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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문학이나 철학에 역설법이라는 것이 있지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맞세워 깊은 뜻을 전달하는 수법입니다. 아마 역설법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속담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기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 져주는 것이 참으로 이기는 길임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역설법은 인생의 진리를 함축적으로 전달해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가히 ‘역설의 장’이라고 할 만큼 인생의 역설에 대해서 역설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온갖 인생의 풍파를 다 겪고 지혜자로 우뚝 선 전도자가 가르쳐주는 역설의 진리를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보면 “∼이 ∼보다 낫다”는 식의 비교법으로 지혜자와 우매자를 대조시켜 나갑니다. 그런대 지혜자는 보통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면 보통 사람들은 잔칫집에 가는 것을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전도서 기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기준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참된 지혜를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기러기”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기러기 한 마리가 거위들 틈바구니 속에 삽니다. 기러기는 거위들을 향하여 자기처럼 거위들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거위들은 도리어 기러기를 향하여 뜬 구름 잡는 몽상가라고 비난합니다. 결국 거위들에게 동화된 기러기는 날기를 포기하고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케에르케고르의 우화처럼 우리는 세상의 기준대로 살아갑니다. 거위들 틈바구니에서 자기도 모르게 야성을 잃어버리고 뒤뚱거리는 기러기와 같이 우리는 하늘의 지혜는 잃고 세상의 약삭빠른 지혜가 전부인양 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일희일비(一喜一悲)를 거듭합니까?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기뻐하고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슬퍼합니다. 살고 죽을 만큼 심각한 문제는 가볍게 여기고 스포츠처럼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때로 목숨을 걸 만큼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너무 심하게 다투다가 마침내 이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법정에서 판사 앞에 싸웁니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논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논쟁 주제라는 것이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감자를 먹을 때 설탕에 찍어먹어야 옳으냐 아니면 소금에 찍어먹어야 옳으냐는 것입니다. 둘이 한참을 싸우다가 판사에게 어느 쪽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글쎄요. 우리 집에서는 감자를 먹을 때 고추장에 찍어먹는데요.”
<여섯 가지 역설적 인생의 진리>
오늘 지혜자가 외치는 “여섯 가지 역설의 진리”를 잘 들으시고 더 중요한 것은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덜 중요한 것은 덜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혜자가 권하는 더 나은 것을 선택하며 한평생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첫째로, 이름이 기름보다 낫습니다.
1절 전반부를 보세요.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여기서 좋은 기름은 많은 재물을 뜻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잠언서 22: 1절에 있습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좋은 기름, 얼마나 좋습니까? 외관상 보기에도 좋고 향기가 멀리까지 진동합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맙니다. 재산은 반드시 소멸되기 마련이지만 이름은 오래 갑니다. 그러므로 재산보다 명예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지요. 셰익스피어는 “오델로”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 지갑을 훔치는 것은 내 쓰레기를 훔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이름을 훔치는 것은 내 목숨을 훔치는 것이다.”
옳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서 4: 3절에서 아름다운 이름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클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요한 계시록 3: 5절도 말씀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얼마 전에 한겨례 출판사에서 나온 “이완용 평전”을 읽었습니다. 삼척동자도 이완용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압니다. 을사오적 중에 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대명사이지요. 하지만 지은이가 일당(一堂) 이완용의 개인사를 연구해보니 서예를 얼마나 잘 했던지 추사 김정희에 버금갔고 미국과 일본에 두루 유학을 다녀온 당대 최고의 합리적 지식인이었습니다. 한 때 고종 임금이 총애하는 충성스러운 신하요, 검소하고 성실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 이완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완용이라는 이름은 망국노(亡國奴), 그것 하나만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안중근, 유관순 같은 이름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의 인생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이완용과 달리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값비싼 향유보다 이름과 명예를 더 낫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2절을 봅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1절 후반부도 봅시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사람들은 생일잔치와 같이 기분 좋은 잔칫집에 가는 것은 즐거워하지만 상갓집에 가는 것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전도자가 발견한 진리는 정반대입니다. 떠들썩한 잔칫집에 가면 우리는 경망스러워지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리를 깨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부처님, 즉 젊은 날의 석가모니가 왕자로 태어나서 항상 잔칫집 분위기, 좋은 것만 보고 자랐는데 어느 날 궁궐 밖에서 사람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로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서는 충격을 받아 출가의 길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영어로 ‘무덤’은 ‘grave’인데 이 말은 ‘엄숙한’, ‘진지한’이라는 뜻도 가집니다. 무덤에 가면 사람들은 철학자가 됩니다. 엄숙하고 진지해집니다. 인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게 됩니다. 우매자는 현실적인 쾌락에 집착하지만 지혜자는 자신의 영예로운 죽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찾아올 영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경박하고 아무 의미 없는 잔칫집의 웃음보다 심각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초상집의 눈물을 더 낫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다.
3절을 봅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절에서는 슬피 우는 대표적인 장소로 초상집을, 떠들고 웃는 대표적인 장소로 혼인집을 듭니다. 그리하여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지만 우매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웃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티 없이 맑고 순한 웃음이 있는가 하면 비굴한 웃음, 어이없는 웃음, 억지로 웃는 웃음, 농담으로 웃는 경박한 웃음도 있습니다. 이런 거짓된 웃음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진실로부터 도피시킵니다.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솔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가시나무는 쉽게 불이 붙고, 타다닥 하고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금방 타고, 쉽게 사그라집니다. 경박한 웃음 역시 요란스럽기만 할 뿐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불타는 가시나무와 같은 것이지요. 예를 들면 텔레비전에서 쇼나 프로를 볼 때의 웃음이 이런 종류이겠지요. 그 때 뿐입니다. 오래 여운이 남지 않습니다.
