
교감 선생님이 불러서 교장실에 내려갔죠. 소파에 앉으라 하더니 두꺼운 책 한 권을 펼치면서 대뜸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겠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 최근 승진 규정이 바뀌었는데 한번 해 볼 만해.” 아시다시피 제가 일반 직장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교대 들어와 나이 삼십이 넘어 교사가 됐는데, 저는 정말 아이들 가르치는 게 좋거든요. 스스로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동학년 선생님들은 대학원 공부하는 것을 승진 준비로 보기만 해서 답답하고 교감 선생님은 잊을 만하면 교무실로 불러 갓 발령받은 저한테 승진 준비할 방법만 가르쳐 주시니 미치겠더라구요. 얼마 전에는 교감 선생님이 어떤 모임에 나오라고 해서 갔어요. 제가 거의 막내뻘이라서 선생님들 배구하는 데 따라가서 수발을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교직에 들어서기 전에는 몰랐는데, 우리나라 교육이 왜 문제가 많은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_ 30대 중반 남교사, 경상지역
젊은 교사들과 초임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황당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이들과 만드는 행복한 교실을 꿈꿨던 그들은 수업과 관련 없는 지시와 명령 위주의 관료 체계를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었다고들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학급운영과 수업에 대해 이야기해 줄 든든한 롤모델이다. 하지만, 실상 학교에서 그들이 기댈 만한 선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개 동료 교사들은 교육활동과 관계없는 업무에 매달리거나 아이들 이야기보다는 학교 밖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그 빈틈을 타고 들어가는 건 대부분 관리자나 승진에 매진하는 교사들이다. 한번은 후배 교사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난 대학 동기들과 만났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 점수 얘기였다고 한다. 그 다음은 ‘라인’이었는데, 같은 대학 출신이 아닌 다른 대학 출신인 자신들은 그 ‘라인’에 들어가기 힘들다며 한탄을 하더라는 것이다. 발령이 난 지 불과 일 년이 채 안 된 친구들이 자기와 다른 사고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 내심 크게 놀랐다고 했다.
이곳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학급운영이나 교과지도 같은 거 함께 공부하자는 말은 안 하고 늘 술자리에서 승진 이야기나 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여기도 저쪽에 벽지학교가 하나 있어요. 하나밖에 없는 벽지니 얼마나 경쟁이 심하겠어요. 그런데 늘 같이 술자리 하며 선배들에게 승진 얘기나 벽지학교 갈 방법을 배웠던 후배들이 완전 뒤통수를 친 거예요. 글쎄, 자기들을 가르쳤던 선배들보다 먼저 벽지학교에 들어갔지 뭐예요. 나중에 선배들이 후배 놈들이 싸가지도 없다느니 의리도 없다느니 막 화를 내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죠. 걔들이 뭘 잘못했냐고요. 선배라는 게 아이들을 위한 교사로 살아가는 얘기는 하지 않고 허구한 날 후배들 데리고 술이나 먹고 승진하는 법만 가르쳐 주지 않았냐고. 배운 대로 한 걸 가지고 누굴 탓하겠냐고. _ 30대 후반 남교사, 전라지역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이나 수업 문제로 선배가 후배를 돕고 협력하는 문화는 만나기 힘들었다. 반면 승진의 길로 들어서는 후배에게 선배가 다가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는 문화는 지나칠 만큼 많았다. 이러한 ‘미덕’은 학교 밖 모임을 만들고 이른바 ‘라인’을 만들어 낸다. 지역마다 곳곳에 만들어져 있는 ‘라인’을 타는 모임들은 승진의 패턴을 만들고 교직 문화까지 쥐고 흔든다. 남자들이 중심이 된 이 모임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명 ‘형님’ 문화다. 주로 같은 대학 출신으로 탄탄한 선후배의 끈을 잇는 이런 모임은 사적인 호칭이 대개 ‘형님’이다. 형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호칭이 낯설기도 했지만, 때로는 공적인 자리나 학교에서까지 ‘형님’이라는 호칭이 이어질 때면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다.
이러한 교직 문화는 자연스럽게 수직적이고도 비민주적인 학교 체계를 만들어 간다. 이를 완전하게 만들어 가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교감이다. 흔히 교감들은 교장을 ‘모신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기도 한데, 그들은 자랑스럽게도 교사들 앞에서 이런 말을 곧잘 하곤 했다. “교감이 학교에서 제일 중요하게 할 일은 교장 선생님을 잘 모시는 거야.” 어떻게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느냐 하겠지만, 실상 승진 시스템을 잘 들여다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교감이 교장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근무평정을 잘 받아야 하는데, 교감의 평가는 해당 교육기관과 교장이 각각 나눠서 하도록 돼 있다. 이렇다 보니 교감에게 교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모실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감이 교장을 받들어 모시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교사들이 상관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으로 모범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다른 표현인 것이다.
