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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통발달사 2
삼국과,발해의 육상과 해상교통
-수레,교통로,교역,교역로,조선,항해술,해상활동
1. 고구려의 교통 넓은 영토를 발판으로 수레·도로 발달
고구려는 다양한 종류의 수레를 만들어 폭넓게 활용한 나라였다. 도로는 수레의 운반과 교역을 위해 자연스레 발달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는 64개의 성과 1천400개의 촌락이 있을 만큼 영토가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성을 중심으로 각 성과 촌락을 통치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대의 도로망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먼 거리는 쉬어 갈 수 있도록 역참제도를 만들어 시행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고구려의 건국과 경제상황
첫 국가인 고조선 이후 자전거, 인력거, 객마차 등 신식 탈것과 기차, 자동차, 동력선, 비행기 등 자동 탈것이 등장하기 전인 조선시대 후반까지, 육상 수송의 주 수단인 수레를 가장 많이 그리고 다양한 종류로 만들어 쓴 나라는 고구려였다.
그 뒤 나라가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되었던 고려시대부터는 수레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뒤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여진, 원나라, 일본 등의 외침을 막기 위해 도로를 방치하는 바람에 수레 왕래용 교통로가 폐쇄된 것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또 수레를 끄는 소·말 등을 종주국인 중국(수·당·원)에 조공물로 많이 빼앗겼고, 수공업 기술자의 천대, 문관우대 정책 등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없어 수레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던 것도 원인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12세기경 만주의 요하(遼河) 서쪽에 건국한 고조선 제후국들 중 한 작은 나라였다. 그 후 기원전 1세기경 위만과 중국 서한(西漢)의 황제인 무제가 침략하자 고구려족 일부가 요하 동쪽으로 이동했고, BC 37년에 부여족 출신인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이 졸본에 도읍해 비로소 독립국가인 고구려를 건국했다.
이후 고구려는 급속히 세력을 키워 5세기 초 광개토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았고 만주 전역과 대동강 이북에 이르는 최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산과 골짜기가 많고 평야가 적은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구려 국민들은 어느 주변국가보다 강인하고 근검했다. 그 결과로 기원전 1세기부터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흡수, 5세기에는 최대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는 풍부한 철광산지를 이용해 철제 농기구를 일찍부터 만들어 농경지 개간에 힘써 농업과 목축을 발달시켰고, 비옥한 농토와 울창한 산림, 수많은 강과 하천, 풍부한 지하자원 덕에 일찍부터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농목업이 발달했을 뿐 아니라 한반도 동북쪽인 함경도와 황해도 북쪽 요동반도 연안 등의 긴 해안선과 함께 내륙에 큰 강, 하천, 호수들이 많아 수산업도 발달했다.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옥저’ 전에는 이 같이 긴 해안선을 낀 바다에서 나는 소금과 물고기를 천리길이나 되는 수도 국내성(압록강 상류)까지 배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구려는 요동지방과 백두산·두만강 일대에 있는 철광산지에서 철·금·은·동을 생산했기 때문에 철제 수공업이 어느 나라보다 일찍 발달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질 좋은 강철을 제조하는 기술이 발전해 망치·도끼·톱·자귀·끌 등의 공구와 가래·괭이·호미·보습·삽·낫·쇠스랑 등의 철제농기구를 일찍부터 만들어 농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철제 공구로 수레와 배를 많이 만들어 사용해 경제가 일찍부터 발달할 수 있었다. 한반도 북부지역인 황해도·압록강 이남지역에 산재한 고구려무덤에서 수레용 철제 부품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철제공구의 발달로 수레 제작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레를 중심으로 한 육상교통문화
고구려가 육상교통에 수레를 많이 사용한 것은 여러 무덤의 벽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구려건국사인 ‘동명왕편’을 보면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적혀 있다. 신화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수레는 일찍부터 왕과 귀족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수레의 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굴대통 등 철제 수레 부품들이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 고분 95기 중에서 18기의 무덤 속 벽화에서 40대의 수레와 4개의 수레바퀴, 그리고 수레관련 그림 등이 발견되어 수레를 이용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과 수레의 종류·특징·신분별 구분 등을 추정해볼 수 있었다. 이런 수레의 그림들은 357년에서 6세기말까지의 고분벽화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고구려에서 수레를 사용한 기록은 여러 역사책에 남아 있다. 그 중 중국 당나라 사기인 ‘구당서 본기’ 제5권에는 669년 5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이긴 당나라군대가 고구려인 2만8천200명을 데려갈 때 수레 1천80대, 소 3천300두, 말 2천900필을 함께 가져갔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 후기에도 수레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수레의 구분과 신분별 특징
고구려에서 수레는 대개 귀족들의 전용교통수단으로 이용된 것 같다. 따라서 신분별로 수레의 모양이 구분되었고 이에 따른 수레의 치장도 차별화했음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수레는 크게 남성용, 여성용, 화물운반용의 3가지로 나뉜다. 남성용수레는 주로 왕과 귀족이 탔고 가마방(지붕 달린 차체)이 없는 개방형으로 햇빛과 비, 눈을 막을 수 있는 큰 차양이 달렸다. 신분에 따라 수레의 크기, 치장, 의자모양, 색깔이 달랐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크고 화려했다.
여성용 수레는 왕과 귀족들의 처나 첩이 타는 수레로서 대개 가마방이 설치되어 있고 남성용보다 크기가 작았다. 여성용 수레도 남편의 신분에 따라 차양의 유무와 수레의 크기가 달랐다. 이 외에도 여성용으로 가마방이 없는 아치형 개방수레가 있는데 사람이 끄는 형태였다.
짐수레는 소·중·대형 3가지 크기로 제작되었고 가마방이 설치된 대형수레는 주로 장거리 화물 운반이나 상업, 외국과의 교역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고려 때부터 널리 사용한 가마도 고구려에서는 수레와 함께 사용했다. 벽화에 그려진 가마는 귀족의 도성 내 외출용으로 네 사람이 허리높이로 들고 가는 형태다.
그밖의 수레 종류와 용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해 가던 초기, 군사훈련과 확장한 영토의 통치, 확인을 위해 왕은 전국을 순시하며 수레를 타고 돌아다녔다. 이때의 수레는 장거리 여행에 편안하도록 크고 사치스럽게 만들어진 최고급품이었다. 왕의 긴 행차가 그려진 벽화를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같은 용도 외에 수레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전투 때 사용했던 것도 여러 사기(史記)에서 엿볼 수 있다. 바로 쇠 화살 수레인 차노(車弩), 큰 쇠뭉치를 수레에 달아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적의 성벽을 넘기 위해 접이식 긴 사다리와 높은 곽을 설치한 운제(雲梯), 돌 투석기를 설치한 포차(抛車)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수레무기는 원래 수나라와 전투 때 수나라 군대가 쓴 것이었는데, 그 중 고구려에서 포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수레기술이 발달한 고구려가 수나라의 여러 가지 수레무기를 본따 만들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수레무기 중 중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전투에 쓰였던 전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산악지대가 많아 전차가 기마병보다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투는 평지나 도로보다 산간지대에서 많이 벌어졌다. 이런 지형에서 전차의 사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전차대신 기동성이 민활하고 전투능률을 올릴 수 있는 기마병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고분벽화에 전차는 보이지 않고 철제갑옷을 말에 입힌 중무장 기마병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수레를 끄는 동력
중국에서는 대개 속도가 빠른 말이 수레를 끌었고 말을 모는 마부나 주인이 수레에 함께 타고 다녔지만 고구려에서는 속도가 느린 소가 수레를 끌고 소를 모는 하인은 소와 함께 걸어 다녔다. 이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속도를 내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느긋하게 수레 타기를 즐겼던 것 같다.
또한 수레가 특정계급의 전유물임을 과시하기 위해 소를 모는 하층계급과 동승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말은 주로 전투와 사냥 등에 사용한 듯하다.
고구려 사람들이 수레를 널리 쓸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소와 말을 많이 키웠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건국 이전부터 농업과 목축업에 힘을 쏟아 소와 말 등 가축을 많이 사육했다. 특히 고구려 북쪽지역인 옛날 부여국은 명마산지로 유명해 중국도 탐내던 말을 많이 키웠고 정복한 국가로부터 소·말·양 등 가축을 많이 탈취했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유목민인 비려국을 정복하고 수많은 소와 말을 빼앗아 왔고, 479년에는 우량마의 산지로 유명한 지두우(부여)를 정복하고 말을 공급하도록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439년에는 800필의 말을 송나라로 수출까지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에 말과 소가 많았다는 사실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려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645년 안시성 전투 때 15만 명의 고구려군이 사용한 말과 소는 각각 5만 마리라 했고, 667년 설하수(청천강)전투 때도 고구려군 5만 명이 전장에서 말과 소를 각 3만 마리나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레를 끄는 말과 소가 고구려에 많았던 것은 일찍부터 농업과 더불어 목축을 장려한 이유도 있지만, 5세기 들어 아세아 최강국이 되어 더 이상 말이나 소를 조공물로 바칠 강대국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레 제작기술의 발전
위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고구려의 수레는 왕족과 귀족의 전용교통수단으로 발전했다. 즉 수레를 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귀족들은 자연히 수레에 관심을 가졌고 신분별로 수레의 크기, 모양, 치장을 구분하기 위해 다양한 수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레의 제조기술이 발전해갔다. 일반 백성들도 수레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짐수레에 한했다. 서민들의 생업 활동, 물자 운반용으로 짐수레의 사용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수레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퀴 만드는 기술이었다. 귀족들이 타는 수레여서 바퀴제조기술자는 국가적으로 보호를 받았다. 고구려에서 목재, 철제품 등 수공업이 발달했던 것은 이 같은 기술자 우대정책에도 힘입었다.
바퀴 제조기술은 상당히 발달했는데 초기에는 나무바퀴를 쓰다가 5세기에 들어와 철제품 수공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쇠태를 입힌 바퀴로 발전했다. 오희 분묘 벽화에 그려진 제륜신이 그 증거다. 대장간에서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제륜신 옆에 바퀴가 놓여 있어, 고구려 중기부터 튼튼한 쇠태 바퀴를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쇠를 불에 벌겋게 달궜다가 물에 집어넣으면 오그라든다는 것을 알고 이 원리를 바퀴 제조에 이용했다. 즉 바퀴 접지면의 폭과 같은 둥근 쇠판을 만들어 불에 달군 다음 만들어 놓은 나무바퀴에 끼우고 즉시 물에 담그면 쇠판이 오그라들면서 튼튼한 바퀴가 만들어진다. 이런 수레바퀴 제조법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수레와 바퀴의 발달은 고구려의 왕성했던 국내외 상업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요동과 백두산·두만강 유역 또는 옛 부여쪽 영토에 풍부한 철광산지를 가진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 멀리까지 철, 농산물, 직물 등을 수출했다.
특히 무거운 철은 사람이나 소·말이 대량으로 빠르게 장거리 운반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장거리 수송에 가장 적합한 운반도구가 짐수레였다.
고구려의 짐수레는 쌀 13가마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컸다. 험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머나먼 거리를 오가자면 수레가 튼튼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러한 장거리용 수레에 안성맞춤이 바로 쇠태 바퀴였다.
초기 벽화를 보면 짐수레 바퀴가 나무로 만들어져 바퀴의 두께가 두껍고 크며 바퀴살도 굵고 튼튼했다. 노면의 충격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바퀴가 크면 클수록 무겁고 험한 길을 다니며 잘 부서져 수명이 짧았다.
고구려는 철기문화시대를 맞았던 중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나무바퀴를 쇠바퀴로 바꾸었다. 고분벽화 속에 나오는 수레바퀴의 대나 살이 모두 가늘고 크다는 것은 철제를 이용한 바퀴로 바뀐 증거다.
영토의 확장과 도로의 발달
고구려는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던 3세기 초부터 주변소국들을 흡수해 확장하면서 국토를 주·군·현 등 지방행정단위로 구분하고 이들 지방행정 중심지와 정부가 있는 국내성을 원활히 연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지방행정구역을 국내성에서 빠르게 통치하는 정책적 수단이기도 하지만 유사시 군대를 신속히 파견하고 복속국들이나 지방에서 바치는 조공물자의 수송뿐만 아니라 국내외 교역을 위한 상품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서도 시급했던 것이다. 또 지방통치, 군사파견, 조공물수송, 교역상품 운반 등에 거의 이용될 만큼 수레가 활발하게 보급된 것도 도로 발달의 요인이다.
도로 발달의 증거는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시대 많은 성들의 유적에는 성벽 안팎으로 오르내리는 수레 길의 자취가 남아 있다.
길림성(중국) 유하현에 있는 나통산성에는 성벽 안팎에서 소천안(송화강 유역)과 연결하는 큰 수레 길의 자취가, 소천안산성에서 송화강 북쪽의 농경지인 큰 평야를 연결하는 수레 길이, 요령성 철령시에 있는 최진보산성 성벽 안에서는 4∼8m 폭의 도로가 발견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무순의 고이산성 성벽 안팎에도 폭 3m의 수레길이 있고 이런 성벽 중심의 수레 길은 한반도의 대관성, 평리고성 등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도로유적이 발견된 곳이 고구려 말기의 수도였던 장안성(평양성)이다. 장안성은 고구려 최대의 왕도로서 내성·중성·외성·북성 4개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그 중 외성은 4곳의 거주구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구역 사이에 소로와 대로가 있었다. 소로(3묘로)의 도로 너비는 3.4m이고, 대로(9묘로)는 너비가 14m나 되는 수레길이다. 또 도로 양쪽 갓길에는 너비 60cm 정도의 하수도까지 만들어져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압록강 상류 중국 지역에 위치했던 수도인 국내성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큰 도로를 만들었는데, 북쪽도로는 평탄하고 천산 산맥을 끼고 있는 남쪽도로는 험했다고 전한다.
상당히 발전했던 고구려의 토목기술
고구려의 도로 포장술은 비교적 발달해 대도시 안 거주지역 도로는 잔 자갈이나 깬 돌, 벽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안학궁(평양성) 안 도로, 고이산성 안 도로, 대성산성 앞 도로가 그렇고, 남평양성, 요양(중국)에서는 너비 7m 정도의 포장도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구려는 각종 수레들과 사람의 왕래를 원활하게 해 상업을 발달시키고, 영토를 넓혀 가는 한편 원활한 통치를 위해 다리를 많이 만들어 도로를 발전시켰다. 413년에는 평양성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기 위해 안학궁성 남쪽 대동강에 평양 주대교를 놓았다.
평양의 청호동과 휴암동 사이 대동강을 가로질러 놓은 이 다리는 길이 375m에 너비가 9m인 나무판과 돌로 만든 다리로,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 이음법으로 연결한 다리인데 깔판에 난관까지 갖춘 것으로 1981년에 발견되었다.
이외에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를 보면 668년 당나라의 침입으로 평양성 전투 때 대동강에 사천교와 남교 등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중 동국여지 승람’에도 평양성 대동강에 통한교와 연우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광범위한 도로망을 만들었던 고구려는 초기부터 그 관리에 힘썼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특히 64개의 성과 1천400촌락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넓힌 광개토대왕 때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각 성과 촌락들을 통치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대의 도로망을 구축하면서 이들 도로와 수레, 사람들의 통행을 관리하고 먼 거리는 쉬어 갈 수 있도록 역참제도까지 아울러 만들어 시행했을 것이다.
