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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토박물관 외부의 '농악'조형물
삶의 통과의례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은 한 종류의 집단에서부터
다 집단으로 옮겨가 지위가 바뀌거나 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풀이
될 때 인간이 치르는 일정한 집단적 의례를 통과의례라 한다.
출생 出生 :
1) 기자祈子 의례
아들이 대를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전통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은 각종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아이를 갖도록 비는 행위를 하였다.
2) 해산의례
옛부터 아기를 낳는 일을 맡고 있다는 신을 삼신할멈이라 불렀다.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에 파란 멍이 있는 것도 삼신할멈이 얼른 세상에 나가라고 엉덩이를 밀어내어서 그렇다고 믿었다.
3) 삼칠일 음식
아이가 태어난 지 21일째 되는 것을 축하하는 삼칠일이다.
예전에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산모는 물론 영아의 사망률이 높았다.
특히 해산 후 삼칠일이 고비였다.
이 시기 동안 산모는 해산 후 감염이나 하혈 등의 후유증으로 위험한 상태에 이르기 쉬웠고,
아기 역시 질병, 배꼽 화농 등의 감염 등으로목숨이 위험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칠일은 아기의 배꼽이 아무는데 소요되는 시일이면서 동시에 산모의 건강의 회복기라고 보았다.
집안의 어른들은 삼칠일이 지나야 비로소 아기를 친척들에게 보여주었다.
산모 역시 삼칠일이 지나야 하루 6회 먹던 산식을 3-4회로 줄여서 먹었으며,
이때부터 가벼운 집안 일을 거들게 했다.
4) 금줄
금줄은 마을사람과 외부 사람에게 성스러운 산고에 접근해서 아이와
산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대뭉에 쳐 두었던 신호의 줄이다.
같은 식구가 아닌 경우 금줄쳐진 집안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새끼줄에 고추, 숯, 집 등을 달고
딸의 경우에는 숯, 미역, 솔잎, 종이 등을 달아두어 아기의 성별을 알렸는데
금줄은 보통 21일간 쳐 두었다.
이는 가족 외에 다른 사람들이 들락거리면 삼신할멈이
노해서 아이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으나
면역능력이 없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과학적인 풍습이다.
돌 :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생일에 행하는 의례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옛날에는 아기들의 사망률도 높았으므로
1년동안 아무 탈 없이 성장하여 첫돌을 맞는 일은 경사스러운 일로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돌에는 백설기와 수수경단, 송편과 국수 그리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로 돌상을 차려주는데 의미가 담긴 상차림이다.
백설기는 깨끗하고 순수한 정신을, 붉은 빛의 수수경단은 액운을 면하라고,
배가 볼록하게 빚은 송편은 식복이 있으라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은 열매를 맺듯이 자손이 번영하라는 축복의 뜻으로,
국수와 타래실은 수명장수를 비는 뜻으로 준비했다.
또 돌잡이를 하는데 돌상 위에 돈과 활, 화살과 붓, 벼루, 먹을 놓고
아이가 첫번째 잡는 것으로 아기의 장래를 점치며 기뻐하는 풍습이다.
이때 돈은 부귀를 붓은 학문을, 활은 용맹을 상징하며
여아일 경우에는 색지, 자, 실을 놓는데 이는 바느질 솜씨를 여성 기예의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계례(笄禮)
계례는 여자에게 비녀를 찌르게 하는 의례로 비교적 간단한 절차다.
예절을 잘 아는 집안 부인을 큰손님으로 모시고 의례를 행한다.
곧 계례(笄禮)는 여자 어린이가 나이 열다섯이 되면 그 동안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 쪽을 지어 비녀를 꽂는데 이를 합발(合髮)이라 한다.
또한 어른 옷을 입히고 어른다워지기를 당부하는 축사를 하는데 이런 의례는 가계(加笄)라 한다.
가계(加笄) 후 술을 내리는 초례(醮禮)를 행한 후 이름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별명인 당호 (堂號)]를 지어 주었다.
15세에 계례를 행한 이유는 "여자는 음(陰)이고 15는 양수(陽數)인 바 음이 음다움은 양과 합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역시 여자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생식기능의 성숙시기를 택했던 것이다.
관례(冠禮)
관례는 남자 어린이가 15세~20세가 되면 상투를 틀고 어른의 평상복을 입히고
갓(관(冠)을 씌우고 술 마시는 예법을 가르치며 별호를
지어주는 의식으로 성인이 되었음으로 사회 일원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부과하는 의례다.
