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미다스 손’… 그는 아직 배가 고프다◇●“대우건설을 인수,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재계 11위에서 7위로 단숨에 끌어올린 박삼구 회장. 박 회장은 더 나아가 대한통운을 인수, 재계 1위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그의 꿈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금호아시아나그룹이 지난해 6월에 대우건설을 성공적으로 합병한 이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단숨에 재계 순위 11위에서 경쟁사인 한진그룹의 뒤를 이어 7위로 수직 상승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초 박삼구 회장이 지난해 2월에 창사 60주년을 맞아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 의사를 동시에 밝힐 때만 해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자산 12조 원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6조4000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매각대금을 주고 대우건설을 인수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작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박 회장은 두산과 한화 등 쟁쟁한 경쟁상대를 물리치고 대우건설을 인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현재 임직원들은 대우건설에 이어 대한통운마저 거머쥐겠다는 의욕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같이 말하고 있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대한통운을 인수하고, 내년 하반기에 제2 사옥에 입주할 때는 능히 재계 서열 1위 그룹에 도전할 수 있다.”
재계에서 박 회장을 두고 ‘미다스의 손’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부러움과 시샘이 뒤섞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그룹으로서는 화려한 변신을 한 셈이다.
박 회장이 대우건설을 너끈히 인수한 비결은 투자 명목의 차입 방식인 소위 ‘재무적 투자자(FI)’를 통해 외부자금을 성공리에 끌어들인 데 있다. 당시 그가 ‘재무적 투자자’에게 제시한 조건은 인수 후 3년 내에 주가를 2만6000∼2만8000원에 유지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약속은 최근 주가가 사상 초유의 호황을 구가하면서 사실로 증명되었다. 현재 대우건설 시가총액은 8조 원대로 인수금액을 훨씬 웃돌고 있다. 박 회장이 지난 1년여 동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재계의 스타로 부상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궁지에 몰렸던 그룹의 화려한 변신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데 따른 가장 큰 소득은 무엇보다 ‘기회의 땅’으로 불리고 있는 베트남의 건설시장이 눈앞의 떡으로 다가온 데 있다. 김우중 전 회장과 대우가 갖고 있던 베트남에서의 영향력이 건재한 것도 커다란 부수입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국내 기업 중 베트남에 가장 활발한 투자활동을 추진하고 있는 기업을 들라하면 단연 금호아시아나를 들 수 있다. 그는 임직원에게 이같이 말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베트남 사람처럼 생각하라.”
최근 그는 2박 3일 일정으로 방한한 농 득 마잉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을 수행하면서 활발한 경제 외교 활동을 펼친 바 있다. 그는 마잉 서기장 앞에서 이같이 포부를 밝혔다.
“베트남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는 물론 사회공헌 활동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이에 앞서 그는 경제포럼 참석차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가 현지 일간지 티엔퐁과의 회견에서 향후 4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오는 2010년에 대대적으로 펼쳐질 하노이 천도 1000주년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가 베트남의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해 학사제도를 만들고 문화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힌 것도 베트남을 글로벌 경영의 전진 기지로 삼겠다는 복안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재계의 관심은 박 회장이 과연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대한통운마저 성공리에 인수할지 여부에 쏠려 있다. 대한통운의 인수가격은 대략 4조 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한통운을 인수할 경우 명실상부한 육·해·공 물류체계를 모두 갖추게 된다.
당초 박 회장은 지난 1945년에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7년 금호타이어에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계열사를 두루 섭렵하면서 곳곳에서 경영능력을 발휘했다. 1991년부터는 아시아나항공의 대표를 맡아 10년 만에 연매출 2조5000억 원 규모의 항공사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항공업계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대우그룹이 외부자금을 끌어들여 급팽창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도 유독 대우건설과 대우증권만은 높이 평가했다. 인재가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나는 대우건설 사람들을 산 것이다”라고 말했다.”“기업의 존재이유는 고용창출”그룹의 비약적인 성장은 기본적으로 그의 윤리경영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기업의 존재이유를 이윤추구가 아닌 고용창출에서 찾고 있다. 이는 투명하고 정직한 경영으로 최상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국가에 공헌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선친이 창업 이래 ‘정도경영(正道經營)’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국가경제에 이바지해 온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윤리경영은 책임경영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해 8월에 벌어진 조종사노조의 파업 당시의 일화를 들 수 있다. 당시 결항사태가 빚어지자 회사는 신문에 대국민 사과문을 게재하기로 했다. 그는 홍보실에서 작성한 문안을 보고 대뜸 호통을 쳤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임직원의 이름으로 사과하는가. 경영 최종 책임자는 나다. 내 이름으로 사과문을 게재하라.”
이는 그룹의 총수가 모든 계열사의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경영상의 잘못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춘추시대의 현상(賢相)인 정나라 자산(子産)의 행보를 연상시키고 있다. 《춘추좌전》(노양공 30년조)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하루는 정나라 사람들이 공공장소인 향교(鄕校)에 모여 정치의 득실을 논하자 대부들이 자산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향교를 헐어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자산이 반대했다.
