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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28) - 제 5장 여래선 시학 8. 마음도 방편이다
8. 마음도 방편이다
달마는 미혹을 끊는 방편으로 마음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기 때문에 언어를 초월한다. 그렇다면 도를 닦는 마음은 무엇인가? 쉽게 생각하면 두 개의 마음이 있다. 하나는 이름과 형상을 초월하는 본래 마음, 청정심, 진심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 마음의 작용인 분별심, 망심이다. 도를 닦는 마음은 후자이다. 전자를 진심, 후자를 자심 혹은 망심이라고 부르면 진심은 분별 이전의 마음, 망심은 분별하는 마음이다.
체와 용의 관계로 읽으며 진심, 청정심은 체(體)이고 망심, 분별은 용(用)이다. 그러나 체와 용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체용일여(體用一如)다. 다만 부석의 필요에 의해 나누고, 이것도 방편이다. 도를 닦는 마음도 분별이고 망상이지만 달마는 이런 분별도 방편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방편으로서의 마음은 청정심, 진심이 아니라 진심의 작용이다. 중요한 것은 미혹을 관하고 미혹이 원래 일어날 곳이 없다는 것(청정심)을 아는 것. 달마와 2조 혜가의 대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혜가는 달마에게 말한다.
혜가: 제 마음이 편안치 못해 불안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십시오.
달마: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
혜가: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
불안한 마음은 분별이고 망심이다. 본래 마음, 청정심, 진심은 불안 같은 망심을 모른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혜가의 말에 달마는 '그 마음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가져오면 편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혜가는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불안한 마음은 진심, 여래청정심이 움직인 것. 그러니까 분별 망상이다. 본래 마음(체)이 움빅인 망상(용)이다. 혜가가 마음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은 분별, 망상이 본래 마음의 용이고, 본래 마음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마음도 없다. 요컨대 불안한 마음(용)도 없고 본래 마음, 청정심, 진심(체)도 없다.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불안도 없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이름과 형상은 없지만 작용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본래 마음이기 때문이다. 밥 먹는 것도 마음, 눈 깜박이는 것도 마음이다. 불안한 마음도 마음이다. 그렇다면 본래 마음, 청정심은 어디 있고 불안한 마음은 어디 있는가? 불안한 마음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불안한 마음이 그대로 청정심인 것도 아니다. 체용일여고 번뇌가 보리다. 그러나 달마가 강조하는 것은 망심을 방편으로 깨닫는 진심이다.
마음을 방편으로 미혹을 끊는다는 말은 불안한 마음을 방편으로 미혹을 끊는 것과 유사하다. 마음(망심)을 이용해 마음이 없다는 것(진심)을 안다. 혜가의 마음이 불안한 것은 그가 미혹을 끊지 못하고 헤매기 때문이고, 달마는 그 마음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가져올 수 없다. 불안한 마음도 원래 일어난 곳이 없다. 이렇게 미혹을 살펴보고 미혹이 본디 없다는 것을 알 때 미혹이 사라진다. 마음을 방편으로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 때 미혹이 끊어진다. 혜가가 마음을 찾을 수 없을 때 이미 그의 마음은 편안해지고, 따라서 달마는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법 자체인 마음, 진리 자체인 마음, 불성 자체인 마음이 어떤 미혹을 끊는 것인가? 마음이 법이라면 미혹도 없기 때문이다. 달마는 범부 외도 성문 연각 보살 등의 단계적 깨달음(해)이라는 미혹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번역에는 범부 이교도 제자 독각 보살로 되어 있다. 범부는 성자와 달리 어리석은 인간을 말하고, 외도는 불교(내도) 이외의 교를 말하니까 이교도이고, 성문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제자, 연각은 스스로 도를 깨닫는 자(독각), 보살은 도를 깨닫고 중생을 위해 교화하는 자이다.
