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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갈등을 넘어 교육 공간으로서 아이들의 변화와 성장을 만들어야
기철이는 은율이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채고는 칠판으로 다짜고짜 밀어붙였다. 다른 한 손에는 촉이 삐죽 튀어나온 볼펜을 들어 은율이를 겨냥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은율이는 지켜보던 친구들이 말리는 틈에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친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오늘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은율이는 다른 친구들과 물건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놀았다.
그런데 은율이는 자신에게 더 이상 던질 물건이 없자, 앞자리에 있던 기철이의 책과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은율이 스스로도 심한 장난인 걸 알았지만, 지금의 재미보다 중요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덕분에 난장판이 된 기철이의 책상.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기철이가 교실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책상과 의자가 넘어져 있었다. 순간 기철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은율이의 목을 조이면서 볼펜을 들어 찌르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지켜보던 아이들이 말리고 은율이 빠져나오자 3교시 종이 울렸다.
수업이 시작되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기철이는 물건을 주섬주섬 주워 책상을 정리했다.
몹시나 억울하고 화가 났던 기철이는 학생부로 달려가 은율이를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하고, 소식을 들은 은율이 역시 기철이를 자신의 목을 조른 가해자로 맞 신고했다.
이번 일로 은율이와 기철이는 당분간 서로 소통하지 말 것을 비롯해 접근 금지 조치를 받았다. 각자가 진술서를 쓰고 담당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상대에게 장난이었지만 미안했다고, 내 책상이 엎어진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랬는데 오히려 억울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절차가 이루어지면 상대 친구를 응징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 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 아이와 연결된 친구들은 눈치를 보며 한 사람씩 데리고 나가 무슨 작당이라도 하고 오는 듯 비밀스럽게 행동하곤 했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나고, 기철이와 은율이의 이야기는 다른 일정으로 떠밀려 아이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 있었고 당사자들만 덩그러니 자신이 겪은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침을 꼴깍이며 기다리다가, 지겹다는 듯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한참 흘렀을까, 더이상 새로운 것이 없었던 기철이와 은율이 관계에 김이 빠질 때쯤 공식적인 ‘대화 절차’가 마련됐다.
두 아이와 보호자들은 조정을 위한 절차라고 들었다. 물론 이마저도 거부한다면 어떻게든 처벌로 이어지겠지만, 아이들은 다행히 덜 익어 떫은맛 나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어서 끝내고 싶어 했다.
조정을 위한 대화모임이 열리는 시간, 기철이와 은율이는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낯선 조정자의 질문에 어색한 짧은 답변이 여러 번 오가고, 기철이와 은율이는 서로를 향한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짧은 용서를 구했다.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했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 그러지 않겠노라고 약속이행문도 작성했다.
더벅머리를 매만지던 두 아이의 보호자들 역시 그럭저럭 마무리되는 것으로 마른 입에 짧은 인사를 더했다. 그간 감정이 식어 더 할 것도 덜한 것도 없는 지경임을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기철이’와 ‘은율이’를 만나왔다. ‘우리 학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아이들이라 표현한 데는 학교와 사회의 틈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사회화’되고 ‘법화’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학교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갈등이 불거져 재판까지 가는 경우를 보더라도 당혹스럽지 않다.
‘기철이’와 ‘은율이’ 역시 갈등 초기에는 살아있는 감정으로 서로를 대하며 어떻게든 자기 생각을 말하려 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절차상 종결을 목표로 하면서부터 당사자들의 욕구는 소거되어 버렸다. 막상 벌어진 문제를 두고 양측이 직면하게 될 때는 서로 기억에 의존해 문제를 재해석하고 있는 상황이 많았다.
이러한 구조가 학교를 지배하게 될 때, 학교는 학생 스스로 살아있는 욕구 그 자체를 운용할 수 있도록 연습할 수 있는 교육적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 놓칠 수 있는 치명적인 역기능 중 하나는 학생의 도덕적 행위로서의 ‘잘못’을 마치 형법상 ‘범죄’로 변질시키려는 자극적인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갈등을 서로가 대화할 수 있는 직면의 자리로, 피해를 복구하고 회복을 위해 자발적 책임을 지는 교육의 공간으로 만나지 못하고,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절차상 하자가 없는가에 집중하면서 아이들의 변화와 성장의 시간보다 행정적 서류 검토의 시간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를 두고 고전범죄학파의 기초를 마련했던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onesana di Beccaria)는 그의 논문 「범죄와 형벌」에서 도덕적·종교적인 ‘죄’와 세속적인 ‘범죄’를 구분하고, 형벌의 목적을 완전히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횡행하던 도덕적·종교적 죄악인 sin을 crime과 뒤섞어 마구잡이식 억측과 예단으로 생사람을 잡아 고문과 사형 집행을 하던 권력에 일침을 가했으며, 분명한 성문법적 근거 위에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를 주창하였다. 그가 형법과 형사 사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이다.
체사레 베카리아(Beccaria)는 소위 ‘sin’과 ‘crime’의 경계를 분명하게 설정하여 ‘죄형법정주의’를 만들었다.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는 의미이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이러한 의미에서 베카리아는 지금 우리 시대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법화사회’의 풍경을 다시 재고하라고 요청한다.
법화사회란 교육은 물론 사회 여러 영역에 법률이 침투하는 현상을 말한다.
베카리아의 지적대로라면 sin의 범주로 교육해야 하는 학교를 우리 사회가 crime의 영역으로 옮겨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법적 절차가 강화하는 과정에서 교육적 자율성은 위축되고 교육 공간이 아니라 사법 공간처럼 오인하고 있다.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다뤄야 할 도덕적 가치를 무시하고 감정적인 응징과 복수심을 따라 사법 절차를 고집한다면 그 누가 교실을 안전하다고 하겠는가?
누가 뭐래도 학교는 교육의 공간이어야 하며, 아이들은 교육과정 속 도덕적 범주에서 일상의 관계와 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가치를 연습해야 한다.
지금도 대부분의 ‘기철이’와 ‘은율이’들은 서로를 마주할 공간이 생기면 함께 대화를 시도하고, 갈등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싶어 한다. 아이들의 살아있는 욕구와 감정을 소거하려 하지 말자.
일부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아이들로 인해 교육의 중심축까지 움직여서야 하겠는가.▩
글 촌평 : 상황을 소설처럼 묘사하고 전달력 있는 것은 바람직하고 고마운 글 전개이나 / 체사레 베카리아를 인용하며 죄형법정주의를 강조한 것은 sin과 crime을 비교한 것은 논리적 연계성이 떨어지고 혹시는 설명이 빈약하다. 오히려 학교사회가 겪는 교육기능의 상실과 혼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학교사회가 법화하는 역기능을 부각시키면서 법화학교로의 전락을 재고하라는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