“그들의 논평이 곧 나의 스승인 셈인데 어찌 향교를 헐어 버린단 말이오. 위세로써 어찌 일시에 그들의 논평을 막을 수 있겠소. 이는 개울물의 흐름을 막는 것과 같소. 방죽을 일시에 터서 한꺼번에 흐르게 하면 많은 사람이 상하게 되오. 이는 방죽을 조금 터놓아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는 것만 못하오. 향교를 허는 것 역시 내가 그들의 논평을 받아들여 약으로 삼는 것만 못하오.”
큰 틀에서 볼 때 글로벌기업으로 부상한 기업은 비록 민간기업의 간판을 달고는 있으나 사실 보이지 않는 국가기업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실제로 수많은 직원이 기업에 의존해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의 성패도 이들 기업의 성패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가 인재경영 원칙을 신봉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지난 1997년의 외환위기 당시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가 고심 끝에 제시한 방안이 바로 안식휴직제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어느 누구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고통을 분담하자.”
이에 기존 사원의 경우 한 달, 당해 입사자는 1년 동안 무급휴직을 떠났다. 외환위기의 돌풍이 지나간 1999년 4월에 무급휴직 직원들의 복직 환영 자리가 마련되었다. 자리에 참석한 그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입을 열어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모든 게 다 내 탓이오.”
그는 2000년대에 들어와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도 결코 직원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는 결국 그룹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대우건설을 인수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인재경영 원칙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평소 대우그룹이 외부자금을 끌어들여 급팽창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도 유독 대우건설과 대우증권만은 높이 평가했다. 인재가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대우건설의 사람들을 산 것이다.”
기업의 성쇠도 사람에 달려 있는 만큼 사람이 최대 자산이라는 사실을 통찰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인재경영은 남녀 구분을 거부한다. 여직원들이 결혼해도 회사를 떠나지 않는 게 그 증거이다. 그가 여직원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국민소득 2만∼3만 달러로 잘 살려면 남자 혼자 벌어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의 인재경영 원칙은 내실경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내실경영 행보는 최근 임원과 부장급 간부들을 연수원에 소집해 회계 중심의 수치경영 비결을 전수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계열사 임원들에게 이같이 경고했다.
●“조종사 노조 파업으로 결항사태가 빚어지자 홍보실은 대국민 사과문을 작성했다. 작성한 문안을 본 박 회장은 대뜸 호통을 쳤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임직원의 이름으로 사과하는가. 경영 최종 책임자는 나다. 내 이름으로 사과문을 게재하라.””“재무제표 모르면 임원될 자격 없어”“재무제표를 모르면 임원될 자격이 없다.”
이는 재무제표를 통해 매출과 경상수익 등 경영 전반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만 내실경영을 기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평소 합리경영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보고를 받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있으면 세세한 부분까지 따져 묻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업무 외적으로는 한없이 자애롭지만 업무에 관한 한 철저하게 원칙과 합리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룹 내에서 온정주의와 적당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각박한 사람은 아니다. 이는 그의 소위 음악경영 행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5월에 한국의 메디치로 불렸던 고 박성용 전 회장이 타계한 이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직을 이어받았다. 음악 애호가로 알려진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음악과 경영의 접목 가능성을 언급해 주변으로부터 ‘음악경영 전도사’라는 애칭을 받고 있다. 그의 음악예찬론은 전래의 ‘예악(禮樂)정신’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음악의 기본철학은 질서와 자유에 있다. 기업의 조직문화 또한 질서가 잡힌 것 같으면서도 빛나는 파격과 도전하는 자유가 넘실대는 음악과 같아야 한다.”
‘예악정신’은 강인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예’와 부드러운 리더십을 상징하는 ‘악’의 절묘한 조화를 의미한다. ‘관맹호존(寬猛互存)’의 통치리더십을 변용한 21세기의 바람직한 CEO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큰 틀에서 볼 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아시아나항공 출항으로 제2의 창업을 이룬 데 이어 박 회장의 대우건설 인수로 마침내 제3의 창업을 한 셈이다. 당초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이 해방 직후 광주여객을 세운 데서 출발했다. 1984년에 부친의 타계로 사령탑을 맡은 장남 박성용 전 회장은 취임 즉시 상호를 (주)금호로 바꾸면서 내실을 다진 뒤 본격적인 기업 확장에 나섰다. 이때 마침 정부가 늘어나는 항공수요와 항공 서비스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복수 민항체제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제2민항 설립을 종용하자 이를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에 이어 국내 두 번째의 민항업체가 되었다. 이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제2의 창업에 해당한다.
제3의 창업을 이룬 박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이 지속적으로 발휘되는 한 그룹의 전망은 매우 밝다. 그러나 온통 장밋 빛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에 불거진 대우건설의 매각을 둘러싼 안팎의 곱지 않은 시선이 그 실례이다.
원래 그룹 측은 대우빌딩을 오는 2008년까지는 팔지 않겠다고 공언했다가 불과 넉 달 뒤 이를 번복한 바 있다. 이는 단기 매각을 통해 대우건설 인수의 과실만을 따먹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만했다. 실제로 대우빌딩 매각 발표 후 주가가 곧바로 치솟았다. 대우건설 인수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미지에 적잖은 손상을 입은 셈이다.