역참이나 우역제도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같은 시대의 신라가 이미 소지왕 9년(487년)에 우역제도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에 비춰 볼 때, 산라보다 경제·도로· 수레교통이 더 발달했던 고구려가 일찍 이런 제도를 만들어 활용했을 것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2. 고구려의 수상교통과 신라의 길 일찍부터 바다로 나간 고구려인들
고구려의 해상교통은 370년 이후 크게 발달했다. 국토확장으로 바다와 접하게 되면서 해로를 통해 중국 남부 여러 나라와 교역하거나 사신이 오갔다. 한반도 이남의 백제·가야·신라를 점령하는데도 해로를 이용했다.
한편, 신라 제8대왕인 아달라는 대구에서 상주를 거쳐 계립령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척했다. 계립령 교통로는 초기에 물물교환과 왕래에 이용되었으나 소지왕 이후부터는 영토를 넓히기 위한 북진의 길이 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고구려의 수상교통
영토확장 계기로 열린 바닷길
고구려는 3세기 초까지 국토가 만주내륙의 일부였기 때문에 바다와 인접해 있지 않은데다 강과 하천만 분포되어 있어 배가 발달할 만한 환경이 못되는 해상교통의 불모지였다. 그러나 국토가 급속히 확장되던 3세기 중엽 황해와 동해북부가 국토와 연결되면서부터 해상교통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해상활동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지’의 오주전에서 볼 수 있다. 233년 3월 양자강 하류의 오 나라가 요서와 요동에 있던 공손씨 세력과 동맹을 맺기 위해 서해를 통해 사신을 보냈으나 공손씨 정권의 배반으로 오 나라 사신일부가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들어와 목숨을 건진 후 고구려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서해로 귀국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해상교통은 370년 이후 급속히 발달했다. 과거에는 대륙을 통해 중국과 교역을 했지만 국토확장으로 바다와 접하게 되면서 해로를 이용해 중국 남부 여러 나라와 교역하거나 사신이 오갔고, 해상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물자의 대량수송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한반도 이남의 백제·가야·신라를 점령하는데도 해로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전성기인 5세기초에는 요동반도 해역인 발해만과 한반도 서해를 거처 제주도에 이르는 해역을 장악, 일본까지 왕래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해상교통개척은 수군의 활동도 크게 도왔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인솔해 압록강어구에서 출발, 서해로 남하해 한강으로 들어가 백제를 공격했다. 404년에는 고구려 수군이 역시 압록강 어구에서 해로를 통해 산동반도로 들어가 전연국 지역을 공격했고, 5세기 초에는 함경도 연안에서 동남해로 진출해 왜군을 격퇴했다.
또한 607년에는 서해로 후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 같은 수군 활동과 대외 교역, 인접국 사절 파견 등으로 고구려의 항해술과 조선기술은 계속 발달해갔다. 특히 대규모의 수군이 이동하려면 군용선과 무역을 위한 해양선이 절대 필요했다.
이뿐만 아니라 최대의 국토를 가졌던 5∼7세기의 고구려는 발해만·동해·서해의 큰 바다를 접한 것은 물론 내륙의 유통을 위해 흑룡강·송화강·압록강·두만강·대동강 등 수많은 큰 강들과 호수 등을 이용해 내륙수상교통도 함께 발달했다.
조선기술과 배의 모양
같은 시대인 신라 배의 유물이나 기록은 다소 발견됐지만 고구려 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중국과 신라 배를 중심으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3세기 이후부터 해상교역·수군활동이 왕성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바다를 다닐 수 있는 큰배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땟목배나 강에서 사용하는 나룻배로 대해를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학자들은 고구려가 풍성하고 뛰어난 재질의 나무를 써서 중국의 누선(樓船)을 모방, 변형한 배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의 누선은 배의 갑판 위에 방을 세운 것인데, 고려 이후의 배가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데다 우리 민족이 전통을 지키는 보수적인 성향인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의 배도 평저선에 돛이 없고 노를 저어 가는 노선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해운선은 많은 짐과 사람을 운반하는 큰 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큰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사람이 수십 개의 노를 저어야 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잡혀 온 노예나 최하층 계급 서민들이었다.
내륙의 수많은 강에서는 뗏목 배와 작은 목제 구조선이 이용되었다.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성의 대동강을 타고 다니던 배는 갈대로 엮은 지붕을 씌운 작은 누선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조선술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조선시대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요동과 산동반도를 해로로 왕래했던 경험과 내륙 수로를 이용했던 경험, 그리고 중국과 해상교역을 하면서 배운 중국배의 제조기술과 항해술 등을 바탕으로 조선술의 발달을 이루어간 듯하다.
이와 관련해 235년에는 2년 전 공손씨 세력에 죽을 뻔했던 오 나라 사신을 구해준 대가로 당대 중국에서 항해술과 조선술이 가장 발달했던 오 나라가 보물을 배로 싣고 와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바치자 그 답례로 동천왕이 수백 필의 말을 주었으나 오 나라의 배가 작아 80필밖에 못 실어 고구려의 배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338년에는 중국의 후조국이 고구려와 합동으로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전연국을 치기 위해 300척의 배에 300만 두의 곡식을 싣고 와 고구려를 도왔다는 기록도 있어, 고구려가 중국 배의 제조술을 접하고 배울 기회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39년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지나 해역과 접해있던 송나라로 한꺼번에 800필의 말을 해상 운반했다는 기록을 보아도 큰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기술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구려가 왕도를 첫 도읍지인 만주 내륙 졸본에서 압록강에 인접한 국내성으로 옮긴 이유중의 하나는 압록강의 수로를 이용해 바다로 진출하고 국내성으로 들어오는 조공물 등 각종물자를 수로를 이용해 대량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 백제와 가야, 왜군을 치기 위해 고구려 수군이 거의 압록강 어구에서 출발했다는 기록을 보아도 고구려의 조선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국내성과 인접한 압록강변이나 압록강어구 또는 요동반도 끝의 비사성 근방, 후기 도읍지인 평양성의 대동강 어구 등에 조선장이 많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유적이나 유물을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어 조선소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의 항구 나루터, 부두시설 등의 유적이 나오고 있어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항구와 운하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띄우려면 나루터나 항구 등의 정박시설이 필요하다. 강변에 배를 세우는 곳을 나루, 해변에 큰배를 정박시키는 곳을 항구라 한다. 강 너비가 300보(약 540m)인 압록강과 요하, 대동강, 송화강 등의 강변에는 나루와 나룻배가 많았고, 바닷가에는 큰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여러 곳 있었다고 ‘통전’ 중 고구려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국내성 터 남쪽강변에 배를 매어두는 돌이 발견되었고, 압록강 입구 안동시(중국쪽) 북쪽 강기슭에서도 부두를 만들었던 석축시설이 발견되어 고구려에 항구가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구려 후기에는 평양성에 대동강을 연결하는 운하까지 만들어졌음을 유적으로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수도를 427년 평양으로 옮긴 후 대동강의 수상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평양 근처에 운하와 갑문까지 만들었다.
‘조선 유적유물도감’에 보면 청암리성(평양) 동문 근처에는 배가 성안으로 드나들도록 작은 운하를 만들었고, 평양외성에서 중심까지 3km의 운하를 팠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평양성기’는 대동강의 조수가 늘면 물이 이 운하로 들어와 노선(갈대 지붕을 씌운 나룻배)들이 물자를 싣고 중성까지 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운하는 조공물이나 왕궁에서 필요한 물자를 신속하게 왕궁내 창고까지 운반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양 외성 밖(평천구역)에는 보조 운하까지 만들어졌다. 너비 10m의 축석 운하로, 큰 운하에 배들이 찼을 때 사용하기 위한 비상용이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평양 외성 운하입구인 다경문에는 큰 판석으로 축조한 갑문시설도 있었다. 조수의 간만에 관계없이 운하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해 항상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3. 삼국을 통일시킨 신라의 교통로
신라의 건국과정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 강대국이 된 이유 중 하나는 일찍부터 전국에 걸쳐 교통로를 개척하고 이를 통해 군사, 경제, 문화교류, 중앙집권에 의한 지방통치 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정식으로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2세기경 지방 소국(小國)시대부터 중국·일본 등과 활발하게 해상교역을 하고 교통로를 통해 영토를 늘려갔으며 백제·고구려와 교류를 함으로써 번창할 수 있었다.
특히 9세기 초에는 해상왕 장보고를 배출해 동양의 해상교통을 장악하는 한편 선박의 제조기술이 발전해 일본이 배워갈 정도였다. 또한 비교적 평지가 많아 도로를 잘 닦을 수 있었기 때문에 수레를 많이 써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토를 확장했다.
특히 국민에게 수레사용법을 가르칠 만큼 수레가 널리 쓰였고 한국 교통변천 3천년사 중에서 조선조 이전의 교통에 관련된 유물·기록·유적들이 가장 많이 발굴된 고대국가다.
신라는 한반도 남쪽에 있던 삼한의 12개 재후국 중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이 발전해 영남의 경주를 중심으로 독립한 국가다. 처음에는 척라(尺羅), 사라(斯羅), 서라벌(徐羅伐) 등으로 불리다가 주변 재후국들과 가야국을 정복해 고구려, 백제와 대등할 만큼 세력이 강해진 503년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주지역으로 이주해 와 살고있던 고조선 유민의 6부락 촌장들이 양산촌 출신인 박혁거세를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추대해 세운 나라다. 사로국은 주변에 있던 한의 소국들과 가야를 차례로 정복해 2세기 중엽 낙동강 동쪽지역을 다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사로국은 백제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대 강국인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450년까지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해 3국을 통일하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676년 3국을 통일, 당나라의 세력까지 물리친 후 1천 년의 역사를 이으며 번창하다가 정치적 내분, 관리들의 부패로 935년 고려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신라의 경제상황
신라는 농업국가로서 일찍부터 철기문화가 농업이 발달했고 아울러 목축업도 성했다. 특히 소와 말을 많이 사육해 농경과 수레 견인용으로 썼다. ‘삼국유사’에 신라 제3대 왕인 유리니사금(283)은 쟁기인 보습과 얼음창고, 수레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같은 기구를 사용하기 위해 말을 많이 길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직조와 철제도구를 만드는 수공업도 발달했는데, 경주의 조양동 38호 무덤에서 출토된 철검과 쇠도끼 그리고 이 같은 철제도구의 소재인 철정(쇠덩이)이 4∼6세기의 신라무덤에서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철정은 초기에서 중기까지 보호를 받고 있던 고구려에서 교역을 통해 수입했거나 소백산맥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철을 일찍부터 발달한 주조기술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동해를 끼고 있어 농업 못지 않게 수산업도 발달했다. 삼국사기 중 실성니사금 15년(416) 편에는 ‘동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크기가 수레에 가득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래, 상어 등의 큰 물고기를 낚는 것은 고기잡이 기술이 발달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삼국사기’는 또 ‘신문왕(683)이 왕비를 맞기 위해 혼인예물로 쌀·술·기름·간장·꿀·된장·말린 물고기·젓갈 등을 135수레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린 고기와 젓갈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수산업의 발전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기의 교통로
신라 초기의 교통로는 사람의 왕래·사냥·물물교환을 위해 고대인들이 개척한 길이었다. 고대인들은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길을 만들었는데, 형상강 상류에 있는 경주를 출발해 강변 낮은 지대를 따라 포항방면에 이르는 동쪽 진출의 길이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이 첫 교통로가 개척된 때를 탈해왕시대(57∼79)로 보고 있는데, 형상강 지대는 큰 호수·높은 산·산맥 등 장애물이 적어 길을 뚫기가 쉬웠다. 이 형상강 교통로를 통해 포항에서 북으로는 영덕·삼척 방면, 남으로는 울산·동래·낙동강하구까지 비교적 쉽게 길을 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개척된 교통로는 서쪽 진출로였다. 파사왕 때는 서쪽 금호강 유역의 압록하(금호강지류=경산)·골벌국(연천)·다벌국(대구)·초팔국(협천)이 정복되었고, 파사왕은 가야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계획적인 교통로를 개척했다. 이것 역시 토목공사로 만든 게 아니라 자연지형을 이용해 만든 길이었다.
가장 오래된 계립령 교통로
신라 제8대왕인 아달라는 파사왕이 개척한 서쪽방향 교통로를 이용해 대구에서 상주를 거쳐 계립령(鷄立嶺)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척하고, 이어 문경과 충주로 연결하기 위해 고대부터 이용하던 소백산맥을 넘는 계립령길을 156년에, 제천과 원주로 가는 소백산맥의 죽령길을 158년에 넓게 닦았다. 바로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삼국사기 아달라왕 편의 ‘소백산 남쪽가지에 있는 죽령(竹嶺)은 신라 아달라왕이 처음으로 길을 개통했다’는 구절이다. 말하자면 신라의 아달라왕은 우리나라 도로역사상 처음으로 토목공사를 벌여 인공적인 도로를 만든 왕인 셈인데, 이 첫 도로의 너비는 수레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경주∼대구∼선산∼상주∼계립령∼문경∼충주로 이어지는 계립령 교통로는 신라 소지왕시대 이전에는 주로 물물교환과 왕래를 위한 길이었으나 소지왕 이후부터는 신라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북진의 길이 되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길로 여겨 소지왕 9년(487)에 계립령 교통로를 관도(官道)로 지정했다. 이 계립령이 바로 충북의 연풍 동북쪽 40리 지점의 월악산맥을 넘는 이화령 고갯길이다.
계립령 길 다음으로 오래된 교통로로 알려져 있는 길이 바로 옆 문경새재다. 문경새재는 정확히 언제 개통되었을까.
문경지방의 구전기록을 보면 ‘문경새재는 예전 삼국시대에 남북을 분단시킨 고개로서 고구려와 신라 양국의 국경이었다. 그런데 아달라왕 때 계림재 길이 생겼다. 처음에는 한입재라 불렀는데, 여기에는 고사갈이 성(城)이 있었다.
고려 태조가 남쪽 정벌에 나서서 이 성에 도착하니 성주 홍달이가 귀순해 성을 개방했고, 새 길을 내 이로부터 새재(新嶺)라 불렀다’고 되어 있다.
즉 왕건이 신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계립령재를 넘을 때 고사갈이 성을 지키던 성주 홍달이가 항복하고 귀순했다. 이어 왕건은 고사갈이 성을 백성에게 개방하고 새 길을 뚫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생긴 길이 문경새재다. 그러니까 문경 새재는 아달라왕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훨씬 훗날인 고려 초에 왕건의 명령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온달장군의 한이 서린 계립령길
흔히들 문경새재를 새(鳥)가 많아 새재라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새로 만들었다 해서 신령(新嶺)으로 표기한 것을 백성들이 쉽게 풀어 새재라 불렀던 것. 후대로 오면서 유난히 이 고개에 새(鳥)가 많아 새(新)를 나는 새(鳥)로 오인, 문경새재(鳥嶺)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 고개를 넘어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조 숙종 때는 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조령에 세 겹 성을 쌓고 이 고개 양쪽 입구에 울타리를 친 관문을 만들어 행인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한편 계립령은 고구려 평원왕의 바보 사위인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패전해 전사한 고개로도 유명하다. 온달은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의 남편으로 영양왕 1년인 서기 590년 계립령 고갯길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장사를 지내기 위해 군인들이 관을 옮기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이미 생사가 정해졌으니 돌아갑시다”라고 호소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전한다.