전통 사회에 있어 그 절차를 보면, 혼례 날짜 20일전이나 한달전에 일가의 어른들을 모시고 관례를 한다.
먼저 날을 잡으면 사당에다 고하는 절을 올리고 가까운 집안 어른들 가운데 유덕하고
예법을 잘 아는 어른을 빈객(賓客)으로 모셔 다가 관례를 주관하도록 한다.
빈객이 관례 할 젊은이의 머리를 빗어 올린 상투를 틀어 주고 망건과 갓을 씌워준다.
그리고 각종 절차에 따라 마련한 옷과 띠, 신발을 갖추기를 세 차례나 한다.
그래서 관례를 흔히 삼가례 (三加禮)라 고 하였다.
삼가례가 끝나면 초례(醮禮)라 하여 관자(冠者:성년해당자)
에게 술을 내리는 의식을 행하고,어른으로서 대접한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이름인 자(字)를 지어주었다.
남자가 20세에 관례를 하는 이유는 "남자는 양이고 20은 음수인 바 양이 양다움은
음과 합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라" 고 했다.
이 말은 남자가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생식기능이 왕성한 때에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20세 이전 에 혼인을 할 수도 있으므로 “남자는
15세부터 20세까지 관례를 한다" 고 하여 최소연령을 15세로 정했다.
남자의생 식기능이 아무리 조숙하더라도 15세는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설사 혼인을 하지않더라도 15세부터 20세 사이에
관례를 함으로써 성인으로서의 행세를 하게 했다.
관례(冠禮)와 계례(笄禮)를 한 후 달라지는 것. 관례와 계례를 하면 이제 어린이가 아니고 어른이기 때문에 대접이 달라진다. ① 말씨:전에는 낮춤말씨 '해라'를 보통말씨 '하게'로 높여서 말한다. ② 이름:이름이 없거나 함부로 부르던 것을 관례와 계례때 지은 자(字)나 당호(堂號)로 부르게 된다. ③ 절:전에는 어른에게 절하면 어른이 앉아서 받았지만 답배를 하게 된다. |
혼례는 남자와 여자가 혼인(婚姻)을 하여 부부가 되는 의식절차를 정한 것이다.
혼인의 의식절차를 정한 예절이라 면 '혼례(婚禮)'라고 해야 할 텐데 '혼(昏)'자를 써서 '혼례(昏禮)'라고 하는 까닭은 혼인예식은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리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혼인예식을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리는 이유는
혼인이란 음(陰)과 양(陽)의 만남 이므로 그 시간도 양인 낮과 음인 밤이 교차하는 시간인 해가 저무는 때가 합당하기 때문에 혼인
예식이 끝나면 곧 바로 첫날밤을 차리는 합궁례(合宮禮)를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일을 혼인(婚姻)이라 하는 이유는 '婚(혼)'은 장가든다는 뜻이고 '姻(인)'은 시집간 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장가들고(婚) 시집간다(姻)'는 말이 된다. 장가든다는 뜻의 글자가 '婚(혼)'이 된 까닭은 저 녁때 (昏)에 여인(女)을 만나는 것이
장가드는 것이고, 시집간다는 뜻의 글자가 '姻(인)인 까닭은 고례(古禮)에 여 자의 집에서 신랑감을 구하는 데는 반드시 중신하는 부인인
매씨(媒氏)에 의해야 했으므로 여자매씨로 인(因)해 남 자를 만나는 것이 시집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인은 음과 양이 합하여 삼라만상이 창조되는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 하는 일이며,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짝을 찾는 순수한
인정(人情)에 합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례(古禮) 에는 "천지의 이치에 순응하고 인정의 마땅함에 합하는 것(順天地之理 合人情之宜)이
혼인이라"고 했다. 혼인은 집안과 집안의 결연(結緣)이므로 중매인을 통해 혼담이 오가고 두 집안에서 합의가 되면 청혼서(請婚書),
허혼서(許婚書), 사주단자(四柱單子), 연길(涓吉), 물목단자 등의 문서를 주고받으며 혼인 할 것을 결정한다.
혼례식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올린다.
회갑(回甲)
혼례를 치르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살아가다가 나이 61세에 이르게 되면 이를 회갑(回甲)이라 한다. 회갑은 자기가 태어난 해로 돌아
왔다는 뜻으로 환갑(還甲)이라고도 하고 '화(華)'자를 풀어서 보면 61이 된다고 하여 화갑(華甲)이 라고도 하며 이러한 의례(儀禮)를
수연례(壽宴禮)라 한다. 자녀들은 만수무강하시라는 헌수배례를 올리고
장성한 자녀일지라도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 주인공에게 효도를 다한다.
