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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멍에목 성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길 4-11
멍에목 교우촌 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의 ‘멍에목’[駕項里]은 ‘멍어목이’라고도 하며, 윗멍에목(속리산면 구병리)과 아래멍에목(속리산면 삼가리)으로 나뉜다. 19세기에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윗멍에목이다. 윗멍에목 마을은 2001년 행정자치부에 의해 메밀꽃 축제를 여는 ‘구병 아름마을’로 조성되었으며, 마을 뒤편의 구병산(876m) 중턱에는 한국의 3대 풍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구병산풍혈이 있다. 충북의 알프스라고 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전승에 따르면, 멍에목은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은 잘못된 것으로, 멍에목은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에 의해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敎友村)으로 일구어진 마을이다.’
복자와 순교자들의 고향 교회사의 기록에 ‘멍에목’이 나타나는 것은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였다. 이 박해 때 상주 포교들이 앵무당(현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의 앵무동) 교우촌에 살던 복자 안군심 리카르도와 김사건 안드레아, ‘상주 멍에목’ 즉 ‘보은 멍에목’에 살던 복자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들은 먼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상주와 대구 감영에서의 형벌은 혹독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이후 박경화(바오로)는 형벌로 인한 장독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안군심 리카르도도 1835년에 옥사하였다. 그리고 김사건 안드레아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오랫동안의 옥살이 끝에 1839년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다시 멍에목에 모여 살게 된 것은 박해의 위협이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땅에 살던 복자 김종륜 루카가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생활하다가 울산 죽령리(현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로 이주하였다. 박경화 · 박사의 부자와 김종륜은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집전 아래 시복되었다.
1867년 10월에는 청주 포교들이 금봉(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월용리) 마을을 습격하여 멍에목 회장 최용운 암브로시오의 처남인 맹인 전 야고보를 체포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서울 포교들이 멍에목 교우촌을 급습하여 여 요한과 최조이 부부, 안 루카, 여규신, 최운흥 등을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상주 장재동(현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장자동)에 피신해 있던 멍에목의 최용운 회장마저 체포하였다.
1867년 청주에서 순교한 전 야고보는 맹인이라고 해서 석방해 주려고 하자, “제가 비록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이지만, 마음으로는 한결같이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고 있습니다.”라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1868년의 순교자 최용운 회장은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교우들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권면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과 처남 전 야고보는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순교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나는 유일한 ‘하느님의 종’들이다.
최양업 신부의 사목 순방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 따르면, 이 해에 멍에목 교우촌의 집들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모든 아픔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였고, 함께 힘을 모아 교우촌을 재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 순방 도중에 멍에목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예비 신자였던 양반 출신 조 바오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멍에목 신자 들은 조 바오로 동생의 위협과 횡포에 시달려야만 하였고, 어렵게 지은 공소집을 허물고 애써 가꾼 농토를 잠시 버려야만 하였다.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 보은 멍에목은 복자 박경화 · 박사의 부자가 거주하던 교우촌이요, 최 양업 신부가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한 공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복자 김종륜, 순교자 최용운 회장과 안 루카, 여 요한 등이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던 천주교 성지다.
멍에목 성지에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살이와 참 신앙이 짙게 배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의 손길 아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신앙으로 인해 박해자들의 형벌 아래 죽어야만 하였다. 오늘의 후손들이 은총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신 분들이다.
성지 조성 청주교구는 2016년 8월 12일 멍에목 교우촌의 교회사적 의미를 반영하여 성지로 지정하고 담당 신부를 임명했다. 현재 멍에목 성지는 숨어 있던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 : 보은 멍에목 성지 리플렛(청주교구 선교사목국 발행),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2일)]
복자 박경화 바오로(1757-1827년)
‘도항’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잘 알려진 박경화 바오로[朴甫祿, Paulus]는, 1757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제법 재산이 있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받는 몸이었다고 한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의 아들이다.
박 바오로는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더 철저하게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박 바오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녀들이 열심히 덕행을 닦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60세가 지나서 박 바오로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우들을 안심시킨 뒤,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가는 동안 박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게다가 옥중에서는 늙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거나 보살펴 주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박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때 그의 자식들도 굳게 신앙을 증언한 뒤에 모두 대구로 끌려갔는데, 장남인 박 안드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구 감사는 연 3일 동안 박 바오로에게 혹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조금도 바뀌지 않자,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언젠가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박 바오로는 새로 감사가 부임한 뒤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령에다가 여러 차례의 형벌 때문에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그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아들과 교우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그런 다음 박경화 바오로는 평온한 기색으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드렸으니, 그때가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5개월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자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경화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년)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Andreas)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박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박 안드레아의 신앙심은 깊어져만 갔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얼마 안 되어 그의 신심과 효성, 애긍 생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족은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온 터라 가난하였지만, 교우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모두가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에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박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몹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후로도 박 안드레아는 수많은 형벌과 옥중에서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 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에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사의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종륜 루카(1819-1868년)
김종륜(金宗倫) 루카(Lucas)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김 루카는 평소에 화목함을 특히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김 루카는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김 루카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 루카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서 김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순교 당시에 김종륜 루카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종륜 루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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