온달에게는 계립령이 고개 너머의 신라를 정복하지 못해 원한이 사무친 길이고, 길을 낸지 400여 년 후까지 고구려와 신라가 영토를 서로 확장하는데 절대 필요했던 교통로였다. 또한 고대 한반도의 남부와 중,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제일의 국가대로였다.
온달장군 전쟁 후 신라는 계립령길을 문경∼중원∼충주∼음성∼장호원∼한강중류로 연결하는 중부행 교통로로 발전시켰다
4. 신라의 교통길과 수레를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하다
158년 신라 아달라왕은 소백산 남쪽 부근 죽령을 통과하는 길을 넓게 닦았다. 한강유역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과 함께 소금의 운반에 이용하는 한편 중국행 뱃길과 연결하려는 의도였다.
이밖에도 왕도인 경주와 정복한 각지방 행정 중심지를 연결하는 신라의 도로망은 정치·군사·경제·문화교류·행정의 대동맥이 되어 신라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다지는 기반이 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부국의 밑바탕이 된 신라의 길
둘째로 오래된 길, 죽령 교통로
계립령 교통로를 낸 아달라왕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58년 소백산 남쪽(희방사) 부근의 죽령을 통과하는 길을 개통시켰다. 원래 이 죽령길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와 살던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북을 왕래하기 위해 뚫은 오솔길이었으나 아달라왕이 다시 넓게 닦았다는 것이다.
다른 전설에는 아달라 왕의 부하장수였던 죽죽(竹竹)이 좁고 높은 고갯길을 넓게 열었다 하여 죽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가 이 죽령길을 서둘러 뚫은 것은 한강유역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생활에 절대 필요한 소금을 서해로부터 얻기 위한 소금길과 한강에서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한 뱃길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컸다.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일조시간이 길며 갯벌이 발달했기 때문에 신라가 접하고있는 동해안이나 남해안보다 소금 만들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소금 산지인 서해안의 소금은 질이 좋아 한강유역은 물론 북부 고구려와 백제의 남부지방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라는 무엇보다 죽령을 지나는 길이 필요했다. 서해의 소금을 배에 싣고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북한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내려와 충주호를 지나 단양까지 온 소금을 육로로 수입하고 교역도 활발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넓게 뚫리기 전의 죽령길은 고구려와 교역을 하기 위한 상인들의 길이었다. 서기 500년 소지왕 때부터는 고구려와 대결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신라는 545년 무렵 죽령 교통로를 거쳐 단양(적성)으로 진출했다.
진흥왕 때인 551년에는 고구려 영토였던 강원도 지역 10개 군을 쟁취한 뒤 강원도 내륙까지 깊이 진출하여 경주∼죽령∼충주∼재천∼원주∼춘천∼금화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척했다. 이 길은 신라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으로 가기 위한 추풍령 교통로 개척
신라가 경주에서 서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압독국(지금의 경북 경산)을 정복한 시기인 파사왕 23년(102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3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의 교통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죽령 쪽의 소문국(召文國. 경북 의성), 계립령 쪽의 사벌국(경북 상주), 추풍령 쪽의 감문국(甘文國. 경북 김천)등 진한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이들 지역과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뚫었다.
서기 450년 신라의 한 장군이 추풍령의 변경을 지키던 고구려 장군을 살해한 사건 때문에 양국은 점차 적대관계로 변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13대 자비왕 때인 470년부터 경주∼영천∼대구∼선산∼상주∼추풍령∼옥천 교통로를 개척하여 곳곳에 군사적 요새를 쌓아나갔다.
추풍령 교통로는 경제적인 목적보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 이들 두 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 큰 길이었다.
신라는 추풍령 교통로를 개척한 뒤 계속 북쪽으로 이어나가 6세기 중엽인 진흥왕 때 비로소 추풍령∼보은∼진천∼이천∼하남∼서울을 연결하는 한강 하류 교통로를 열었다. 현재 추풍령에서 서울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개척한 교통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진천과 중평 사이 길목에는 신라가 축조한 길이 28간의 석판다리인 용교가 있고, 중평 길 양쪽에는 길을 닦기 위해 삭토한 헌적이 발견되었다. 또 진천과 괴산을 잇는 길에 있는 두타산 정상에는 이 길을 지키기 위해 만든 두타산성의 유적도 발견되었다.
추풍령 교통로는 중국을 오가는 길로서도 중요했다. 신라는 특히 중국의 선진 문물에 욕심이 커서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25대 진흥왕 때에 경주∼진천∼서해안 남양만을 잇는 교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553년부터 남양만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백제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6세기 말에는 경주∼상주∼보은∼청주∼진천∼직산∼남양만(담항성)의 중국행 교통로를 완전히 개척하여 서쪽 길도 확보했다. 중국사기인 <송고승전>에 보면 원효와 의상대사가 당으로 유학 가기 위해 이 길을 거쳐 남양만에 이른 뒤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 중류 교통로의 개척
신라가 한강 유역과 북쪽으로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한강 하류에 있던 백제의 소국 6개를 정복한 진흥왕 14년(553)이었다. 이 무렵에 경주∼상주∼보은∼중평∼농교∼진천∼이천∼하남∼서울의 교통로가 완성되었다. 이때부터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신라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대치했다.
경주∼상주∼한강의 교통로를 개척한 신라는 계속하여 한강 북쪽 고구려와 연결하는 교통로를 뚫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고구려가 남침하기 위해 개척한 길과 신라가 고구려의 침투를 방어하기 위해 개척한 교통로가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이 교통로를 개척할 때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길을 뚫었던 덕분이다.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는 길은 서울∼한강 중류∼아차산∼의정부∼법원∼적성∼동두천 서북의 감악산∼임진강으로 이어졌다.
감악산에 있던 칠중성은 고구려의 남침을 방어하는 데에 중요한 성일 뿐만 아니라 평양∼서울간 교통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이 칠중성 앞의 임진강은 강폭이 좁고 여울이 얕아 건너다니기 쉬워 신라의 대 북쪽 진출 교통로가 되었다.
고구려로서도 중요한 대남 교통로로 초기부터 이용하던 자연적 길을 조금씩 정비해서 쓰던 교통로였다. 고구려가 선덕왕 때 2회, 무열왕 때 4회 등 여러 번 집중적으로 이 칠중성을 공격했던 기록을 보더라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인지 잘 알 수 있다.
고구려로 가기 위한 한강 상류 교통로의 개척
신라는 한강 하류와 중류를 잇는 교통로를 6세기 후반까지 완성한 뒤, 완만한 계곡과 구릉지 같은 자연조건과 고구려의 교통로를 활용하여 서울∼의정부∼포천∼한탄강∼철원∼원산∼함흥 길을 개척했다. 이 길도 삼국통일 전에는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한 군사용으로, 중요 지점에 많은 성을 쌓아 보호했다.
포천의 반월산성, 성동리산성, 고모리산성(노고산), 철원의 아차산 등이 그것이다. 서울서 함흥에 가려면 이들 산성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었다.
나중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길을 동북관도로 지정하여 함흥 가는 길로 자주 이용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라가 6세기말까지 개척한 교통로는 한반도의 동북부와 중부 일대를 쟁취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왕도인 경주와 정복한 각지방 행정 중심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은 정치·군사·경제·문화교류·행정의 대동맥으로 쓰여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굳힘으로써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특히 중요 교통로는 국가가 관도(官道)로 지정하고, 5세기부터 이를 이용한 우역(郵驛)제도와 관도 관리기구까지 시행하면서 삼국통일을 위한 대비를 해나갔다.
신라의 우역과 관도 제도
우역의 설치와 운영
우역이란 임금이 상주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와 지방행정 중심지 사이를 잇는 통신과 교통수단을 뜻한다. 임금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나라에 바치는 조공물 등을 도보나 가마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우역제도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고조선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기원전 12세기인 중국 주나라 초기에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중앙집권제도가 실시된 뒤 나라의 문서를 지방에 전달하고 조공을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 국도(國道)를 닦고 이 길을 오가는 관리들에게 숙박, 식사, 말, 수레, 배 등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 무렵 중국과 인접하여 문물교역이 활발했던 고조선 말기에 이 제도가 도입되었고,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구려가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 우역제도가 도입된 것은 소지왕 9년인 487년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에 보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요 교통로에 역 이름 다섯 개가 나온다.
신라의 우역제도는 소지왕 이전부터 실시했지만 소지왕 시대에 이를 더욱 확대하여 역과 관도의 정비를 담당하는 관청과 관리관인 유사(有司)까지 두었다. 신라가 우역제도를 발달시킨 목적은 관도를 통하여 군사와 통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는 신분이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나라의 명령이나 조공을 전달하는 전담 관리, 군인, 지배층 계급들이었다.
신라 관도의 규모
관도는 신라 수도인 경주와 지방 행정지역을 연결하는 국가 관리의 교통로다. 이 길은 군사나 군수품의 이동, 국가의 우역제도 시행, 경제 교류와 교역을 위해 필요한 수레를 이용할 목적으로 나라가 정비하거나 건설한 도로다.
기록상으로는 아달라왕 시대인 150년대에 개척된 죽령로와 계립령로를 관도의 효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역제도를 시행하고 국민들에게 수레의 이용을 권장한 소지왕 9년(487)이 본격적으로 관도를 정비하고 확장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관도의 규모나 구조, 노선의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이 충분히 발견되지 않아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경주와 대구 지역에서 발견된 소규모 도로유적을 살펴서 당시 도시 안팎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도로유적 가운데 황룡사 남쪽 외곽의 동서도로는 가장 오래된 관도다. 이 길은 상·하층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단단히 다져서 마무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상층에서 70cm 아래에 있는 도로지반을 10cm쯤 되는 자갈과 황갈색 점토를 혼합하여 다져 올린 위에 다시 30cm두께로 흙갈색 점토를 포설하고 상층도로 표면은 황갈색 사질토를 5cm 두께로 덮었다.
하층도로 양쪽에는 돌을 쌓아 만든 배수구까지 있어 매우 발달된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다. 황룡사 동쪽 외곽에 있는 동서로도 남쪽 외곽 동서로처럼 상·하층 구조에다 직경 5cm쯤 되는 자갈과 점토로 다져진 두께 5m짜리 도로다. 이 도로는 남쪽 도로보다 늦은 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 남쪽 동서로도 상·하층 구조로 축조되었다. 퇴적층 위에 10cm쯤 암갈색 점토를 깔고 그 위에 잔자갈과 갈색 점토를 혼합하며 10cm를 덮고 다진 다음 상층 노면을 황갈색 사질토와 잔자갈이 섞인 모래로 단단히 다져 마무리했다.
대구지역에서 발굴된 도로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관도 가운데 가장 길고 큰 도로로서, 길이 38m에 폭이 2m나 된다. 도로 하부에는 암갈색 점토를 깔고 그 위에 깬 돌과 자갈을 깔아 표면을 단단히 다졌다.
도로 유적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닌 흔적이 두 줄로 나 있는 것을 보면 신라의 관도는 주로 수레가 오가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수레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배수구까지 설치하여 단단히 쌓아 올린 것을 보면 토목기술과 포장기술이 매우 발달했던 듯싶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도로유적들은 도시 안의 도로뿐이어서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관도도 기술적으로 잘 건설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금 수준이 떨어질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수없이 많은 노선들을 도시 도로처럼 축조하자면 경제적 부담이 크고 엄청난 인력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교통로를 수레나 군사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넓히고 보수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경주에서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다리도 많이 놓았을 텐데, 이를 뒷받침하는 다리 유적은 지금까지 하나만 발견되었다. 추풍령 교통로의 진천과 중평 사이에 놓인 28간 짜리 석판다리인 ‘용교’가 그곳이다. 기록을 보면 많은 다리가 있었던 듯하다.
<삼국유사> 흥법(興法)편 아도기라기에는 경주의 서천(西川)에 놓았다는 ‘금교’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기이(紀異)편 도화녀 비형랑기에도 경주의 서쪽 황천에 놓았다는 ‘귀교(큰다리)’ 이야기가 있어 관도에 많은 다리를 건설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건설하거나 정비한 관도는 병부(兵府)가 관리했으나 눌지왕 이후에는 승부(乘府)라는 전담 부서를 두어 관도의 개보수·건설·확장공사는 물론 우역을 위한 숙식시설과 말의 대여를 맡겼고, 유사(有司)라는 최고 책임자까지 두었다.
수레의 보급에 앞장섰던 신라왕
유물이나 여러 기록을 보면 신라는 수레를 많이 이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레 유물은 실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고분에서 토기로 만든 수레가 발견되었다. 신라 제13대 미추왕(262∼284) 능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수레모양 토기가 있다.
이 토기는 높이가 12.5cm에 바퀴 지름이 12.3cm의 두 바퀴 수레인데,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적재함이 달려 있다. 또 경주 25호 고분에서 출토된 차형(車型) 토기는 매우 발달한 신라 중기의 수레 모양을 나타낸다. 바퀴 살이 16개인 것을 보면 신라의 귀족이나 장수들이 탔던 전차(戰車) 가운데 하나였던 듯하다.
그밖에 수레가 조각된 기와도 출토되었다. 이 기와에는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좌우에 늘어뜨린 바퀴 달린 연(輦)이 조각되어 있다. 연은 왕이 타는 호화로운 가마로서 신라시대 왕들은 궁궐 안이나 도시 내를 행차할 때 바퀴 달린 연을 탔다.
문헌상의 기록도 많다. <삼국사기>에는 제18대 실성이사금 15년(416)에 동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크기가 수레에 가득 찼다고 했다. 기록상으로 처음 수레를 언급한 것인데, 이때 잡은 고기를 ‘한 마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래나 큰 상어인 듯싶다. 고기가 너무 커서 사람이 손으로 운반하지 못해 수레에 싣고 간 모양이다.
신라가 백성들에게 수레 이용을 권장했던 것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명백히 나타난다. 제19대 눌지왕은 재위 22년째인 438년에 귀족은 물론 백성들에게 국가적으로 우차법(牛車法)을 만들어 수레 이용을 가르쳤다고 했다.
제22대 지증왕은 재위 6년 무렵인 505년부터 백성들에게 수레 이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 귀족과 백성들의 수레 이용을 규정한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기도 했다.
수레를 승용과 짐수레로 나누고 승용 수레는 왕족인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귀족까지만 탈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 또 수레의 치장이나 말의 치장도 계급에 따라 다르게 했다. 왕족인 진골이 타는 수레는 가장 좋은 목재를 쓰고 화려한 치장을 했고, 그 밑으로 내려갈수록 간소하게 단장했다
5.신라의 수레와 해상교통 극동의 해상권을 장악하다
9세기 들어 통일신라는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기를 맞았지만 해상무역은 크게 발전했다.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백성들이 자유롭게 해상으로 진출, 일본·중국을 상대로 활발하게 교역을 해나간 덕분이다.
이 시기 신라가 최대의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장보고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 극동해상의 교역권을 장악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수레의 모양과 가마의 용도
신라 귀족 중에는 수레를 모는 기술이 특출한 사람이 있었다. 제29대 태종 무열왕(604∼661)의 둘째 아들로서 신라의 장군이며 외교관에다 유학(儒學)의 대가였던 김인문이 활쏘기와 수레운전에 능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귀족이 수레와 짐수레를 끌고 다녔을 리 없지만 아마도 전장에서 사용하는 전차(戰車)를 잘 몰고 활쏘기에 능했던 것을 말한 듯하다.
