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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의 기술 10 / 영적 투쟁에 있어서의 진정한 승리
- 영적 투쟁에 있어서의 진정한 승리
영적 투쟁에 있어서의 진정한 승리란
지옥의 세력을 단번에 섬멸하여 시험의 상황을
물리적으로 종료시키는 압도적인 결과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험의 한복판, 가장 거센 압박이 몰아치는
그 위태로운 현장에서 자신의 영적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께 의지를 단단히 고정하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승리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
도리어 지옥의 그림자가 영혼을 가장 짙게 덮쳐오는
시험의 한복판이다.
우리가 그 지점에서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그분을 부를 때
비로소 시험은 나를 무너뜨리는 적이 아니라
주님과 나를 결합하는 거룩한 장이 된다.
이때 우리가 악에 맞서 저항하는 힘은
결코 스스로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시험을 이길 저항의 에너지를
우리 영혼 안에 은밀히 공급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부르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그분의 힘을 불러올 때
그 은혜는 지옥의 거대한 관성을 뚫고
현실을 돌파하는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가 되어
우리를 영적 평형으로 이끈다.
결국 승리는 악과의 싸움에서 거둔 외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시험 중에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의지를
주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지옥과 나의 연결을 끊어내는
그 치열하고도 거룩한 과정 그 자체이다.
우리가 이 과정을 완수할 때 내면에는
지옥의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고요한 영적 평형이 회복되며
이 평형이야말로 미세한 우세를 점하는 근거이자
우리 영혼을 거듭남으로 이끄는 생명의 에너지가 된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진보를 '지옥의 공격이 사라지는 상태',
혹은 '평온함이 찾아오는 상태'로 정의하곤 하지만
실제 신앙의 삶은 시험의 파도가 끊이지 않는 거친 바다와 같다.
지옥의 압박 속에서도 영적 평형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아내는
그 섬세한 힘을 우리가 '미세한 우세'라 부른다면
이 기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못된 기대를 품고 낙심한다.
그들은 악의 자극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것을
'승리'라 오해하지만 실상은 고통 속에서도 악을 거부하는
그 치열한 대치 상태 자체가 거듭남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악의 충동이 사라지는 것을 '승리'라 여기지만
정작 내면은 계속해서 시험에 요동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동 속에서 우리가 영적 중심을 잃지 않고
거듭남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또 하나 무척 중요한 원리가 있다.
그것은 삶 속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우세는
그 기준을 ‘상황의 승리’가 아닌
‘악과의 분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결코 악의 자극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수동적인 정서적 반응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내면을 어지럽히는 악한 충동을
'나의 것'이라는 착각에서 분리해내고
주님의 진리를 칼날 삼아 그 뿌리를 베어내는
실질적인 투쟁의 역사이다.
악이 마음속에 떠오를 때 내 의지로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단호히 거부(fight against)하는 행위가 중요하다.
그리고 악을 발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악을 '나의 생명'에서 완전히 도려내어 내동댕이치는
능동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DP 278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악들을 보고 그것들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들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것들을 행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그것들 안에(악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만약 그가 시험 중에 있고 그것들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그는 그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 반대되는 것 즉 선을 원하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때 그를 당신 자신에게 결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참고 :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어떤 것 안에 있다(to be in something)'는 표현은
그것이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나
의지(Will)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이 내 마음속에 떠오르더라도(시험)
그것을 내 의지로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fight against)한다면
그 악은 내 생명의 일부(내 안의 실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부하는 행위 자체가
주님께서 나를 당신과 결합(Conjunction)하시는 영적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지옥의 압박이 거세질 때,
단순히 고통스러워하며 낙심하지 말고 대신 그 고통을
지옥과 내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신호로 삼아야 한다.
악으로의 압박을 느끼는 것은
내가 악 안에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이를 착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오히려 주님께서 나를
악으로부터 분리하고 계시다는 섭리적 기회이다.
