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낙원에 대한 지향을 시로 표현한 ‘향수’의 시작부분. 한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가곡의 가사이기도 하다. 이 시를 쓴 작가는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로 불리는 정지용.
▲ 1902년 태어나 1950년 평양에서 타계한 것으로 알려진 정지용시인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3년 송재숙과 결혼했다.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동인지 『요람』을 발간했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 <서광>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고 이듬해인 1923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던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30년에는 『시문학』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34세 때인 1935년 그 동안 발표했던 시들을 묶어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다. 1939년부터는 시뿐 아니라 평론과 기행문 등의 산문도 활발히 발표했으며, 1941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을 발간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사회 상황이 악화되면서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은거 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에 시집 『지용시선(芝溶詩選)』을 발간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文學讀本)』을 출간했다. 이듬해인 1949년 2월 『산문(散文)』을 출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1953년 평양에서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지용은 1930년대에 이미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인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단 이후 오랜 기간 그의 시들은 다른 납북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됐다. 그러다 1988년 3월 해금(解禁)되어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5년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향수’가 가요로 만들어져 발표되기도 했다.