성문은 부처인 말씀<사체법(四諦法)>을 듣고 깨닫고, 연각는 스승 없이 스스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12인연법을 깨닫고, 보살은 깨달은 다음 6바라밀을 실천한다. 성문, 연각은 자신만 깨닫고(소승), 보살은 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진리를 실천한다(대승). 그러니까 소승은 자기만 이롭게 하고, 대승은 자기도 이롭고 중생도 이롭게 한다. 전자가 상구보제(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보리는 지혜, 도, 깨달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역사는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전하고, 중국 선종은 특히 대승불교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다 같이 깨달음을 구하지만 범부 외도를 포함해서 깨달음은 범부-외도-성문-연각-보살의 단계로 나간다. 달마가 강조하는 것은 법과 같은, 여법(如法)한 마음이면 미혹도 없고, 따라서 미혹도 없는데 어떤 미혹을 끊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것은 범부-외도-성문-연각-보살 등의 단계적 깨달음에 관한 미혹을 끊는 것 왜냐하면 단계적 깨달음도 분별이고, 참된 마음은 이런 분별도 부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달마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마음은 공이고 무이지만 이런 마음의 본성을 깨닫기 위해 마음을 방편으로 사용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깨달음에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분별(미혹)을 끊어야 하고, 단계적 깨달음에 관한 미혹도 끊어야 한다는 것, 내가 달마의 말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런 주장이 여래선의 시쓰기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나는 여래선을 수행에 의한 이념거정(관심)과 깨달음(증심), 혹은 간심간정을 중심으로 해석했고, 그것을 시학에 원용했다. 말하자면 여래선 시학은 후생, 점수에 의해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과정은 자아-대상-진아 혹은 자심-대상-진심으로 요약되고, 마침내 달마가 강조하는 무심을 전제로 이런 도식은 무아-무상-진아 혹은 무심-무상-진심으로 부연된다. 한편 반야사상을 강조하면 무아-무상-무언-무의의 도식이 가능하다.
거칠게 말하면 여래선은 마음(자심)이 수행에 의해 참된 마음(청정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문제는 두 개의 나, 두 개의 마음이다. 달마에 의하면 마음(자심)은 방편으로서의 마음이고, 이런 마음도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 마음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마음을 닦느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방편이고, 어디에도 없는 마음이 여래청정심이고 진심이고 보리이고 반야 공이다. 수행이 방편이고 시쓰기가 방편이다. 그러나 달마에 의하면 깨달음에는 단계가 없고, 단계적 깨달음도 미혹이기 때문에 이 미혹도 끊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여래선 시학과 조사선 시학을 분별하는 것도 미혹이지만 이런 분별도 방편이다. /제 5장 여래선 시학 끝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29) - 제 6장 조사선 시학 1. 무념식정
1. 무념식정
여래선 시학은 간심간정(看心看淨), 곧 망상을 떠나 정념을 버리는 이념거정(離念去情)과 증심(證心)을 지향한다. 특히 수행으로서의 시쓰기는 좌선을 하듯이 계속 마음을 비워 마침내 증심, 자성청정심을 깨달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래선 시학이 이념거정, 곧 망념을 버리고 잡스러운 느낌을 버려 청정심에 도달한다면 조사선 시학은 무념식정(無念息情)의 세계를 노래한다. 이념(離念)은 떠나야 할 마음도 없다. 전자가 대상을 매개로 진심에 이른다면 후자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대상도 없다. 무념은 대상의 상(相)을 초월하는 진여를 보는 마음, 혜능 식으로 말하면 생각하되 생각이 없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무념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되 생각(망념)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는 대상은 실체가 없고 모두 마음의 산물이고 마음도 실체가 없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여래를 볼 수 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말씀하신다.
이념거정이 망념과 정념을 떠나 자성청정심을 지향한다면 무념식정은 자성청정심을 자심과 결합시켜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불기념(不起念), 마음을 조작하지 않는 부작의(不作爲), 정념이 일어나지 않는 불기정(不起情)을 강조한다. 이념(離念)은 자심이 일어나지 않고, 자심이 그대로 진심(청정심)을 지향한다면 무념(無念)은 자심이 일어나지 않고, 자심이 그대로 진심(여래)이 되는 것, 거칠게 말하면 여래선은 나쁜 마음을 버리고 좋은 마음을 찾아가고, 조사선은 마음이 다른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여래청정심이 된다. 전자가 다심-대상-진심의 관계라면 후자는 자심=진심으로 표현할 수 있다.