따라서 고통을 느낄 때 그 압박의 근원이 되는
나의 습성을 주님의 빛 앞에 드러내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압박 속에서도
주님께 손을 내밀어 악을 거부하는 그 치열한 투쟁이야말로
주님께서 당신의 선을 우리 의지에 전유(Appropriation)시키시는
영적 접합의 현장이다.
주님은 우리가 고통을 견디는 수준을 넘어
악을 주체적으로 물리치고 당신과 하나 되는
거룩한 투쟁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 인간의 영적 평형 상태는 '기울어진 경사면'과 같다.
신앙인이 미세한 우세를 누리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결함은
자신이 영적 평형 상태에 있다고 착각한 채
지옥의 폭풍과 정면으로 맞서려 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우리의 기질과 과거의 습성이라는
이미 기울어진 경사면을 타고 우리를 덮친다.
그러므로 똑같은 높이에서 힘으로 맞서면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간이 시험의 한복판에 서 있을 때,
그 내면에서는 '지옥의 압박'과 '주님의 지탱하심'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이를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구분하여 설명해본다.
1. 시험 중의 평형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시험 중의 영적 평형은
모든 외부 자극이 소거된 평온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지옥의 당기는 힘과 천국의 미는 힘이
인간이라는 의지의 중심에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역동적인 '긴장 상태'이다.
즉, 인간이 시험을 겪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지옥의 힘을 허용된 한계 내에서 통제하고 계시며,
동시에 당신의 생명을 공급하고 계신다는
섭리적 방어선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2. 기울어진 경사면과 공급받는 힘의 공존
'이미 기울어진 경사면'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가진 '자아의 기질과 과거의 습성'이
악의 영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그들이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심리적 통로를 열어두었음을 뜻한다.
반면, '이미 공급받는 힘'은
주님께서 우리 내면의 깊은 곳(내적 자아)을 통해
실시간으로 주입하시는 생명력이다.
우리는 지옥의 관성(경사면) 위에 서 있지만,
동시에 주님의 지탱하심이라는 밧줄에 묶여 있는 상태이다.
이 두 힘이 격돌하는 그 지점이
바로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장이다.
3. 왜 시험의 한복판이 거룩한 장이 되는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평형을 유지하려 하면
반드시 지옥의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진다.
그러나 주님의 저항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스스로 그 힘에 의지하여 악을 거부하는 순간,
평형은 지옥의 궤도에서 벗어나 천국의 궤도로 재조정된다.
따라서 시험의 한복판은
지옥이 우리를 파괴하는 장소인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 의지를 당신의 것과 결합(Conjunction)시키기 위해
마련하신 거룩한 접속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그 치열한 갈등은
결코 주님의 부재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지옥의 거센 폭풍 속에서도,
당신의 생명을 우리 영혼의 뼈대에 은밀히 심어두심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우리가 그 공급받는 힘을 신뢰하며
악을 거부하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때,
그 고통스러운 시험의 자리는 주님의 권능이
우리 영혼에 실체로 새겨지는 가장 거룩한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대목에서, 인간의 영적 평형 상태를
'기울어진 경사면'에 비유하는 것이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자유의지와 회복된 평형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주님의 승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승리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되는지를 밝히려는 시도이다.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되찾아주신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참으로 위대한 사건이다.
다만 그 자유가 우리 내면에서 매일의 실존적 승리로 확증되기까지는
필연적인 시험과 투쟁의 과정이 남아 있다.
따라서 영적 평형이
'밧줄에 묶인 상태'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부정적인 결함이 아니라 주님의 정복 사역을
우리의 내면으로 전유(Appropriation)해 나가는 거룩한 과정의 실상이다.
이러한 상태가 단순히 위험한 위기라기보다,
거듭남을 위한 섭리적 구조임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논리를 덧붙인다.
주님의 정복 사역은
지옥의 절대적 지배를 무력화하여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과
'선택의 자유'를 되찾아주신 역사적 승리이다.
그러나 그 승리가 우리 내면에서
매일의 실존적 승리로 확증되기까지는
인간이 겪어야 할 시험과 투쟁의 과정이 남아 있다.