한편 신라에서는 가마가 이용되었다. 고구려에서도 가마를 이용한 것 같으나 구체적인 사료가 없고 다만 여인들이 주로 탔으며 수레만큼 많이 이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가마를 이용했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데, 왕이나 귀족 여인들이 주로 탔다. 신라 31대 신문왕(681∼691)은 즉위 3년째 되던 683년에 일길찬(정승급) 김흠운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가마와 비단을 가득 실은 수레를 처가에 보냈고, 결혼식 잔치용으로 15수레 분량의 쌀·술·기름·꿀·간장·된장·생선포와 135 수레 분량의 식혜, 150수레 분량의 벼 등 도합 300대의 수레로 물건을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귀족 여인들은 주로 가마를 탔음을 알 수 있고, 신문왕이 이렇게 많은 수레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에서 수레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특히 신라중기(600) 이후에는 육상교통과 수레, 말, 가마 등을 관장하는 승부(乘府)가 궁궐 안에 생겨 이처럼 많은 수레를 동원할 수 있었다.
신라 수레의 모양은 무덤에서 나온 수레형 토기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퀴살이 12∼16개인 두 바퀴 수레가 주종을 이루었고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사각함이 두 바퀴 사이 차축 위에 설치되어 있다.
귀족용 수레는 계급에 따라 치장, 의자, 의자 깔개 등이 다르지만 모양은 2륜 수레로 통일한 듯하다. 백성들이 사용하는 화물 운반용 수레도 2륜 수레인데 승용과 화물운반용을 겸하는 간소한 수레로서 끄는 동물이 다를 뿐이다. 귀족 수레는 주로 승용이라 빠른 말 1∼2필이 끌었고, 짐수레는 힘이 센 소가 끌었다.
수레의 적재량은 얼마나 될까하는 문제는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 보면 문무왕(661∼668) 2년 1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포위하고 있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지원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수레 2천 대를 동원, 쌀 4천 석과 벼 2만2천 섬을 실어 경주에서 평양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한 대가 쌀 2석과 벼 11섬 등 13가마니를 운반할 수 있었으니 꽤나 큰 수레였다.
짐 운반용 수레가 큰 것이었다는 증거는 바퀴자국 유적에서도 알 수 있다. 경주 황룡사 동쪽에 있는 왕경지역의 신라시대 도로유적에서 폭이 90cm쯤 되는 수레의 두 바퀴자국이 발견되었고, 충북 보은군의 삼년산성 서문 터에서도 폭이 165cm쯤 되는 바퀴자국이 발견된 것을 보면 수레도 소형과 대형이 있었던 것 같다.
큰 수레 바퀴자국의 폭이 160cm를 넘는 것을 보면 수레의 전체 너비는 180cm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앉을 수 있을 만큼 커서 이런 수레는 소 또는 말 두 필이 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이렇게 귀족이나 서민 할 것 없이 두루 쓰던 수레는 모양이나 크기가 달라서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고구려처럼 상당한 대우를 받았고 국가에서 수레기술을 적극 장려해 제조기술이 매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해상왕 장보고를 배출한 신라의 해상교통
내륙수상교통
내륙의 강을 이용한 신라의 수상교통은 삼국통일 이전 삼국시대인 4세기까지는 영토가 경상북도에 국한되었고 이 지역은 깊고 긴 강이 거의 없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제법 길고 큰 강이 있었다면 경주에서 포항의 영일만으로 연결되는 형산강뿐이었다.
형산강 역시 깊고 넓지 않아 주로 강 연안 길로 왕래했기 때문에 나룻배나 노를 저어 가는 강선(江船)교통은 그리 발달하지 못한 것 같다. 신라초기의 내륙수상교통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땟목배나 나무둥치를 파서 만든 반구조선 정도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신라의 내륙수상교통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낙동강지역의 가야국과 한반도 중부의 한강유역으로 영토가 확장되면서부터였다. 6세기 들어 신라는 중, 남부 지역을 통일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깊은 한강, 낙동강, 섬진강 등을 수상운수에 적극 이용했다.
통일신라로 들어와서는 이러한 내륙의 강들이 수상운수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 조공물 수송과 내륙의 농산물들을 각지로 수송하는데 최대한 이용되었다.
신라가 강을 내륙수상운수에 이용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 들어 있다. 제14대왕 유레이사금 6년(286) 5월에 배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때는 신라초기라 형산강을 통해 조공물을 경주로 수송하기 위한 강선(江船)을 만들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제22대 지증왕 6년(505) 11월에 강에서 배를 수송용으로 적극 이용하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신라인들이 강이나 호수에서 어떤 배를 이용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유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배가 그 일부분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이 배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길이 5.9m에 폭 1.5m의 소나무로 만든 반구조선으로 돛이 없는 노선이다. 아마도 안압지에서 왕의 유람선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교통
삼국 중에서 해상교통과 무역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했던 나라가 신라였다. 삼국 중기까지는 백제가 발달했으나 신라는 6세기 들어 삼국을 통일하면서 당나라와 일본·신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과 함께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해상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라의 해민(海民)들은 3세기경부터 한반도 남해의 낙동강 어구를 거처 흑산도로, 황해를 건너 중국(진나라시대)으로 흘러 들어가 산동반도에서 장강(양자강)어구 사이 중국해 황해 연안에 퍼져 살기 시작했는데, 6세기 초 한반도의 한강일대인 중부지역과 동부지역을 통일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던 당나라 초부터 본격화되었다.
중국으로 이주한 신라인들은 5세기말부터 산동반도의 동주에 신라관, 문등현에 신라소, 희하 하류의 초주등에 신라방 등 신라의 집단촌을 차차 늘려가면서 해상무역과 상인들의 숙박, 교통을 돕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국내의 세력을 이용해 6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의 삼한을 통일한 신라인들은 남해를 돌지 않고 서해의 직항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은 물론 왕래를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중국과의 활발한 해상교류는 항해술과 선박제조기술 발달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정식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제22대 지증왕 13년(521)부터다.
이 해에 신라 조정에서는 처음으로 서해에 배를 띄워 당에 친교사신을 파견했고, 같은 해 울릉도를 병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를 보면 신라가 해상교통에 자신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의 배가 늘고 백성들의 해상교통이 왕성해지자 해상 운수를 통제하기 위한 선부(船府)가 제26대 진평왕 5년(583) 1월에 설치되었다. 신라와 당나라간의 해상교통이 가장 왕성했던 때는 당나라 무덕왕 4년(621)이었다. 이때 신라와 당은 두 개의 서해항로를 이용했다.
신라서 당으로 갈 때에는 한강하구나 남양만에서 산동반도로 직항하거나 전남 영암부근에서 흑산도를 거쳐 상해 아래 항주만을 통해 갔다고 <조선통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당에서 신라나 일본으로 갈 때는 산동반도 해안을 타고 북상해 발해만을 거쳐 여순→대련→압록강 입구를 지나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남양만이나 당진부근에서 육로를 따라 신라의 경주로 들어가거나,
남양만을 지나 남하해 완도의 청해진을 거쳐 부산→경주로 들어갔고, 일본항로는 부산을 출발해 남지나해로부터 북상하는 흑조(黑潮) 해류를 타고 대마도로 향해 규슈→일본으로 이어졌다고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당나라 이전의 중국과 신라의 해상교통은 어떤 루트로 이루어졌을까. 3세기후반 초기에는 요동반도 연안 항로를 개척해 왕래했다. 산동반도 북부해안의 봉래에서 요동반도의 남단 여순을 거쳐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북상, 압록강 입구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으로 오는 해로였다.
이때는 항해술과 배가 황해로 직항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주로 이 항로를 이용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가 많아 어려운 항로였고 이에 따라 중국과의 원활한 교역을 위해서도 신라는 삼국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세기 이후 고구려가 요동반도 연안해로를 본격적으로 막아 황해를 횡단하는 직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는 고구려의 봉쇄도 있었지만 그만큼 항해술과 배가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한반도 서해의 남양만과 중국 산동반도를 직결하는 황해 직항로를 이용해 항해 시간과 경비를 절약했다.
첫 황해 횡단항로는 4세기경 중국의 위나라가 개척해 사용했다. 원래는 육로를 통해 한반도 여러 나라들과 왕래했는데 4세기 초 요동반도를 공손씨 일파가 점령하고 세력을 키우면서 위와 한반도간의 육로를 막아 할 수 없이 황해횡단 해로를 개척한 것이었고, 삼국시대에 와서는 고구려가 해로뿐만 아니라 당나라간의 육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신라는 위나라가 개척한 황해해로를 다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일본의 유명한 승려인 엔닌(圓仁, 794∼864)이 838년부터 847까지 9년 6개월 동안 당나라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에 신라의 해상교통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겨 신라의 해상교류가 발달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의 해상교통은 대개 세 시대로 나뉜다. 신라건국부터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사신파견으로 중국과 국교를 맺고 세력을 강화하던 ‘견사 해운시대’가 처음이고, 그 다음이 5세기 초부터 통일신라시대 동안 일본·중국과 무역이 왕성했던 ‘해상교역시대’다. 그리고 마지막이 신라 말기 해상왕 장보고가 동남아해상 교역을 장악하던 시기다.
신라가 극동의 해상권을 최대로 장악한 시기는 통일신라말기였다. 통일신라 후기에 접어들면서 신라내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기가 찾아왔고,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개인활동이 자유로워진 백성들이 마음대로 해상으로 진출해 대한해협과 황해·동지나해를 무대로 일본·중국과 해상무역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정치적으로 쇠퇴할 무렵이었지만 민간의 해상활동은 더욱 강해져 극동의 해상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
9세기 들어 신라가 해상교통·해상교역·항해술·조선기술에서 최대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해상교역의 대가였던 장보고(張保皐, ?∼846)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 근방에 해상진출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병력을 이용해 동양 삼국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면서 극동해상의 교역권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해상교역을 활발히 하는 동안 당나라와 일본의 사신·승려·유학생들의 왕래에 배를 제공하고 정부간 교류와 통신을 대신 해주는 한편 선박 건조와 수선 그리고 조선기술자들까지 도와주어 신라·당·일본으로부터 정치적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지방의 가난한 어민출신으로 소년 때부터 활과 창쓰기 등 무예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어민 출신답게 수영과 자맥질(잠수)도 잘했다고 한다. 그런 장보고에게는 소년시절부터 무예나 수영에서 뒤지지 않는 정년(鄭年)이란 죽마고우가 있었다.
철이 든 궁복(장보고의 소년 때 이름)과 정년은 가난에서 벗어나 출세하고 싶어 소년의 몸으로 당나라로 들어가 수련을 쌓은 후 청년이 되자 강서성에서 이지역을 통치하던 총독인 무녕군의 군대에 입대, 뛰어난 무예와 총명함으로 무녕군 중소장(武寧軍 中小將)의 벼슬을 받아 장군으로 출세했다.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출세했던 때 신라는 왕족간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가 혼란했던 통일신라 말기였다. 이 틈을 타서 한반도 삼면 근해에는 해적들이 자주 출몰해 해상 무역선은 물론 백성들을 괴롭히고 신라사람들을 붙들어 당나라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아 넘기는 극심한 행패를 부렸지만 쇠퇴하는 신라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이를 본 장보고는 특히 당에서 신라백성들을 노예로 매매하는데 분개해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교역을 보호하기로 결심한 후 828년 당나라 장군 자격을 포기하고 귀국해 해적 토벌 군사기지 겸 해상진출의 근거지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
이어 당시 신라 임금이었던 제42대 흥덕왕(826∼836)에게 해적 소탕을 위해 군사 1만을 요청했다. 당에서 장군으로 출세했고 해상활동에 두각을 나타냈던 장보고를 알고 있던 왕은 골치 아픈 해적을 소탕해준다는 그에게 쾌히 군사를 주고 청해진대사(감독관)로 임명, 해적을 소탕해 신라의 해상권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장보고가 신라·당·일본 등 삼국해안의 해적을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은 1만의 군사와 그의 뛰어난 무예도 큰 바탕이 됐지만 그를 도와 준 두 세력도 큰 도움이 됐다.
한 세력은 한반도 서남 장보고의 고향 완도일대의 해민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 장강하구, 요동반도 해안, 경항 대운하유역에 일찍부터 건너가 살던 신라인들의 집단부락 세력들이다. 이들을 규합해 황해와 서남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극동해상교통을 지켜, 중국·신라·일본의 3국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보고의 해상왕국시대가 16년이라는 짧은 세월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정치 관여 때문이었다. 왕위를 강제로 빼앗은 민애왕은 김명을 격파하고 장보고는 그가 돕던 왕족 김우징을 839년에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신무왕은 감사하다는 표시로 감위군사라는 직위를 장보고에게 내리고 진해장군이라 불렀다. 그러나 신라조정의 신무왕 반대파 귀족과 왕족들이 장보고의 부하인 염장을 시켜 서기 846년 그를 암살하고 신무왕을 몰아냈다.
이후 문성왕이 제위 13년(851)에 청해진을 없애버려, 삼국바다의 교통·무역·군사를 장악하던 해상왕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장보고가 그의 해상활동 근거지로 삼았던 청해진을 완도에 설치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를 증명할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2001년 4월 학계 사적발굴 조사단이 완도 갯벌에서 지름 10cm의 잡목 500여 개가 바다로 향해 33m쯤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잡목행열이 청해진의 선박 접안 시설로 추측되고 있다.
신라의 조선
신라인들은 중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던 3세기 무렵부터 항해기술을 배워 신라의 해상형편에 맞도록 개발시켰다. 당나라 시대에는 신라의 항해기술이 당나라보다 훨씬 발전해 전성기를 이룬다.
백제는 한성, 웅진성, 사비성 등 역대 수도를 중심으로 도로와 다리를 건설해나갔다. 백제의 활발한 도로 건설은 영토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도로교통과 더불어 고대 통신법인 봉화제도도 일찌감치 발달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신라의 항해술, 일찍부터 발달
신라가 해상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항해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것도 한몫 했다. 신라인들은 중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항해기술을 배워 신라의 해상형편에 맞도록 더욱 개발시켰던 듯하다.
이런 신라의 항해술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당나라의 항해기술보다 훨씬 발달하여 항해술의 전성기를 이룬다. 신라의 항해술을 이해하기 전에 당나라의 항해술은 어떻게 발달했는지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된다.
신라와 당나라는 당나라 건국 때부터 멸망 때까지(618년∼907년) 무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교류, 문화교류, 나당 연합군의 군사교류, 사신교류 등으로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따라서 항해술·조선기술·선단운영술을 발전시키는 데 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보고는 소년 시절에 당으로 들어가 청년이 된 뒤 당나라 장군이 되기까지 당에서 오래 살았는데, 이때 발달된 항해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고사기(古史記)인 <해도지>(770년), <해조부>(850), <해조론>(900) 등에 따르면 당은 정확한 해류의 파악과 이를 이용한 항해술이 매우 발달했다. 해마다 4월에서 7월까지 중국 동해안에는 서남 계절풍이 불었는데, 바로 그 계절풍을 타고 일본에서 당으로 갔다.
일본 고대 역사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책인 <고사기>((古事記, 712)를 보면 한 신라 왕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돛에 관한 설화가 있다. 6세기 초에 신라 왕자인 천일모(天日矛)는 아름답고 요리 잘하는 아내가 일본으로 도망가자 그녀를 찾아 오사카부근 니나와로 건너가려 했다.