수연에는 축하의 한시漢詩가 읊기도 하는데 이를 수연시壽筵詩라고 하는데 많은 명사들의 시를 모아 가보家寶로 삼는 사람도 있다
회혼례 回婚禮 :
혼례를 올리고 60년을 해로한 해를 회혼이라 한다.
자손들 앞에서 혼례복을 입고 60년 전과 같은 혼례식을 올리면서 <해로 60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자손들이 헌주하고 권주가와 음식이 따른다.
오복 중에서 오래 사는 수壽가 으뜸이요, 그 수에서도 가장 선망을 받았던 것이 회혼수回婚壽였다.
벼슬한 사람이 회혼례를 맞이하면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잔치음식이 하사되고 궤장几杖까지 내린다.
각지에서 모인 친지들은 열두폭 병풍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다.
이를 축수 서명이라고 하며 이렇게 만들어진 병풍을 만인병萬人屛이라 했다.
상례는 사람이 숨을 거둔 후 장사를 지낼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로 사람이 운명(殞命)하여 땅에 묻힌 다음, 대상(大 祥)을
지내고 담제, 길제(吉祭)를 지내는 것으로서 탈상(脫喪)하기까지의 3년 동안의 모든 의식을 말한다.
효(孝)를 예(禮)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유교적 관념에서는 부모의 상을 당한 것을 큰 불효의 하나로 여겨 장례를 잘 지내려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 관습에 관혼상제의 의례 중에서 가장 엄숙하고 정중하여 그 절차가 까다 롭고 그 이론이 구구한 것이 바로 상례
이다.
상례에는 초종(初終), 습(襲), 소렴(小殮), 대렴(大殮), 성복(成服), 조석전과 상식, 분상, 치장, 천구, 발인, 반곡, 우 제, 졸곡, 부제, 소 ·
대상, 담제, 길제 등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가 있으며 만 2년에 걸쳐 엄격하고 경건하게 행해 졌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죽은 자를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고, 없는 자를 섬기기를 있는 사람과 같이 해야한다 '고 했다. '사(死)'라 쓰지 않고 '상(喪)'이라 쓰는 것은
효자(孝子)의 마음에 차마 '사'라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따라서 '사(死)'는 육신이 썩는 것을 말하고 '종(終)'은 군자(君子)의
죽음을 말하는 바 '사(死)'와 '종(終)'의 중간을 택해 '없어진다'는 뜻인 '상(喪)을 쓰는 것이다.
상여(喪輿)에는 재생을 의미하는 연꽃, 자유로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신성시되는 용과 봉황, 재액을 물리치는 귀면 (鬼面)과 요령(鐃鈴),
죽은이의 영혼을 인도하는 새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죽은 이가 아무 탈 없이 저승까지 이를 수 있도록 보호하는 기능과 저승에서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상여는 시체를 운반 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집의 기능을 한다.
우리의 세시풍속(歲時風俗)
설: 1월 1일 설날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설이라는 말은 설다, 낯설다 등의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되며,
익숙했던 지난해를 마감하고 새로이 시작되는 새해에 대한 낯설음을 나타낸 표현으로 보인다.
이러한 (낯)설은 날에 선조들은 삼가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는데
그것을 각종 세시기歲時記에 설을 [신일愼日, 삼가해야 할 날]이라 표기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는 모두 새해가 열리는 첫날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것으로
마음과 몸가짐을 새롭고 신중하게 가다듬을 것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설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섣달에 손질해 놓은 깨끗한 설빔으로 갈아입고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고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다채로운 풍속을 펼치면서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했다.
설날에는 흰 떡국을 끓여 먹는다.
설날은 새해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떡을 사용하며,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양이 둥근 것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설날에만 떡국을 먹기 때문에 떡국한 그릇을 나이 한 살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술을 마시는데,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라 한다.
추석 秋夕 :
추석은 일 년 중 보름달의 빛갈이 가장 좋고 밝은 가을밤으로 흥겨운 우리의 멸절이다.
추석을 멸절로 삼은 것은 삼국시대 초기부터이다.
서기 32년인 신라 유리왕때 경주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두 공주로 하여금 각각 7월 보름부터 8월 14일까지 여자들을 독려하여 밤늦도록 김쌈내기를 하게하였다.