이 긴장 관계를 신학적 논리로 풀어본다.
주님은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영토를 되찾아주셨다.
그러나 그 영토는 지옥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청소된 상태(상태적 완성)가 아니라,
언제든 주님의 통치와 지옥의 관성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영적 전쟁터'로서의 자유이다.
주님의 승리는 우리에게 '이길 수 있는 조건'을 주신 것이며,
이제 그 승리를 우리 내면의 실재로 만드는
'전유(Appropriation)'의 과정은 인간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사실 우리가 겪는 영적 평형은
고정된 상수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매순간 보정되는 변수이다.
인간의 타고난 기질과 습성은
지옥의 영들과 공명하기 쉬운 '기울어진 경사면'을 형성한다.
이때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은
우리를 지옥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건져 올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악의 관성 속에서
튕겨 나가지 않도록 붙드시는 '생명의 밧줄'과 같다.
이 상태는 위험해 보이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밧줄의 긴장'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매 순간 감각하고 의지할 수 있다.
이 위험한 평형은 인간이 결코 자신의 힘으로
완전한 성인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한다.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을 향한 절박한 호출이 터져 나온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위험한 경사면에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위태로움을 통로 삼아
인간의 의지를 주님의 의지와 잇대어 가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이 위태로움은 신앙의 결함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거듭남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는 그 아슬아슬한 영적 긴장은
결코 실패의 징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붙들고 계시다는 가장 명징한 증거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쥐고 계신 그 밧줄을 온전히 신뢰할 때,
그 위태로웠던 평형은
서서히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거룩한 질서로 고정되며
마침내 지옥의 기울기를 넘어선 영원한 평화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 단지 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소극적 태도에 머물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확신은
도리어 우리 내면의 악을 향해 단호한 칼날을 휘두르게 하는
능동적인 투쟁으로 이어진다.
진정으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악의 기운이 밀려올 때 그 압박에 무력하게 매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려야 할 '미세한 우세'는
단순히 압박을 느끼며 견디는 인내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의 힘이 닥쳐올 때
그 힘의 근거가 되는 내면의 악을 정확히 포착하여
그것이 결코 나의 생명이 아님을 선언하고
주님의 주권 아래 그 악을 굴복시키는 치열한 분리의 행위이다.
지옥의 압박에 끌려 다니며 괴로워할 때
그 고통의 중심에서
단순히 ‘힘들다’고 탄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순간 ‘주님 나는 이 압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압박을 일으키는 나의 이 악한 성정(애정)을
당신의 빛 앞에 내어놓으며 거부합니다.’라고 시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을 향한 주체적인 투쟁의 시발점이다.
위에 인용된 DP 278항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악들을 보고
그것들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들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만약 그가 시험 중에 있고 그것들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그는 그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즉 압박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며
그 고통을 통해 지옥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그 빈자리에
주님의 선을 의지적으로 채워 넣는
'악의 거부와 선의 전유'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격리(분리)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옥의 압박을 그저 버티는
수동적인 피조물이 되길 바라지 않으신다.
도리어 지옥이 덮쳐올 때
그 힘에 굴복하지 않고 비틀거릴지라도
내면의 악을 발견하여 그것을 당신의 말씀으로 단호히 거부하는,
그와 같은 우리의 주체적인 투쟁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승리를 우리의 생명으로 바꾸어 주신다.
우리가 지옥의 거대한 무게를 견디며
악을 물리치려 분투하는 그 모든 순간은
주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천국의 질서를 세우시고
당신의 강한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기 위해 흘리는
그 영적 땀방울 하나하나를 주님은 헛되이 여기지 않으시며
그 투쟁의 끝에서 반드시 승리라는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 ‘미세한 우세’와 관련하여 습관의 굴레를 끊는 싸움의 기술
여기서 추가할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영적 우세의 원리가 '막중한 시험'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적 취약성(약점)'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우리 신앙생활의 더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고충이 된다는 점이다.
거대한 시험보다 어쩌면 더 심각할 수도 있는 것은
매번 같은 지점에서 무너지는 자신의 습관적 반응이다.
