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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자들이 빵을 가져 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16.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 하였다.
17. 예수께서 이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너희는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은 그에게 "열두 광주리입니다" 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 광주리입니다" 하니,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막8:14-21)
14. The disciples had forgotten to bring enough bread and had only one loaf with them in the boat. 15. “Take care,” Jesus warned them, “and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and the yeast of Herod.”
16. They started discussing among themselves: “He says this because we don't have any bread.”
17. Jesus knew what they were saying, so he asked them, “Why are you discussing about not having any bread? Don't you know or understand yet? Are your minds so dull? 18. You have eyes—can't you see? You have ears—can't you hear? Don't you remember 19. when I broke the five loaves for the five thousand people? How many baskets full of leftover pieces did you take up?”
“Twelve,” they answered.
20. “And when I broke the seven loaves for the four thousand people,” asked Jesus, “how many baskets full of leftover pieces did you take up?”
“Seven,” they answered.
21. “And you still don't understand?” he asked them.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 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
14. The disciples had forgotten to bring enough bread and had only one loaf with them in the boat.
예수님과 제자들은 평소에 도시락을 챙겨서 다녔습니다.
우리가 나들이 갈 때처럼.......
그랬으니 제자들이 식사 챙기는 일을 깜빡했을 때 당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입니다.
주님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일곱 개의 떡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제자들 한 열너댓 명의 식사 준비는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수시로 그런 능력을 행하셨더라면 제자들은 평소에 제자들은 한 사람 도시락만 달랑 들고 다녔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도시락도 필요 없습니다.
떡 하나에 반찬으로 물고기 한 마리!
그래도 제자들은 배부르게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의 기사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배고파서 남의 밭의 밀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 일은 단순히 제자들이 주님의 기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려해야 할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사탄이 떡의 기적을 요구할 때 주님은 그의 요구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어느 순간에는 5,000명도 4,000명도 먹이신 것입니다.다.
제자들은 언제 주님의 기적이 일으키실지 또 그 기적이 부인 되어야 할지 그 경계를 몰랐던 것이 옳습니다.
[공생애 3년 X 일 년 365일 X 하루 3끼 – 2끼(오병이어, 칠곱 개 떡 몇 마리 물고기 기적) = 3,283 번]
그러니 제자들이 3년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동안 기적을 통해 식사를 해결했던 것은 단 두 끼였습니다.
나머지 3,000번은 제자들이 도시락을 준비했고 283번은 굶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도시락을 준비하고 어느 때는 기적을 기대해야 하는 것인가?
이 거창 시골 마을에 엄청난 규모의 교회 건물이 있습니다.
건물이 한 20층 될 것입니다.
그 목사는 얼마 안 되는 교인을 두고 “믿쉽니다.!” 한 다음에 융자도 받고 복지 관련 국가 지원도 끌어내고 기술을 부려서 이 건물을 지은 것 같습니다.
빚은 다 갚았는지?
저는 그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생각합니다.
왜 저런 교회 건물을 무리하게 이곳에 지었을까?
지금은 무슨 용도로 사용되고 있을까?
전기세 수도세 청소비 단순히 이 건물의 한 달 유지비만도 굉장할 것입니다.
과시용인가?
그래도 이것은 나은 편입니다.
종종 부도난 교회들에 관해 신문 기사들이 뜹니다.
믿음 믿음하다가 일어난 불상사입니다.
40년을 사막을 헤매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만나에 관한 한 엄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하루 이상의 만나를 챙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저장하면 그것이 썩어서 거기에서 벌레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소유욕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 짓을 하다가 결국 썩어서 벌레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창고 다섯을 지어서 몇 년 치를 보장하려는 욕심 때문에 핵 폐기수를 바다에 방류해야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가끔은 굶기도 하고, 또 하루치를 은혜로 챙겨 먹고, 그러다가 3년에 한 두어 번 일어나는 일인데 난관에 부딪히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난관을 헤쳐나가는 그런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좌우간에 제자들이 실수했습니다.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 실수를 했으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탄 배 안에서 굶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음식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해석 이야기입니다.
그 일로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알아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못 챙기더니 주님의 말씀을 두고 주님께서 먹을 것을 두고 그 말씀을 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15. “Take care,” Jesus warned them, “and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and the yeast of Herod.”
예수님은 아무 때나 경고하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그 때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 경고를 받았다면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더 주의 깊게 들은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다만 엉뚱하게 해석했을 뿐입니다.
해석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조심할 대상을 말씀하셨는데 그 대상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또 헤롯 사람들의 누룩입니다.
이 두 누룩은 전혀 성격이 다를 것입니다.
술을 만드는 누룩이 있고 빵을 만드는 누룩이 있습니다.
