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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요5:24)
24 “I am telling you the truth: those who hear my words and believe in him who sent me have eternal life. They will not be judged, but have already passed from death to life.
소망
신약 성경을 펴자마자 나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은 역사의 시작을 아담에서 시작할 줄 알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됩니다.
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초청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것입니다.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현재에 대한 치명적인 부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살고 있던 땅, 난 곳, 아버지의 집을 그의 뿌리로 여겨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절대 긍정을 제시하셨습니다.
내가 보여 소망의 장소가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재의 장소에서(from) 새 장소로(to) 이사 가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당시까지 살던 곳이 갱단이 득실거렸다든지, 성적으로 문란했다든지, 특별히 우상의 문제도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네 근거의 뿌리를 뽑아서 다른 곳에 심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배춧잎 위를 기어다니던 애벌레에게 이제는 하늘을 나라다니며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을 날게 될 경우 그는 배추입을 갈아먹고 살 수 없습니다.
그 경우 배춧잎을 씹어먹던 이빨 대신에 그것의 입에는 꿀을 빠는 대롱이 달리게 될 것입니다.
배춧잎에 농약을 뿌려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 애벌레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고달팠는데 왕의 필요를 위해 흙벽돌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달픔은 어떤 식으로든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왕은 전혀 다른 요구를 했습니다.
바로가 애급의 경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사람 숫자를 조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의 요구가 아닌 생명의 요구는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종들이라도 그것은 견뎌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이런 시점에서 검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를 발전시켰으니 사람 생명을 위협하는 독재가 용인된다는 그런 생각이 우리나라를 혼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으로 말을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고전13:1)
생명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에게 방언과 예언은 엄청난 소음입니다.
네가 낳은 아들들을 죽여가며 경제적인 보장을 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바로가 악당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그 현재의 땅 애급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들에게 가야 할 새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첫째 일은 쉽지 않았는데 바로가 완강한 거부 때문이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철저히 제 정치 경제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많을 경우 전쟁나면 위험했고 그들이 없어질 경우 애급의 공장이 모두 서게된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그들의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이 바로의 군대를 저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장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현실을 목격한 것입니다.
10번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마다 애굽은 휘청거렸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의 기적을 애급의 모든 집의 장자들이 죽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애급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다시 그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 소망의 장소를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그들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눈 떠보니 거기는 정말 의외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광야였습니다.
모래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그곳은 차라리 애급보다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마실 물조차 없었습니다.
3. 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출17:3)
여러분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면 거기에는 돼지 고기 삼겹살 부추 상추 다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급에서는 집 텃밭에 부추라도 심어 먹었습니다.
김치도 담갔습니다.
돼지 한두 마리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이 사막에서는 그런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그런 타당한 이유로 그들이 하나님께 불평했는데 하나님은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재를 보장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미래의 소망을 보장받았을 뿐입니다.
현실을 모조리 그 소망에 의해 해석이 될 것입니다.
교수 의사 혹은 검판사가 되기 위해 현재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이야 게임하다가 잠들면 그만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도 소망의 나라를 가는 과정에서 그의 백성들을 낮추시고 혹은 굶기시고 시험하시고 단련하셨던 것입니다.
2.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3.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민8:2-3)
이 모든 일들은 그들에게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어려움을 택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4.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민8:4)
그 순종으로 광야를 지나다 보니 열한 번째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40년 동안 60만이 굶지 않은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자도 살고 가난뱅이도 삽니다.
황인 흑인 백인이 함께 삽니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살고 영어 독어 불어.......를 쓰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종과 주인도 삽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의 그런 구분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세상에는 죄를 짓고 옥에 갇힌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윤리적인 문제도 주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형수 고재봉이 찬송을 부르면서 사형틀로 갔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그것은 차이도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통치하던 나라에서 그의 백성을 구해냈습니다.
주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 때 모세는 바로가 통치하는 애급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이 통치하는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애급은 바로에게 시달렸지만 세상은 죽음의 권세에게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2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렇게 예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끌어내셔서 소망의 나라고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24.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24 but have already passed from death to life.
죽음이라는 현실에서(from) 소망하는 생명으로(to)!
사랑
우리의 구원이란 애급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일을 이릅니다.
물론 바로의 방해로 그 애급에서 나오는 일이 어렵습니다.
거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40년 과정 역시 어렵습니다.
저도 제 차로 가끔 서울을 다녀옵니다.
