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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지지할 때 '좋고' '싫고'의 문제로 접근합니다. 그러고 나서 좋은 이유, 싫은 이유를 덧붙이지요. 이게 진실 아닐까요?"
『프레시안』 기자 강양구의 말이다. '좋고', '싫고'의 문제는 주로 특정 정치인의 스토리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스토리에 열광하고, 그래서 대선 후보들은 스토리 마케팅에 몰두한다. 『오마이뉴스』가 연재한 「2012 전략가의 선택」 시리즈에서 나온 다음 주장들은 2012 대선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스토리 전쟁을 치렀음을 말해준다.
저녁이 있는 삶'은 학생운동 시절부터 탄광, 빈민촌, 철공소에서 했던 막노동과 민생대장정을 통해 직접 경험한 노동자의 삶과 애환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대안이며, 그게 바로 다른 대선 후보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손학규 후보만의 차별점이다. …… 스토리가 가장 많은 인물이 손 고문이다. - 조정식 의원
노무현 대통령이 요트 타는 변호사에서 뒤늦게 철들었다고 한다면 문재인 고문은 청년 시절부터 민주주의에 헌신해왔다. 문 고문의 삶에는 노 대통령보다 더 많은 스토리가 있다. - 윤후덕 의원
2012 대선이 박근혜의 승리로 끝난 걸 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였던 두 번의 암살 사건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겪은 박근혜였을까?
과연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야기'의 힘이 막강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요즘 아이들이야 불행하게도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하고 자라겠지만,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대는 이야기의 가공할(?) 마력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텔레비전이나 인쇄 매체의 픽션물이 쉬운 이해를 위해 이야기체 스크립트를 사용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광고도 이야기체를 사용하는데, 어느 학자는 고민하는 치질 환자를 주제로 한 30초 동안의 광고 내용이 고대 그리스 비극과 같은 극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이야기해주기'라는 말 대신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는 외래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디지털 시대의 특성에 맞는 이야기하기'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최혜실은 "스토리텔링에서의 'tell'은 단순히 말한다는 의미 외에 시각은 물론 촉각이나 후각 같은 다른 감각들까지 포함한다. 특히 구연자와 청취자가 같은 맥락 속에 포함됨으로써 구연되는 현재 상황이 강조된다. 현장성의 회복, 즉 새롭게 확장된 '구술 문화'의 차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ing'는 상황의 공유, 그에 따른 상호작용성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풀이했다.
최혜실은 "스토리텔링은 문화기술(CT)과 결합하면서 문학,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광고, 디자인, 홈쇼핑, 테마파크, 스포츠 등의 장르를 아우르는 상위 범주가 됐다"며 "서사 형식의 원형질인 스토리텔링은 다른 매체로 옮겨가면서 매체 변주를 하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획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한 장르가 성공했을 때 다른 장르로 활용, 개발되는 것은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대중문화에는 스토리텔링이 철철 흘러넘친다. 2008년 구둘래는 "텔레비전을 켜면 '스토리 욕망'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드라마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스토리의 힘은 구체성의 힘이다. 유명한 예로 '원수를 사랑하라'란 말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추적하던 경감을 용서하는 '장발장'의 이야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출판계에서도 자기계발서의 '우화형으로 메시지 전달하기' 기법은 베스트셀러로 가는 지름길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우화적으로 전하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지금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간곡하게 전달한 『마시멜로 이야기』, 칭찬의 힘을 다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등의 전통은 미국 시장을 넘어 국내에도 미치고 있다. 우화형 자기계발서는 2006년부터 한국형을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불상을 다루는
스토리텔링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스토리텔링 마케팅도 각광을 받았다. 이는 상품에 얽힌 이야기를 가공, 포장해 광고·판촉 등에 활용하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다.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카네기멜런대 교수 로저 섕크(Roger Schank)는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스토리, 들어온 이야기로 세상을 이해한다. 상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듯 기업도 회사가 만들어낸 스토리, 주변에서 만든 이야기로 정의된다"고 말했다. 또 덴마크의 스토리텔링 전문기업 시그마(SIGMA)의 클라우스 포그(Klaus Fog) 대표는 "창업주에 대한 스토리, 제품 탄생과 관련한 스토리, 훌륭한 직원에 대한 스토리, 감동받은 소비자의 스토리 등 모든 기업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며 "이는 기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훌륭한 전략적 도구"라고 강조했다.
