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 이동)]
루카 9,23-26
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려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게 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2일 [연중 제25주일]
복음: 마르 9,30-37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강론>
(2024. 9. 22.)(루카 9,23-26)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ㄴ-26).”
1) 신앙생활은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동시에 그 믿음을 생활로(온 삶으로) 증언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신앙을 증언하는 생활”입니다.
순교는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는 신앙의 완성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완성이기도 하고, 증언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신앙인이 아니고, 믿음이 없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랑’은 믿음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믿음의 방향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사랑을 너무 강조하다가 믿음을 뒤로 밀어내는 이가 있는데, 신앙인의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과 희망’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의 죽음은 결코 순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음 없이 사랑만으로 죽는 일이 더러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 그 죽음을 고귀한 희생이라고 부르더라도, 우리 교회가 말하는 순교는 아닙니다.
그런데 순교는 신앙인이 신앙을 증언하는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지만, 순교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고,
순교는 그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달아나라는 뜻이 아니라,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박해자들이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도 죽기를 자청하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 자살입니다.
사실 순교는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은총이며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에 순교한 분들도 많지만, 박해를 피해서 깊은 산 속 같은 곳으로 가서 교우촌을 만들고, 신앙생활을 계속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모두 버리라는 뜻입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인데,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사람마다 그 성격과 내용과 크기가 다릅니다.
박해와 순교가 십자가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육신의 목숨에만 집착하는 사람”이고,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만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면, ‘온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누구든지 나를 믿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은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항상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심판과 멸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주님을 버리고 떠난 양은 그 사랑을 거부하는 자이고, 그가 받게 되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주님의 사랑’만 믿고 방심하고 자만하는 것은,
그 사랑을 배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 더욱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지금’이 중요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