그 때에 제가 하는 일을 핸들로 방향을 잡고 발로 액셀을 밟는 일입니다.
저는 의자에 앉아서 아주 간단한 일만하는 것입니다.
아주 지루해서 졸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자동차는 난리가 난 것입니다.
연료를 기화해서 흡입하고 압축하고 폭발하고 팽창하며 배기하고.......
4 기통인가 6 기통인가 서울에 도착해서 시동을 끌 때까지 엔진 하나마다 수천 수만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영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흡입 압축 폭발 배기 쉬지 않고 엄청난 사랑의 실천 행위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의 행위가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엔진이야 4가지인지 공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작은 일과 큰 일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하시는 작은 일들입니다.
눈먼 사람들 앞을 보게 하시고
귀먹은 사람 듣게 하시고
나병이 걸린 사람 치료하시고
다리 저는 사람도........
다시 이르지만 이것들은 작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보다 훨씬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여,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어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니,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요5:20.,21)
작은 일들은 말하게 되고, 듣게 되고, 서서 걷게 되고........ 이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이란 무엇을 이릅니까?
죽은 사람을 일으켜서 세우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두 일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계셨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한 중풍 병자의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인파에 밀려서 들것을 들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지붕 위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고 친구를 달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더니 그들에게 더 큰 일부터 하셨습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막2:5)
그것을 보고 있던 서기관들이 중얼거렸습니다.
‘저 더 큰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죄를 용서하다니 저 청년이 참람하지 않은가!’
예수님을 그들의 속엣말을 들으시고 이 중풍 병자에게 작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서,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막2:11,12)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작을 일들을 하셨을까?
그 큰일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사람들이 제대로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작은 일은 큰일의 보조적인 역할 외에 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눈먼이가 눈 떴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구나!
예수님을 통해 나병이 씻은 듯이 나았구나 이제 예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큰일을 하시겠구나!
성경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20:29)
작은 일이 실은 있어도 없어도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작은 일이 충만한 부흥회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거기에서 예수님의 작은 일들이 큰일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큰일이 나는 것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1)
이 두 사건을 혼동하는 경우 심각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거부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 문 앞에서 이를 갈며 고통을 참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신 일
주님이 부활하신 일
기적을 통해 부자가 된 일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고 다섯 개를 더 지어서 부자처럼 작은 일에만 충성하다가는 그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부르시는 수가 있습니다.
기독인들에게는 그 작은 일이 아니라 큰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8,9)
스스로 거지되는 일이 큰 일입니다.
믿음
제 삶도 제 뜻대로 계획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상일을 다 그렇다 치고 죽고 사는 일은 만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인명재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왕들을 봅시다.
그들의 권세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사는 집도 우리와 다릅니다.
그 무덤도 완전히 다릅니다.
왕들의 무덤은 산과 같이 큽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별 짓을 다 합니다.
산 사람을 제 죽음과 함께 매장시키기도 합니다.
귀한 살림을 무덤에 함께 챙겨 넣기도 합니다.
그들이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 사람의 어떤 행위도 무의미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 행위에 대한 부정을 연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40년 동안 사막에서 그 연습을 시키셨습니다.
그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서는 먹을 곳을 걸어야 했습니다.
마실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 길을 60만이 40년을 사막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 손녀
그리고 약속의 땅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40년의 길이 가능했던 것은 내일의 음식을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 단 하루의 음식만 챙기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가?
24.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24 those who -- believe in him who sent me have eternal life.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 분이 그 나라로 부르실 때에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24.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24 They will not be judged, but have already passed from death to life.
믿는 사람이 심판을 받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받을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형수가 환상을 보았답니다.
자신이 사형틀에 섰습니다.
자신의 목이 올가미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털커덕 그가 서 있던 밑판이 빠질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목 대신에 예수님의 목이 그 올가미에 들어가더니 사형이 집행된 것입니다.
자신 대신에 예수님께서 사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일이 과연 믿어지느냐는 것입니다.
24.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24 those who hear my words and believe in him who sent me
말씀을 듣는다는 그 장소에서 바로 그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을 일을 사람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사람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입니다.
특권입니다.
이 일이 여러분에게 믿음을 심어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려주는 일을 위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펴십시오.
성경을 직접 읽으시기 바랍니다.
실은 교회도 그 성경의 말씀 밑에서 봉사라는 기관에 불과합니다.
그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해 주었다면 교회는 그 소명을 제대로 감당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