추석날인 8월 15일에는 어느 편이 더 많이 짰는가를 살펴,
진 편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을 대잡하며 노래(회소곡)와 춤을 즐겼는데,
여기서 추석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기적으로도 추석은 봄에서 여름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을 거두어 들이는 풍요의 계절로,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아서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는 계절이므로
속담에 <1년 365일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고,
또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다.
이와 같이 계절적으로 모든 것이 풍족한 달이므로 추석명절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행사와 놀이가 세시풍속으로 전승되고 있다.
목기를 만드는과정을 연출한 디오라마
목기
남원은 동쪽으로 경남 함양군·하동군, 서쪽으로 임실군·순창군, 북쪽으로 장수군, 남쪽으로 전남 구례군·곡성군에 접해 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은 목기가 유명하다.남원의 목기는 지리산을 배경으로한 풍부한 임산자원과 더불어 사용되는
목재의 독특한 향과 함께 모양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목기 자체가 단단하여 더욱 유명하다.
남원의 목기는 옛날부터 왕실에 진상하는 진상품이었는데 현재 전국 수용의 50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목기의 역사는 신라고찰 실상사의 스님이 3천여명이 넘었는데 스님들로부터
바리 만드는 기술을 전수한 것이 목기 제작의 시초라고 한다.
현재 이곳의 목기는 제기, 상, 함지박, 목공예품등을 천연 옻칠과 카슈등을 사용, 현대감각을 살려
세련미의 품격을 갖춘 우수제품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식도
지금은 아주 드물게 대장간이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지만 과거에는 여러 마을이 모인 제법 큰 마을이면 대장간이 거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사용하다 무디어진 칼이나 낫, 도끼, 호미, 괭이, 쇠스랑 등 농촌의 모든 연장과 농기구들은 대장간에서
새롭게 만들어 새것처럼 사용하였다. 지금처럼 여러 가지 합금을 통해서 특수강이나 석유화학제품 등 특수소재가 나오지 않던 시절인 만큼 대부분의 용품이나 공구가 철이나 식물을 통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남원에서도 70년대 까지만 해도 현재의 성한약방 앞 샛길에서 남상관으로 들어가는 길가엔 대부분의 대장간이 즐비하게 있었다.
남원칼이 유명하게 된 동기는 1922년 6월 한영진이란 분이 부호품공진회(공예품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옹기
남원은 옹기의 고장이다. 남원의 질그릇 역사는 천년이다.
남원의 옹기는 원형에 가까운 달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의 항아리는 배 부분보다 어깨가 더 불룩하게 튀어나와 풍만하다.
서울이나 경기도의 옹기는 주둥이와 밑바닥의 너비가 비슷하고 중간 배 부분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충청도 옹기는 주둥이와 밑바닥의 너비가 비슷하고
배 부분이 서울 경기도 지역의 항아리보다 더 불룩한 타원형 모양을 하고 있다.
강원도 옹기는 주둥이와 밑바닥의 너비가 비슷하고 배 부분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는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경상도 지역의 옹기는 전라도 항아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밑바닥은 주둥이 너비보다 좁고 배 부분은 옹기의 높이보다 더 넓은 형태이다.
지역적인 기후와 자연환경에 따라 옹기의 모양이 달라지고 용도와 만드는 사람에 따라 각각의 특색을 보인다
남원 향토박물관
전라북도 남원시 양림길 14-9번지(어현동 37-156번지)
☏063-620-6792
(관람시간)
하절기 : 09 : 00 ~ 18 : 00
동절기 : 09 : 00 ~ 18 : 00
※ 월요일(휴관)을 제외한 토, 일요일 모두 개관함
(승용차)
서울(호남고속도로) → 전주(17번국도) → 남원(4시간 소요)
대구(광주행 88고속도로) → 남원(2시간소요)
광주(대구행 88고속도로) → 남원(1시간소요)
부산(남해고속도로) → 진주 → 함양(88고속도로) → 남원(3시간 30분소요)
강릉(영동고속도로) → 신갈 → 대전(호남고속도로) → 전주 → 남원
(기 차)
서울 ↔ 남원(13회, 4시간 30분 소요)
남원 ↔ 여수(12회, 2시간 45분 소요)
(비행기)
서울 → 광주행(하루9회, 50분소요) → 시외버스 → 남원
서울 → 군산행(하루3회, 45분소요) → 시외버스 →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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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향토박물관 잘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