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정은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송죽1리에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5(현종 6) 김만영(金萬英), 나기(羅棋), 김이상(金履相) 등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1869년(고종 6) 중수하였으며, 현재 모습은 1973년 영산강 범람을 막기위해 제방을 만들면서 이곳에 세워졌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대청형 구조다.
금사정을 상징하는 동백나무는 키가 6m, 뿌리 부분의 둘레가 2.4m에 이른다.
어른 두 명이 두 팔을 서로 벌려야 겨우 닿을 정도다. 폭은 동서 7.6m, 남북 6.4m로 넓다. 사방으로 가지를 고르게 펼치고 있다
금사정의 동백나무가 아름다운것은 웅장한 자태나 꽃보다 더 애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1519년(중종 14년), 개혁정치를 주창하던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전남 화순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당시 정암은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벼슬아치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력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훈구세력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책에 기록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정암을 유배지로 떠나보낸 그의 졔자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당시 태학관 유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에게 정암의 억울함을 주청 하지만 묵살당했다.
정암은 결국 37살 나이에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서 죽임(賜死)을 당했다.
정암을 따르던 많은 유생들은 공포를 느끼며 훗날을 기약하며 도성을 떠났다.
유생을 대표해 상소를 올린 임붕, 나일손, 정문손, 김식, 진이손, 진삼손, 정호 등 11명이 그들이다.
낙향한 유생들은 금강십일인계를 조직했다. 모임 장소로 영산강변을 정하고, 그 자리에 금사정(錦社亭)을 세웠다한다.
정자 앞에는 동백나무를 심었다.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한 유생들은 동백꽃의 비장함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같다고 느꼈던것 같다.
한겨울 추위에도 붉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동백꽃을 흠모했다.
사철 짙푸른 이파리를 떨구지 않는 동백나무의 한결같은 생명력도 닮고 싶었을 것이다.
유생들에게 동백나무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었던 것이다.
동백나무를 지키고 선 금사정은 나주시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비록 재건되어 겉보기에 건축미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당시 유생들의 삶과 정신이 깃들어 있어 엄숙함을 갖게한다.
금사정 내부 마루에 커다란 전기장판 두장이 펼쳐져 있는것을 보면 이곳이 최근 동네사람들 모임을 갖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했다.
아쉬운것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때, 또는 꽃 봉우리가 잔뜩 덜어져있을때 오고 싶었으나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이번에야 오게된것이다.
금사정을 나와서 예정되었던 김효병 고택 대신 10여분 거리에 있는 나주 공산면으로 가서 아쉬움과 허기를 함께 해결했다.
영화배우 조인성, 차태현등이 출연해서 대박난 중국음식점을 가기 위해서다.
1킬로 남짓인 면소재지 거리는 타 지역 관광객으로 활기찼고 주인공들이 다녀간 김밥, 꽈배기집과 테이블이 다섯개뿐인 중국음식점 앞에는 30여분씩 줄을 서야 했다.
텔레비젼이 모처럼 지역 경제에 큰 선물을 안긴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