그런데, 거센 파도가 가로막아 더 갈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돌아오다가 일본의 다지마라는 곳에 머무르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왕자 천일모가 일본으로 가지고 간 보물은 옥진보 두 개, 파도를 일으키는 천, 파도를 가라앉히는 천, 바람을 일으키는 천, 바람을 잠재우는 천오경과 변경이라는 거울 두 개 해서 모두 여덟 가지였다.
여기서 각종 천은 항해에 필요한 돛을 만드는 재료를 뜻하며, 거울과 보물 두 개는 항해용 도구로 보면 된다. 따라서 신라의 항해술이 일찍부터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배는 이미 6세기 초부터 강이나 연안 해로에서 돛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신라와 당이 돛 달린 해선으로 본격적인 항해를 한 것을 8세기 초로 보고 있다. 중국 고사기인 <태평어람>에는 조병이라는 무역거상 이야기가 나오는데, 돛을 펴고 배 중앙에 앉아 큰 고함으로 바림을 불러 유유히 바다를 건넜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연대를 추정한 듯하다.
바람과 돛만 있다고 해서 넓은 바다를 항해할 수는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뱃길을 잘 아는 것이다. 당나라는 실용적인 항해도를 일찍부터 만들어 썼다. 군부 내에 직방랑중(織方郞中)이라는 항해도 전문 작성 부서까지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대의 명재상인 매탐(賣耽)이 만든 항해도인 ‘등주해행입고려발해도(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에 당에서 한반도 서해로 가는 ‘해내화이(海內華夷)’라는 뱃길이 그려져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구름 낀 날이나 별 없는 어두운 밤에도 항해할 수 있도록 나침반도 만들어 이용했다. 나침반은 고대 중국의 발명품인데, 당의 나침반은 지남철 침을 이용한 것으로 기원전 2세기 한(漢)나라 때부터 쓰던 관측성술, 즉 별을 관측하는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이렇게 중국과 오래 교류하면서 신라에는 항해도, 즉 뱃길을 잘 알고 나침반을 능숙하게 다루는 항해사인 ‘암해자(暗海者)’가 많았다. 그 증거로 당에 들어갔던 일본 사람 엔닌(園仁)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귀국선단(船團)의 배 아홉 척에 신라인 암해자 60명을 분승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신라는 항해 기술의 기본을 당에서 배워 발달시킨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은 3세기부터 바다를 거쳐 중국으로 내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해선이었다.
초기에는 육지 연안을 따라 내왕하는 연안 해로였기 때문에 주로 노를 젓는 배를 썼지만 다양한 통로로 바다를 건너는 해로교통이 발달하던 4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배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달했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당나라의 조선기술보다 크게 앞섰다.
앞선 조선기술로 주변국에 영향
또한 신라는 개국 초기부터 일본의 침략을 자주 받아 이를 막느라 수군(水軍)과 배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특히 군선, 즉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전투용 배를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대 유례왕 6년(289)과 22대 자비왕 10년에 군선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 배 만드는 기술자를 파견한 기록도 있다. 4세기 무렵 일본의 배는 기둥과 대들보를 줄로 엮어 만든 원시적인 떼배여서 신라왕이 조선기술자를 파견했다고 한다.
이때 신라에서는 목판을 붙일 때에 나무못이나 쇠못을 쓰지 않고 요철로 파내어 결합시키는 기술이 이미 발달했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사기(史記)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무코(武庫)의 수문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배 500척이 모여 있는데, 신라의 사신이 타고 온 배에서 불이 크게 번져 많은 배를 불태웠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유능한 조선기술자를 보내어 배를 만들었다. 이 사람이 곧 이나베 가문의 시조인 저명부(猪明部)다.”
기록상으로는 저명부가 일본에 건너간 신라의 첫 조선기술자인 셈이다. 오사카만 무코강 입구에서 불에 탄 신라사신의 배를 다시 만들어주고 저명부는 그대로 무코강 입구에 눌러 앉았다. 그런 뒤 그곳에 조선소를 세워 일본에서 배를 만들면서 조선기술을 전했던 것이다.
뒤에 이나베라는 일본 이름으로 바꾼 저명부의 자손들은 이세만(灣) 연안의 나고야로 옮겨 조선 기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신라의 배 건조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사신들이 당나라로 갈 때 타던 견당선(遣唐船)도 만들었다.
이나베 가문이 일본에서 만든 배는 신라 배와 구조나 크기가 같았다는 것이 증명된 일이 있다. 이세만 연안지방의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에서 `하나와` 라는 일본 배가 출토된 게 그것이다. 100명쯤 태울 수 있는 이 배는 5세기 무렵의 대형 구조선으로서 노를 꽂는 구멍이 12개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와 배와 매우 닮은 배 모양 토기가 경주에서 발굴되기도 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6세기에 등장한 일본의 견당선도 하나와 배에서 발전된 모습으로서, 신라조선기술로 만든 배임을 알 수 있다.
문무왕 18년에 중국·일본과 해상교류 늘어 - 당 거주 신라 해상민 조선기술 특히 뛰어나
신라의 뛰어난 조선기술은 배와 관계 깊은 여러 역사적 사건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제22대 지증왕 6년(505)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선(軍船)을 제도화시켜 수군을 강화했다. 또 23대 법흥왕 4년(517)에는 이 군선단을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부(兵府)에 소속시켰다.
26대 진평왕 5년(583)에는 병부에 군선과 일반 무역선을 관리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해 수군과 일반 백성들의 해상교통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데에 힘썼다. 그리고, 제29대 무열왕 7년(660)에는 왕자 법민(法敏)이 군선 100척을 이끌고 덕적도까지 출항하여 당의 수군을 환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 초기인 제30대 문무왕 18년(678)에는 중국·일본과 해상교류가 급증하여 선박이 많아졌다. 그래서 병부에 속했던 선부를 독립시켜 병부와 같은 자격을 주고 수군과 군선, 그리고 해상 무역 제도를 더욱 강화,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막강한 수군과 발달된 배는 문무왕이 당나라와 동맹한 연합 수군을 이용하여 676년 통일신라를 이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신라의 조선기술이 발달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황해와 동지나해 연안으로 이주했던 신라 유민들의 힘도 켰다. 일본 승려 엔닌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승려행기>(794∼864)와 <속일본기>를 보면 그런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는 신라 해상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자강과 경항 대운하 등 산동반도의 항구들 주변에 자리잡고 살던 신라 해상민들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신라인 집단촌을 열 군데나 꾸렸다.
그들이 운송·조선· 무역업·상업·제조업에 종사하여 중국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도록 허락했다. 특히 양자강 어귀 유산포 항구에는 서해를 건너다니는 신라인들의 대형 해양선들이 모여들어 배의 수리업과 함께 조선업도 크게 번창했다.
당나라 거주 신라 해상민들의 조선기술은 뛰어났다. 목판 한쪽을 가늘게 깎은 ‘장부’를 다른 목판에 뚫은 구멍에 끼워 맞추는 기술, 쇠못을 깎아 만드는 기술, 방수기술이 남달랐다. 그리고, 물에서 잘 썩지 않는 녹나무 같은 특수목재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까지 선보였다.
신라인들은 이런 조선기술로 원양 항해선뿐만 아니라, 하천이나 강에서 운행하는 수운선, 전투함, 경주용 용선(龍船) 등 다양한 배를 만들었다.
중국의 고서인 <구당서>에 이런 기록이 잘 나온다. 기록을 보면 신라인이 건조한 배들이 양자강의 나루터들을 장악하고, 수만 척의 배들이 주야로 왕래하여 교역을 했다. 특히 원양 항해용 해선은 선체가 웅장하고 안정성이 뛰어나 아라비아와 일본인들이 타기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훌륭한 신라인들의 조선기술은 당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중국 배는 당나라시대에 비로소 크게 발전한 듯하다. 당나라의 동래·강주·양주·상주·항주·복건 등 주요 항구에는 신라와 당나라 사람이 만든 수많은 조선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배를 만들어 군사·운수·교역에 쓰였음이 중국 고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당어림>(唐語林)에 따르면, 당의 태종인 이예(李豫)는 양자강변에 있는 유남도의 관찰사(도지사) 유안을 시켜 양자강 연안 양주 일대에 조선소를 열 곳이나 세웠다. 그래서 한 척에 100만 전짜리 큰 배 2천 척을 건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배 모양과 종류
1960년 양자강변에서 당나라시대의 배와 선창이 발견되었다. 길이 24m, 높이 1.4m, 너비 4.3m의 이 대형 당나라 선박은 녹나무로 만들었는데 장부 맞춤과 못박이 기술로 짜 맞춘 완벽한 방수선이었다. 또 1973년에 양자강변의 마항에서 출토된 길이 17m, 너비 2.6m의 삼나무로 만든 목선은 선실이 9개에다 돛이 하나 있는 범선이었다.
이 두 배는 신라의 조선기법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배들이 출토된 양자강변은 신라의 유민들이 살던 곳으로, 당나라·일본·신라인들의 출입이 잦던 항구들이 집중해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양자강변 화남도에 있는 양주와 초주 항구 근방 치외법권 지역에 모여 살던 신라인들은 해상운수업과 무역이 주된 산업이었다. 따라서 이에 필요한 선박제조와 수리업이 번성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만든 배의 모양은 어떠했을까? 엔닌의 일기나 당나라 고서인 <구당서> 기록에 잘 설명되어 있다. 범선은 갑판이 없으며 중앙에 돛과 노와 키가 있는 배다. 관선(官船)은 갑판이 있으며 문과 창이 달린 방 하나에 주위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갑판과 선창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사다리가 있었다.
방인 누각 말고는 갑판에 천막을 쳤으며, 배의 조립은 나무판재를 구부려 못으로 결합했다. 또 무거운 닻을 끌어올리고 내리는 승하강장치가 달려 있고 스무 폭쯤 되는 천으로 만든 큰 돛을 쓰는 대형 해선이었다.
이러한 신라방의 선박들은 일본 배보다 안전해서 일본사신들이나 무역상들이 즐겨 탔다. 그 증거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담겨 있다. 이 여행기의 저자인 일본승려 엔닌이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선박 9척을 신라방에서 빌려 신라 선원 60명을 태운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다.
이때 이 배를 수리하느라 양주의 신라촌에서 기사장, 목공, 선공, 철공 등 신라인 조선기술자 36명을 데려갔는데, 장보고의 도움으로 그토록 많은 배와 선원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면 서기 820년대 말부터 삼국의 바다를 장악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배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장보고의 배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나 유물,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무렵 당나라와 일본 배 또는 기록을 살펴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장보고는 대형 군선인 누선(樓船)과 쌀 1천 석쯤을 나를 수 있는 튼튼한 화물선인 조운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고려가 신라 말기에 쓰던 배의 구조나 크기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추정해 보자. 장보고가 중국·일본과 교역하자면 험한 바다를 건너다녀야 했고, 따라서 크고 튼튼한 선박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사신이나 화물주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선실이 갑판 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건너다니는 해양선은 밑바닥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尖底船)’이고, 연안을 주로 다니는 해안선은 서해안의 얕은 수심에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밑바닥이 평평한 ‘편저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본다.
항해술이 뛰어난 장보고는 속력이 빠른 배가 필요했을 것인데, 배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은 돛의 숫자다. 따라서 두 개가 넘는 독립적 기능을 가진 대형 돛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나 역사학자들의 결론이다.
1984년 전남 완도 앞바다에서 배가 한 척 발굴되었다. 완도선이라고 부르는 이 배는 선미와 선수부가 없고 상부도 삭아 없어져 배의 남은 길이는 9m, 너비가 3.5m, 높이가 1.7m로 그다지 큰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학계는 이 배를 해안을 항해하던 장보고의 청해진 배로 보고 있다.
6. 백제의 교통 국내도로와 국제도로 활발히 개척
백제의 건국과 경제
백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졸본부여 왕인 주몽의 둘째 아들인 유리가 서울 한강 상류, 지금의 강동구 부근에 위례성을 쌓고 도읍했다. 그 뒤 한강 유역에 있던 마한을 병합하여 발전한 나라다. 뒤에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 때문에 공주로 천도했다가 마지막에는 부여를 수도로 바꿨다.
백제는 전성기에 해외로 뻗어나가 해상무역으로 경제력을 키웠고, 특히 일본에 우수한 도기·조선·철기·한문 등의 백제문화를 전했다. 백제는 일본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시켜 일본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일찍이 서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남중국·일본과 교역을 함으로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백제는 32대 678년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660년 나당연합군에 멸망, 통일 신라에 흡수되었다.
백제는 초기부터 농업이 발달했으나 곧이어 쇠로 농기구를 만드는 수공업도 발달했다. 4세기 이후에는 해안을 중심으로 철을 기반으로 한 수공업이 발달해서 각종 어구를 쇠로 만들어 어업과 염전업이 함께 발달했다.
백제의 수공업은 농기구를 중심으로 무기, 생활용품, 장식품 등 여러 부문으로 발전되었다. 백제의 수공업은 크게 관청 수공업과 민간 수공업으로 나누었다 관청 수공업은 궁내 내관(內官) 소속으로서, 최고 기술자들인 장공(匠工)들을 마부(馬府), 도부(陶府), 목부(木府)로 구분해서 배치했다. 장공들은 왕족과 귀족을 위한 생활도구와 병기, 말, 수레, 배에 필요한 부속품들을 만들었다.
관청 수공업은 내관과 외관으로 나눠 운영했다. 외관에는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가 있었는데, 사공부(事工府)에서는 주로 궁궐·사찰·다리·조선·승용 수레와 달구지 제조 같은 큰 공사를 맡았다.
백제의 도로망과 다리
백제는 한성(서울)·웅진성(공주)·사비성(부여) 등 역대 수도를 중심으로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와 다리를 활발하게 건설했다. 도로가 발달한 것은 영토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백제가 점차 영토를 넓히면서 이를 통치하기 위해 고구려가 시행하던 지방통치법인 ‘5방성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전성기에 전국을 다섯 방성으로 나눴다. 이들을 중앙에서 군사·경제적으로 통치하자면 수도에서 각 방성의 성도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필수적이었다. 지방세력이 봉기할 때 중앙의 군사를 급파하여 제압하고, 각 방성의 농수산물을 수도로 편리하게 수레로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왕의 명령을 각 방성 수령에게 신속히 전달하는 데에도 국도가 요긴하게 쓰였다.
중앙에서 5개 방성을 군사·경제적으로 통치 - 광범위한 도로와 함께 수많은 다리도 건설해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523∼660)와 각 방성의 거리는 60리부터 360리까지 다양했다. 중방성인 고사성(고부)는 부여에서 남으로 260리 거리였고, 동방성인 득안성(은진)은 부여에서 동남쪽으로 100리 거리였다.
가장 먼 남방성은 부여에서 남쪽으로 360리 거리인 변성(장성)이고, 다음으로 먼 서방성은 부여에서 서쪽으로 350리 거리인 도선성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북방성인 웅 진성(공주)으로서, 부여에서 60리쯤 떨어졌다.
백제가 부여와 각 방성을 연결하는 도로는 물론 각 방성끼리 연결하는 지방도로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온다. 여러 강에 많은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도로가 발달했던 증거는 부여에서 발굴된 도로 유적이다.
