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왕 무왕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추론하는 견해로는 무왕의 본래 신분이 별볼일없는 왕위계승서열이 먼 왕족이라서 처음 결혼할적에는 그리 지위가 높지 않은 귀족가문의 여성과 혼인했지만 왕이 된 후에는 별도로 세도가문인 사택씨가문의 여성을 정비로 맞이했고 그에 따라 의자왕의 생모가 최고지위높은 왕후가 아닌지라 태자책봉이 되기 어려운 상태였다라고 해석들합니다.
헌데 여기서 의문점은 그렇다면 당시 백제는 조선시대와 비교해서 정비만 여러명이 가능했다라고 볼수 있슬것입니다.
만일 조선시대기준이라면 왕자신분시절에 이미 혼인을 했스면 왕이 되면서 그대로 그 부인이 왕비가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미 혼인을 해서 정실부인이 있는데도 왕이 된후 또 정실부인을 들이고 되려 후에 들인 부인이 더 높은지위가 될수도 있는것이 조선시대와는 다른점이라고 볼수 있죠.
그렇다면 왜 무왕에게 이런현상이 나타났슬까?
무왕의 원래신분이 왕족들중에서 어느급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여러 추론들의 일반적인 주류는 그다지 높은급이 아니라서 조선시대 방계계승의 경우와 비교하면 어디서 유사성을 찾아야 할지부터 추론해야 할것입니다.
조선시대 전왕의 조카나 여타 방계로 계승한 경우는 성종, 선조, 철종, 고종이 있습니다.
무왕은 조선시대 이들왕과 비교해서 왕족시절에 어느 왕에 가까운 케이스일까요? 그리고 무왕은 어떤 과정으로 왕위승계를 했슬까? 삼국사기에는 전왕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예전에 드라마에 나온 서동요나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정변을 일으켜 법왕을 죽이고 왕위계승을 한 일종의 반정으로 즉위한 경우라고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기전 신분도 위덕왕의 아들이니 왕족으로써도 높은 신분입니다.
만일 중국측기록이나 서동요드라마에서 나온식대로 할 경우 무왕의 왕이되기전 신분은 조선왕조로 비교하면 성종에 버금가고 선조(하성군)보다더 높은 지위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되면 결코 별볼일 없는 왕족이 아니라는 결과가 되죠.
만일 위덕왕의 아들이라면 위덕왕의 정비소생인지, 후궁소생인지는 모르겠스나 정비소생이라면(비록제1왕후가 아니더라도) 왕자시절 결혼한 부인이 애시당초 사택씨가문의 여성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그리하여 처음부터 처가였던 사택씨의 협조를 받아서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된 상황이라고 해석할수 있죠.
그렇다면 원래 좀 지위낮은 귀족층여성과 혼인한후 왕이 되어 다시 사택씨가문의 여성과 혼인을 하고 되려 그 여성을 제1왕후로 삼았다라고 한다면 무왕의 원래신분 및 왕위계승과정은 아무리 높게 잡아보아도 조선왕조의 선조정도 그 이하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선조가 되는 하성군의 부친 덕흥군은 중종의 서왕자들중에서 한참 서열이 아래이기에 선조는 완전 줄을 타고난 왕이 됩니다.
그런 왕족이 왕이 되는 경우는 전왕으로 부터 지명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권력층 귀족들의 추대를 받을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서동요설화대로 할 경우 비록 선화공주라는 존재는 빼더라도 서동의 행적을 볼 적에 조선왕들중에 철종과 가장 유사하다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경우라면 당연히 본래 혼인했던 여성의 신분은 하층귀족급수준이라고볼수밖에 없스며 이런 상태에서 사택씨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다면 이 본처를 그대로 제1왕후로 올리기에는 정황상 불가능했다라고 보고 이 정처에서 왕위되기전 의자왕을 출산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면 왜 무왕은 태자책봉을 늦게 했는가?
의자가 제1왕후소생이 아니라서라고 한다면 제1왕후 사택씨소생중 맏이를 책봉하면 그만인데 그렇게도 하지 않고 늦게까지 머뭇거린 이유가 참으로 미스테리죠.
무왕의 왕권강화에 연계를 시키는데 문제는 무왕의 본 신분을 감안하여 서동설화의 내용이 맞다면 왕이 되고나서도 제대로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슬 것이되고 의자의 태자택봉을 왕권강화의 결실로 해석할 경우 무왕 집권후반기에나 가서 제대로 강한 왕권이 가능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도 일단 의자를 태자로 책봉한것은 무왕입장에서는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싶은마음이 애초부터 존재했기에 그렇게 태자책봉에 늑장을 부릴수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만일 의자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면 일치감치 사택씨왕후소생의 왕자를 태자책봉했슬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의자에게 처음부터 마음을 두고 있었거나 아니면 여러 왕후들의 친정집안 귀족들간 권력암투를 유발해서 사택씨가문의 세를 약화시키려 했슬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기록이 없기에 참으로 미스테리한 점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