진심 ( )
자심 대상 자심=진심 ( )
(여래선) (조사선)
요컨대 마음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여래선이 수행을 강조하는 것은 자심(망념)이 수행에 의해 진심(여래청정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선에선 진심이 바로 자심이고 여래이고 부처이기 때문에 수행이 필요 없다. 조사선을 흔히 초불(超佛)조사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부처가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부처이기 때문이다. 달마도 말했지만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다.
거칠게 말하면 여래선이 '나는 부처를 찾아간다'는 명제라면 조사선은 '나는 부처다.'라는 명제가 된다. 무념은 사물을 보되 상(相)을 보는 게 아니라 진여를 본다는 점에서 이미 깨달은 상태고, 조사선 시학은 이렇게 깨달은 마음을 노래하는 경우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깨달은 선사들의 오도송, 게송 등이고, 후자는 내가 부처라는 것을, 본디 내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노래한다. 대상을 관하는 관심(觀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보고, 망념이 없는 무념의 세계를 노래한다. 망념이 없으면 그대로 진심이고 부처다. 여래선이 수(修)와 증(證)을 강조한다면 조사선은 무수무증(無修無證)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자심과 진심, 망념과 깨달음도 하나의 마음이고 그러므로 무념 가운데 본래 청정심이 운용되기 때문에 닦을 청정심도 없다.
신수(여래선)에 의하면 마음은 명경대와 같고, 따라서 부지런히 닦아 맑은 거울(청정심)에 티끌과 먼지가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러나 혜능(조사선)에 의하면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은 그런 마음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일체 현상은 자성, 본질이 없고 인연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공이고 이 공이 또한 색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이런 색과 공의 중도에 대한 깨달음이고, 이런 깨달음은 인연이 닿아 순간에 깨닫기 때문에 돈오다. 신수의 경우 마음이 마음을 닦는다면 혜능의 경우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닦을 것도 없다. 이념거정이 망념 정념이 생긴 후 그것을 닦는 방법이라면, 무념식정은 망념 정념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맹아 상태에서 소멸시키고 죽이는 방법이다. (이상 이념거정과 무념식정에 대해서는 홍수평, <선학과 현학>, 김진무 역, 운주사,1999, 179~180 쪽 참고)
여래선이 비록 여래장 사상과 반야사상을 결합했지만 조사선과 비교할 때는 여래장 사상을 강조하고, 조사선은 반야사상을 강조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닦을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부처고, 내가 할 일은 부처를 이루려는 성불(成佛)이 아니고 마음이 부처라는 즉심즉불을 깨달으면 된다.(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30) - 제 6장 조사선 시학 2. 조사선과 동시
2. 조사선과 동시
앞에서 여래선과 동시에 대해 말했지만 조사선 역시 동시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동시에서 읽는 것은 청정심이고 무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선이 강조하는 청정심 무념이 천진한 아이들의 마음이고, 사물을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아이들의 시선이고, 본래 우리 마음은 순수하고 투명한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그후 나이가 들면서 이 순수한 마음에 때가 묻은 게 아닌가? 원래는 우리는 아는 게 없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교육과 사회생활을 통해 마음이 오염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최근에 우리 현대시를 거의 읽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인들의 마음이 너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동심을 회복해야 하고, 동심이 선과 통한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스님이 훌륭한 선사를 찾아가 "도란 무엇입니까?" 묻는다. 그때 선사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을 일을 하시오." 대답한다. 무슨 거창한 말이 나올 줄 알고 기대했던 스님은 "그건 아이들도 하는 일이 아닙니까?" 반문한다. 그러자 서사는 "어린아이들은 할 수 있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못하오." 대답한다. 나이 든 인간들이 착한 일을 못하는 것은 마음에 너무 많은 때가 묻고, 사물을 분별하고, 삶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아상(我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심이 된다는 것은 먼저 무아, 곧 나라는 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념으로 사물을 보아야 한다, 다음은 짧은 동시 한 편.