부여 박물관 앞의 이 유적은 남북거리가 30m, 동서거리가 25m쯤 되는 교차도로로서, 달구지 두 대가 서로 비켜갈 수 있는 넓은 도로다. 그리고, 도로 양옆에는 돌을 깐 도랑도 부설되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는 후기인 사비성(부여) 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다섯 방성을 22담으로 더욱 세밀히 구분하고 각 담에는 왕족을 파견하며 통치했다. 이때는 5방성시대보다 도로가 더욱 발전되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 규모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수레 한 대쯤 달릴 수 있는 도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 백제의 도로와 해상교통 뛰어난 조선기술 바탕으로 주변국과 교류
백제는 임진강·한강·금강 등 넓고 긴 강이 고구려, 신라보다 많아 화물을 내륙이나 해안으로 운반하는데 수상교통을 이용했다. 이러한 내륙 수상교통의 발달은 백제가 서남해를 통해 탐라국·일본·중국과 활발하게 교역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백제인들은 노와 키, 돛이 달린 해양선을 타고 황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백제의 조선술은 중국, 일본보다 훨씬 앞섰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한반도 나라간 도로와 봉수 통신법
백제는 국내 도로망의 발전과 함께 신라·고구려·가야로 가는 국제도로도 개척했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북쪽 한성에서 평양으로 이어졌고, 신라로 가는 길은 공주에서 보은지방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 상주를 지나 경주로 향했다. 가야로 가는 길은 보은에서 상주→선산→왜관→성주→고령을 거쳤다.
이런 광범위한 도로망에는 수많은 다리도 함께 건설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 20년(498) 웅진교(공주)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다리는 공주를 거쳐 흐르는 금강에 놓인 것으로서, 전북과 충남의 도로를 연결한 다리다.
이것만 봐도 백제가 도로 건설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금강처럼 큰 강에 다리를 놓았다는 것으로써 나머지 크고 작은 강에도 다리를 놓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넓고 큰 금강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많은 백성들을 동원한 엄청난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이처럼 큰 공사를 시행한 목적은 마한 때부터 발달되기 시작한 서남부의 교통망을 잇고자 함이다. 이 웅진교를 통해 남북이 편리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백제의 도로가 발달됐음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망한 직후의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 기록을 보자. 의자왕 20년, 즉 백제가 멸망했던 서기 660년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정복한 백제 땅에 주둔하여 전후 수습을 했다.
그 대목에서 `촌락을 다스리며 관장을 두고 도로를 통하게 하고 교량을 세우고 저수지를 복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전쟁 때문에 막혔던 여러 도로를 다시 개통하고 부서진 다리들을 복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도로와 다리가 전국에 널리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교통과 더불어 고대의 통신법인 봉화제도도 일찌감치 발달했던 듯하다. 일본 <고사기>에는 백제에서 봉수가 운영되었던 지명에다 거의 봉(奉)자를 붙여놓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편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온조왕 10년(BC 9)에 북쪽의 말갈족이 침입했다.
이에 왕이 정예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수의 신호를 받고 봉현(봉수대가 있는 중요한 지점)으로 나아가 적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를 보면 백제가 기원전인 백제 초기부터 요긴한 통신 기술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전국에 많은 봉현을 두고 이를 이용한 봉화법으로 외적 침입 같은 소식을 임금에게 급히 전할 수 있었다.
큰 강을 이용한 내륙 수상교통의 발전
백제의 전성기는 4세기다. 한반도 남서부의 넓은 평지를 차지할 만큼 국토가 가장 넓었다. 임진강·한강·금강·영산강·섬진강 등 넓고 긴 강들이 고구려 신라보다 많아 화물을 내륙 수도나 무역을 위해 해안으로 운반하는데 이 강들을 이용했고, 그만큼 수상교통이 발달했다.
내륙의 수상교통 발달은 백제가 서남해를 통해 탐라국(제주도)·일본·중국과 해상 교역을 활발히 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내륙의 수상교통발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사기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중 백제본기 무왕 편을 보면 무왕 35년 2월 부여의 금강 근처에 왕흥사가 낙성되었는데, ‘금강의 지류인 강수변에 건축한 이 절은 풍광이 장엄하고 미려하여 왕은 수시로 배를 타고 절을 찾아 참배했다. 3월에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금강의 물을 20리나 끌어들었으며 사방 못 언덕과 물길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은 육로보다 오히려 수로교통을 편하게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용선(임금의 전용배)을 띄워 운하와 금강을 통해 자주 왕래했던 것이다. 또 하나, 수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운하의 건설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무왕은 금강과 궁궐 사이에 20리나 되는 긴 운하를 파 수로교통을 편리하게 했다.
백제본기에는 무왕 39년 3월에 궁녀들과 함께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내륙수상교통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백제는 세 번의 천도를 전부 강변으로 했다. 한강변의 위례성과 금강변의 공주·부여 모두 수로교통을 이용하기가 쉬운 지역이다. 그만큼 백제는 수심이 깊고 넓은 강들을 교통에 이용하는 것이 육로교통보다 빠르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상교통을 이용해 해외로 가장 먼저 진출하다
백제사람들은 신라보다 훨씬 먼저 배를 타고 황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과 일본으로 진출했다. 백제는 육지를 통해서 중국과 문화, 경제를 교류하려 했으나 고구려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따라서 일찍부터 서해안과 내륙의 큰 강에서 익힌 수상교통기술을 바탕 삼아 1세기경에 백제의 상인들과 유민들이 서해를 건너 상해 앞바다에 있는 주산군도로 진출해 중국으로 드나들었고, 제11대 비류왕(304∼343) 때는 본격적으로 노·키·돛이 달린 해양선을 타고 주산군도로 대거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정하고 백제와 중국 사이를 왕래하는 황해 교통로를 개척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372년부터 621년까지 서해를 건너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백제가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바닷길을 택한 것은 고구려가 육로교통을 막았기 때문이다.
제21대 개로왕 18년(472)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원군을 청하러 북위(北魏)로 사신을 보낼 때도 고구려가 막아 육로로 가지 못하고 서해를 건너갔다는 기록도 있다. 더불어 백제가 일찍부터 바닷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항해술과 해양선을 만드는 조선기술이 아울러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해상교통도 일찍 개척한 듯하다. 백제의 박사였던 왕인은 일본 천황의 초빙으로 서기 285년 떼배를 만들어 도자기와 철공 기술자를 태우고 천자문 1권, 논어 10권을 가지고 건너가 천황 태자의 사부로 일본에 살면서 도자기 등 백제문화를 전달했다.
당시 왕인박사가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갔던 떼배인 `티우`는 고증에 의하면 직경 30cm의 삼나무 11개를 엮어 만든 길이 약 7m에 너비 약 4m, 높이 1.5m에 역시 나무로 엮은 평상을 위에 설치하고, 너비 3m에 높이가 3.3m인 황포돛 1개를 달아 노를 저어 가는 뗏목배였다.
왕인박사는 이 배를 타고 전남 영암 대불항 근처에서 출발하여 완도-보길도-고흥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 남단을 거쳐 일본 큐슈 연안으로 들어가 후쿠오카 남쪽 가라쓰 항에 상륙했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로부터 1716년이 지난 2001년 봄, 고대 항해 연구팀은 왕인 박사의 떼배를 재현시켜 백제시대에 건너갔던 해로를 따라 7일만에 일본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백제는 당시 3국 중 제일 먼저 일본·중국과 해로교통을 개척했고 돛을 사용한 해양선 제작기술과 조류·바람을 이용하는 항해술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노와 키, 돛과 나침반을 처음 사용
백제가 일찍부터 바다교통을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항해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인 박사가 3세기말에 떼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엔닌 일기에는 ‘백제의 해민(海民)들은 지리지식으로 방향과 거리를 계산해 항해하는 지리항법, 밤에는 별을 보고 방향을 잡는 관측성항해법, 흐린 날 지남부침(指南浮針)이라는 나침반을 이용하는 항해법으로 바다를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항해술에 익숙한 항해기술자를 암해자(暗海者)라 불렀는데, 백제 사기에서는 암해자에 대한 기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같은 시대 신라의 배에 암해자가 많았던 것을 보면 해상진출이 신라보다 빠른 백제에도 이런 전문항해사가 많았고 국가가 적극 양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 사기 <동서양고> 중 범례조를 보면, 나침반은 원래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이를 선박항해용으로 사용한 것은 백제의 해민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들은 나침반을 이용하는 ‘침경항복’이라는 새로운 항해술을 개발해 이용했다. 이것이 바로, 방향을 잡는 ‘곤신침(坤申針)’과 거리를 계산하는 ‘갱’, 수심을 재는 ‘탁’이라는 항법이라고 중국고사기인
<무비지> 중 정화항해도(鄭和航海圖)와 엔닌의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해민들은 노와 키 그리고 돛 달린 바닷길 전용 해양선을 1세기 중엽부터 만들어 탔던 듯하다. 백제의 해양선은 중국의 배와 달랐다. 우선 노와 키가 다르다. 중국의 배는 노를 당기는 반동으로 물을 밀어 가기 때문에 큰 힘이 필요해 배 양쪽에 많은 노공(櫓工)이 필요했다.
마치 로마시대 갤리선과 비슷한 해양선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노는 도 또는 즙이라 하여 사람의 힘이 많이 필요한 비능률적인 도선이었다. 반면 백제의 노는 끝을 스크루형으로 회전시켜 물을 저어 가는 능률적이고 과학적인 노선이어서 사람의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배의 방향을 잡는 키 역시 달랐다. 백제의 것은 배의 뒤꽁무니에 고정시켜 좌우로 회전하는 전용키였지만 중국의 키는 노인 도를 사용하거나 배 한쪽의 도들을 쉬게 하여 방향을 틀었다. 이처럼 백제의 배는 바다를 건너기에 알맞은 순수 해양선이지만 중국의 배는 주로 양자강 같은 중국대륙 내 여러 큰 강에서 사용하는 도강선이라, 속도가 느리고 무거워 바다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백제의 해양선을 따라 잡지 못했다.
백제의 해양선이 중국의 도선보다 훌륭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중국의 <삼국지>에 있다. 오 나라 손 권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서기 219년 조조에 쫓긴 유비는 제갈량이 세운 중국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갖는다는 천하삼분정책에 따라 촉 나라로 들어가 왕이 되었고, 이때 관운장은 촉 나라 입구인 장강(양자강) 연안에 군사를 배치하고 봉수를 세워 수비를 철저히 했다.
그러자 오 나라 손 권의 부하 장수였던 여몽이 병사를 숨긴 배를 ‘백의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하여(使白衣搖櫓)` 촉 나라 양자강변 수비진으로 재빨리 접근, 척후병들을 제거하고 방심하던 관운장을 생포했다.
여기서 백의는 백제인을, 노를 젓게 한다는 뜻의 요노(搖櫓)는 백제의 배를 젓게 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여몽이 백제의 해양선을 이용한 이유가 중국의 배보다 빨랐기 때문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백제의 해양선은 스크루형뿐만 아니라 방향을 잡는 키까지 사용했다. 그 증거는 중국의 고사기인 설문해자(서기 100년), 삼국지(219)에 나온 전쟁 기록, 북송 때(982)에 저술된 태평어람 중 주부 편 즙조, 유희가 쓴 <석명> 중 석선, 6세기경에 쓰인 고야 왕의 <옥편> 등에 나타나 있다.
특히 삼국지의 전쟁기록을 보면 스크루형 노를 젓는 기술에서 백제인이 중국인보다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수로왕의 허왕비가 타고 온 ‘돛 달린 배’
김해가야를 서기 42년에 건국한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은 인도 여자라 했다. 그런데 최근 사학자인 김성호 박사는 허황후가 인도에서 온 여자가 아닌 백제 여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유는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장장 1만km의 바닷길과 육지를 거치는 죽음의 대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라 했는데 원래 이름이 아요디아인 아유타국은 기원전 5∼6세기 경 인도의 16개 소국 중 하나로, 허황후가 수로왕에게 시집 온 때는 기원 후 48년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이 백제나 중국인 이름과 비슷하다는 점들 때문이다. 김성호 박사는 허황후를 상해 앞 주산군도의 보타도 출신 백제 여인으로 보고 있다.
허황후가 타고 김해로 온 배는 붉은 빛깔의 돛을 단 괘비범(卦緋帆)이고, 가지고 온 선물은 중국 한나라에서 만든 한사잡물(漢肆雜物)이며, 이 배는 키잡이인 숭공(嵩工)과 노잡이인 즙사(楫師) 등 15명이 몰았다는 기록이 가락국기와 삼국유사에 있다.
또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돈인 ‘화천’이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것을 보아도 중국 선박이나 주산군도의 백제 선박이 이미 김해를 드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중국의 선박은 돛이 없는 도형선 이었으므로, 1세기 중엽에 이미 돛을 사용한 배는 백제의 해양선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증거들로 보아 허황후가 타고 온 배는 백제의 돛 달린 노형 해양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배의 형태
백제는 초기부터 바다로 진출한 만큼 이에 따른 조선기술도 아울러 발전했다. 동성왕 20년(498) 8월에 탐라국(제주도)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군을 출정시키려하자 탐라국왕이 이를 미리 알고 겁이 나 굴복했다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 있는 탐라국을 정복하려 했다면 백제는 이미 큰 군선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기술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사기(史記)에는 없지만, 중국사기에 그 증거가 남아 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강에서 사용하는 반동형 노가 아니라 힘이 덜 들게 휘둘러 젓는 스크루형 노를 초기부터 사용하여 황해 바다의 흑조해류를 해쳐 나갈 수 있는 해양선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조선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은 일본 고대 문헌인 <효덕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효덕기에는 백제의 조선공들이 만든 크고 튼튼한 배를 특별히 ‘백제 배’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배에 돛이 달리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된다.
7세기 중반에 와서는 해양선뿐만 아니라 강에서 사용하는 도강선에도 달 만큼 돛이 일반화된 듯하다. 백제본기 중 의자왕 편을 보면 의자왕 20년(660) 6월에 부여의 왕흥사 승려들이 마치 배의 돛과 같은 것이 금강의 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돛을 묘사한 기록인 셈이다.
그러면 백제 배들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한국고대사에는 백제 배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한참 후대인 중국 명나라 때 사기 <주해도>(1563), 중 경략 병조선과 <무비지>(1621) 중 군자승 전선조를 보면 중국 해안에 살던 백제유민이 만든 배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은 해금(海禁)정치를 펼쳐 중국해안에 퍼져 살던 백제유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에 반발한 백제유민들을 강에서 사용하는 도형강선을 군선으로 삼아 격퇴하려 했지만 백제인들의 노형 해양선을 이기지 못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후 명나라는 백제인들의 노형 해양선을 빼앗아 군선으로 개조해 사용했고, 이런 백제인의 배들을 17가지 모양으로 구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바다가 얕은 장강(양자강) 이북의 황해용으로는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을, 바다가 깊은 장강 이남의 동·남지나해용으로는 배 밑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을 썼다. 백제의 평저나 첨저선 모두 스크루형 바다용 노와 키, 돛을 사용했다.
백제의 노형 해양선은 크기가 어느 정도였을까. 안타깝게도 백제 초기의 배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당시 신라와 백제후기 시대에 사용했던 당나라 배의 크기를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의 승려 엔닌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시킨 신라 김 진이 만든 배는 47인승, 당나라 대신 감진화상이 당의 명주에서 백제 조선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건조한 배는 35인승이라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평균 40인이 탈 수 있는 크기로서 길이는 18m 전후(삼대실록, 879)인 것으로 추정된다.