바래새파의 누룩이 흰색이라면 거의 반대 성격을 가진 헤롯의 누룩은 검은색입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을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나라 양반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 배를 며칠 굶었어도 양반은 어흠 어흠하면서 이쑤시개로 이 쑤시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양반 출신은 밥을 주면 비벼 먹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비빔밥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이 정해 놓은 양반의 규율을 따라 하지 그들이 정해 놓은 상놈의 법을 따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그 법들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눅18:12)
그들은 그렇게 세상과 구별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의를 잘 지키다 보니 그들은 남을 얕잡아보고는 했습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눅18:11)
물론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간단히 외식하는 자라고 치부하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도 그들의 경건 행위를 일정 인정하시고 계셨습니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
주님은 그 경건을 능가하는 경건을 보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헤롯의 성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족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우라고 했던 헤롯 안티바의 증조 할아버지 헤롯 안티파테르 1세는 이두메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이방 나라 에돔의 장군이었습니다.
그 때는 유대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안티퍼테르 2세는 로마에 의해 유대 행정 장관(징세관)으로 임명받아서 유대 지경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는 로마가 지배하던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두메인이 유대인을 통치하는데 그의 출신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신분 세탁을 위해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헤롯 대왕인데 그가 BC47 년 갈릴리의 총독으로 부임해 와서 산적들을 제압하고 유대와 로마의 지지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BC40년 로마 황제에 의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 되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세상이니 로마가 유대인의 왕을 정한 것입니다.
이 헤롯이 왕이 되어서 먼저 산헤드린의 정치력을 빼앗아버리고 그를 견제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대제사장도 종교 기능만을 하도록 제한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을 의식해서 유대 혈통인 아내 마리암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성전 건축을 했습니다.
특별히 성전 건축은 그의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정치적으로 더 종교적 행위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에 속으면 안 되는데.....
그 종교 행위는 그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약점을 보상하는 행위였습니다.
정치인의 명분을 주의해서 살펴봅시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불평등 사회가 북한입니다.
극소수의 권력층이 그들의 풍요를 보장받기 위해 수천만 양민을 기아로 몰아 죽이는 불평등을 자행합니다.
그들이 첫째로 내세우는 가치가 평등입니다.
완전히 자기모순입니다.
그들은 사회 평등을 위해 그 불평등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자신이 독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자신이 가장 부정의하다는 것을 이를 뿐입니다.
정치인들의 명분은 내용에 대한 치명적인 보상행위들입니다.
헤롯이 그랬습니다.
성전을 화려하게 지은 이 헤롯 대왕이 헤롯 안티파의 아버지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주의하고 경계하여라" 하셨다.(마16:6)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헤롯의 누룩을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두개파 사람들 그들은 말마다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보수성으로 인해서 모세 오경 외에 다른 경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들이 보수를 주장하니 이들이 이 세속 사회를 부정하며 기피 할 것 같은데 천만에 그 반대였습니다.
로마에 빌붙어서 세상 권력을 다 누리는 것입니다.
보수를 말하면서 엄청난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보수를 주장하면서 친일 매국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하는 일마다 또 말마다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때는 안면을 싹 바꾸는 것입니다.
4.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마2:4)
그는 나실 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7. 그 때에 헤롯은 그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캐어 묻고,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기를 "가서, 그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 하였다.(마2:7,8)
그는 그리스도를 경배하겠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16.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마2:16)
경배하겠다던 그들이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조리 죽인 것입니다.
그 죽은 아이 가운데 그리스도가 들어있기를 바라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경배를 말하는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런데 군대를 몰고 가서 그리스도를 죽이는 처세를 합니다.
주님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16.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 하였다.
16. They started discussing among themselves: “He says this because we don't have any bread.”
그들은 주님의 누룩에 대한 경고를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서울의 친척집을 찾아갈 때 먼저 네비게이션을 켭니다.
그리고 네비게이션이 말 한대로 핸들을 돌려야 합니다.
네비게이션의 지도를 무시했다가는 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천국을 알리는 네비게이션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표현이 아주 은유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은 갑자기 여기에서 누룩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누룩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주님은 왜 이런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보이는 것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롬1:20)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 대한 은유입니다.
시만큼 어려운 것이 있을까!
그런데 세상은 모조리 하나님의 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이 대면하여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0.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21. 주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22.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23.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출33:20-23)
우리는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계시받아야 합니다.
17. 예수께서 이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17. Jesus knew what they were saying, so he asked them, “Why are you discussing about not having any bread? Don't you know or understand yet? Are your minds so dull?
주님의 비유가 어렵다는 면에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주님과의 이런 대화의 단절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물을 말씀하시면 여인은 물바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께서 샘솟는 생수를 말씀하시면 빨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 여인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갑자기 이 여인을 공격하신 것입니다.
16. 예수께서 그 여자더러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하시니,
17. 여자가 대답하기를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18.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제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말하기를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요4:16-19)
주님은 대화와는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 여인의 약점을 여지없이 찔러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 주님의 말씀 때문에 비명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일어난 일입니다 .