이유진은 「명품의 스토리텔링」이란 글에서 꿈·희소성·전통·장인 정신·스토리·후광 효과 등을 명품 스토리텔링의 구성 요소로 꼽았다. 이를테면 루이비통의 경우 외국인은 파리 매장에서 하루 두 개밖에 구입할 수 없으며 페라가모 구두는 134가지 공정을 거친 뒤 변형을 막기 위해 7일간 오븐에 넣는다는 이야기, 영화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와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가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입었다거나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했을 때 에르메스 핸드백으로 볼록한 배를 감췄다는 이야기 등이 모여 명품의 신화를 만들어 판촉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명품 보석·시계로 유명한 불가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페이 웰던에게 아예 『불가리 커넥션』이란 소설을 써달라고 의뢰했다. 이 책의 표지는 불가리 사의 목걸이 사진이었는데 이 목걸이가 소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에르메스 핸드백을 들고 있는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그녀가 임신 중에 자신의 배를 에르메스 핸드백으로 가린 모습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자 에르메스사는 그 가방 모델 에 켈리 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박정현은 "출간 2년 만에 600만 부를 돌파한 한자 만화 책 『마법천자문』의 인기는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경향은 과학이나 역사 서적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또한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효과는 관광 등 문화 산업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똑같은 남이섬이라 하더라도 '<겨울연가> 주인공이 거닐던 남이섬'이면 한 번 더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지자체 등 문화 산업 주체들은 '스토리'와 '체험'이 있는 문화 상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데, 최근 한국관광공사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유명 관광지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결합한 다양한 한류 상품을 기획한다는 계획이다."
『마법천자문』의 인기에 자극을 받은 걸까? 2012년 1월 교육과학기술부는 '수학 교육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요약된 설명과 공식, 문제 위주로 구성돼 있는 기존 교과서에 수학적 의미, 역사적 맥락 및 실생활 사례 등을 스토리텔링 방식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계해 수학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높인다"고 발표했다.
스스로 수학 교육에 스토리텔링을 도입하는 교사들도 늘고 있다. 2013년 1월 24일 사단법인 전국수학교사모임이 주최한 '제15회 매스 페스티벌'의 '스토리텔링 교수학습방법과 서술형 평가문항을 통한 교실수업 개선'이라는 강의의 한 장면을 보자.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 밴드 자우림이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노래 <가시나무>가 울려 퍼진다. 노래가 끝나자 마이크를 들고 있던 고양외고 박성은 수석 교사가 청중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은 이 노래가 나오는 동영상을 놓고 무슨 수업을 하실 건가요?" 박 교사의 질문에 강연장에 있던 교사들이 하나둘 손을 들어 대답한다. "함수요!" "집합이요!" 박 교사가 미소를 지으며 다음 설명을 이어간다.
"네. 좋습니다. 그렇게 사용하세요. 저는 '부등식의 영역'에 대해 수업할 때 이 동영상을 활용합니다. 원래는 마음이 한 개였는데 원을 그리면 영역이 두 개 생깁니다. 원을 그리다 보면 '경계'가 생깁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기준', '가치관'이 생기는 겁니다.
박 교사는 "학생들이 '수학 이거 어디에 써먹어요?'라고 묻는 걸 보고 자극받아 나만의 스토리텔링 수학 수업을 만들어보게 됐다"며 "기존의 수학적인 언어, 실생활 속의 언어로 수학을 표현하는 삶의 언어, 여기서 나아가 수학으로 한 편의 에세이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심미적 언어 세 가지를 모두 담은 수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야기의 마력을 감히 누가 부인할 것인가? 문제는 픽션 이외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일 것이다. 정보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른바 '이야기 정보'라는 것도 있다. 일상적으로 사람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말한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어본 사람들은 이야기 정보가 얼마나 재미있고 강한 파급력을 발휘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도 있다.
이야기는 육하원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럴듯하면 그걸로 족하고 설득력은 말하는 이의 권위와 말솜씨에 좌우된다. 굳이 옛날이야기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그거 말 되는데'라거나 '말도 안 돼'라는 말을 즐겨 한다. 진실은 때로 얼른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진실은 이야기로서의 생명력이 약하다.
이야기 정보가 워낙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강하기 때문에 신문 기사마저도 점점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특히 사람들 간의 갈등을 많이 다루는 정치 기사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정치 보도와 논평이 정치인의 퍼스낼리티에 대한 품평회로 전락하는 것은 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어렵게 만든다.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식의 냉소주의마저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는 결국 정치 개혁을 좌초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치를 포함한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너무 이야기식으로 말랑말랑하게 쓰인 기사나 글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