엄난 내가
왜 좋아?
그냥
넌 왜 엄마가 좋아?
그낭
-문삼석, <그냥> 전문
문삼석의 <그냥> 전문이다. 그냥 좋을 뿐이다. 아이는 무슨 이유, 사유, 의미 없이 있는 그대로 엄마가 좋다. 그리고 이런 아이의 말을 듣고 엄마도 그냥 좋다고 말한다. 엄마도 아이가 된다. 아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그동안 슴어 있던 맑음 마음을 만나는 것. 그러니까 모든 인간에겐 원래 청정한 마음이 있고, 다만 생활에 쫓기며 망념 때문에 못 볼 뿐이다. 이런 청정심을 보고 청정하게 사는 게 부처가 되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조사선이 강조하는 것은 무념식정이다. 이 동시에서 읽는 건 무념, 곧 망념 없이 사물을 보는 아이들의 마음이지만 정까지 사라진 건 아니고, 이게 선과 관련시킬 때 동시의 한계가 된다. 선이 강조하는 건 정념도 없는 청정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는 정서를 매개로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 동시는 정념도 소멸하는 무념식정의 세계에 접근한다.
하얀 이팝나무 꽃을 보니
참 하얗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거짓말 하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얀 꽃이 필까요.
-이창건, <이팝나무 꽃> 전문
이창건의 <이팝나무 꽃>의 전문이다. 하얀 이팝나무 꽃을 보고 '참 하얗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시인이 마음을 조작하지 않기 때문이고, 따라서 시인의 마음엔 망념, 분별이 없다. 많은 시인들은 하얀 이팝나무 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대로 상상하고 설명하고 조작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이런 표현은 조주 선사의 어법에 접근한다. 그에 의하면 사원은 사원일 뿐이고, 사원엔 스님들이 살 뿐이고, 의자는 의자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어법을 곧장 말하기(直言), 혹은 보여주기(示)의 방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주관적 판단, 설명, 부연이 없는 이런 어법은 망념이 없다는 점에서 자성청정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법의 수준에서 이 동시는 선적 어법은 아니다. '거짓말 하지 않고/나쁜 짓 하지 않으면/저렇게 하얀 꽃이 필까요' 라는 표현이 주관적 설명이 되어 곧장 말하기(直言) 혹은 보여주기(示)의 어법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동시는 교욱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불가피하고, 이게 선과 관련시킬 때 동시의 한계가 된다.
이런 점을 제외하면 이 시에서 읽는 것은 순수하고 청정한 마음이다. 시인의 마음은 마치 맑은 거울과 같고 이 거울에는 잡것이 없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그대로 비친다. 맑은 마음엔 맑은 사물만 비친다. 이런 마음은 거짓말 하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을 때 가능하고, 이런 마음은 분별을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대상이 하나가 된다. 청정한 마음은 바로 '하얀 꽃'이 된다. 그러므로 자아와 대상을 전제로 하는 감정, 정서 같은 정의 세계도 소멸한다.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시인(자아)과 대상이 하나가 되는 세계이지만 이때는 시인의 정서나 상상력을 매개로 하고, 그런 점에서 주관의 표현이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아가 대상을 잡아먹는 주관적 착취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선 그런 착취가 없고, 주관적 정서나 상상력에 의한 동일화도 없다.
일반 서정시가 자아를 강조한다면 이런 시는 자아가 없는 무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자아가 없기 때문에 무념식정에 접근한다. '하얀 이팝나무 꽃'은 그저 '참 하얗다'. 이런 표현이 선에 접근한다.
