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강에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일사불란하게 얼지 않는다 얼었다가 다시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길 몇 차례 반복한 다음에야 평평하고 두껍게 언다 단단한 것들은 경전(經典)의 고리처럼 파륵 파륵 넘겨지다가 다시 한 권으로 뭉친다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엔 손뼉을 치는 주장이 있어 셀 수 없는 의견으로 나눠지고 다시 이어 붙는 합의 그런 일들의 끝에 큰 강은 하나의 얼음판으로 얼어붙는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 쩡쩡 얼음 조각들의 합의가 밤을 울린 다음에야 흐름이 멈춰 서듯 얼어붙는다 그런 물도 추우면 저희끼리 쩡쩡 뭉치지만 분분한 의견의 투합이 겨울을 건너와 지탱했던 제 몸을 다시 풀면 봄이다 그러니 녹는 순서는 그저 얼음 밑 흐르는 속도에 맡겨두면 되는 일이다 햇살이 조각나는 일을 두고 나뭇가지들은 저의 일직(日直)인양 분분하지만 지상의 결빙이 풀려야 비로소 햇볕도 해동한다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
태풍 카눈이 온 나라에 피해를 주려고 합니다. 지금은 많은 비가 내리고 있는데요, 피해가 없으면 좋고, 있다 하더라도 그저 스쳐 지나가길 바랍니다. 오늘은 불교신문 신춘문예입니다. 불교라는 색채가 있어서 너무 치우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읽어보면 우리의 일상과 한껏 닿아있는 작품이고 불교적 색채를 보편적인 일상으로 잘 이끌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펴볼까요?
큰 강에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일사불란하게 얼지 않는다 얼었다가 다시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길 몇 차례 반복한 다음에야 평평하고 두껍게 언다 단단한 것들은 경전(經典)의 고리처럼 파륵 파륵 넘겨지다가 다시 한 권으로 뭉친다
큰 강에 얼음이 어는 장면 묘사입니다. 사실적 진술이지요. '큰 강'은 '큰 사람', '큰 일', '성공', '완성' 등 여러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큰 일이 쉽게 이루질리 없다는 보편적 진리를 말해주는 성공적인 시작이라 여겨집니다. 일사불란 하지도 않습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다보면 언젠가는 '평평하고 두껍게' 얼음이 어는 것처럼, 완성이 다가오지요. 경전도 그냥 만들어지진 않았겠죠. 한 장 한 장이 모여 하나의 경전이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 하나가 모여 언젠가는 큰 하나가 되겠지요.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엔 손뼉을 치는 주장이 있어 셀 수 없는 의견으로 나눠지고 다시 이어 붙는 합의 그런 일들의 끝에 큰 강은 하나의 얼음판으로 얼어붙는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 쩡쩡 얼음 조각들의 합의가 밤을 울린 다음에야 흐름이 멈춰 서듯 얼어붙는다
이제 강에서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의 합의로 건너갑니다. 합의를 보기 위해서 셀 수 없는 의견들을 내고 그 의견들이 마침내 하나의 합의가 되듯 강도 그렇게 하나의 얼음판이 됩니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와 같은 표현은 오랜 시 창작 경험을 보여줍니다. '추위에 추위가 달라붙는다'니, 시인은 종일 시만 생각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연륜이 보이는 표현입니다. 쉬운 것 같지만 저런 표현 하나를 만드는 일은 수 많은 시집과 사색을 통해서 나오는거죠. 티베트 승려들의 합의와 강 얼음을 빗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런 물도 추우면 저희끼리 쩡쩡 뭉치지만 분분한 의견의 투합이 겨울을 건너와 지탱했던 제 몸을 다시 풀면 봄이다 그러니 녹는 순서는 그저 얼음 밑 흐르는 속도에 맡겨두면 되는 일이다 햇살이 조각나는 일을 두고 나뭇가지들은 저의 일직(日直)인양 분분하지만 지상의 결빙이 풀려야 비로소 햇볕도 해동한다
추위에 추위가 달라붙더니, 숫제 물도 추우면 뭉쳐서 얼음이 된다고 합니다. 아, 정말 묘사가 뛰어납니다. 분분하던 의견들이 뭉쳤다가 다시 또 흩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일은 물 흐르는 속도에 맡겨 두라는 군요. 물(水)이 흐른다(去)는 표현은 법(法)으로 합쳐지죠. 물 흐르는대로, 즉 세상의 이치대로, 법대로 두라는군요. 햇살이 조각나는 일이 하루하루의 임무인 것 처럼 나뭇가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마지막 연은 반전입니다. 햇볕이 세상을 주관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지상의 결빙이 먼저 풀려야 하늘도 움직인다네요. 사람이 먼저 마음을 풀어 놓으면 하늘도 움직인다는 시인의 지론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의 큰큰 '무엇'입니다.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많겠지요. 그냥 평안하게 살아가는게 최고지, 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큰큰 '무엇'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 흐르는대로 살면 하늘도 풀어집니다. 좋은 시를 읽고 나면 마음도 푸근하게 흘러갑니다. 태풍 '카눈'의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