어떤 영안실로 세 사람의 시신이 실려 들어왔습니다. 셋이 모두 웃고 죽었습니다. 첫 번째 시신은 목사님이었습니다. 교인 가운데 할머니가 있었는데, 100 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그 소식을 알리면 할머니의 심장이 약해서 위험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목사님을 통해서 복권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를 찾아가 100 억 원짜리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말하자 할머니가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복권을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이 그 말을 듣고서는 너무 좋아서 웃다가 기절했고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 시신은 자식이 맨 날 꼴찌만 하다가 처음으로 1등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너무 좋아서 웃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시신은 벼락 맞아 죽은 사람입니다. 번개가 번쩍할 때 사진을 찍는 줄 알고 “김치!” 하고 웃다가 죽었다는 것이지요.
웃고 사는 것,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웃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나 웃는 웃음이 아닌 경박한 웃음, 그것보다는 차라리 슬픔이 더 낫습니다. 눈물과 슬픔에는 인간의 진실과 정직과 순수가 있습니다. 눈물은 우리를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의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린 이들이 기쁨의 열매를 거둔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의미 없는 경박한 웃음보다 영혼의 울림이 있는 눈물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
본문 5절을 봅시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노래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혼의 찬양과는 다릅니다. 부질없고 육적이고 세상적인 의미의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가지고 “이제부터 찬양대도 없애고 열심히 책망만 하자.” 이렇게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가끔 대중가요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노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그런 노래들이 우리의 감각만 자극할 때 발생하지요. 마음을 뒤흔들고 영혼을 깨우기 보다는 일시적인 감흥만 돋우는 그런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도 모든 노래라고 하지 않고 “우매한 자의 노래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매한 자들이 불러서 일시적으로 감각만 자극하는 노래에 취하지 말고 차라리 지혜자들이 던지는 책망을 더 즐겨들으라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는 말은 백번 들어도 옳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듣기 좋은 아첨만 하는 사람보다 때로 진실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잘못을 꾸짖어 주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스승인 것을 알게 됩니다. 사극에서도 흔히 간신배는 듣기 좋은 아첨만 일삼지만 충신은 임금을 참으로 아끼고 존경해서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듣기 좋은 노랫소리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때로 폐부를 찌르는 충고와 책망을 귀담아 들어 우리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습니다.
8절 전반부를 봅시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사람들은 일의 시작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물론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시작의 종교이면서 무엇보다도 끝을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시작이 아무리 좋아도 끝이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었던 좌옹(佐翁) 윤치호 선생의 평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가 개화가 되기 전에 윤치호는 중국과 일본에 유학했고 미국의 남감리교 대학인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중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했는데 미국 유학시절에는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 계속 우등만 했고 유명한 학생회의 회장을 지냈고 감리교회 여러 군데를 다니며 영어로 얼마나 연설을 잘 했던지 멀리서도 윤치호의 연설을 듣기 위해 찾아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윤치호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최고가는 지성이요 대석학이었습니다. 60년 동안 매일 영어로 기록한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사료일 정도입니다. 그는 한 때 독립협회에도 몸 담았고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도 했습니다. 시작은 너무도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역시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알리는 나팔수로 전락했고 역사는 그를 대표적인 친일분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반전보다 후반전이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후반전을 강조하는 역전의 종교이지요. 구약의 시편에 등장하는 “할렐루야”는 신약에 가서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요한 계시록 거의 끝에 가서야 나옵니다(계 19: 1, 3, 4, 6). 기독교는 마지막을 유달리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에는 좋았으나 나중이 좋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처음에 출발은 잘못 했으나 죽기 몇 분 전에 결단을 잘 해서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시작보다 끝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섯째로,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습니다.
본문 8절 후반부부터 9절을 봅시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하나님 사랑의 제일가는 특징이 “오래 참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역시 사랑의 14가지 속성 중에 가장 먼저 든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쉽게 화를 냅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잘 참고 기다릴 줄 압니다. 거룩한 분노 혹은 의로운 분노(義憤)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순간적인 분노는 통제력을 잃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약 1: 20). 모세는 분노로 사람을 죽였고 분노로 인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민 20: 1-13). 참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사람이 어리석습니다. 잘 참아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옵니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합시다!>
인생은 어차피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더 나은 길을 선택해야 하겠지요. 전도자는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현자 중에 현자입니다. 그 지혜자의 대명사 전도자가 우리에게 더 나은 길을 선택하라고 충고합니다.
보배로운 기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선택하십시오! 잔칫집보다 상갓집을 더 많이 찾으십시오! 웃음보다 슬픔을 더 귀하게 여기십시오! 즐거운 노랫소리와 칭찬을 듣는 것보다 현자의 충고를 더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일의 시작에 만족하지 마시고 일의 끝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교만해서 쉽게 노하기보다 잘 참고 기다리십시오!
오늘 전도자가 주는 이 귀한 말씀이 여러분에게 “찌르는 채찍들 같고 잘 박힌 못”(전 12: 11)과 같아서 여러분의 삶이 한층 더 지혜롭고 행복하게 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우리가락으로 만든 찬양이라고 해서 연주해 봤는데
국악버전의 곡이 또 있다는군요. 그러나 고유한 리듬은
우리가락인 것 같습니다.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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