이 문제의 원인과 대처법을 스베덴보리의 저서를 통해 분석해본다.
그 원인으로는 '지배적 사랑'과 결합된
습관적 악의 영들을 지목할 수 있다.
일상에서 매번 같은 약점을 잡히고 물러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지배적 사랑의 일부와 결합된 악의 영들이
이미 그의 기억과 습관 속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AC 8209
‘인간과 함께 있는 영들은
인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들은 인간의 애정들과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생명과도 결합되어 있다.
인간의 생명은 그의 애정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애정들은 그의 삶의 사랑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약점(물러남, 대처 불능)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소중히 여기거나 보호하려는 어떤 애정은
지옥의 영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그가 평온할 때가 아니라
그의 애정'이 건드려질 때(약점을 잡힐 때) 즉시 활동하여
그의 의지를 마비시킨다.
즉 인간이 '스스로 싸우려고 노력'할 때 이미 그들은
그의 생명과 결합된 애정을 통해 그의 생각을 조종하고 있다.
대처 방법으로는
투쟁의 장소를 '행동' 이전인 '애정'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매번 무너지는 그 지점에서 대처하려면
'어떻게 잘 대처할까'라는 행동 전략을 짤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하는 자신의 '애정(의도)'을 직시해야 한다.
AC 9079
‘인간이 가슴으로부터 행하는 모든 것은 그에게 남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슴은 그의 사랑이며
그의 사랑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가슴으로부터 행한다는 것은 의지로부터 행한다는 것이며
의지로부터 나온 것은 그에게 전유(Appropriation)된다.’
그리고 매번 무너지는 그 '상황'이 무엇인지 짚어보라.
그것이 자신의 어떤 애정, 즉 보호받거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등을 건드리지 않는지 살펴보라.
그 애정이 바로 지옥의 영들이 그를 묶어두는 밧줄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것들로부터 의지의 즉각적인 분리가 중요하다.
그 상황이 닥치기 전, 혹은 닥치는 즉시 그 애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주님께 돌려드리는 훈련'을 해보라.
‘주님 제가 갈등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음을 시인합니다.
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의지적으로 선언해보라.
악한 충동과 스스로 하듯 맞설 때
'대처를 잘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 나의 애정을 주님께 굴복시키는 것'에 집중하라.
지옥은 인간의 행동을 무너뜨리려 하지만
인간이 애정의 중심을 주님께로 옮겨버리면
그들은 그의 내면적 연결고리를 잃게 되고 만다.
연결고리가 끊어져 그들은 영향력을 가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자아의 애정을 주님께 돌리는 이 작은 결단의 변화는
거대한 지옥의 관성을 무력화하는 결정적인 단초가 된다.
‘미세한 우세’와 관련하여
습관의 굴레를 끊는 싸움의 기술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약점을 잡히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생명과 결합된 어떤 애정이
지옥의 영들과 통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 싸우려 애쓸수록
지옥은 바로 그 '잘 해내려는 욕구' 속에 숨어 있는
우리의 애정을 이용해 우리를 묶어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세한 우세를 누리지 못하고
매번 똑같이 물러나는 이유이다.
진정한 승리는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기술에 있지 않다.
승리는 그 상황을 대하는 나의 마음속 '애정'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매번 무너지는 그 지점을 찾아 그곳에 숨어 있던
지옥의 영들이 나의 애정을 이용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이 애정조차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 주소서.’
라고 진심을 실어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의 투쟁은 지옥의 통로를 차단하는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절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도리어 그 실패의 순간마다 ‘아 내가 또 나의 애정을
주님께 드리지 못했구나.’라고 깨닫는 그 인식의 전환을
주님은 당신을 향한 가장 귀한 고백으로 받으신다.
우리가 매번 반복되는 그 약점의 고리를
주님의 빛 아래로 가져올 때
주님은 그곳을 천국의 질서로 재편하시고
우리가 결코 넘을 수 없다고 믿었던 그 문턱을
당신의 권능으로 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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