‘큰 파도를 헤치며 달릴 수 있는 배’라는, 성능에 관한 얘기도 <속 일본 후기>(839)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엔닌 등 사신들을 당나라에 파견할 때 사용했던 일본의 견당선도 백제선의 모방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8.발해의 교통 당의 영향 아래 정치·경제 발전
발해는 고구려 왕족 출신 대조영이 서기 698년 세운 나라다. 당나라는 대조영의 세력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대조영을 발해왕으로 책봉했다. 발해는 정치·경제적으로 당의 속국 형태로 발전했고 전성기인 9세기 때는 고구려보다 더 넓은 땅을 갖게 되었다.
특히 3대 문왕은 수도를 용천부의 상경으로 옮기고 대도시와 5대 도로 등 기간시설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발해의 건국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는 한반도 평양이남 땅을 통일하여 영토를 넓히고 당나라는 평양이북 고구려 땅인 만주 전지역을 점령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의 넓은 땅을 통합하려다가 역부족을 느꼈다.
나라를 빼앗긴 고구려의 유민들이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펼치는 데다 접경하고 있는 말갈족의 방해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이를 평정하고 점령한 고구려 땅을 통치하기 위해 고구려의 왕족들과 말갈족을 포섭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틈을 타고 고구려의 왕족으로서 나라 잃은 유민이 되었던 대조영(大祚榮)이 말갈족을 포섭하고 세력을 키워 고구려 땅 중앙 깊숙이 있는 동모산(길림성의 동경성 근방)으로 들어가 서기 698년 발해(渤海)국을 세웠다. 그러자 당나라는 대조영의 세력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당나라 속국으로 삼기 위해 대조영을 발해왕으로 책봉했다.
발해는 건국 후 초기에는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보다 친화정책을 택해 고구려와 당나라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정치, 경제적으로 당의 속국 형태로 문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고구려 땅을 되찾은 발해는 한창 전성기인 9세기에 와서 고구려의 국토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했다.
이렇게 하여 10대 선왕(813∼830) 때는 국토가 최대로 확장되어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 동으로는 연해주(동해의 시호테이아린산맥) 북으로는 흑룡강, 남으로는 용흥강(함남의 영흥) 서로는 개원형(개원)에 이르렀다.
해동성국(海東盛國) 3대 문왕 (대흠무)은 수도를 동모산에서 용천부의 상경으로 옮기고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모방한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용천부의 상경을 중심으로 전국의 동서남북에 용원부의 동경(동쪽의 훈춘), 남해부의 남경(함흥), 압록강의 서경(압록강 상류 중강진 근처), 현덕부(길림성의 포화)의 중경 등 5대 도시와 신라로 가는 신라도, 서쪽의 거란국으로 가는 거란도, 당으로 가는 육로인 영주도,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 당나라 왕에게 조공하는 길인 조공도의 5대간선 국도를 건설했다.
이렇게 번성했던 발해는 수많은 도시와 건축물 등 국가 건설에 막대한 재력을 쏟아부었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에 들어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진데다가 귀족들의 부패가 심해 국운이 쇠퇴할 무렵 거란국의 왕 아율아보기가 1만 명의 거란군을 이끌고 상경을 함락해, 발해는 15대 왕조 229년만인 서기 92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의 경제
위도상 북위 42。 이북에 있는 발해는 한대성 기후조건을 갖고 있어 목축업이 발달했고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어 농업도 꽤 번성했다. 발해의 성터나 주거지 또는 무덤에서 각종 철제 농기구와 마구들이 출토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발해는 국토 절반 이상이 철·동·금·은·납 등이 매상된 산악지대라서 제련업과 철을 이용한 수공업도 발달했다. 따라서 철광석 무역도 성행했는데 도로와 수레가 발달해 이웃 당나라 거란까지 수출이 가능했다.
제련업이 발달했음은 유적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풀무화덕과 용광로가 증명하고 있으며, 그밖에 유구와 쇠동구덩이, 선철조각, 주물용 집게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발해는 풍부하게 매장된 광물을 제련하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고 이를 위해 국가에서 야금기술자를 양성했다.
풍부한 철·동·금·은 등 광물을 소재로 제련업이 발전하면서 이들 금속을 이용한 수공업도 발전했다. 이 같은 사실은 돈화·화룡·영안 등 만주에 있는 발해의 유적지에서 각종 철제 농기구·무기·철제 장신구·마구 되는 등 다양한 철제품이 발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발해가 바다를 통해 당나라나 일본과 정치나 묘역을 위해 빈번한 왕래를 했던 것을 보면 조선업도 상당히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유신들로 구성된 나라여서, 고구려로부터 전수 받은 조선술과 당과의 해상교역으로 받아들인 당나라 조선술 등을 잘 융합해 발해 고유의 조선업을 발달시켰던 것이다.
5대 간선도로
발해는 당나라·일본·신라와 정치적 교류, 문물교역을 원활히 해 경제적 기반을 굳히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구하기 위해 건국 초기부터 교통로를 개척 발달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국내 각 지방행정구역을 통치하고 수공업제품과 농산품, 그리고 철·금·은·동 등 철광 인마가 다닐 수 있는 도로망도 건설했다.
발해의 첫 도로는 <구당서> 중 ‘말갈서’에 말갈시대 장군인 이근행이 발해 건국 초기에 중국과의 교역·문화교류·사절교류를 위해 만든 석도(石道)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시작으로 발해는 당나라와 무역·경제·정치·문화·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전국에 5대 간선도로인 조공도·신라도·거란도·영주도, 일본도를 건설했다.
조공도
발해의 3경인 상경(용천부)·중경(현덕부)·동경(용원부)으로부터 압록강과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의 등주(연대 근방)로 상륙해 육로를 통해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으로 가는 길이다. 이처럼 조공도는 육로와 해로를 거치게 되어 있다.
육로는 수도인 사영을 출발해 돈화·대포채화를 지나 무송을 거쳐 압록강의 임강진 근방에 있는 신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 다른 육로는 상경을 출발해 오아청가야 하류를 지나 연길·용정을 거쳐 중경 화룡의 서고성을 통과해 압록강 압록부의 서경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한 용원부의 동경(훈춘)에서 당나라로 가려면 두만강을 타고 남강산맥을 넘어 부르하통하를 따라 연길과 용정을 지나 현덕부의 중경을 거처 안도·대포채하·무송을 통과, 압록부의 서경으로 갔다. 서경에서 당으로 길 때는 뱃길을 이용했다.
서경(중강진 근처)에서 강선을 타고 압록강으로 내려가 환주(지금의 집안)를 거쳐 압록강어귀인 박장구로 나와 돛 달린 해선으로 갈아타고 요동반도 해안을 따라 오골강(애하) 어귀를 지나 석인왕(석성도)와 행화포·도화초(대련)·여순을 거친 다음 오해호(발해만)를 건너 산동반도 북쪽 연안의 대사도(묘도열도)를 지나 등주로 상륙한 후 육로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것이다. 이 해로는 발해 제일의 간선교통로였다.
조공도가 개통된 정확한 시기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발해 초기로 추정된다. 즉 발해 5대 교통로 중 제일 먼저 개척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 건국이 당나라와 밀접한 정치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나라 앙의특사인 홍영경과 최흔이 발해로 파견되어 대조영을 발해의 왕으로 정식 책봉한 2년 후인 서기 714년, 이 두 사람이 발해에서 당나라로 귀국하던 길에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에 있던 황금산 기슭에다 조공도를 기념하는 우물 두 곳을 파고 조공도의 위치와 거리 그리고 경유지를 기록해 세운 비석이 후대에 와서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라도
발해의 4대 도시인 상경·동경·서경·중경에서 남경(함경도 부청근방)으로 가 신라로 들어가는 길이다. 발해에서 육로를 통해 신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남경을 통과해야 했다. <삼국사기>와 당나라 사기인 <고금군국지>에는 ‘남경(부청 근방)은 니하(용훈강)를 경계로 신라와 접했고, 신라의 정천부(함남의 덕원)에서 책성부(훈춘)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5대 교통로를 만들면서 각 도로마다 일정한 간격에 역을 두고 오가는 관리와 사람들의 여행을 돕도록 역로 제도를 함께 시행했다. 신라도 중에 동경용원부가 있는 훈춘에서 발해의 남경 남해부와 접경하고 있는 신라의 접천부 덕원 사이 길에는 30회마다 1개 역씩 모두 39개 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두 도시를 연결하는 육로는 1천170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영주도
발해의 수도인 상경에서 당나라의 영주로 가는 육로다. 현재 중국 요녕성에 있는 모양을 당나라시대에는 영주로 불렀는데 이곳에는 발해국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당나라 조정을 대표하는 평로절도사(총독)가 주재했다. 발해국에 대한 당나라 왕의 명령이 영주의 평로절도사에게 전달되면 영주도를 통해 발해에 전달되거나 영주의 당나라 관리들이 발해로 들어갔다.
이 영주도는 당나라와 발해간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정치도로의 성격을 띠었다. 영주도는 상경에서 중경(현덕부)을 거처 현덕부의 중경(돈화)를 거처 화전·휘남·해남·신성(무순)·심양·흑산·북진을 통과해 영주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를 넘어 당나라 수도 장안(서안)으로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상과 같은 육로로 발해와 영주간을 오갔으나 거란과 돌궐족 때문에 영주도가 자주 차단되어 후기에 들어와서는 압록강을 거치는 해로인 조공도를 이용했다.
거란도
발해에서 서쪽 거란국으로 가는 육로이다. 부여국(농안)은 거란과 접경지역에 있어 거란국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부여를 통과해야갈 수 있었다. 발해의 상경에서 출발해 장광재 고개를 지나 국경의 부여부를 통과한 다음 천산산맥을 넘어 거란국의 수도인 임황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일본도
발해의 상경·중경·서경·남경에서 용원부의 동경(훈춘)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길인데 이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 두 길을 지나야 했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용원부의 동경(훈춘)이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
발해 내륙의 어느 곳에서나 일본에 가기 위해 배를 타려면 필히 동경으로 가야 했는데, 발해 전기(698∼755)에는 발해 내륙에서 화룡과 연길을 통해 동경으로, 후기(755∼926)에는 수도인 상경(용천부)에서 왕청과 도문을 통해 동경으로 들어갔다.
동경에서 일본으로 가는 뱃길도 전·후기가 다르다. 발해 전기에는 동경에서 출발해 두만강을 타고 내려와 현재의 크라스키노인 모구위(염주)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 중부 연안의 후쿠이·이나이시가와로 상륙하는 직항로를 택했다.
그러나 이 직항로는 험한 편이어서 표류가 잦았다. 따라서 후기 때는 계절풍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쉬운 남행항로를 개척해 이용했다. 바로 훈춘에서 염주(크라그티노)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한반도 해안으로 내려와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난 후 일보의 북규슈에 도착하는 ‘규슈항로’였다.
‘왕의 길’ 주작대로와 역로제도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제3대 문왕(대흠무)이 초기의 수도였던 동모산에서 옮겨 건설한 도시로서 발해국이 존재했던 229년 동안 가장 오랫동안 수도 역할을 했다.
상경의 규격과 형태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도시를 외성으로 두르고 그 안에 내성인 궁성과 왕성을 만들어 궁궐과 관청 건물을 건축했다.
상경용천부는 외성과 궁성, 왕성의 3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외성은 전체 둘레가 16.3km고 성벽 높이는 2∼3m인데 외성벽 밖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문은 동서에 각 2개, 남북에 각 3개 등 10개가 설치되었고 동서와 남북의 문은 대칭으로 세워졌다.
성안에는 장기판 모양의 도로 11개가 나 있고 이 길은 10개의 문과 이어져 있다. 연결된 5개의 길은 성의 중심 도로 구실을 했다. 이밖에 동서를 연결하는 3개의 큰집과 성벽안을 따라 만든 1개의 순환도로가 있었다.
성안 북쪽에 있는, 왕국과 남쪽의 중앙문을 연결하는 가장 큰 도로를 주작대로(朱雀大路)라 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2구역으로 나눠 중앙통치기구인 각 관청건물을 배치, 도로가 서로 교차하는 장방형 도시를 이루었다.
주작대로의 유적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어 당시 상경성의 웅장함을 엿보게 한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있던 주작대로를 모방한 것으로 너비는 110cm다.
상경성의 도로구조는 모래와 돌을 섞어 탄탄하게 다져 만든 사석도로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왕승례, 이전복과 손옥량은 흙을 다져 만든 흙길이라 주장하고 있다. 수레를 많이 사용한 상경성 도로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면 비가 왔을 때 진흙탕이 되어 무거운 쇠태 바퀴를 단 수레의 운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한 흙은 모래와 돌로 보는 것이 옳다. 사석도로임이 증명된 것은 1990년이다. 성의 복원작업 중 5개의 도로 가운데 한 곳을 1천 건 가량 팠을 때 깊이 30cm∼2m 사이에서 돌덩이가 섞인 모래층이 나온 것.
이밖에 주작대로와 성의 남문에서 목탄강을 연결하는 길도 사석도로였다. 모래를 깐 위에 20∼30cm 직경의 돌을 얹었다. 1층 또는 2층으로 깐 돌 사이에는 모래를 넣어 다졌다.
1989년 흑룡강성의 고고학 연구소가 상경성내 궁성의 관사터를 발굴했을 때 너비 15m의 사석도로가 발견되었는데, 이 도로에는 80∼85cm 너비의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로써 발해 수레의 규격과 함께 발해가 수레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발해는 국내 도로뿐만 아니라 멀리 중앙아시아와도 교역하기 위해 국제 교통로인 ‘담비길’을 뚫었다. 고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민족 중 하나로 러시아 우즈베르 지역에 살던 소그드인들과 발해인들이 7세기 초부터 아무르강-우수리강의 수로와 육로를 통해 주로 담비를 교역했다고 하여 발해사 전문 러시아사학자인 사브크노프 교수는 이 길을 ‘담비길’이라 부른다.
발해는 당나라의 교통관리제도를 그대로 모방해 5대 국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에 역로제도를 실시했다.
당나라 가담이 쓴 <고금군국지>에는 책성(훈춘)과 신라의 정철(원산 근방)사이 교통로에 39개 역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해는 이 기록대로 전국 간선도로 30리마다 역참을 설치해 왕명이나 조정의 업무를 지방통치자나 외국에 전달하는 관원·사신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수레·역마·배를 제공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서기 833년에는 말이나 수레 등 탈것을 빌려주는 일종의 환승제도인 체승제도를 시행했다. 발해와 당나라를 왕래하는 사신, 관현, 당나라 유학생의 교통에 도움을 주기 위해 당나라를 여행할 때는 당의 역참에서, 발해의 조공도를 따라 여행할 때는 발해의 역참에서 말이나 수레를 빌리고 또 새것으로 바꾸어 탈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고금군국지>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했던 발해 유학생들을 체승해 본국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9. 발해의 수레와 수상교통 계절풍 이용한 새로운 바닷길 개척
발해는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당나라나 일본과 활발하게 교역했다. 당나라를 오가는 바닷길은 중국대륙의 연안을 따라 이어져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는 길은 어렵고 험해 뛰어난 항해기술이 요구되었다.