승진의 도구가 된 학교와 아이들
작은 학교는 꼭 살려야 해요. 우리 학교(벽지)만 봐도 그래. ○○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학교가 없어져 봐. 벽지 점수 따려고 우수한 교사들 다 밖으로 나갈 거 아냐? 그리고 작은 학교가 끝까지 버티고 있어야 교감 돼도 갈 데가 있지. 교감 아무리 많이 만들면 뭐하나? 갈 데 없으면 어쩌나? 교육장 볼 낯이 없잖아.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은 학교는 살려야 하는 거야(여기서 말하는 ‘무슨 수’는 위장 전입을 통한 학생 수 불리기를 말한다. 이러한 위험부담을 감수하지 않고는 학교를 살리거나 혁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필자 주). 그런데도 이런 뜻을 몰라주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나만 잘되려고 했으면 큰 학교에 가지 여기에 있겠어? _ 50대 후반 교장, 충청지역
충청지역 어느 작은 학교에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이 발언을 한 교장의 학교는 얼만 전까지만 해도 지역 언론에 보도되며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인근 작은 학교에서 이 교장을 초청해 조언을 듣고자 마련한 자리에서 그가 자랑스럽게 강조한 말을 전해 듣고는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 의심스러워 말을 전해 주던 교사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을 정도였다. 40년이 다 돼 가도록 교육에 헌신(?)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고작 이 수준의 말뿐이라는 생각에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철학으로 살려내는 작은 학교가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여기다 다 옮겨 적지는 못했지만, 그도 자기가 떠나면 이곳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후배 교사들의 분투를 거듭 바랐다고 한다. 교육적 목적으로 살려야 할 작은 학교조차 승진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위해 이용되어야 하는 현실을 아주 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아닐까 싶다. 이들에게 학교는 결국 개인적인 성취욕을 채워 주는 직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저 장학사, 나랑 같이 근무했는데 어떻게 장학사 된 줄 알아? 학급은 거의 내버려 둔 채로 아이들 자습시켜 놓고 장학사 시험 공부하는 일은 다반사였어. 퇴근하면 학원으로 달려가 밤새도록 시험공부 하고 오니 제대로 수업이 될 리가 있겠어. 아이들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아이들 내팽개치고 시험 준비하더니 결국 장학사 되더라고. 참 문제야. 저런 사람들이 수업 장학하겠다고 학교에 오고 우리가 고분고분 조언을 들어야 하니 우리도 참 한심하지 않아? _ 40대 초반 남교사, 경상지역
요즘은 조금 덜하다고 하나 예전에는 아이들 자습시키고 연구 논문을 쓰거나 시험공부 하는 일은 예사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다들 그랬다며 조심스럽게 지난 과거를 털어놓는 동료 교사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함께 근무했던 어떤 교감 선생님에 대한 여교사들의 비아냥거림은 듣기조차 민망했다. 특수학급까지 맡아 가며 학교에서 박사 논문도 쓰고 장학사 시험 준비도 했던 사람이 우리 학교 교감으로 와서 교육에 대한 소신을 밝히는 모습에 그들은 진저리를 쳤다.
승진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학교와 아이들은 일종의 도구가 된 지 오래다. 승진을 준비하는 이들의 학교 선택 기준도 오로지 점수다. 각종 연구시범학교에 부여되는 점수, 근무평정, 농어촌학교, 벽지학교 점수 때문에 철새처럼 떠도는 그들은 지역사회 주민과 아이들에게는 무의미한 존재들이다.
승자와 패자들의 불편한 동거
남교사의 경우, 일찌감치 승진에 눈을 돌리지 않았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다 보니 뒤늦게라도 싹수가 보이면 교장, 교감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승진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어요. 하지만 여교사의 경우에는 고만고만해서 승진 경쟁이 가늘고 길게 오래가는 편이죠. 모든 스펙을 다 갖추었어도 줄에서 밀리는 경우, 남은 경력과 나이를 계산해 보고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접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어요.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오로지 승진 하나만 보고 달려오다가 아이들 얼굴만 쳐다보자니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에요. 입에 붙은 말이 “아이구~ 내가 얘 땜에 학교를 그만두든지 해야지. 아이구 못 살아~” 같은 소리를 꼭 남이 들을 때에 끊임없이 외쳐 대는 교사도 있어요. 마치 자기는 아이들이나 가르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죠. 그때 동료교사들은 그 교사의 성씨를 앞에 붙여 ‘김그만’, ‘박그만’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건 오늘내일로 그만둔다던 그 김그만, 박그만은 오늘도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거죠. _ 40대 중반 여교사, 경상지역
교단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내가 본 교사들의 모습은 정말 이상하기만 했다. 학교 업무 때문에 교무실과 교실을 오가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교사들은 매우 당당해 보였던 반면 교실 속에서 머무는 교사들은 나름 열심이지만 뭔가 학교 일에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됐다. 답은 하나였다. 교사로서 삶의 목표가 승진이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그러나 승진을 향해 달릴 때의 당당함은 그 목표를 상실하면 급격하게 꺾여 버렸다.