최근 경쟁업체인 대한항공이 저가항공 진출을 본격 선언하고 나선 것도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간 아시아나항공은 후발주자로서 미주와 유럽 등지의 장거리 노선보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 등지의 중단거리 노선에서 집중해 왔으나 대한항공이 저가항공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경우 혈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
‘형제경영’ 이냐 ‘3세 경영’이냐경영권 승계 문제도 간단치 않다. 박성용 전 회장은 지난 1996년 4월에 돌연 동생 박정구에게 회장직을 과감히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손을 뗀 바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3대 회장이 된 차남 박정구 전 회장은 회장 취임 6년 만인 지난 2002년에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역시 공교롭게도 65세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65세 때 동생에게 회장직을 물려주는 전통을 만들어낸 셈이다. 여타 그룹이 대개 장자승계 원칙에 입각하고 있는 데 반해 유독 금호아시아나그룹만이 형제경영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상 형제가 돌아가면서 양위한 대표적인 경우로 춘추시대 말기의 오나라를 들 수 있다. 《오월춘추》에 따르면 기원전 561년 당시 오나라 왕 수몽(壽夢)이 병이 들었다. 당시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의 이름은 제번(諸樊), 차남은 여채(餘祭), 3남은 이말(夷末), 막내는 계찰(季札)이었다. 수몽이 가장 현명한 계찰에게 보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계찰이 이같이 사양했다.
“예제(禮制)가 이미 엄중히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선왕의 예제를 폐하고 부자지간의 사정(私情)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것입니까.“
이에 수몽이 장남인 제번을 불러 당부했다.
“나는 나라를 계찰에게 주고자 한다. 너는 나의 말을 잊지 말도록 해라.”
제번이 말했다.
“주나라의 태왕(太王)은 손자인 서백(西伯: 주문왕)이 현명한 것을 알고 폐장입소(廢長立少: 장자를 폐하고 차자 이하의 자식을 후사로 세움)했습니다. 이에 주나라의 치도(治道)가 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수몽이 말했다.
“네가 내 말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의 대권을 형제의 순서대로 대물림하여 반드시 계찰에 이르도록 하라.”
“제가 어찌 감히 명을 좇지 않겠습니까.”
수몽이 죽자 제번이 장자의 신분으로 보위에 올랐다. 제번은 상기를 마치자 계찰에게 보위를 물려줄 생각으로 이같이 말했다.
“전에 부왕(父王)이 훙거(薨去: 제후의 죽음)하기 전에 이르기를, ‘나는 계찰이 현명하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부왕은 ‘폐장입소’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다만 이를 말하기가 어려워 부득이 나에게 나라를 맡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감히 명을 어길 수 있겠는가. 지금 이 나라는 그대의 나라이다. 나는 참으로 부왕의 뜻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계찰이 사양했다.
“무릇 장자가 국정을 맡는 것은 나라의 제도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어찌 멋대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제번이 말했다.
“만일 그런 원칙을 국사에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하면 주문왕이 어떻게 대명(大命)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계찰이 거듭 사양했다.
“전에 조(曹)나라 선공(宣公)이 죽었을 때 공자 부추(負芻)가 장자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제후들이 부추를 경사(京師: 천자가 머무는 곳)로 압송하면서 자장(子臧: 부추의 庶兄)을 옹립하려고 하자 자장은 조나라를 떠났습니다. 이로써 조나라는 치도를 온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부족하기는 하나 자장이 행한 바를 따르고자 합니다.”
오나라 백성들 모두 계찰의 즉위를 간절히 요구했으나 계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번은 임종할 때 동생 여채를 불러 당부했다.
“반드시 나라를 계찰에게 넘겨야 한다.”
여채는 보위에 오른 뒤 계찰에게 보위를 넘기고자 했다. 계찰이 또 이를 사양하자 이내 그를 연릉(延陵: 강소송 무진현) 땅에 봉했다. 이에 그를 ‘연릉계자(延陵季子)’로 칭하게 되었다. 경전에서는 연릉계자를 예인(禮人)의 상징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기》(단궁 하)편의 다음 기록이 그 증거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연릉계자의 일은 예에 합당하다’고 했다.”
재계에서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사령탑을 맡는 그룹의 특성상 박 회장이 언제 양위(讓位)할 것인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소위 ‘65세 룰’에 따르면 박 회장은 2010년에 동생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부문 회장에게 양위해야만 한다. 그러나 박찬구 회장 역시 ‘65세 룰’을 따를 경우 3년 만인 2013년에 다시 사령탑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박 회장이 어떤 행보를 취할지 여부를 단정키가 쉽지 않다. 그룹 3세들의 경영승계 구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앞날은 일차적으로 박 회장의 글로벌 경영 의지가 ‘65세 룰’과 얼마나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정치부 기자로 10년간 활동했다. 열국지와 춘추좌전 등을 편역했다. 21세기 정치연구소를 운영중이며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