대화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으로 하여금 주님을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말씀을 곡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여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 안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멋대로 해석했던 것은 도시락을 챙기지 못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동문서답을 하는 것은 이 여인의 남편 다섯 때문이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에게 솥뚜껑이 자라로 보였던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오늘도 여전히 앉은뱅이인 것은 내가 일어설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앉은뱅이를 향해서 명령하시자 그 일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의 위력 앞에서 자신이 앉은뱅이라는 사실을 잊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시락 못 챙겼다는 그 강박 관념 밑에서 누룩과 빵을 연관시킨 것입니다.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일도 있었을 것이고 또 부정적인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그 부정적인 일들인 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이 제자들과 같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교회가 실패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곡해로 인해 엉뚱한 말을 듣고 아멘 할렐루야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부르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된 셈입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자신이 앉은뱅이라는 사실을 잊고 주님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일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말 못 하는 자들은 자신이 말 못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주님이 지금 말하라고 하시는 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고 성경이 말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강박 관념이 있는 사람에게 주의 말씀이 통하지 않습니다.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18. You have eyes—can't you see? You have ears—can't you hear? Don't you remember
사람들은 눈이 있으면 보는 줄 압니다.
목욕탕에 가 보세요.
자신의 손가락을 보세요.
자신의 손가락이 그렇게 짧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이 여러분의 바로 눈 앞에서 굴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귀가 있으면 틀림없이 듣는 줄 압니다.
주께서 바래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과 빵 만드는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빵 만드는 누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바로 듣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8. 기억하지 못하느냐?
18. Don't you remember
그들은 지금 홍해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들이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그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1.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느냐?
12.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더냐?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출14:11,12)
그들의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쳐들어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은 현실을 보기 전에 그들이 먼저 보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10 번의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것을 기억했다면 무덤을 운운하며 차라리 애굽의 종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3.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여라. 너희가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14. 주께서 너희를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진정하여라."(출14:13,14)
홍해 앞의 히브리인들이 10번의 기적을 기억해야 했다면 배 안의 제자들이 반드시 기억할 사건이 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너희는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은 그에게 "열두 광주리입니다" 하였다.
19. when I broke the five loaves for the five thousand people? How many baskets full of leftover pieces did you take up?”
“Twelve,” they answered.
예수께서는 사람을 피해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거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그들이 급히 달려오느라고 먹을 것을 챙길 시간이 없었습닏.
주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외딴 곳에서 먼저 하늘의 양식을 먹이신 것입니다.
즉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한 사람의 도시락을 들어 감사하셨고 그것을 5,000명에게 나누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먹고 남긴 부스러기가 12 광주리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감사 앞에서 한 사람의 도시락이 5,000명의 도시락이 되는 일을 눈으로 보고 또 귀로 들은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 광주리입니다" 하니,
20. “And when I broke the seven loaves for the four thousand people,” asked Jesus, “how many baskets full of leftover pieces did you take up?”
“Seven,” they answered.
이 일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일곱 개의 떡으로 또 몇 개의 물고기로 그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주께서 일곱 개의 덕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4,000명을 먹이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경험한 것은 1-1=0 인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1에서 1을 5,000번을 뺐는데 주님의 손에는 여전히 1이 들려있었습니다.
다음에는 4,000번 그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21. “And you still don't understand?” he asked them.
아직도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본 적이 없으며 들은 적이 없느냐?
주일이 오면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11시 교회 장의자에 앉아서 수천 년 전 모세의 때의 일들을 기억하는 일들입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앞에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헤롯의 누룩과 바리새파의 누룩은 과연 무엇을 뜻합니까?
어떤 목사님의 해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룩은 ‘위선’(hypocrisy)을 이른다는 것입니다.
누룩은 밀가루를 부풀려서 겉과 속을 다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위선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헤롯 즉 사두개인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야 외식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다릅니다.
그 외모가 이미 이두메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면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외식이 가능하지만 헤롯은 도대체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외식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를 봐도 이두메인이었습니다.
말투를 들어도
그의 생각도
바리새인이 제 존재를 감추고 물건을 빼앗으려는 도둑이라면 헤롯은 존재를 드러내고 물건을 빼앗는 강도에 속합니다.
그들은 거추장스럽게 자신은 위장하며 피곤하게 외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식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든이라고 해놓고 날리면이라고 들으라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바리새인이나 헤롯당이나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누룩이란 질을 바꾸는데 그것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 맹숭맹숭한 큰 밀가루 덩어리를 다른 질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양을 넣어도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 전염성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종교적인 실천 행위를 하고 잘난 척하는 일
아니면 보수를 말하면서 가장 처세적인 친일을 하는 일
이것의 전염성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입니다.
파급 효과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무엇 때문에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오직 한 개의 떡만 준비했던 그 배로 돌아가 봅시다.
주님은 5,000명 4,000명을 먹이신 그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시고 그 배 안에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그 배 안에서 모조리 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후 배에 있던 그 유일한 떡 하나를 드시더니 감사를 하셨더라.
그리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먹고 남은 것이 한 광주리 반이었더라. 마가복음 8장 몇 절” 그런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그 경계는 엄격합니다.
20층의 교회 빌딩은 지어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경계를 넘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가끔 굶어야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배 안은 기적이 일어날 곳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