사실 선이란 그렇게 진지하고 위대하고 고답적인 게 아니다. 뒤에 다시 살피겠지만 추우면 춥다고 말하고 배고프면 배고프면 밥 먹고, 하얀 꽃을 보면 하얗다고 말하는 세계다. 특히 조사선이 그렇다. 위대한 선사들은 아이들 같고, 그저 평범할 뿐이다. 평범하다는 말은 가식이 없다는 뜻이고, 아이들도 가식을 모른다. 가식을 모른다는 것은 무념무작(無念無作), 곧 아무 생각이 없고, 조작도 하지 않는 평범심을 말한다.
조록조록 조록조록 비가 내리네
나가 놀까 말까 하늘만 보네.
쪼록쪼록 쪼록쪼록 비가 막 오네
창수네 집 갈래도 갈 수가 없네.
주룩주룩 주룩주룩 비가 더 오네
찾아오는 친구가 하나도 없네.
쭈룩쭈룩 쭈룩쭈룩 비가 오는데
누나 옆에 앉아서 공부나 하자.
-임석재, <비오는 날 > 전문
임석제의 <비 오는 날>전문이다. 조록조록 비가 내릴 때는 나가 놀까 말까 하늘만 본다. 그러나 쪼록쪼록 비가 막 올 때는 창수네 집에도 갈 수가 없다.처음 비가 내릴 때는 망설이고 비가 막 올때는 친구 집 가는 것도 포기한다. 억지로 일을 벌이지 않고 자연 따라 사는 삶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연따라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 비가 더 와서 찾아오는 친구가 없으니까 결국 누나 옆에서 공부나 할 수밖에. 비가 막 와도 친구 집에 우산 쓰고 놀러가는 건 자연스런,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고 억지이고 조작이다.
청운(靑原) 유신(惟信) 선사는 말한다. 참선하지 않을 때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그 후 훌륭한 선사를 만났을 때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대로 깨달았을 때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일상인들에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나 선사를 만나 공부를 하면 산도 물도 본질, 실체가 없고 모두 자아가 만든 가상이므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그러나 제대로 깨달으면, 그러니까 무념의 상태가 되면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때 산이 산인 것은 처음 산이 산인 것과 다르다. 처음엔 일상의 시각, 그러니까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마지막은 망념, 분별이 없는 무념, 곧 청정심이 되어 보는 산이기 때문에 분별, 조작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산을 뜻한다. 그러니까 주괸적 판단이 소멸한 다음의 대상,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다.
위의 동시에서 아이가 그대로의 삶을 산다고 했지만 아이는 산에 들어가 수행한 것도 아니고 무얼 깨달은 것도 아니다. 원래 자성청정심이기 때문에 수행이고 깨달음이고 하는 것이 필요 없다. 그러므로 천진한 아이들은 이미 부처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은 노장사상과 관계가 있지만 선종은 노장사상을 수용한다. 장자는 나도 대상도 잊는 물아양망(物我兩忘)을 강조하고 선도 주관과 객관이 소멸한 진여(眞如), 즉 자성청정심을 강조한다. 물론 장자와 선의 차이도 있다. 예컨대 장자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선은 그런 태도도 초월한다.
그렇다면 아이는 장자 공부를 했는가? 아이는 장자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수행을 해서 깨달은 것도 아니다. 이 시에서 비록 아이가 자연에 순응하는 삶, 억지로 무슨 일을 벌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삶을 보여주지만, 아이를 지배하는 것은 비 오는 날 친구와 놀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 아이는 마음을 모두 비우고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다. 한편 이런 게 동시의 아름다움과 통한다. 비가 더 오니까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마침내 쭈륵쭈륵 비가 오는 날 친구와 놀기를 포기하고 '공부나 하자'고 말한다. 선이 강조하는 것은 아는 게 없는 무지, 공부도 하지 말라는 무학이다. 이것이 선과 동시의 차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념, 청정심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시는 조사선 시학으로 가는 길의 입구에 있다는 입장이다. 조사선이 강조하는 것은 이렇게 맑은 마음, 허공과 같은 마음이 되어 마침내 걸릴 것이 없는 무애(無碍), 자유자재의 삶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