벽지 점수 채우러 섬까지 갔다 왔는데, 소수점 몇 점 차이로 밀려났어. 10년간 승진 하나만 생각하고 집 떠나 살았는데…….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니 참……. 주위에서는 그래도 끝까지 해 보라 하는데, 지치기도 하고 그냥 포기했어. 지나고 나니 미련한 짓이었다는 생각도 들어. 이제 뭐 은퇴할 준비나 해야지, 뭐. 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한데, 나이든 교사를 젊은 학부모들이 좋아나 하겠어. 이래저래 마음만 불편하네. _ 50대 초반 남교사, 경상지역
내가 처음 발령을 받아 간 곳은 바닷가를 낀 작은 도시에 위치한 36학급 규모의 꽤 큰 학교였다. 그때는 학교 내 수업 공백을 채우는 증치교사라는 제도가 있었다.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내 첫 임무가 바로 이 증치교사였다. 내가 한 일은 퇴임을 앞둔 원로 교사의 수업을 나눠 도와드리는 일이었다. 후줄근한 남색 양복을 입고 4학년 교실 뒤편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힘없이 담배를 피워 대던 퇴임을 앞둔 한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한번은 그가 이런 말을 내게 건넨 적이 있었다. “자네, 후회하지 말고 일찍부터 승진 준비를 하게. 내 꼴 나지 말고. 나도 젊었을 적에 딴짓 하지 말고 승진이나 했어야 했는데…….” 그 시절 한창 젊고 의욕적이었던 내게 퇴임을 바로 앞둔, 노老교사의 충고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얼마 뒤, 교단을 떠나야 했던 이 노교사가 문득 그려질 땐, 전장에서 쓸쓸히 퇴장을 하는 노병이나 패잔병을 함께 떠올리곤 했다. 승진의 길목에서 밀려나거나 관심을 접은 이들이 내게는 마치 패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패자들은 한편으로는 매우 자유로워 보였지만, 승진을 준비하며 힘차게 살아가는 승자들과 불편한 공존을 해야 했다. 때로는 승자들과 함께 자리하는 것마저 불편해하며 그들만의 자리를 마련하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본질은 교사가 아이들 교육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지 못하고 승진 문제로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불편한 동거를 하게 만든 모순된 제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같이 근무했던 햇병아리 교감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교감이 되기 위해 최고 근무평정을 받아야 했던 몇 해 동안 자신은 교장의 ‘개’였다고. 그는 교장이 시키는 일이라면 공적이든 사적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고 했다.
승진하기 위해 지역마다 만들어져 있는 이른바 ‘라인’에 들어가야 하고, 승진하기 위해 관리자와 장학사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해야 하고, 승진하기 위해 관리자들의 반교육적인 행위에 눈을 감아 주어야 하고, 승진하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쓸데없는 일로 여기며 오히려 아이들을 승진 도구로 삼는 일이 오늘도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에 우리 사회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신경 쓸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여교사의 자살 사건이 일어난 이틀 뒤, 난장판 ‘예산국회’ 소식이 온 매체를 휘감으면서 그의 서글픈 죽음은 우리들 기억에서 잊혀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던 교원승진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논쟁도 함께 사그라졌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고 싶지 않다. 점수 위주의 모순된 승진제도로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야만 하는 왜곡된 교사 문화와 교장을 정점에 둔 비민주적인 학교 문화에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한 편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비극의 주연을 교사로 한정시키고 싶지도 않다. 현실에서 교사의 역할이 지나치게 부각되다 보니 숨은 주연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고 사는 것 같다. 이 비극의 숨은 주연은 우리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교육정책과 제도로 상처를 받는 최대 피해자라는 사실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런 허무한 죽음을 막고 도무지 해법을 찾지 못하는 교육개혁의 실마리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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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환
올해로 교사라는 직업을 얻은 지도 스무해가 됐습니다. 한동안 정신 차리지 못하고 살다 교사가 된 지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아이들의 선생이라는 걸 비로소 알아챘습니다. 선생으로 아이들 곁에서 사는 참맛을 느낀 것은 불과 5년 전입니다. 저는 뭐든 적응이 늦고 늘 때늦은 반성을 했습니다. 벌써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겼으니 더 이상 변명은 궁색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그저 아이들만 보고 살 뿐입니다. 처음 담임이 돼 교실로 아이들을 만나러 가던 그날 그때의 떨림과 설렘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