발해는 무수한 고난과 모험을 감수하며 수십 차례나 일본을 왕래, 항해기술과 경험을 축적해갔다. 이를 통해 계절풍을 이용한 해로를 개척하고, 더욱 빠르면서 튼튼한 배를 만들 수 있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수레를 널리 이용하다
발해가 육로교통에서 수레를 널리 이용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유적에서 나온 출토품이나 행정조직, 발달한 도로를 보면 수레를 많이 이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수레의 생김새도 대강 알 수 있다. 당나라 고서인 <고금군국지>에는 일본과 발해인들이 두 나라를 왕래할 때 동해의 발해쪽 항구인 염주와 일본도의 관문인 용원부의 동경성(훈춘) 사이에 많은 수레가 오갔다는 기록도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손들이 건국했기 때문에 생활 양식, 건축구조, 생활 도구를 고구려에서 물려받아 수레의 모양이나 구조도 고구려의 것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밖에 발해의 무덤이나 유적에서는 수레 부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수레바퀴에 쓰는 비녀모양의 주철 못, 철제 수레바퀴 축받이 통, 바퀴 태인 폭이 10~12cm나 되는 철제굴렁쇠 조각 등이 그것이다. 발해 수레에 철제부품을 많이 쓴 것은 풍부한 철광산지를 가지고 있어 제련업과 철제수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용천부의 상경성에서 발견된 도로에는 바퀴자국 두 줄이 또렷이 남아 있는데, 이것도 발해가 수레를 널리 이용했다는 증거다.
발해는 교통과 수레를 중요하게 다루어 이를 관장하는 행정기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고금군국지>에 있다. 발해의 행정 조직은 3성(省)·6부(部)·1태(台)·7사(寺)로 이뤄졌다.
이 가운데 3성의 하나인 정당성(正當省)에 속한 신부(信部)는 교통·수레제조·관청용 수공업·장인(匠人)·건축을 관장하고, 강과 하천을 관리하는 ‘공업행정부서’였다. 이런 기록을 보아도 발해가 수레의 제조와 기술자인 장인을 얼마나 중요하게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
발해의 수로교통
발해 내륙에는, 홀한하(목단강), 속말수(북송화강), 마자수(압록강), 나하(동송화강), 솔빈수(수분하), 이통화(부여천), 두만강, 혜란강, 휘발하, 우수리강, 흑룡강 같은 길고 깊은 많은 강들이 있다. 자연스레 이들 강을 이용해 각 성과 지역을 잇는 내륙수상교통이 발달했다.
5대 간선도로를 빼면 전국을 연결하는 나머지 육로는 높은 산과 고개 같은 험한 지형 때문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전국토에 걸쳐 연결된 내륙 수로는 아주 훌륭한 조건이었다. 작은 강선(江船)을 이용한 수로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할 수 있는 지형조건이었던 셈이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일본과 교역할 때에는 주로 5대 간선도로를 이용했다. 그러나 거란·몽골과 벌인 교역은 내륙수로를 주로 이용함에 따라 수로는 발해 내에서 국도이면서 국제 무역로 역할을 맡기도 했다.
내륙 수로에서는 한 개의 돛과 노를 쓰는 소형 평저식(平低式) 범선을 많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내륙 수로용 강선은 기록이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배의 상세한 구조와 종류는 알 수 없다. 다만, 발해시대로 들어와 인근 지역과 교역이 활발해짐으로써 고구려시대부터 이용하던 강선을 더욱 튼튼하고 속도가 빠른 배로 발전시켜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해의 해상 교통
해로 교통의 개척
발해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당나라와 벌인 조공(朝貢) 교역이나 동해를 오가며 일본과 활발하게 벌인 교역에는 바닷길 두 곳이 주로 쓰이고 발달했다. 이들은 각각 조공도(朝貢道), 일본도(日本道)로 불린다.
첫째 해로인 조공도는 당나라를 왕래하는 길이다. 육로를 거쳐 압록강 어귀로 나와 배를 타고 중국의 황해 연안을 따라 산동반도의 등주까지 가는 뱃길인데, 등주에서는 육로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게 된다. 이 항로는 중국대륙의 연안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해로였다.
발해는 개국한 뒤 229년 동안 당나라에 조공과 문물 교류를 위해 몇 십 명에서 120여 명에 이르는 사절단을 143회나 파견했다. 따라서 초기부터 줄곧 이용했던 이 해상교통로는 수많은 내왕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이 바탕이 된, 가장 안전했던 바닷길이었다.
하지만 둘쩨 해로인 일본으로 가는 길은 당나라 항로보다 훨씬 어렵고 험했다. 일본으로 가는 관문인 용원부의 동경성(훈춘) 근처의 염주에서 배를 타고서 해류가 험하고 복잡한 동해를 횡단해야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 해로보다는 더욱 뛰어난 항해기술이 필요했다. 발해는 초기부터 무수한 고난과 모험을 감수하며 수십 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면서 항해기술의 경험을 축적했다. 결국 발해의 뛰어난 항해기술은 이처럼 일본과 교류하느라 자주 동해를 횡단하면서 얻은 셈이다.
건국에서 멸망할 때까지 229년 동안 문물 교류와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발해의 사절단은 동해를 건너 34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가는 발해 사절단은 적으면 100명, 가장 많을 때는 1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발해의 항해술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발해에 관한 당나라 사기나 삼국사기 기록을 찾아보면, 당나라로 내왕하는 해로에서는 일본항로에서처럼 길을 잃어 표류하거나 험한 파도 때문에 난파당한 기록이 없다. 즉 일본 해로보다 비교적 개척이 쉬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본 사기와 삼국사기를 보면 발해가 일본 해로를 개척할 초기 표류하거나 거센 파도에 난파당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발해는 이렇게 어려웠던 초기의 일본 해로 개척에서 얻은 경험으로 항해술과 조선술을 발달시켰고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후기부터는 염주와 함흥 일대의 동해안 북부에서 동해를 따라 남하해,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거처 일본으로 들어가는 비교적 안전한 해로를 개척, 왕래했다.
발해가 본격적으로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제3대 문왕 때부터다. 일본사기를 보면, 776년 문왕인 대흠무는 일본 왕 조견을 위해 사도몽을 인솔자로 167명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이 일행은 동해를 건너다 조난을 당해 사도몽을 포함한 46명만 살아 일본에 도착했다.
또 이로부터 2년 후인 778년 일본의 사신 일행이 동해를 건너 발해로 가다가 험한 파도와 폭풍우 때문에 배가 파손되어 발해의 염주(크라스키노)에서 두 척의 배를 새로 만들어 일본으로 귀국했다는 사실도 <속 일본기> 중 ‘광인천황’편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초기 일본항로 개척의 어려움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다
발해는 일본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했던 초기(727~819년) 항해기술이 미숙하고 경험이 적어 무수한 고난을 겪었다. 동해를 건너다 폭풍과 거센 파도 등으로 표류하거나 배가 난파당하곤 했다. 50년쯤 되는 초기 해상교통 경험은 발해의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을 놀랍게 발전시켰다.
일본으로 가는 안전한 해로의 개척에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더욱 빠르고 튼튼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도 발달했다.
해류를 이용해 일본으로 진출한 것은 고조선시대가 처음이다. 고조선 후기 사람들이 일본으로 갈 때 이용한 해류는 흑조(黑潮)였다.
고조선 사람들은 한반도 서해쪽으로 흐르는 흑조와 한류를 타고 한반도 서해안으로 내려와 남해쪽을 지나 대마도를 거쳐 다시 일본 동해안으로 흐르는 흑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따라서 고조선과 고구려 사람들은 동해안의 해류는 거의 이용하지 않았고, 북서쪽에서 부는 계절풍도 이용할 줄 몰랐다.
발해도 물론 고조선시대부터 개척한 해류항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해의 계절풍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항해기술 개척은 발해가 처음인 것 같다.
초기에는 발해 내륙의 각 성에서 일본도의 관문인 용원부의 동경(훈춘)으로 나와 이곳서 가까운 동해안의 항구인 조구위 또는 염주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직접 횡단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항해 기술의 부족으로 표류, 난파 등의 어려움이 많았고 일본 동해안 북부지역의 야마가타 또는 아키타 해안에 구사일생으로 도착하는 일도 잦았다.
이후 발해는 동해를 건너다니며 해류는 물론 계절풍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해 새로운 일본행 해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즉 일본으로 갈 때는 9월에서 12월 사이 겨울철에 출발했다. 해마다 이 무렵에 대륙에서 대양으로 부는 북서풍과 남하하는 차가운 한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구위에서 배를 띄워 신라를 피해 멀찌감치 한반도 동해를 따라 남하해 울릉도 부근에서 큰 어려움 없이 일본 동해안 중부의 이시가와나 후쿠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일본에서 발해로 갈 때는 여름인 6~8월 사이에 출발했다. 이것도 해마다 이 시기에 대양에서 대륙으로 부는 동남 계절풍과 북상하는 해류인 흑조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이런 계절풍을 이용하는 항해술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810년경이었는데, 이런 항해술을 익히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린 셈이다.
발해가 계절풍 항해술을 이용하기 전에는 동해 횡단 때 자주 일어나는 항해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발해와 일본 양국에서 사절단을 호송하는 호송사를 동행시켰다. 즉 일본을 방문한 뒤 귀국하는 발해 사절단은 일본 호송선단이 발해 해안까지 따라갔고, 발해를 방문하고 귀국하는 일본 사절단도 발해 호송선의 보호를 받으며 동해를 건넜다.
그러나 서기 810년 이후에는 발해나 일본에서 호송사와 호송선단을 파견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이때쯤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하는 항해술이 발달하고, 그 뒤 조선기술도 함께 발달해 표류하거나 선박이 부서질 걱정 없이 마음대로 일본을 왕래하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발해의 조선 기술
발해의 조선술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당나라와 일본의 발해 관련 기록이나 항해기록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발해 건국 35년째인 733년, 제2대 왕 대무예(무왕)는 당나라를 공격하려고 거대한 함대를 조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해 건국 초기에 이미 조선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술이 발달하지 않고는 군선(軍船)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속 일본기>에는 778년 일본사신이 발해로 가다가 배가 심하게 파손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발해왕이 염주에서 배 두 척을 만들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 전 염주 근방 연해주 남부 해안에서 발해의 조선소 유적지가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발해가 당나라로 파견한 사절단은 가장 많은 때에 128명이나 됐는데, 이 많은 인원이 탈 수 있는 배는 대형 해양선이라야 했다. 또 험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갈 때에는 1천 명까지 한꺼번에 움직이기도 했는데, 이것도 거대한 원양 항해선박을 만드는 조선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일본의 당나라 유학 승려인 엔닌(圓仁)은 <입당구서순례행기>에서 그가 당나라로 들어갈 때 등주의 삼천포에서 발해의 무역선인 교관선(交關船)을 많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역선이 많다는 것은 당나라와 해상무역이 성행했고 아울러 조선술이 발달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발해 배의 모양
발해의 배 모양과 크기는 그림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정크선이나 일본의 견당선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발해의 해양선은 초기부터 돛과 노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다녔다. <속 일본기>의 공인천황편에는 이를 뒷받침하듯 ‘776년 일본에 파견한 발해 사절단의 배가 대마도를 지나다가 폭풍을 만나 노가 부러지고 돛이 떨어져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均)이 당나라 임금에게 조공을 하고 귀국하는 발해 왕자를 환송하면서 읊은 시에도 돛이 나온다. 그는 시에서 ‘포구에 다다르니 가을 물결이 이별을 재촉하는데, 돛을 펴니 새벽노을이 깃 폭에 걸려’라고 표현했다.
김육불이 쓴 <발해국지장편>과 황유한이 쓴 <발해국기>에는 ‘서기 771년 발해왕 대흠무(무왕)가 대신인 일만복과 모항록을 포함한 일본파견 사절단 325명을 돛과 노배 17척에 나누어 타고 일본으로 가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의 크기는 전기와 후기가 달랐다. 전기의 배는 30~40인승 돛배로 100톤급 일본 견당선과 비슷한데, 길이가 20m, 너비 6.5m, 높이는 15m쯤이었다. 후기의 배는 한층 튼튼하고 크게 발전해 평균 100인승 돛배로서, 무게 200톤에 길이는 25m, 너비 7m, 높이는 17m쯤 되었다. 이는 전기의 견당선보다 용적이 두 배나 큰 것이다. 한편, 이 배는 갑판 위에 누각이 있는 누선(樓船)이었다.
발해의 배는 삼각형 돛보다 바람의 여러 형태를 잘 이용할 수 있는 튼튼한 직사각형 돛을 썼다. 그리고 수심이 깊고 해안선이 단조로우며 암초도 적은 동해에 맞게 평저선보다는 속력이 빠른 첨저선(尖底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해양선이 일본의 견당선과 비슷할 것이라는 견해는 일본이 발해의 사신을 위해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를 증명할 옛 기록이 있다.
727년 10월 발해 무왕은 장군 고인의 인솔로 사절단 24명을 처음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사절단은 염주를 출발해 동해를 횡단하다가 항해술 미숙으로 대마도 해류를 따라 떠내려가 일본 동해 중부해안 아키타 근방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장군 고인과 16명은 이 지역의 토호국인 데와국 왕 에조에게 붙들려 죽었고 8명만 겨우 목숨을 구했다. 이들은 무왕의 국서와 선물인 담비가죽 3장을 가지고 일본의 왕도인 헤이조경으로 들어가 일본 왕에게 전했다.
그러나 배와 항해사를 잃은 발해사절단의 귀국길이 막히자 일본 왕은 새 배를 만들도록 했다. 발해사절 8명과 이들을 호송할 호송병사 62명을 태울 배 두 척은 1년 뒤에 건조되어, 사절단은 728년 5월에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35명이 탈 수 있도록 만든 이 배는 그 무렵 일본의 견당선과 모양이 같은 매우 큰 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발해의 배들은 일본을 왕래할 때 대부분 염주나 북청 근방에서 직접 동해로 나가는 원양항해를 했다. 이것은 동해연안을 따라 남행할 때 신라의 군사적 정치적 간섭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원양항해에는 해류와 계절풍의 이용도 중요하지만 별을 보고 항로를 측정하는 천문항법도 중요했다. 따라서 이 방면에 경험과 기술이 숙달된 천문항법사도 필수적으로 함께 배를 타고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초 이후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술을 개발해 비교적 쉽게 일본을 오가던 880년경에도 발해사신의 배는 동해에서 종종 난파당해 일본에서 배를 만들어 주었고 특히 발해사절의 배는 좋은 나무로 만들도록 일본 왕이 배려했던 기록도 <일본삼대실록>에 나온다.
기록을 보면, 서기 882년 일본으로 건너가던 발해사절단의 배가 일본 근해에서 난파당해 귀국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왕은 동해안에 있던 토호국인 노토국 왕에게 인근 하쿠이산과 후쿠우라산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런 뒤 그 산의 나무로 발해사신의 귀국용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기록에 따르면 발해 사절단이 타고 일본으로 동해를 건너온 발해의 배가 재질과 건조기술이 뛰어난 것을 보고 일본 왕이 그보다 더 좋은 배를 만들어 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발해 사절단의 배가 만들어진 곳은 하쿠이산과 후쿠우라산 근처의 하쿠이 또는 후쿠이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발해 후기 일본을 오간 발해 사절단들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 주로 이 두 항구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ohyh45
첫댓글 이런 말도 안되는 글들 때문에 .. 중고대사가 왕따를 당하는거지>
도대체 발해항로라는게 가능이나 하다고 보는건지 .. 에잉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